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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합천문학25호(강배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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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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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3 |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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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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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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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19 13:38:32 |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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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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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 이
강배훈
전조등 앞으로 드러난 산은 교미를 막 끝낸 동물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루는 손을 뻗어 목덜미를 감싼 먼지잼을 쓰윽 문질렀다. 빗물이 손바닥에서 미끄러졌다. 땀이었다.
“닥쳐!”
듣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메아리가 루의 가슴을 때리며 되물었다. 만나는 사람은 있느냐? 한 번 소개 시켜 주마. 그 사람 정도면 뭐가 어때서 그러니. 그네들은 자못 진지하게 말을 걸어왔으나 마지막 말은 모두 무성의하게 툭 던지는 말이었다. “그래도 결혼은 해야지?”
송이를 캐러 이 산 속에 들면 들끓던 말들은 잠잠해질 테다. 차교가 시트 뒤에 처박힌 버섯 채취 장비를 꺼내는 동안 루는 지난 주 바닷가에서 주워 온 집어등을 켰다.
“그게 무슨 구닥다리 등이냐?”
차교도 오래된 간드레를 켰다. 차교의 눈가에 드러난 잗다란 주름이 손금보다 우글쭈글했다. 손을 잡으니 손금은 굳은살에 덮여 있다. 둘은 오랜 동안 어둠을 보물처럼 붙들고 신음하며 살아온 걸 들켜버려 누른 등 앞에서 과장스레 웃었다.
“귀농을 할 땐 누구나나 망사르드지붕 아래 다락에서”
담배를 고쳐 물고,
“채광창으로 스며는 햇살을 받으며 원두커피를 홀짝이고는 저 아래 마당에서 햇빛에 타고 있는 붉은 고추를 내려다볼 꿈을 꾸지.”
차교는 공초를 밟으며 자신은 얼씬도 못해본 일을 떠들 때 루는 모모의 잔소리를 지우려 붉은 스니커즈 끈을 쪼여 맸다.
트럭 전조등이 꺼졌다. 둘은 시커먼 들깨 밭에 발을 디뎠다. 백팩 속 신문지에 송이버섯을 싸 담기 시작하면 어머니의 잔소리 따위는 사라질 거다.
“너와 나는 이제 아무 사이가 아니다.”
“네?”
“너에게 나는 어머니가 아니라 모모(某某)씨가 된다는 말이다. 결혼을 하기 전까지는.”
어머니는 짜증을 잔뜩 내다 이내 다정한 목소리로 아들 옆에 바짝 붙어 말했다.
“공무원 한다는 그 아가씨 말이다. 나이가 있긴 하다만 한 번 더 만나보지 그래”
모모가 아들에게 말한 여자는 브라운과 네온 라임을 섞은 애매한 컬러의 머리색처럼 끝을 명확하게 마무리 짓지 못한 아가씨였다. 하기야 그간 소개를 받아 인사를 했던 여자들을 루는 시작도 제대로 못해보고 끝내지 않았던가.
‘관두자, 그래.’
루는 발바닥에 힘을 불끈 주고 재빨리 걷기 시작했다. 나이키 스니커즈는 달밭 달뿌리풀 위에서 스케이트 날처럼 달아났다. 스틱은 산죽 이파리를 쓸다 옆구리를 찔러댔다. 수축과 이완을 반복한 종아리의 통증은 장딴지를 묵직하게 옭아맸다. 다시 발목께로 내려온 경련이 마비로 바뀌는 동안 두 발은 플래시 불빛처럼 제멋대로 풀렸다. 가쁜 호흡에 아랫니가 아렸다. 따가운 조릿대 줄기에 몸뚱이를 던지고 싶었다. 검은 바위에 주저앉아 단내 흥건한 입에 담배를 꽂자 비로소 모모의 잔소리가 잊혔다. 거무튀튀한 오솔길을 지나 밤밭골로 들어서자 루의 불쾌감은 묘한 흥분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결혼은 언제 해도 하겠지. 오늘은 산을 타며 송이를 따는 거라고.’
그러나 또다시 초파리가 귓가에서 윙윙댈 때 성가신 소리가 귓불을 때렸다. 퇴근하여 방 침대 옆에 컴퓨터를 켜자마자 모모는 루가 보고 있는 모니터를 빼꼼히 들여다보며 동창회에서 여자라도 만나지 않았느냐, 여자를 소개 해주겠다는 친구는 소식이 없더냐며 드라마를 보는 표정으로 물었다. 루는 최근에 다시 펼친 ‘노인과 바다’ 양장본 속표지에 박힌 저자사진처럼 어머니의 질문에 입을 닫고 있었다. 모모는 방을 나가지 않았다. 그렇다면 루가 입을 여는 게 어머니를 문 밖으로 내보내는 방법이다. 작가가 한 말이 페이지 수만큼 두툼하듯 루는 입을 떼 모모에게 지난 주말 동창회 모임에 있었던 이야기를 주연배우처럼 말했다. 루는 이야기를 듣는 척하며 우선 모모를 주방으로 데려 나가 레인지 위에 식어 있는 도치매운탕을 데웠다. 모모는 흥분된 얼굴로 듣다 악역의 목소리로 루에게 대꾸했다.
“동창회에 처녀는 있지 않던?”
냄비에 남은 뼈를 꾹꾹 씹고 있는 아들의 면전을 보고 모모는 좀 전의 질문과 형식은 같으나 내용을 달리하여 물었다.
“동창회에 너 같은 총각이 아직 있더냐?”
루는 마시다 만 맥주병을 보일러실로 치워두고 폰을 집어 들어 연락처 어플 액정을 두드렸다. 주소록에는 루에게 자신들의 청첩장을 던져준 이름이 펼쳐졌다. 이제는 루와 술을 마실 이유도 시간도 없는 사람들이다. 회사 쪽 사람을 떠올려도 딱히 불러낼만한 이는 없었다. 루는 폰을 팩 던지고 월요 브리핑에 쓸 서류를 뒤적거렸다. 페이퍼엔 회계 감사 결과가 요약된 숫자가 어지럽게 나열되어있다. 루는 통계표를 보며 자신의 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회사 예산에 맞춰 나눗셈을 하고 저들끼리 다 해먹고 남은 떨거지의 수. 루는 거기 맨 아래 오도카니 버려져 있는 숫자와 함께 자신의 모습을 쳐다봤다.
‘조직이란 원래 최대공약수로 이뤄진 거지. 같이 나눌 수 없는 수는 밖으로 빼고.’
루는 서류를 구겨 대충 쑤셔둔 뒤 손바닥 위에 폰을 놓았다. ‘노인과 바다’를 접고 재생의 시대에 쓰인 ‘지옥’이라는 도톰한 책을 펼쳤으나 던져두고 다시금 작은 직방형 유리를 요술램프처럼 문질렀다. 갑자기 액정화면이 벨소리와 함께 컬러풀한 영상으로 변했다.
귀농한 차교로 부터 전화가 온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석 달을 주기로 오곤 하는 전화였고 도라지를 캐러 갔다 오소리를 따라가선 새끼곰을 보았다는 동화같은 통화 패턴도 변하지 않았다.
