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천문학 19호 작품(이성동) 3편
● 진부령 아가씨
선녀와 나뭇꾼의 전설이 전해지는 곳, 인제(이제) 가면 언제 오나 다시 돌아오지 못할 곳처럼 원통하다는 강원도 인제군 원통면에서 백담사에 이르는 길목을 지나, 시원스레 펼쳐지는 동해안 푸른 바다와 설악산 하얀 설경의 아름다움을 아련하게 바라 볼 수 있는 진부령 고갯길에는 1965년도 나의 젊은 시절 추억이 서린 곳이다. 지금부터 46년 전, 김해 공병학교에서 임관식을 마치고, 내가 첫 부임지로 발령받아 찾아 간 곳이 강원도 모 야전공병단 000대대 1중대가 주둔했던 진부령이었다. 지금은 강원도 원통에서 속초로 넘어가는 도로망은 한계령과 미실령, 진부령 등 시원스럽게 달릴 수 있는 2차선 포장도로들이 3개 코스나 있지만, 그 당시는 동북부 전방지역에 이르는 군사작전도로이면서, 강원도 내륙주민과 수도권 거주 관광객들이 동해안 관광코스로 이용할 수 있는 유일한 도로여행코스로는 진부령 고갯길뿐이었다. 해발 600고지인 이곳은 구름도 머물고 가고, 바람도 쉬어간다 할 만큼 고지대였다. 이곳은 인적이 너무 드물었기 때문에 어쩌다 버스가 이 도로를 지나면 진부령 군인들이 버스 안의 낯선 사람들을 향해 반갑다고 손짓을 하는 곳이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산간지대의 한 병영에서 고달픈 일상으로 생활하는 병사들에게는 마음 한 쪽에 만나고 싶은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으로 낯선 사람도 지나가면 그렇게 반가운 곳이다.
당시 진부령 공병 1중대는 이곳에 주둔하면서 동해안과 야전군사령부를 연결하는 군사 작전도로를 365일 원활하게 소통시키는 임무를 띠고 있었다. 이 공병 1중대가 이곳에 불도저와 그레이더를 장비(裝備)하고 있었던 것은 이곳 진부령에는 동절기 눈이 많이 내리면 이 장비즐을 동원해 지체없이 제설작업에 임해야하기 때문이다.
영하 20도 이하로 내려가는 혹한의 적막한 이곳에는 하얀 설원에 핀 매화 꽃송이처럼 진부령의 꽃으로 불리는 아름다운 한 아가씨가 있었다. 진부령가게 노부부의 무남독녀 영순(가명)이라는 아가씨였다. 내가 이곳에 부임하기 한해 전, 그녀는 강릉 K여고를 졸업하고 가게를 운영하는 연로한 부모님 곁으로 돌아와, 부모님을 모시며 이곳에 머물고 있었다. 겨울철에는 시베리아의 설원을 연상케 하는 혹한의 북풍이 몰아치는 삭막한 이곳에서. 영순이는 130명이 넘는 진부령 청년 병사들이 모두 만나고 싶어하는 선망의 홍일점이었다. 그들은 매일 작업차를 타고 이 가게 앞을 지날 때, 언제나 영순아!를 목청을 높여 불렀다. 젊은 청년 병사들의 이성애(異性愛)가 넘치는 넋두리였다. 그러나 이 소리는 언제나 응답 없는 메아리로 진부령 허공으로 사라질 뿐이다. 병사들이 그렇게 영순이를 만나고 싶어해도 그녀는 호락호락 만나주지 않았다. 그녀는 가게를 보다가도 병사들이 탄 트력에서 영순아! 소리가 들릴 때는 일부러 의식하지 않았고, 그녀의 노모는 "네깐놈들 아무리 성화를 대도 소용없는 일이여, 우리 순이가 눈하나 깜짝하나 두고봐라"하는 식이었다. 영순이는 진부령 모든 병사들이 좋아할 만큼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가느다란 눈썹과 약간 두툼한 아미에 쌍커플이 없는 눈, 옅은 보조개를 가진 전형적인 동양 미인이었다. 삭막한 진부령 설원에 핀 설중매(雪中梅)는 그렇게 아름다웠지만, 아무나 쉽게 접근하여 꺾지 못하는 청순한 한송이 꽃이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이 가게는 진부령 공병중대 1소대장 장 소위가 무상출입하는 곳이었다. 진부령 1중대는 최전방이 아니었기 때문에 장교들은 일과시간을 마치면 영외로 출퇴근이 가능하였다. 장 소위는 훤칠한 키에 핸섬한 용모를 가진 장래가 촉망되는 ROTC 2기 출신의 젊은 장교였다. 하루 일과를 마치면 진부령 도로변 외흘리 마을 자기 숙소로 가기 전에 의례 들리는 곳이 진부령 가게였다. 영순이 부모도 그의 출입을 개의치 않았다. 그들은 만나면 노부부가 지켜보는 가운데 언제나 가게에 딸린 방안에서 마주 보며 정답게 바둑을 즐기고 있었다.
