1) 기원정사에서 길을 잃고
- 마라도 시편 1
김 원 욱
석탄일 앞두고 처음 찾은 기원정사
대웅전은 바다와 하늘 중간 쯤 높이 떠있었다
하늘로 오르는 사닥다리라도 있는지 살펴보니 대웅전은
어느새 바다와 수평을 이룰 만치 낮아져있었다
이 무슨 조화란 말인가
붓다의 자비는 높았다 낮았다 하는 것인지
해수관음상 옆길을 도망치듯 빠져나오다가 그만 길을 잃어버렸다
한참을 강아지처럼 엉금엉금 기다가 깨갱, 소리라도 지를라하면
꿈인 듯 눈앞에 펼쳐진 사닥다리, 누군가 보았다던 영가인지
아니면 누군가 떠났다가 돌아오는 어느 정토의 초입인지
헷갈려서 마냥 기어가는 초저녁
일몰에 묻혀
떠나야 할 길이 아득히 멀다
2) 금잔화
- 마라도 시편 2
아무도 없는 섬에서 벌거숭이 내 몸을 보니 상처뿐이다 아직 살아있
는 것들은 봄이 왔다고 서로 물고 당기다가 싱싱한 원수原水처럼 솟
아나는데 멀리 지구의 모퉁이 한 뼘 땅 위, 위태롭게 딛고 있는 두
다리, 가슴과 목울대까지 아마 섬이니까 외로운 흔적은 아닐까 정말
내 안 깊숙이 겨울을 이겨낸 푸른 잎사귀라면 어쩔까 아득한 날 가
야산 자락 빛바랜 삶의 끝, 서러움이 서러움을 넘어 그래도 살아야
한다고 든든히 서있어야 한다고
함박눈 내리던 흐린 날, 눈물도 이쯤이면 되겠지 자위하다가 아무래
도 섬이니까 풍랑 속에서도 세상은 온통 상처일 거라고 금잔화처럼
흔들리는 거라고
내 몸 언저리 마다 삐죽거리는 상흔, 금잔화 그 내밀한 안쪽을 가만
히 들여다보다가
3) 나는 날마다 꽃을 치네
울혈 맺힌 가을 날, 꽃을 치네
시퍼런 낫으로
선혈의 살점 쳐냈네 탁, 탁,
흘러내리는 진물을 따라
어느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 순백의 꽃잎을 보네
덜겅덜겅 잘려나가는
절망에 젖은 파출소 화단 옆
나는 잘렸네 꽃에게
서슬 푸른 낫을 휘두르며 또 다른 꽃을 보네
잘려진 것들은 잘려진 것끼리
아직 살아있는 것들은 살아있는 것들 끼리
노을 떠난 빈 하늘 언저리
세상은 온통 아우성 뿐
날마다 맑은 꽃을 치네 이 악물고
악물고 쳐냈네
치고 또 쳐도 솟아오르는 그 꽃을
< 약 력 >
김원욱/시인
제주 서귀포에서 출생하였으며 <예술세계>로 등단하였다. 시집으로 <그리움의 나라로 가는 새(1997)>와 <노을에 들다(2009)>가 있고,
제 8회 ‘공무원문학상’을 수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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