“이번에도 능소니를 쫓았소?”
“아직 놈이 내려오지 않더군. 양봉하는 마을로 간 게 틀림없어. 난 말이야, 통계만 믿어. 이 세상에서.”
세상에 우연이란 없지, 우연으로 얻은 달콤함은 결국 칼날을 들이 민다고. 루는 차교가 이어서 할 말을 내뱉었다. 차교는 모든 걸 팽개치고 촌으로 내려갔다. 자신의 결혼에 관한 것만 빼고 세상은 차교가 해석한 확률이 맞다. 그러나 생각해보니, 루는 미미한 확률의 미혼자 구성원 통계 수치에 자신이 껴 있을 뿐임을 알았다. 루가 고향을 떠날 무렵 차교는 방물을 트럭 째 싣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사업의 실패는 도시로 부터의 추방이 되었고, 결국 결혼의 실패로 이어졌다. 그러나 차교는 속에 든 눈물을 숙성시켜 더 이상 눈물을 밖으로 흘리지 않았다. 촌에서 띄운 청국장을 루에게 택배로 보내며 한 말도 의젓했다.
“나이를 먹다보면 말이야, 새로운 걸 찾기보다 내 붙들고 싶은 것을 지키는 거지. 그러니 난 곁에 두고도 썩지 않는 걸 찾아. 그러니까 발효되는 것들을.”
시큼하게 발효된 청국장은 걸쭉한 은유였다. 차교가 시골로 내려가 양봉을 했고, 마늘 농사를 짓고, 표고버섯 재배장을 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곁에 두고 지낸다는 처자 소식은 들어보지 못했다.
저녁에 루에게 전화한 차교의 목소리도 숙성되어 편안한 목소리였으나 루는 깜짝 놀라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산엘요?”
이번에야 말로 천국에 두 발을 들여 놓겠다는 심사로 루는 들떴다. 베아트리체의 목소리가 유혹한다.
“송이버섯을요?”
차교가 말한 송이란 말은 루에게 낯설었으나 야생이란 말과 날이 새기 전 깜깜한 밤이란 말에 귀가 솔깃했다. 루는 곧바로 재킷을 꺼내 깃을 올리고 정상에 우뚝 서 저 아래 지평선을 내려다보는 눈빛으로 현관 거울 앞에 섰다.
“송이는 골목을 댈 수도 없고 씨균을 퍼트릴 수도 없어. 오로지 자연 그대로의 산에서만 나.”
차교가 떠든 흰소리가 끝나고 루는 가을 산이 품고 있는 야생에 대해 생각했다. 수양목 틈새 너도밤나무를 비집고 다니는 담비와 땅속으로 참나무 열매를 나르는 청솔모를 본다는 것. 그건 테트라포드 틈에 낀 시간과는 다르다. 거기다 산 위에서의 원시성은 일부일처제의 관습, 모노가미 따위에 맞추지 않아도 된다. 그런 자유로움이 도리어 루에게는 자신이 여자를 꿰차는 일에 실패했다는 자괴감이 일게 했다. 그동안 어설프게 만나다 말았던 여자들이 머릿속에 지나간다. 모모의 잔소리만큼이나 잊고 싶다. 그러나 괜찮다. 송이를 따는 일은 흥미 있는 일임에 틀림없으니까.
루로 하여금 현관문 신발장 속에 든 스니커즈를 꺼내게 한 것은 차교와의 통화를 마친, 물기 없는 냄비바닥에 도치 뼈가 길냥이 먹이로 마당에 던져진 그날 늦은 저녁이었다. 그 때 모모의 몰골이야말로 뜯긴 청새치를 바라보는 산티아고의 모습이었다.
모모는 집 밥의 식대 계산서를 내미는 마냥 루에게 메모지를 들이밀었다. 종잇조각에는 폰 번호가 적혀 있었다.
“이 번호로 니 사진을 보내줘라. 얼굴이 잘 나온 걸로.”
먼저 루의 사진을 여자 쪽 폰으로 보내주고, 여자 쪽에서 루의 사진이 맘에 들면 소개팅을 해보겠다는 여자 쪽의 말을 모모는 전하고 있었다. 아들의 외모로 1차 면접을 하려는 여자 쪽에 가졌을 괘씸함을 모모는 아들 앞에서 숨겼다. 그걸 루도 눈치 챘다. 그러나 루의 분노도 곧 따분함으로 변했다. 남자의 사진이 맘에 들면 여자는 소녀로 변할테지. 픽스플레이로 포토샵을 해 루키캠 어플을 두드려 공주의 얼굴을 다듬어 손바닥보다 작은 창으로 답장을 보내주겠지. 그러니까 간밤에 집을 덜컥 나온 건 차교와의 명일 산행 약속 때문이 아니라 모모 때문이었다. 그리고 더 이상 진전이 없었던 그동안 소개받은 여자들 때문이었다. 루는 한밤중에 톨게이트를 빠져나와 국도를 타고 달렸다. 마을로 가는 도로변은 캄캄했지만 차창으로 보이는 강청색 감나무의 윤곽과 흙냄새를 나르는 바람은 루가 고향에 도착했음을 또렷이 일깨워주었다. 집을 나온 지 세 시간이 지나고서 루는 마을에 도착했다. 고향 입구 주유소 공터에 주차된 차량은 두 번을 봐도 차교의 차였다. 녹슨 고철 트럭은 노란 등을 눈곱처럼 켠 채 파르르 떨고 있었다.
“일찍 왔구먼.”
“산행이란 건 본래 가을하고도 야간이 제격이죠.”
루는 다부지게 대답했지만 말투는 차가웠다. 백로가 막 지난 가을의 산은 시커먼 윤곽이 감싼 정적뿐이었다. 여백에 기대 살고 있는 상대의 몰골을 확인한 때문으로 둘의 대화는 끊겼다. 비에 젖어가는 담배를 손끝에 붙들고 시트에 올라타니 빗방울은 전조등을 향해 지난여름 풀벌레처럼 달려들었다. 캡을 두드리는 굵은 빗소리는 루로 하여금 환청을 사라지게 했다. 정적이 가시니 마음이 나른하게 풀렸다. 마을 진입을 알리는 과속방지턱을 지날 때는 기분까지 튀어 올랐다. 차교도 시트에 늘어진 허리를 곧추세우고 담배를 차창 밖으로 던진 뒤 추수를 마친 품을 들고 시내에 나가 아가씨를 가비로 다룬 이야기를 꺼냈다.
“그게 말이다, 아가씨가 무릎 위에 세워 둔 온더락 잔을 왜 쓰러트렸는지 아나? 스커트 속으로 이 손을 쑥 넣었지…. 허헛! 근데 잔을 쓰러트린 아가씨에 대한 벌칙이 더 대단했다고!”