한 달간의 영내 근무를 마치고, 나도 이들의 만남에 염치없이 끼어들어 가끔 두 사람의 바둑 경기를 관전하였다. 그러든 어느 날, 장 소위는 군복무기간을 만료하고 진부령을 떠났다. "장 소위가 제대하고 떠났으니 영순이는 이제 이 소위가 혼자서 독차지하게 됐구만```" 병사들의 수군거리는 질투의 소리를 내무반에서 우연히 듣게 되었다.
나는 그 이후로 영순이 가게에 들릴 수 없었다. 영순이를 만난다는 것은 장 소위에게 미안하기도 했지만, 만날 이유도 명분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밤, 자정이 조금 지난 시간이었는데, 나의 하숙집 방문을 급하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 문을 열고 보니, 영순이 노모가 떨리는 목소리로 " 이 소위 큰 일 났어, 순이가 순이가 ```"하며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시는 것이었다. 내가 "왜 그래요, 아주머니, 순이가 뭘 어쨌어요" 내가 그렇게 대꾸하자 노모는 엉겁결에 내 손을 붙잡으며, "이 소위! 영순이가 열이나고 복통이 너무 심해, 빨리 부대에 가서 구급약을 구해줘."라고 말하며 간절한 애원을 하시는 것이었다. 당시 진부령에는 병원도 약방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응급환자가 발생하면 병원이 있는 원통이나 간성에 이송해야 하는데, 부대차량이 아니면 이송할 아무런 차량도 없었다.
다행히 나는 이 산간오지에 오기 전에, 행여나 있을지 모를 응급상황을 대비해서 구급약을 미리 상비해 두고 있었다. 내가 가지고 있었던 진통제를 찾아 노모에게 주고, 나는 곧 바로 부대에 들려 주번사관에게 사정 이야기를 전하고 협조를 구해, 위생병이 링거(Ringer)를 가져가 주사하도록 하였다. 그녀의 병세는 들어보니 다행히 우려했던 급성 맹장염은 아니었다. 식중독에 걸려, 그렇게 고열과 통증으로 신음하다가 약을 먹은 후, 마치 거센 파도가 한동안 거칠게 일다가, 어느 순간 잠잠해지는 것처럼 한 시간만에 진정되었다. 이 일을 계기로 나는 영순이 집에 초청받아 노모로부터 극진히 환대를 받고 음식도 자주 대접받았다. 영순이와 나는 그 이후 스스럼없이 가게에서 만나 오누이처럼 다정하게 지냈다. 흐르는 세월은 비켜 갈 수 없어서 1년이라는 세월은 눈깜짝할 사이 잠시 지나가버렸다. 내가 진부령에 부임한지 1년이 되던 1966년 7월, 김해공병학교 초등군사반에 입교명을 받고 진부령을 떠나게 되었다. 진부령을 떠나던 날, 차에 짐을 싣고 마지막 인사차 하숙집 아주머니와 영순이 노부모님을 찾아가 작별인사를 하였다. 물론 영순이 한테도 인사를 했다. 서로 마음을 주고받은 사이는 아니었기 때문에 그녀에게 한 인사도 단순했다.
"영순아! 부모님 잘 모시고 있다가 좋은 사람 만나서 시집가 잘 살어, 잘 있어"
대답 없는 그녀의 눈가에 이슬이 맺히는 것을 본 나는 서둘러 그 자리를 빠져 나왔다. 그렇게 떠나온 후 나와 그녀 사이에는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그 후 그녀와 그 노부모님들도 진부령을 떠나 고향 강릉으로 가셨다는 말을 진부령 1중대에 같이 근무했던 Y병사의 편지를 받고 알게 되었다. 1970년 나는 지금의 아내와 결혼했고, 곧 바로 제대한 후 교직생활을 하던 중 1979년 아내와 함께 진부령 고갯길을 찾았다. 감자떡과 옥수수를 삶아 주시던 그 정다웠던 노모님과 아가씨가 살던 옛집이라도 둘러보고, 1년 동안 기거하며 한집 밥을 먹었던 하숙집 아주머니도 만나보기 위해서 진부령을 찾아갔다.
그러나 그렇게 기대를 걸고 찾아간 진부령은 옛날의 진부령이 아니었다. 공병중대가 있었던 자리는 관광객 휴게소로 변했고, 진부령 상점과 외흘리 마을은 일부 확포장된 도로에 편입되어 들어갔고, 일부는 도로주변 축대로 조성되어 사라지고 없었다. 살아오면서 나는 그처럼 허무한 마음을 느껴본 일이 별로 없었다.
진부령에서 돌아오면서 나는 앞으로 다시는 진부령에 가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그런데 진부령 기억을 잊고 지내던 1985년 어느 날 가수 조미미가 부르는 "진부령 아가씨" 노래가 라디오 방송을 타고 내 귓전에 흘러 들어왔다.
이 <진부령 아가씨) 노래는 잊혀져가던 내 마음에 진부령 시절을 상기시키며, 중년이었던 그 당시 나의 심금을 크게 흔들어 놓았다. 지금도 가끔 이 노래를 틀어 놓고 감상할 때면, 마음 저 밑바닥 깊은 곳에서 뭉클거리는 뜨거운 무엇을 느낀다. 내 나이 칠십을 넘어 늙어가도 그 감성은 식어들지 않고 되살아나고 있으니, 인생은 죽는 순간까지도 지난날을 추억하며 사는 존재인가 보다.