벌칙의 내용과 벌을 받는 아가씨의 자세에 대해 떠벌린 난질꾼의 목소리는 막 눈 비비고 일어난 구멍가게 늙은 주인에게 담배를 달라는 억지가 되었다. 담배를 입에 문 차교의 과장된 큰 목소리는 마을을 통과하도록 가라앉지 않았다. 그러면서 콧잔등에 송골송골 맺힌 땀에 스며드는 차교의 눈물. 그건 고향을 떠나며 도시 생활 정착에 애를 먹었던 루 자신의 모습이었다. 차는 균추산이 있는 마을로 진입했다. 머구리 입구를 알리는 회나무에서 우회전을 하면 도장집이 나오고 옆으로 붙은 문 닫은 장의사 집을 따라가면 균추산 기슭으로 미나리깡 연못이 새까맣다. 그 길로 산을 올라가다 향교를 지나면 제실 외벽에 음나무 서너 그루가 만든 그림자가 있고 그 뒤편으로 곰보자국 묘지가 있다. 원래 묘터가 있던 사토 깔린 마밭은 재작년 장마가 끝나고 물이 차 이장했다. 마밭 옆 다락밭과 함께 물 고인 소는 검은 미나리가 불어 있을 것이다. 문둥병자들이 거기 순채를 따러온다는 이야기를 어릴 때 들은 적이 있다. 병이 든 몸들은 이 새벽에도 순채 소에 기웃거릴지 모른다. 성한 사람보다 눈을 드세게 뜨고서 살겠다고 센 입김을 뱉으며 연못을 훑을지 모른다.
루는 멀쩡한 자신의 몸이 불구보다 작게 느껴져 허리를 뒤틀었다. 눈을 뜨면 트럭은 장의사 집을 지나칠 테다. 루는 꼭 감은 눈으로 또렷한 모습을 보고 있었다. 균추산 능선을 뒤로하고 음나무 줄기가 밤마다 외벽에 그린 검은 그림자. 그 실루엣을 묘지기로 세워둔 무덤. 빗방울이 때리는 더블 캡 안에서 삼박한 루는 무덤 속에 누운 아버지의 형상을 보고 있었다.
밤 밭을 지나고, 들깨 밭이랑을 밟으니 사람은 물론 청솔모 새끼 하나 보이지 않았다. 나뭇길로 들어서니 능선너머 휘청 솟은 구준봉이 루의 눈에 희미하게 잡혔다. 루는 가쁜 숨을 추스르며 흥이 나서 중턱으로 연결되는 나뭇길 옆으로 가서는 어지럽게 이파리를 떨고 있는 산죽에 대고 몸을 쓰러트렸다. 얼굴을 덮은 조릿대 잎을 손으로 부비니 입에서 뿜는 김과 함께 웃음이 풀려났다.
“이제 송이만 따면 되겠군!”
루는 아까 자루에 담아둔 밤을 깨물고 껍질을 퉤퉤 뱉어내고는 스틱을 꺼내 치고나가기 시작했다. 차교가 뒷짐지고 외쳤다.
“구절장부터 치워라. 그거 짚으면 더 잘 미끄러진다.”
루는 지난겨울 회사 캠프연수에서 스키를 탔을 때처럼 산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그동안 자신을 옭아맨 잔소리는 풀벌레소리보다 가벼운 것일 뿐인 아무 것도 아닌 거였다. 참나무 아래 바짝 마른 나뭇잎 위로 다시 엎어진 채 벌레처럼 꿈틀거리며 루는 낄낄댔다. 산줄기는 하늘과 맞닿은 능선까지 여태 새까맣다. 시커먼 산을 들여다보니 소나무의 윤곽이 희끄무레 잡혔다. 그 때문에 루는 소나무 한 그루를 골똘히 쳐다보았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루!”
뒤돌아보니 곧게 서 있는 소나무 한그루 밖에 없었다. 루는 나무를 노려봤다. 어둠 속의 나무는 서서히 푸른 윤곽이 잡혔다. 퍼뜩 자기 이름자 음운이 소나무 한그루의 모습과 꼭 닮아 있음을 알았다. 순간 어깨가 펴지고 자신감이 솟구쳤다.
‘백팩에 송이버섯이 다 차버리면 어떻게 하지?’
루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산꼭대기를 쳐다보았다. 곧장 치고 올라가면 중봉이 나올 테고 거기서 이 백 미터 더 올라가면 정상인 구준봉이다. 루의 시선이 더기를 올라 서재밑등 능선을 짚어 대니 이미 산꼭대기에 도착한 것 같았다.
루는 등산이 아니라 송이를 따러 온 것을 되뇌고선 온 산의 풀을 다 가진 풀벌레처럼 재바르게 차교의 꽁무니를 뒤따랐다. 그런데 도무지 이상했다. 아무리 올라가도 아까 주춤바위에서 보았던 정상과는 도리어 멀어졌다. 산허리를 타고 맴도는 길은 산길이 아니었기 때문에 비탈에서 자꾸 미끄러질 뿐 구준봉은 차츰 시야에서 사라졌다. 걷고 또 걸어도 중턱을 맴돌 뿐 나선을 맹탕 걷고 있었다. 비 젖은 돌쩌귀를 헛디디고 휘청거린 몸을 바로 세우니 루는 되레 산 아래로 내려가고 있음을 알았다. 스니커즈를 바위에 문지른 후 방향을 틀었다. 루는 산꼭대기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아, 아니 오늘은 정상이 목표가 아니야. 버섯을 캐러 온 거니.’
도토리를 밟으며 참나무를 지나치며 소나무 군락으로 다시 갔을 때 루는 버섯은커녕 산길도 찾지 못하며 차오르던 숨이 턱하니 막혔다. 그 때 차교가 장다리가 시든 푸성귀 밭을 아치랑대고서 나오며 외쳤다.
“여기 한 송이!”
루는 안도했다. 차교가 딴 송이도 송이였지만 지천에 선 소나무가 눈에 확 들어왔기 때문이다. 루는 소나무 줄기를 당겨 그 아래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솔잎을 타고 알알이 내리는 빗방울이 정수리를 때리고 소나기 물줄기가 온 몸을 두드렸다. 루는 어깨를 펴고 두 팔을 정상을 향해 뻗었다.
고함을 마친 차교는 우뚝 선 송이 앞에 섰다. 가랑이 사이 부푼 물건처럼 꼿꼿한 버섯을 차교는 마주했다. 돌출된 황갈색의 균모표면을 쓰다듬고 갈색 인편을 들추니 백색의 살이 도드라졌다. 살에는 짙은 송진 냄새가 진동했다. 차교는 주름살 밑으로 뻗은 뿌리에 손가락을 쑥 밀어 넣었다.
“우리가 딴 송이는 생으로 입에 넣을까 팔팔 끓는 쇠고기 전골에 넣을까?”
딴 송이를 자루에 담으며 차교는 신이 났다.
“서른 해가 넘도록 말이야, 이 곡괭이가 칠월 장맛비 흙 마당 휘비 듯 산을 쑤셔대질 않았겠니. 그러더니 끝이 요렇게 모지라졌어. 이젠 깔비에 갖다 대기만 하면 요 곡괭이 끝에 송이가 자석처럼 착착 달라붙지.”