진부령 고갯길에 산새가 슬피 울면
길을 가던 나그네도 걸음을 멈추는데
구비마다 돌아가는 사연을 두고
말없이 떠나가는 야속한 님아
아아아아 울지마라 진부령 아가씨야.
이렇게 내가 이 노래를 즐겨 듣는 것은, 이 노래 속에 실존 인물 "진부령 아가씨" 영순이가 주인공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궁금한 것은 이 노래를 지은 사람이 누구일까 하는 생각이다. 아마도 그 사람은 1965년에서 67년도 사이 진부령 공병중대에 근무했던 사람들 가운데 그녀를 연모했던 사람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렇지만, 이 노래와 나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영순이의 그 남자 주인공은 나보다 훨씬 키 크고, 성격이 너그러우며, 좋은 인상을 가진 장 소위가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그러나 그렇든 아니든간에 모두 부질없는 짓이다. 그녀는 이미 장 소위도, 나 이 소위도 아닌 제 3의 남자와 가정을 이루어, 지금쯤 자식, 며느리, 사위들을 거느리고 손자, 손녀들을 사랑하며, 나처럼 하얀 은발을 하고, 복된 노후를 잘 살아가고 있으리라 믿기 때문이다.
● 영호남 문학 기행
금년에도 합천문협회원들(이하 우리회원들)의 문학기행 나들이는 또 어김없이 6월 6일 현충일이었다. 푸른 6월의 짙은 녹음이 아침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영롱한 이날 아침, 합천고속버스에 12명의 회원들이 탑승하여 자리가 한결 여유로웠지만, 참석하지 못한 회원들에 대한 아쉬움을 뒤로하고, 우리회원들은 이날 아침 7시를 조금 지나 이화예식장 앞을 출발하였다. 버스가 출발하면서 손국복 회장님의 인사와 일정 발표가 있었다. 그는 회원들에게 문학기행에 필요한 정보 제공과 시간 운영의 효율성을 높여 이번 문학기행이 보다 알차고 유익하도록 하기 위해 가족과 함께 동일 코스를 1박 2일 여정으로 이틀 전에 사전 답사를 하였다. 그 만큼 이번 영호남 문학관 순례는 회원들의 문학체험을 위해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많은 시간과 비용을 투자한 것이다. 그는 또 인사말 중에 우리회원들과 함께 하는 문확활동에 자긍심을 느끼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오늘도 황금문학코스인 영호남 문학관 순례를 통해 알찬 문학 체험의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합천을 출발한지 한 시간 반쯤 되면서 합천고속버스는 시원스럽게 뚫린 해안가인 통영의 산양일주도로를 달려서 그 길로 우리회원들은 첫 일정으로 대하소설 토지로 이름난 통영의 박경리 문학전시관에 들렸다.
박경리 문학전시관에서
박경리 문학전시관은 통영시 산양읍 신진리 산양일주도로 끝자락에 조용히 자리잡고 있었다. 박경리를 기념하는 공간은 통영 외에도 대하소설 '토지'의 배경이 된 경남 하동 평사리와 '토지'를 저술했던 공간으로 강원도 원주에 박경리문학공원이 조성돼 있다. 통영은 그녀가 태어나서 일제치하의 파란만장한 삶이 점철된 곳으로, 이러한 생활체험을 바탕으로 생전에 많은 작품을 쓰고, 불후의 명작 '김약국의 딸들'과 대하소설 '토지'로 유명해졋지만, 살아온 생애는 그렇게 평탄하지 못했다.
소설가 최명희가 '혼불'을 집필하며 글쓰기의 어려움에 고뇌했던 것처럼 박경리 또한 집필과정이 순탄하지 않았다. 누구도 감내하기 힘든 모진 세월을 오랫동안 살아오면서 그의 문학이 성숙해진 것이다. "어린 시절 나는 어머니에 대한 연민과 경멸, 아버지에 대한 증오, 그런 극단적인 감정 속에서 고독하며 책과 더불어 상상의 세계를 찾았다고 회고했다. "내가 행복했더라면 문학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그의 회고는 "소설같은 그의 삶이 문학작품 속에 베어든 듯 합니다"라고 하였다. 박경리는 진주여고를 졸업한 후 1946년 전매청 서기였던 김행도와 결혼했으나 6, 25전쟁 때 남편이 납북되었고 아들도 잃고 외동딸 영주를 홀로 키워야 했다. 그리고 1973년 그의 딸 영주와 결혼한 사위 김지하 시인도 '오적필화' 사건으로 수차례 감옥을 드나들었고, 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투옥되어 배후 조종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기도 했다. 그리고 자신의 폐암 선고, 하나 같이 모진 시련의 연속이었다. 그는 사석에서 "나는 슬프고 고통스러워 문학에 몰입했고, 훌륭한 작가가 되기보다 차라리 인간으로서 행복하고 싶다"고 고백한 적이 있으며 문학작품 속에서 다루고자 하였던 이야기는 그의 고단한 삶을 통해 인간소외에 대한 저항과 인간과 생명에 대한 존엄성, 사랑 등이 작품 속에 투영되어 나타난 것으로 본다.
그리하여 그도 말년에 폐암으로 신음하다가 2008년 5월 5일 세상을 떠났다. 소설가 김동리의 추천으로 단편소설 '계산'이 55년 8월 '현대문학'에 실리면서 등단한 이래 1957년부터 본격적으로 문학활동을 시작, 1962년 "김약국의 딸들", "시장과 전장" 등 사회 현실에 대한 비판성이 강한 문제작들을 잇달아 발표함으로써 문단의 주목을 끌었고, 그의 대표적인 대하소설 '토지'는 1969년부터 집필을 시작하여 1994년까지 무려 26년간의 집필 끝에 한국 근현대사의 전 과정에 걸쳐 700여명을 등장시켜 여러 계층의 갈등과 민족의 수난사를 깊이 있게 다룬 작품으로 원고지 4만장에 달하는 분량을 5부작으로 완성하였으며, 이 작품들이 다시 영어, 일본어, 프랑스어로 번역되어 해외 독자들로부터도 호평을 받았으며, TV드라마로도 세 차례나 방영되어 온 국민의 심금을 울리기도 하였다.
전시관 한 쪽 페널에는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의 생명은 다 아름답습니다. 생명이 아름다운 이유는 그것이 능동적이기 때문입니다 ```"라고 씌어져 있었다. 그것을 본 순간 나는 그의 생명에 대한 존엄성 인식이 문득 슈바이처의 그것과 같다고 생각되었다. 슈바이처도 박경리처럼 자신이 처해 있던 암울한 시대적 상황에 도처에서 자행되는 대량파괴와 학살과 같은 '생명경시' 현상을 체험하면서 생명에의 경외심(Reverence of Life)을 저작한 것이다. 그는 그 저작을 통해서 물질 우선주의의 서구사회에서는 본질적으로 생명 적대적일 수밖에 없는 서구문화를 경멸하고 있었다. 그는 아프리카의 가봉의 랑바레네에서 의료봉사활동으로 일생을 거의 바치고 흑인들의 애도 속에서 그 땅에 묻혔다.
박경리도 불치의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슈바이쳐처럼 그를 아끼는 많은 독자들이 슬픔에 잠겼으며, 고인의 장례는 평소 많은 사랑을 받은 원주시민장으로 치루려고 했으나, 이곳 통영시민들이 나서서 그의 주검을 모셔와 그가 자라면서 살았던 이곳 산양읍 신진리 양지농원 내 미륵산 산자락에 안장하였다. 우리회원들이 작년에 이어 금년에도 찾아와 참배한 이곳 선생의 묘소는 비록 우청룡 좌백호의 명당자리는 아니지만, 통영 앞바다와 한산도가 시원스럽게 바라다 보이는 전망이 매우 좋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우리 회원들이 무덤 앞에서 경건한 마음으로 일동 묵념을 올렸지만, 우리 회장께서는 그래도 좀 아쉬웠는지 엎드려 큰 절을 올리고, 어머니 품을 쓸어안는 것처럼, 선생의 봉분을 쓸어안는 지극한 사랑과 존경의 마음을 표했다. 그런 연후 무덤 주위를 한 바퀴 돌아 회원들과 함께 산을 내려왔다.
박경리 문학전시관과 인접한 미륵산 선생의 묘소를 둘러본 후 우리회원들은 그곳에서 10여분 거리의 통영시내에 있는 전혁림 미술관을 찾았다.
세라믹타일 모자이크 예술의 전혁림 미술관
이곳을 찾은 날이 현충일이라 미술관은 닫혀 있었고, 주인도 출타하여 부재중이었다. 그래도 산 밑 외따로 조용한 곳에 천연색의 화려한 벽면 모자이크 조형물이 우리회원들의 전시관을 볼 수 없는 허전한 마음을 조금은 달래주었다. 벽면에 우뚝 서서 우리 일행을 내려다보고 있던 전혁림 화백의 자화상 얼굴이 낯선 이방인에게 자상하게 다가왔다. 그 옆에 그의 생몰연대(1916, 1. 21~2005. 5. 25)를 보니 94세로 작년에 작고하셨음을 알려주고 있다. 미술관 전시실에 들어가면 아직도 그의 체취가 남아 있을 성 싶다.
손회장님의 설명에 의하면, 전혁림 화백은 추상화 작가였는데, 30년 자기가 살던 집을 허물고, 이 자리에 미술관을 2003년 5월에 지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그의 아들 전 영근 화백에게 이 미술관을 넘겨주고, 남기고 갈 것이 없어서 좋다는 박경리 선생처럼 편한 마음으로 불과 1년 전에 세상을 떠나신 것이다. 벽면의 조형물은 세라믹타일이다. 전혁림 화백의 작품 다섯 점과 아들 전 영근 화백의 작품 다섯 점을 7,500장 세라믹타일로 제작, 조합하여 벽면에 붙여 놓았다, 이들 父子 화백은 통영의 바다와 주변의 순수한 자연의 색체를 사용하여 통영의 이미지를 예술적으로 잘 표현해 미술관을 아름답게 장식해 놓았다. 주인 없는 아름다운 전혁림 미술관을 떠나 우리 일행은 음악의 세계적인 거장 윤이상 음악관으로 이동했다.
윤이상 음악관에서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로 잘 알려진 그리고 그의 고향이 통영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통영이 낳은 음악의 거장 윤이상 선생, 그는 그가 소원하던 통일을 생전에 보지 못하고 불귀의 몸으로 아직까지 이국땅 독일에 묻혀 있다.