차교가 우산나물 군락에서 담배를 물어 나오며 자루를 멜 땐 채삼꾼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는 산에서 만큼은 자신감이 넘쳤다. 그 모습을 보고 루가 머릿속에 떠올린 건 회사 후배들과 신입이 여자와 척척 달라붙어 연애하고 결혼하는 모습이었다. 그제야 루는 아까 솔가리를 헛짚었을 때처럼 가슴이 내려앉았다.
‘혹시 오늘 버섯을 따지 못하는 게 아닌가…’
는개에 젖기 시작한 재킷처럼 루의 처진 얼굴에는 낭패감이 스몄다. 차교는 조용해진 루를 위로한답시고 말벌 집과 꼭 닮은 곰보버섯과 실뱀 모양의 노루궁뎅이버섯을 루의 얼굴에 던져댔다. 루는 말벌 떼에 쏘였대도 손살치지 않을 낯빛을 하고 뱀의 모가지를 쥐듯 비장하게 버섯을 따는 족족 자루에 넣었다.
“그거 송이 아니다. 송이아재비 버섯이라고 하는데 향이 없다.”
루는 자루에서 다른 버섯을 보여줬다.
“것두 아니다. 솔버섯이라고 하는데 독성이 세다. 아까 내가 던져준 노루궁뎅이버섯으로 술이나 담가 먹든지. 송이와 비슷하다고 해서 다 송이버섯이 아냐. 그리고 송이를 소나무 아래서만 찾으러 하지마.”
그러면서 차교는 가문비나무며 눈잣나무 아래서 송이 균륜을 쓸어 담았던 무용담을 몸짓과 더불어 펼쳐댔다. 루는 홀린 듯 곰솔이나 눈잣나무를 찾아 움직였다. 하지만 루에게는 그런 나무를 찾는 것이 송이버섯을 보는 일보다 더 힘들었다.
“그까짓 송이!”
곰팜이 먼지 덩어리를 밟고 지나가면 흙덩어리보다 푸석하게 부서질 가느린 몽동아리. 빗방울 튕겨낼 갓 하나 달랑 달고 홀몸 꼿꼿이 버티는 강철 포자. 하늘 향해 우뚝 선 키 작은 몽상가. 루는 차교가 딴 송이를 거인처럼 쳐다봤다. 루의 시선은 곧 바뀌어 몸매 도드라지게 차려입고 걸어가는 아가씨 엉덩이 쳐다보듯 송이를 멍하니 바라봤다. 괜찮다. 이 산 어딘가에 송이가 있다. 그러나 송이는 루의 눈길을 쉽게 따돌리고 있다. 집과 회사에서 혼자였지만 외롭지 않은 척을 한 루는 그동안 가면극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줄곧 산을 타는 동안에도 외줄타기를 하는 것 같다. 루는 광대버섯처럼 독이 오른다. 자존심이 아까 바위에 부딪친 무릎의 멍처럼 우리하게 상해온다. 눈을 더 크게 떠 송이를 찾는다. 그 눈길 앞에 신 부장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루에게 시킨 일이 비친다. 지난번 선 본 여자에게 넣은 문자의 답이 없었던 일이 보인다. 관자놀이에 핏줄이 팽팽해진다. 이제 루는 송이 따는 일에 자존심을 몽땅 걸었다. 사실 송이를 따는 건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송이를 신문지에 싸서 백팩에 넣는 것은 머리를 식히는 일일 뿐이다. 송이는 보이지 않는다. 송이를 못 따는 건 참을 수 없게 되었다. 루는 소나무를 쳐다보며 주먹을 부르르 떨며 따리란 다짐이 낭패감으로 바뀌지나 않게 하려 서둘러 담배를 끄고 건장한 사내의 몸통같이 뻗은 소나무 등걸에 걸어둔 백팩을 낚아 채 고쳐 멨다. 한 오십 미터를 포복해 들어가 차교에게 받은 곡괭이를 장총처럼 겨누자 눈앞에는 재선충에 감염된 소나무 한 그루가 드러났다. 의기양양한 마음을 먹고 보니 일이란 게 이리 돼버렸다. 군불 가마 옆에 쌓아둔 깔비처럼 솔잎은 가무퇴퇴하게 늘어뜨려 있었다.
“쯧쯧”
루는 소나무에 대고 자신의 모습이 감정이입 되어버렸다. 그러고는 열흘 전 산으로 가려다 바다로 갔던 일이 떠올랐다.
“다르게 사는 것 한 번 해보세요. 파란불에만 건너는 사람은 빨간불이 켜졌을 때 횡단보도를 건너는 것부터 해보시고 민물낚시만 하는 사람은 바다낚시도 해보세요. 높은 고지를 탐내는 알파니스트라면 해발 영 미터 바다를 누벼보라니까요.”
회사 교양 프로그램으로 실시된 ‘자존심 버리며 자존감 높이기’ 강연자는 시답잖은 강의 내용을 때우려 과장된 목소리로 떠들었다. 루는 한 번도 연수나 강연의 내용을 따라 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시키는 대로 했다. 주말마다 가던 산이 아닌 항구로 갔다.
루가 가막사리를 바짓가랑이에 붙이며 해발 천 미터 이상 되는 산에 오르곤 하는 건 일상적인 일이었다. 마호가니 식탁 문양을 고르며 모모와 다투고 난 뒤에나, 혹은 작년 가을 동생이 먼저 결혼이란 걸 했을 때면 여느 때보다 해발을 좀 높이 잡았을 뿐 등산이란 주말이면 어김없이 해오던,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산책이었다. 그러나 그날 루는 강변북로를 막 빠져나와 습관적으로 아차산으로 향하는 차의 핸들을 고쳐 잡고 한남인터체인지를 빠져나와 뭍의 끝으로 진군했다.
내내 따라오던 해를 서쪽으로 보냈으나 남쪽 끝자락에서 들끓는 햇볕은 식지 않고 있었다. 루는 굉장한 보물이라도 찾듯 남해에서 더 아래로 내려가다 내비게이션 길안내가 멈춘 곳에 차를 세웠다. 지도의 끝은 당포항이었다. 루가 보고 있는 컴퓨터 모니터를 짚고서 던지던 모모의 질문들이 차창 뒤로 떨어져나갔다. 눈앞에 펼쳐진 푸른 바다 해수면을 보고 있으니 북바위산을 덮은 파란 소나무가 얼른 스쳐지나갔지만 루는 포말과 함께 흩날리는 갈매기처럼 금세 기분이 차올랐다. 그러나 고꾸라지는 새처럼 금방 우울해졌는데, 세상의 끝이라고 여긴 당포항은 끝이 아니었다. 어항은 연옥처럼 소란스러웠고 페리는 사람들을 더 먼 남쪽으로 실어 나르고 있었다. 사람들은 반쯤 감은 눈으로 수평선을 쳐다보며 매표소에 줄을 서서 천국을 기다리고 있었다.
“조도요? 여기선 거기 가는 배 없는데요.”
그 말을 듣고, 빛이 좋은 조도에 가면 햇살이 눈부시겠죠, 아, 아니, 새들이 많아 조도 인가요, 라고 하려다 입술을 오므리곤 다시 물었다.