세계적인 작곡가 윤이상 선생의 음악세계를 재조명하기 위해 매년 이곳에서는 국제음악제가 열리고 있어 세계인들이 '윤이상'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통영을 떠올리게 하고 있다. 그만큼 윤이상 국제음악제가 통영을 유명한 도시로 격상시킨 것이다.
우리회원들이 이 음악관에 들렸을 때는 여직원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사무실 직원도 보이지 않고 전시실은 조용한 분위기였다. 음악관 한쪽에 그가 살던 독일의 집 형태를 본떠 만든 양옥 한 채가 문이 잠긴 채 외부 손님의 입장을 거부하고 있었고, 그 옆에는 안을 훤히 들여다 볼 수 있도록 투명한 유리관으로 만들어진 실내자동차 차고 안에 전시된 독일제 벤즈승용차 한 대가 생전에 선생이 탔던 유품임을 말없이 웅변하고 있었다. 분단의 민족사가 안겨준 이산(離散)의 고통과 사무친 그리움으로 그늘지게 살다가 결국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낯선 이국땅에서 쓸쓸히 숨을 거둔 사람이 어찌 윤이상 선생 한분뿐이랴? 선생은 우리가 알고 있는 이상으로 음악을 통해 20세기 최고의 작곡가로 알려져 있다. 한국의 전통 음악과 동양의 철학을 서양의 음악기법과 융합시켜 유럽에 알렸을 뿐만 아니라, 독자적인 음악체계와 창의적인 음악세계를 창조한 세계음악사에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는 통영의 가난한 한 어부의 자식으로 태어났지만, 음악의 천재적인 재능을 타고 태어나 어린 시절 통영의 바닷가에서, 그리고 아버지를 따라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바다새들의 노래, 물고기들의 헤엄치는 소리, 그리고 흥얼거리는 '남도창'같은 어부들의 노랫소리에 즐거이 귀를 기울였다고 한다. 멀리서도 이런 소리들은 해면으로 미끄러져 그의 귀에 들어와 음악적 영감을 키워줬으리라 생각된다. 봄에 물댄 논에서 개구리들이 밤새워 우는 소리는 다른 사람에게는 안면방해의 소음이지만, 음악적 감수성이 남다른 그에게는 개구리 소리들이 혼성 합창으로 들렸다고 한다. 한 마리가 울기 시작하면 다른 소리가 거기에 맞춰 화답하고 또 다른 세 번 째 개구리떼가 가세하면 갑자기 고음, 중음, 저음 등의 삼중주 합창이 일제히 시작되고, 그러다가 또 갑자기 모두 그 합창을 중단한다고 한다. 그런 자연의 소리가 음악의 천재인 그에게는 굉장한 대자연의 향연으로 들렸던 것이다.
20세기 최고의 음악인이었지만, 그는 자기의 명성을 결코 내세우지 않았다, "내 음악은 나 개인의 것이 아닙니다. 내 음악은 우주의 큰 힘, 눈에 보이지 않는 큰 힘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주에는 음악이 흐릅니다. 이 우주의 음악을 내 예민한 귀를 통해 내 놓을 뿐입니다."라고 말했다 한다. 그는 이처럼 눈에 보이지 않은 위대한 힘, 그것이 내재한 자연의 소리를 그의 영혼의 귀로 듣고 뛰어난 음악적 예지로 음악을 창작하여 세상에 내놓은 것이다.
통영은 삼천포에서 해금강에 이르는 한려수도 중심에 위치해 그 경관이 빼어나게 아름다운 해안도시로 동양의 나폴리로 불려지고 있다.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 미륵산 전망대에서 바라본 조용한 섬과 섬들의 고즈넉한 군도(群島), 그리고 그 사이를 드나드는 고기잡이 배들, 그것들과 함께 어우러진 갈매기들의 너울대는 모습들이 마치 한폭의 동양화처럼 시야에 펼쳐진다. 이처럼 주위 경관이 아름다운 곳에서 태어나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어릴 때부터 심미적(審美的)인 감성(感性)을 기르며, 성장하는 곳이라 통영에는 소설가 박경리, 작곡가 윤이상, 시인 유치환, 김춘수, 김상옥, 미술가 전혁림 등 문학과 미술, 음악 등 전 예술분야에 뛰어난 대가들이 많이 배출된 곳이라 생각해 보았다.
우리회원들은 윤이상 음악관을 마지막으로 둘러보고 또 아름답기로 이름난 환상의 섬도시, 거제시에 진입하기 전에 거제대교 건너편 성포해안 입구에 자리한 '친구횟집'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태백산맥 문학관을 향해 달려갔다.
조정래의 태백산맥 문학관
조정래(趙廷來)의 태백산맥문학관은 전남 보성군 벌교읍 회정리 현부잣집 고가(古家) 옆에 조용히 자리잡고 있었다. 벌교는 고흥반도와 보성군과 화순군을 잇는 삼거리 역할을 하는 교통의 요충지이다.