“그럼 소나무를 볼 수 있는 곳이 있을까요?”
루는 바닷가에 와서까지 등산할 만한 곳을 찾는다는 걸 숨기기 위해 둘러댔다.
“여긴 없소.”
걸음을 돌린 루는 이번에야 말로 목적지를 찾았다는 듯 어깨를 펴 차를 몰아 통영항 여객선 터미널로 갔다. 루는 반듯한 목적지에 닿은 적이 없었다. 한 여자를 오래도록 만난 적이 없었다. 터미널 저쪽 어항 방파제에 서서 바다를 보며 껴안은 채 사진을 찍는 커플들을 바라보았다. 반사된 빛에 눈이 아려왔다. 좀 전에 해를 봤을 때도 눈을 돌렸다. 내도록 자신을 따라다닌 것이라곤 해뿐이었다. 눈길을 다시 물이랑으로 떨구니 수면에 자신의 얼굴이 떠있어 좀 전과 같이 고개를 또다시 돌렸다. 조도에 갔다 해도 이럴 테지. 아, 아니 이러기 싫어서 바다로 온 거잖아. 주차장으로 가 내륙으로 되돌아갈까 하다 멈춰섰다. 루는 터미널 매표소 위 계기판에 찍힌 노선 중 곧 출항하는 페리의 티켓을 서둘러 끊었다.
페리가 관매도에 접안하는 동안 루는 좌현비트에서 일어나 수밀문을 열어젖히고 사람들이 다 빠진 홀 안으로 들어갔다. 히빙라인을 묶은 홋줄을 푸는 우현과 달리 수밀문 안은 휑했다. 상아로 만든 헤르메스가 걸린 마린레스토랑은 좀 전까지 북적거린 유람객 탓에 정적이 얄망궂다. 수밀창을 내다보니 여행의 흥취가 취기에 내맡겨진 관광객들이 배에서 내려 술 마실 곳을 찾았고, 퍼플 재킷을 맞춰 입은 커플은 어깨를 서로 감싼 채 현문다리를 내려 굴튀김을 파는 맥줏집으로 들어갔다. 커플을 쳐다보는 루의 시선 앞으로 술 취한 관람객이 한마디 내뱉었다.
“산다는 건 바로 저러한 거지.”
그 취객이 쳐다보는 커플을 다시 쳐다본 루의 귀에 으깨지는 물살소리가 맞물린 윙윙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세상이 있다. 젊은 남녀가 있던 호프집 앞엔 잠시 후 커플이 없어지고 바다의 배경만 남아 휑하다. 그러나 커플 둘이 함께 있는 세상의 장소는 더 분주해진다….”
뒤돌아보니 아무도 없었다. 입항을 하면 먼저 관매도에서 가장 높은 산을 찾아야겠다. 루는 배에서 내리자마자 지난 태풍에 터진 방파제의 사방을 뜯는 인부에게 다가갔다. 그들은 테트라포드에 서 있는 그에게 얼른 나오라는 손짓을 했다. 포크레인 소리 때문에 작업꾼들이 대답을 한다 해도 알아듣지 못할 것이 뻔했다. 시멘트 부수는 소리에다 여객선의 엔진소리까지 귀를 때려댔지만 그 소리에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누구도 루처럼 혼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산으로 가야했어…’
산악회에서 원래 계획했던 코스인 북바위산이 머리에 스쳐지나갔다. 정상을 떠올렸지만 루의 눈앞에는 바다뿐이었다. 주홍빛을 제외하곤 아무것도 없었다. 보색의 환영을 지우고 아나디오메네를 찾았지만 젊은 여인도 없었다. 조개를 손질하는 여자들이 있었으나 비너스로 보기엔 턱없이 늙었다. 루는 길 잃은 미조가 되어 갯가를 두리번거리다 턴버클과 철침사를 발로 차서 밀고 있으니, 저만치서 고무보빈을 깔고 앉아 술병을 돌리는 작업꾼들이 보였다. 보리 숭어가 수면 위로 뛰어 올랐다. 그들은 그 쪽에도 루에게도 시선을 두지 않고 방금 켠 깜빡거리는 등 앞에서 시커먼 얼굴을 하고 석쇠 사이에 낀 전어를 빼는데 정신이 팔려 있다. 루는 강철색에서 자남색으로 변한 바닷물에서 시선을 떼 고함치듯 물었다.
“이 섬에 오를만한 산이 있나요?”
물크러진 회를 비비적거리는 사내가 고개를 히뜩 돌렸으나 그들은 대꾸 없이 죽은 전어를 다시 석쇠 위에 올렸다.
사람들과 거리가 가까워지자 그들은 낡은 간드레를 루의 얼굴에 댔다.
“소나무를 좀 보려하는데…”
루는 참았던 소변을 보듯 그렇게 말하고 말았다. 그러나 시원한 대답 대신 카무플라주 외피에 지퍼를 올린 인부는 루에게 소주잔을 건넸다. 받은 잔을 비우고 전어에 젓가락을 댔으나 생선대가리는 집자마자 툭 부서져 내렸다.
“소나무요? 있긴 있죠. 오래된 데다 병신이 된 나무…”
일꾼들은 말끝을 흐린 입에다 소주를 털어 넣고 정치망에 걸린 밍크고래의 커다란 덩치에 대해 떠들어댔다. 위판 받은 돈으로 내륙 기행을 하다 후린 여자에 대해 말할 땐 성의 없이 대꾸해주던 루도 정신이 확 깼다. 그러나 이내 졸음이 밀려왔다. 저쪽에서 물고기를 낚았다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니까 이건 정말 대어야! 봐, 방파제에서 낚시를 하는 사람들도 우리 배를 향해 줄을 던지고 있잖아.”
허풍선이 몇 명이 함께 그물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루도 바다에서 올라온 아나디오메네를 보기 위해 사람들의 시선을 따라 쳐다보았다. 고래보다 더 큰 대어가 걸렸는지 모른다. 루는 뒤꿈치를 잔뜩 세웠다. 그 자세는 선을 볼 때 약속장소인 이층 카페에 미리 나가 저 아래 걸어오는 상대 여자를 볼 때의 몸짓이었다. ‘자, 누구일까, 무엇이 걸렸을까?’ 올라온 그물에는 아버지가 걸려 있었다. 내내 괴롭히던 환청은 터무니없는 환영을 비췄다. 루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턱에 받치고 있는 손을 떼며 잠시 잠이 든 거라고 우기며 스스로를 진정시켰다. 루는 소금 먼지를 피해 천으로 얼굴을 두르고 톳을 건지는 인부에게 찾아가 다시 물었다. 그는 마스크를 내려 먼지를 쫓듯 손을 휘휘 저으며 소나무가 있는 곳을 루에게 알려주었다. 들끓던 바다가 숯처럼 잠잠해지고 루의 발놀림은 선착장 해변 바위에서 주검처럼 굳었다. 소나무 화석은 수백 만 년 전 소나무의 숨결을 머금고 꼿꼿하게 서 있었으나 밑동이 잘려나가고 없었다. 소나무 앞에서 루는 불구처럼 휘청거리며 서 있었다.
다음 날 루는 통영항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관매도 선착장으로 갔다. 방파제 공사를 끝낸 인부들은 종일토록 오르내린 포크레인 집개 옆에서 소주잔을 들었다 놓기를 되풀이 했다. 어제의 모습과 변한 게 없다. 달포 전과, 또한 작년과 마찬가지로 루는 혼자였다. 바닷물을 보니 아랫도리 없는 몸뚱어리 하나가 물살 위로 흔들리고 있었다.
관심 없는 세상은 쳐다보지 않으면 된다. 그치만 그 세상에 자신이 떨궈 졌을 때는 쓸데없이 섬세하게 거기를 관찰하는 법이다.
이명을 떨치고 루는 그날 밤 늦게 집에 도착했다. 드라마를 보는 모모의 모습도 그렇거니와 다음 날 회사의 업무도 달라진 게 없었다. 루는 그게 드라마의 뻔한 줄거리만큼 견딜 수 없었다. 회사에서는 단식부기를 복식부기로 바꾼 장부를 루에게 던져주며 확인 결재를 요구했다. 신부장은 중요 결재 문서를 루에게 툭 던져주며 검토를 지시했다. 그건 참을 수 있었지만 루를 신입사원보다 무시할 때면 결재 파일을 잡은 손이 벌벌 떨렸다. 결혼한 신입사원 앞에서는 루를 더 무시했다. 회사 후배들이 제 짝을 찾아 제때 결혼을 하는 걸 루도 보고 있고 적령기를 한 번 넘겨버리면 결혼이 성사되기 힘들다는 걸 신부장이 알 텐데, 그렇다면 자신을 더 위로해주고 치켜세워줘야 하는 것 아닌가. 그건 루의 생각일 뿐이다.
송이를 찾을 수 있다고 루는 생각했다. 송이는 보이지 않았다. 송이가 꼭 필요한 것은 아니었으나 송이를 따지 못한 것은 넘어갈 수 없다. 자, 그렇다면 머구재를 넘어가기 전에 송이를 꼭 따야겠다. 더 이상 병신이 되지 않으리란 심사가 루의 가슴에 독버섯처럼 돋았다. “여자라고 해서 다 내 여자가 아닌 건 알고 있다. 그래서 이 여자 저 여자 얼마나 만나봤는지. 그러나 내 여자는 없었다. 송이를 못 캐고 있는 것처럼…”
한 번 허탕치고 내려가면 두 번 다시 버섯을 캐러 산에 오르지 않는 법이라던 차교의 말이 머리를 때렸다. 차교의 말이 사실이라면 누군가 차교의 그 말에 자존심이 동해 한 송이를 캤을 터이다. 결혼이란 것도 순전 자존심 때문에 해두려는 걸까. 루는 인중에 모인 땀을 손목으로 쓱 훑고 콧마루를 비볐다. 짜증 난 얼굴로 고개를 쳐드니 햇살을 비집고 구준봉이 오똑하게 서 있다.
루는 자신에게 맞는 키에 쌍꺼풀 낀 커다란 눈망울을 가진 긴 생머리 여자가, -라이트그린 빛 염색을 한 머리카락에 핑클을 돌린 여자도 좋다.- 분명 있을 거라 생각하며 어금니를 곱씹었을 때 맞은편에 우뚝 솟은 소나무가 보였다. 쩍 벌어진 도톰한 바위 한가운데 우뚝 박힌 소나무는 한눈에 봐도 외설스러웠다. 과연 그 아래 버섯이 있었다. 바위 틈새 음모처럼 도드라진 이끼 위로 불뚝 솟은 버섯은 황금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루는 그 버섯을 냉큼 움켜잡아 뿌리를 털었다. 차교가 그걸 재빠르게 낚아챘다.
“금버섯이다. 먹으면 중독되는 독버섯이지.”
루는 두 입술을 헛씹으며 꽈릿빛으로 번쩍이는 포자 덩어리를 독사 모가지 쥐듯 뒤틀어 문지르고 고수 풀 위로 내던졌다.
‘그래, 예쁜 여자는 무슨…’
나뒹굴어진 버섯을 보고 있노라니 결혼과 관련하여 주위에서 해준 말들이 지슴처럼 듬성드뭇 솟구쳤다.
“조건 따지지 말고 딱 두 번은 더 만나봐!” 라고 루가 밤에 방에서 보고 있는 인터넷 창에 기대 커서처럼 따라다니며 캐묻는 모모의 말들. “여자란 이미 완전체야. 상대의 단점이 보인다면 그건 너의 콤플렉스 때문이야. 넌 거울을 보며 네 멋있는 부분을 쳐다보지? 마찬가지로 여자에게도 그 예쁜 구석만 뚫어지게 들여다보란 말이다.” 라는 신부장의 말들.
그들의 어쭙잖은 관심과 성가신 조언은 루로 하여금 여자를 점차 멀리하게 했다. “설마 독신주의자는 아니지?”, “결혼을 하지 않는 루는 금수저?” 그들의 질문에 답은 이미 정해져있고 루는 정해진 답만 말하면 되는 답정너의 역할에 충실했다.
“송이야 어디 있냐!”
루의 고함은 비가 갠 축축한 대기를 타고 구릉을 돌아 가슴팍에 되돌아와 꽂혔다. 날숨을 내뱉고 다시 홉뜬 눈으로 사방을 훑으니 배까지 고파왔다. 송이는 안 보인다. 잠깐 산에 든 햇빛은 자신의 불안한 마음만을 비추어 루는 나무 그림자 속으로 헤집고 다니며 눈에 보이는 대로 송이를, 아니, 송이 비슷한 것들을 모조리 주워 담기 시작했다.
차교는 머구재 붉나무 아래서 루를 만나, 기다렸다는 듯이 백팩을 낚아 채 먹물버섯, 꽃송이버섯, 머쉬마루버섯을 전부 꺼내 모조리 길섶에 던졌다. 그런 다음 자신의 자루에서 꺼낸 버섯을 루의 빈 백팩에 집어넣었다.
“흰색처녀버섯이야. 이게 맛은 좋다고!”
“처녀?”
루는 아까 금버섯을 내팽개칠 때처럼 가방을 내던지고 갈참나무 밑동에 오줌을 싸질렀다.
“넌 버섯을 따러 온 거냐, 등산을 즐기러 온 거냐. 송이가 눈앞에 저절로 나타날 거라 생각 마라!”
아닌 게 아니라 차교의 말은 신부장이 했던 말과 오버랩 되었다.
“여러 여자를 만나 봐야 니 여자를 찾는다. 근데 결혼을 해도 후회할 일이 뼛속까지 스밀 걸.”
그렇게 말한 신 부장은 분기 복식부기가 헝클어져 월말 마감을 못하고 있을 때 와이프가 목에 열이 난다고 집으로 달려간 인물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평범한 감기였다. 신부장 책상에 덩그러니 놓인 핑크빛 하트 가족사진을 보며 루는 생각했다. 결혼이란 건 필연코 좋은 일이지 않을까, 라고.