건물 외벽이 유리로 되어 있고 2개의 전시실이 있었는데, 1층에는 태백산맥 전 10권의 육필 원고지 16,500매를 비롯해, 취재수첩과 카메라, 작가가 직접 그린 벌교 읍내와 지리산 일대의 약도 등 작품의 탄생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옷과 신발, 찻잔, 심지어는 태백산맥 비디오테이프와 지팡이 등 그의 삶과 함께 했던 소품들도 전시되어 있었다. 우리 민족 분단문학에 큰 획을 긋고 많은 독자들의 관심을 모은 '태백산맥'은 전체 4부 10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4년간 준비하고 6년간 집필하였다고 한다. 이 소설은 해방 후 여수 `순천사건(1948)에서 6,25 전쟁이 끝날 때까지의 민족분단의 고통과 이산의 한과 이데올로기의 세계를 형상화한 대하소설이다. 등장인물로 주인공 염상진과 무당 소화, 허대치, 김범우 등이 등장하여 사랑과 갈등이 어우러진 80년대의 분단문학의 대표작이다.
'태백산맥' 원본을 그의 아들 며느리, 독자들이 필사한 원고지가 2층 전시실에 가지런히 쌓아올려져 있는 것을 보면서 태백산맥의 탈고과정에 많은 사람이 참여했음을 알 수 있었다. 2층 전시실에는 '아리랑'과 '한강' 등 작가의 또 다른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문학관 바깥 1층 전시실과 마주보는 담장 벽면에는 분단의 종식과 통일에 대한 염원을 담은 대형 벽화 '원형상-백두대간의 염원'이 설치되어 있다. 백두대간 지리산, 독도 등 우리국토를 웅장하게 형상화한 이 옹석 벽화는 한국화가 이종상, 문학관을 설계한 김원이 공동으로 기획한 것이라고 한다.
소설 태백산맥에 등장하는 태백산맥 문학전시관 뒤편에 자리잡은 현부자집은 박씨 문중의 소유라고 하는데, 담장 밖에서 들여다 본 이집의 구조는 우리나라 전통 한옥을 모방하여 일본식구조 일부를 가미한 점으로 일제 강점기의 왜색이 드러나고 있는 형태를 갖고 있다. 팔작지붕으로 된 본체로 들어가는 입구 현관위에 작은 기와지붕이 연결되어 있는 것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이 외에도 소설 태백산맥의 배경이 된 철다리, 중도방죽, 황갯다리, 소화다리, 소화의 집들이 있는데, 소화의 집은 현부자가 자기 전속무당 역할을 하고 있는 월녀와 소화가 거처하도록 자기집 앞에 바깥 터에다 마련해준 작은 집이다.
조정래 문학관을 나오면서 벽면에 붙여놓은 조정래태백산맥 문학관 표지에는 표지글보다 좀 작게 조정래가 쓴 다음 글이 내 시선을 끌었다.
"문학은 인간의 인간다운 삶을 위하여 인간에게 기여해야 한다"
이 소설이 다루고 있는 시대를 흔히들 '민족사의 매몰시대' '현대사의 실종시대'라고 한다. 그것은 곧 그 시대가 그만큼 치열했고 격랑이 심했으며, 분단사 속에서도 또 그만큼 왜곡과 굴절이 심했음을 의미한다. 그 시대의 진실과 참모습을 얼마나 객관적으로 복원하고 되살리느냐가 바로 분단극복이고 통일지향일 것이다.
순천만 그 아름다운 갈대밭을 다시 걷다
우리회원들이 순천 문학관에 도착한 때는 일과시간이 조금 지난 오후 6시 10분경이었다.
버스 주차장에서 내려 10여분 거리의 아담한 정원을 지나 도착한 순천문학관, 우리일행이 이곳에 도착하는 순간 노레일(No Rail) 관광열차가 승객들을 싣고 유유히 제방길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지붕에 용마름과 이영이 금방 엮어 이어놓은 듯 말끔하고, 입구에는 옛날식 싸립문과 집주위를 두른 돌담장이 70년대 이전에 늘 보아왔던 우리 전통 농촌마을 촌집의 형태 그대로의 초가집들이다. "어서 오십시오, 순천문학관 입니다"라는 정감을 주는 안내표지판과 담장을 따라 일열로 파상(波狀)을 그리며, 늘어선 선홍색의 아름다운 폐츄니아 항아리 꽃들이 환한 미소로 우리 일행을 먼저 반가이 맞이해 주었다.
단편 '무진기행(霧津紀行)'과 '서울, 1964년 겨울'을 발표하여 전후 무기력증과 도덕적 형식주의에 빠졌던 한국문학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던 소설가 김승옥과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잃어버린 참된 가치를 동화적 서사(敍事)로 표현함으로써 아이들만 읽던 동화의 독자층을 성인으로 확대시킨 동화작가 정채봉의 문학을 기리는 공간이 두 작가의 고향인 전남 순천 이곳 순천만 갈대밭을 가로지른 제방 건너편에 한적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늦은 시각이라, 퇴근한 해설사를 대신해서 조성혜 사무실 직원이 전시실 내부를 돌며 친절한 설명을 해주었다.
순천시는 김승옥관과 정채봉관 등 9개동으로 이루어진 순천문학관을 2010년 10월에 개관했다고 한다. 김승옥은 1960년대 각광을 받은 소설 작품들을 잇달아 발표한 뒤 영화계로 자리를 옮겨 시나리오 작가로도 큰 명성을 얻었다고 하며, '무진기행'을 각색하여 만든 영화 '안개'를 시작으로 김동인의 '감자', 조선작의 '영자의 전성시대', 조해일의 '겨울여자' 등을 각색한 영화가 모두 흥행에 성공했다고 한다.
김승옥관에는 소설 원고, 영화대본, 포스터 신문기사 등 많은 것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한국 동화작가로는 처음으로 동화집 '물에서 나온 새'와 '오세암'이 독일과 프랑스에 번역, 소개되었다고 한다. 전시관에는 한국의 동화작가로 활동했던 정채봉의 육필원고 등 자료 276점이 전시되어 있었다.
순천만 갈대밭 길을 또 걸으며
우리 일행들이 김승옥관과 정채봉관을 둘러보고 나왔을 때는 연한 회색빛 구름 사이로 옅은 저녁노을 속에 아직 해가 서쪽 하늘에 걸려 있었다. 초여름 저녁나절에 이는 산들바람이 갈대숲을 흔들어대는 시원한 제방길을 따라 우리회원들은 여유롭게 걸었다. 갈대밭 숲 속 에서는 생사를 건 먹이사슬들의 먹고 먹히는 치열한 살육전이 소리없이 진행되고 있었지만, 우리들은 그것들을 외면한 채, 순천만 갈대밭 길을 걷고 또 걸었다. 아름다운 산과 바다와 갯벌, 그리고 그 갈대숲 마룻길에서 느낀 서정을 가슴마다에 담고 용산 전망대를 빠져나와 궁중요리 전문점인 들마루식당에 들어갔다. 작년에 이집에서 먹었던 짱뚱어탕이 이날에도 또 일미였다. 저녁식사가 끝나면서 우리는 또 나그네처럼 짱뚱어 요리가 든 포장 하나씩을 들고 버스에 탑승하여 귀로의 여정에 올랐다.
귀로의 버스 안에서
귀로의 버스 안은 처음 출발할 때 생기발랄하고 들뜬 분위기와는 대조적으로 회원 모두가 피로에 젖어 축 늘어져 있었다.
버스 안 전면에 걸린 TV모니터에서는 6,25때 우리국토와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산화한 호국영령들을 추모하는 60주년 현충일기념 가요무대가 펼쳐지고, 인기가수들이 등장하여 우리민족이 격은 수난과 고통, 이산의 아픔 등, 그 한이 실린 주옥같은 노래들을 부르고 있었다. 그 노래들의 가사와 애잔한 리듬은 우리일행이 이날 둘러본 문학전시관 작가들의 생애와 작품들의 배경 속에 알알이 박혀있는 것들이어서 더욱 큰 의미로 다가왔다.
이날도 회원들과 함께 했던 소중한 시간들을 나의 노후생활의 아름다운 추억으로 또 삶의 신선한 에너지원으로 삼을 것이다. 이번 문학기행을 위해 애써주신 회장님과 임원들의 노고에 깊은 감사를 드리며, 항상 변함없는 성원을 보내주시는 회원 여러분들에게 진정한 사랑의 마음을 전한다.
● 일본의 대지진 재앙을 목격하면서
지난 3월 11일 일본 도호쿠(東北) 지역에서 발생한 사상 최악의 강진과 쓰나미(해일)로 희생된 사람의 숫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게센누마시 도시가 통째로 사라져 버리고, 인명과 재산피해로 일본 열도가 아비규환에 휩싸였다.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후쿠시마(福島) 원전이 연일 폭발하면서 15일 센다이를 떠나려는 시민들이 미야기현 청사 앞에서 버스를 타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렸다가 승차하는 모습들이 뉴스 시간에 전해졌다.
이번 일본 대지진에서 우리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것은 대재앙 앞에서 일본 국민들이 보여준 질서의식과 침착성이다.
이런 대참상 속에서도 일본 국민들의 태도는 다른 어떤 나라의 지진이나 재난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놀랄만한 모습들이다. 물과 음식이 부족하지만, 남을 배려하는 모습들이 아름답게 비춰졌다. 최악의 지진으로 폐허가 된 일본 미야기현, 진열대 안은 물건이 거의 비었지만, 생존자들이 대형 슈퍼마켓 밖으로 긴 줄을 이루고, 차분하게 자기 차례를 기다린다. 아이에게 먹일 우유를 산 어떤 젊은 엄마는 "이제야 마음을 놓습니다. 어제부터 줄을 섰어요, 지금 우유를 먹이려고요, 아이 탈수(脫水)가 걱정됩니다"
쓰나미가 휩쓸고 간 이바라키현, 작은 슈퍼마켓 앞에도 긴 줄이 생겼다. 문을 연 다른 가게도 없고, 물건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 차분하게 자신의 차례를 기다린 뒤 꼭 필요한 것만 구입한다. 한국 기자의 질문에 '쿠니오 이와츠키'라는 한 시민은 "종이 기저귀와 음료수, 인스턴트 식품 등을 사려고 줄을 섰습니다" 라고 하면서, 어느새 물건이 없다는 표지판이 걸리는 것을 보고, 하루 종일 기다려 물건을 사지 못해도, 불평 한마디 하지 않는다. 또 '와다'라는 한 시민도 "물을 사려고 왔는데, 이미 떨어졌대요, 이런 상황이 얼마나 오래 이어질지 걱정입니다."라고 말한다.