‘인간의 가장 큰 행복은 애초 태어나지 않는 것이며, 그 다음 행복은 태어났다면 빨리 죽는 것이다.’
신부장이 술 취한 어느 그리스 신의 고언을 빌려 한 말을 두고 루는 그걸 반어적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었다. 살아있다는 불행 중에서 결혼을 하는 건 불행을 깎아 주는 일이 되겠지. 더구나 신부장이 부서별 연수를 하며 쏘았던 PPT화면에 박힌 문구를 떠올리면 더더욱 그랬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쓰는 언어는 이미 우리의 언어가 아니라 기계의 언어이다. 우리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동기화’되어 있는가를 확인하며 그들과의 관계를 ‘측정’한다. 그런 다음 우리는 직장에서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 ‘주파수’를 맞춘다.」
루는 붉나무에 대고 코를 휑하게 풀어 제쳤다.
‘결혼을 하지 않으면 결혼이라는 주파수가 평생 나를 따라다닐 테지!’
루는 자신이 결혼을 안 하는지 못하는 건지 몰랐다. 더구나 여자의 주파수는 자신의 주파수와 교신이 뒤엉켜버렸다. 소나무 사이를 산책하는 발걸음으로 송이를 딴 차교는 이번에는 지렁이를 닮은 자주국수버섯을 훑어 따선 골똘해진 루의 낯짝에 던졌다. 루는 역시 대꾸 없이 계곡 쪽으로 몸을 돌려 내뺐다.
“왜, 포기하고 내려가려고?”
어느새 따라 붙은 차교는 방금 캔 굵고 곧은 송이를 쭉 찢어 내밀었다.
“우선 이것 먹고 자네 아랫도리 뿌리부터 곧추세우게.”
루는 송이를 씹으며 산줄기를 올려다보았다.
“송이 뿌리는 동그랗게 퍼지며 자라나. 근데 조건 좋은 환경만 들이 대면 뿌리만 뻗을 뿐 버섯을 만들지 못해. 차고 더운 계절이 포자를 때리고, 송진 같은 것이 못살게 부딪혀야 요 모양대로 솟아나지.”
차교의 말을 들으며 루는 송이가 보낸 계절과 덮어쓴 이물을 떠올리며 지난한 자신의 고생스런 일들을 떠올렸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지옥으로 가는 림보의 계곡에 빠져 버렸다. 환청은 미노스의 목소리가 되어 괴롭히기 시작했고 머리가 셋 달린 요상한 괴물도 그를 계곡에 꼭 붙들고 있는 것 같았다. 개비 계곡이 가까워지도록 송이는 보이지 않았다.
계곡만 지나면 분명 송이가 있을 것이다. 다행히 계곡 너머로 아직 사람들 기척이 없었다. 계곡 비탈을 지나 산길에 발을 디디면서 보았던 콩버섯과 굽더더기버섯, 해송이 버섯, 이꽃버섯 같은 잡버섯 군락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곧 송이가 보일거야, 하는 기대가 부풀었다. 하지만 이내 흐뭇한 마음들이 싹 가셨다. 그것들은 모두 송이가 아닌 버섯일 뿐이었다. 루는 오기 같은 것이 서서히 식기 시작했다. 상한 자존심이 열등감으로 고꾸라졌다. 루는 담배를 꺼내다말고 가쁜 숨을 쉬다 목에 걸린 가래침을 기합 넣듯 뱉어냈다.
“허엇, 퉤”
차교는 루의 백팩을 쥐고 또다시 뒤집었다.
“왜? 아까 처녀버섯은 바로 까먹었는지 없네? 이건 멧돼지나 고라니 배변 흘린 자리에 나는 큰졸각버섯. 요건 버섯심이 새까만 먹물버섯!”
차교는 루의 자루를 탈탈 털며 한마디 더 보탰다.
“송이를 따기 힘든 건 송이가 없어서가 아니야. 송이 아닌 버섯이 너무 많은 탓이지.”
차교의 말에 루는 짜증이 벌떡 솟구쳤다.
‘그래, 이 세상 수많은 여자 중 내 여자 아닌 여자가 너무 많다. 그 여자들 중에 한 둘은 내게도 관심이 있었겠지만 그 여자들마저 내 앞에서 위장복을 꼭꼭 걸치고 있었지. 그 여자들은 그걸 결코 벗지 않는단 걸 알았다. 근데 나는 그걸 왜 못 벗겨 냈지?’
그러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세상에서의 한 명과 상대가 지구에서 좋아하는 한 명이 서로 맞아 떨어지는 게 가능하기는 할까하며 루는 트집 혹은 자기 위안을 가졌다. 심지어 결혼을 해서도 삼 할은 헤어진다 하지 않더냐. 루는 또다시 통계에 갇혔다. 온 산에 솟아있는 온갖 나무와 야생초를, 그니까 송이가 아닌 그것들을 짜증스레 쳐다보았다. 그 비좁은 확률을 벗어나려 산을 올랐지만 송이는 보이지 않았다. 송이를 따고 싶은 오기는 이제 없다. 근간에 자신이 여자를 못 만난다는 건 이해할 수 없다. 참을 수 없다. 그렇다면 송이라도 꼭 따야지.
“내 좋아하는 여자를 내 것으로 만들어서 벗길 테다.”
“뭘 벗겨?”
“아, 아니, 위장복을 벗긴다고요.”
“그래, 말 잘했다.”
차교는 숨을 크게 뱉은 뒤 말했다.
“송이를 따는 맛은 송이를 입에 넣고자 함이 아니라 숨어있는 송이를 찾는 묘미에 있지. 소나무도 숲의 모습으로 위장복을 입고 있고 송이는 깔비로 머리를 두르고 있어. 죄다 살아남기 위해 카무플라주를 입고 있다고. 난 말이야, 도시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그 따위 것들 홀랑 벗어던져 버렸지. 그리하여 여기로 내려왔는데 이제야 비로소 위장복을 제대로 걸친 것 같다. 저 풀 이파리와 나무 등걸이 날 감싸고 있다. 이 풀나무는 창세된 때 그러하였듯 허한 내 자*까지 가려준다고. 봐, 누가 날 건더려!”
차교의 말마따나 루는 송이가 죄다 솔가리 아래 숨어 있는 걸 알았다. 그걸 상기하며 루는 전사처럼 스틱을 잡았으나 목이 말랐고 털컹거리는 백팩에는 생수조차 다 떨어졌다. 아무리 봐도 이 산에는 자신이 딸 송이가 없었다. 나이키 스니커즈는 니케의 여신처럼 새벽부터 재바르게 구준봉 줄기를 누볐으나 흙먼지만 날릴 뿐 승리감은 오지 않았다.
“줄송이는 고사하고 포자 먼지 구경도 어렵구먼. 솔가리를 보기도 어지럽고 검불을 치기도 따갑다.”