급수차 앞에는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늘어섰다. 하지만 큰소리를 내는 사람도, 물을 더 요구하는 사람도 없다. 이중 한 시민은 "다들 힘들 것 같아서요, 이럴 때일수록 서로 도와야조"
이처럼 일본 전 피해지역 상점 앞에서, 차분하게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며, 물건을 사는 모습, 사지 못해도 서두르거나 불평하지 않는 모습, 다른 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약탈이나 사재기를 하는 모습은, 일본에서는 지금까지 한건도 없었다는 점은, 참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가족을 잃은 사람들의 절규나 통곡이 표출될만한 상황인데도 의연히 그 슬픔을 억제하는 모습들이 참으로 인상적이다. 어딘가 살아 있을 것이라는 한가닥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마음으로 잃어버린 가족의 이름을 부르며, 찾아 헤매는 비통한 모습들은 전쟁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하다.
전력부족 때문에 14일부터 계획절전이 실시됐는데, 시민들의 자발적인 절전 협력으로 오히려 전력이 남아돈다고 한다.
일본 언론의 재난에 대한 보도도 우리 언론에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지진 발생 직후부터 계속 재난방송을 하고 있는 NHK는 사망자 유족의 인터뷰를 거의 하지 않고, 시신 수습 장면도 멀리서 카메라로 잡는다. 외신들도 '인류정신의 진화를 보여주었다'는 찬사와 놀라움을 표시하고 있다.
대재앙 앞에 어느 나라 사람들이라도 가지고 있을 충격적인 상황에서의 슬픔과 좌절감을, 그들도 가졌을 것이 분명한데, 그들은 그렇게 차분한 침착성을 보이고 있다. 선천적으로 그들은 그런 선진 민족성을 보유한 국민들일까?
지진이 자주 발생하는 일본에서는 유치원에서부터 이에 대한 지속적인 교육 훈련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모든 시설의 설계 단계에서부터 내진설계가 의무화되어 있고 지진에 대응하는 교육훈련이 일상화되어 있기 때문에, 이번과 같은 대지진이 발생해도, 의연히 대처할 수 있는 침착성을 가진다는 것이다. 이에 부연(敷衍)하여 그들은 재난 상황에서도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적 행동을 자제하고, 남을 먼저 배려하게 된다는 것이다.
국가가 재난에 빠졌을 때, 그 나라 국민의 질서의식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일본인들이 대재앙 앞에 놀랄 만큼의 질서의식과 침착성을 보이는 것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일본 민족이 공멸한다는 위기의식이 국민 개개인에게 각인되어 나타나는 일본인 특유의 공동체 의식이 아닐까?
지금 세계의 모든 나라들이 이번 일본의 참상을 강건너 불 보듯 하지 않고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통해 일본 돕기에 나섰다.
미국은 우리나라로 향하던 핵항모 로널드 레이건호와 조지 워싱톤호를 일본 재앙지로 급파해 도우고 있고, 센카쿠 섬과 쿠릴열도 등으로 일본과 대립하고 있는 중국과 러시아에서도 일본을 돕겠다고 나섰다.
사상 최악의 재난을 당하고 있는 이웃 나라 일본의 참상 소식에 우리나라도 각계의 온정의 손길이 이어지고 있다. KBS와 대한적십자사는 물론, 재난구호대책위를 구성해 일본 복구 지원에 나선 불교계와 긴급구호기금을 마련한 천주교 등 종교계와 각 구호단체, 일본에 욘사마로 불리는 배우 배용준, 그리고 최지우, 류시원. 김현중, 송승현, 카라, 이병현 등 많은 한류스타들과 일본프로야구 오릭스 벌필로스에서 뛰는 박찬호 등이 또 기부 행렬에 적극 동참하여 삶의 터전을 잃은 일본 이재민들을 돕고자 적극 나서고 있다.
태평양 전쟁 때, 군국주의 일본군의 위안부로 끌려가 정신과 육신이 갈기갈기 찢긴, 그래서 평생을 불행하게 살아온 정신대 할머니까지도, 일본 구호 대열에 참여하고 있는 모습은 이번 참상에서 보여준 일본인들 자기들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보다 더 가슴을 찡하게 감동을 주는 아름다운 모습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임진왜란 7년의 전화(戰禍)와 35년 동안 일본제국주의 식민통치로부터 많은 시련과 고통을 우리민족에 안겨주었던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 근간에는 역사왜곡과 독도 영유권을 주장해 우리 국민들의 마음에 분노를 일으켰던 나라지만, 그들이 지금 당하고 있는 참상을 보고 따뜻한 연민의 정으로 그들에게 사랑의 마음을 전하는 우리 국민들의 모습들이야 말로 되려 더 아름답게 느껴진다.
'글로벌 카운티'라는 세계화의 이름에 걸맞는 '지구촌 공동사회' 의식으로 이번 기회에 그들이 당한 참상과 그 고통을 쓰다듬어 주고 힘이 되어 주는 것이, 한일간 선린 우방으로 가는 새로운 전기(轉機)를 마련하는 길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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