휘한 산에 대고 외치며 두 손은 솔가리를 후비적거렸으나 버섯은커녕 쥐며느리만 기어 나왔다. 산 정상은 점차 멀어졌다. 송간에 서서 허망한 눈빛을 거두고 줌치에 넣어둔 밤알을 꺼내 백팩에 넣으려니 백팩 지퍼 속에 쑤셔져 있는 종이가 나왔다. 종이는 회사 월요 브리핑 연수 자료였다. 펼친 부분은 자료의 맨 뒷장이었는데 얼렁뚱땅 복사하여 붙여넣기를 한 문구는 어느 독일철학자의 말이었다.
「세상은 말이다- 본질로 일컬어지는 있는 그대로의 ‘물자체’ 보다 이미지즘으로 포장된 상대성의 잣대로 판단되는 게 가반이 넘는다. 그러나 ‘물자체’도 모호한 대상이 되었다. 우리의 감성을 건드려놓고는 감성의 등 뒤에 숨어버리는, 감각의 대상이 안 되는 순수한 가상체-. 물자체는 우리의 정신에 떠오르기는 하지만 결코 인식될 수 없다.」 대충 보아 소비자의 심리를 잘 파악하자는 의도의 문구였다.
“씨발! 버섯도 여자도 내가 쫓아다닌 건 죄다 숨어 버렸다.”
차교는 루의 구시렁거리는 소리에다 포개 말했다.
“엊저녁에 사람들이 여길 다 훑었군. 그러나 캘 사람은 캔다고.”
차교가 열아홉 송이나 담은 송이버섯 자루를 고쳐 메고 앞장을 설 땐 루는 남은 발악을 쏟아 부어 차교 뒤를 좇았다. 차교는 경사가 급한 바위를 이끼버섯같이 바짝 붙어 까치살모사 비늘처럼 날렵하게 장화를 놀려 타고 지나갈 땐 루도 따라갔다. 잠시 석이버섯을 긁어대며 한눈을 판 루를 차교는 가뿐히 따돌리고 또 외친다.
“송이닷!”
금세 또 한 송이를 발견한 차교의 눈은 상투가 국수버섯 솟듯 의기양양해졌다.
“그래, 나는 병신 맞다.” 루가 목소리를 깔아 내뱉고 샛길로 빠지려 할 때, 차교는 루를 불러 손에 쥐고 있던 대검을 루의 손에 쥐어주었다. 루는 아가씨 검불 틈사이로 물건을 집어넣듯 송이를 향해 칼을 쑥 꼽았다.
“이제부터가 중요해. 흙이 묻어 있는 기둥 끝 부분을 칼로 도려. 도자를 댈 것도 없이 검지만 찔러 뽑은 다음 갓 부분부터 닦아 누런 껍질은 죄다 벗겨. 그러고 나면 하얀 속살을 맞이하게 된다고. 혹여나 방치했다간 귀한 향이 날아가 버리니 훌렁 벗겨 얼른 입에 넣는 거야.”
“홀딱 벗겨서 먹는다고요?”
“송이를 다루는 건 처음부터 끝까지 여자를 만나는 거와 다름없지. 눈으로 발견하기가 어렵고 찾기가 힘들어 그렇지 일단 통하고부터는 두고 보며 감상할 겨를이 없어. 무작정하고 들이대야지. 혓바닥으로 자근자근 애무하며 먹는 거지. 누가 낚아채기 전에, 음, 맛있게.”
루는 차교의 패설과도 같은 군소리가 거북살스러웠지만 송이를 벗겨 맛있게 씹는 모양을 보자 제법 군침이 돌았다. 야릇한 생각이 헝클어져 아랫도리를 요분질해대자 발걸음은 금세 산죽을 치고나가 두터운 솔가리를 재빠르게 훑어 나갔다. 그 때 늙은 소나무 두 그루 사이에 얽혀 내걸린 플래카드가 눈앞에 나타났다.
“자연보호라? 도대체 언제적 프래카드 문구가 아직 남은 거야.”
루는 먼저 치고 나간 차교에게 화풀이 하듯 떠들어 댔다. 저 앞에서 차교가 외쳤다.
“자연보호 좋지! 자*를 연마하여 보*를 호강시키자!”
차교의 진부한 음담을 두고 루는 환청을 대하듯 귀를 막았다. 그러면서 이상하게도 루는 그간 스치며 만났던 여자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미니플레어스커트에 실키 블라우스를 차려입은 서은지, 그녀는 침대 이야기를 꺼냈다. 침실에 함께 사는 몰티즈가 거실 계단에서 내려오다 앞다리를 삐끗한 후 밥을 먹을 때 앞으로 고꾸라진다며 허기진 표정을 지었는데, 그 안타까운 표정이 마치 루에게 짓는 표정인 것 같아 루는 내내 불쾌했다. 오별아 – 그녀에게 루는 소개팅 자리에서 피해야 한다는 정치이야기는 꺼내지 않았고 작정하고 해변이 배경인 로맨스 영화에서 남자 주인공들이 바다로 돌아온 이유를 말하기 시작했는데 과연 효과가 있었다. 대화가 무르익자 그녀는 지난여름 다녀왔던 폰디체리 해변에 대해 말했고 인도에 가본 적이 없는 루는 조용히 듣고 있다가 책에서 본 거기 동물원 이야기를 꺼내려다 퍼뜩 입을 다물었다. 말을 꺼냈다가는 그녀는 곧 가장 기억에 남는 해외 여행지를 꼽아봐라 할 것이다. 대답을 했다간 루는 자신의 경제력이 들통 날 테다. 다 마신 커피 잔에 스트로를 꽂고 소리 내어 빨아대다 일어섰다. 지미연 – 그녀는 서른 중반의 나이지만 스무 아홉 돼 보였는데 시청 공무원답게 갈매색 정장을 차려입고 다르질링을 주문했다. 때문에 루는 복고에 대한 주제로 이야기를 풀었으나 정작 그녀는 루가 잘 모르는 걸그룹과 아이돌에 대해 떠들어댔다.
“그 다 해외 기획사와 유투브가 키운 거요. 케이팝이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이 뭔지 아시오? 바로 한글 때문인데- 한글이란 게, 발음기관을 상형하고 획을 첨가하여 모아쓰기를 한 표음문자라는 건 알고 있으시죠? 그런데 이 한글이 말이죠, 사실 이 세상 어떤 소리도 표현이 가능하단 건 몰랐을 겁니다. 소리의 표현을 기껏 일본은 300개, 중국말은 400여개만 할 수 있죠. 맥도날드가 한국에선 ‘맥도날드’지만 일본은 ‘마쿠도나루도’로 맛없게 표기된답니다.”
그녀는 잠자코 듣고 있다가 후설에서 뽑아낸 긴 목청소리로 흘려내 혀끝에 와서 된소리를 마찰시킨, 그러니까 한글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가장 거친 소리를 내뱉었다. “맥또날드건 마쿠도뭐든… 씨팔.”
쌍욕이었다. 그것도 여물 씹는 소 혓바닥 사이로 흐르는 김처럼 아무렇지 않게 내뱉었다. 루가 쳐다보자 그녀는 시선을 얼른 테이블로 돌린 다음 머그잔을 툭 밀치곤 다른 말을 하는 척 했다.
“여기 다르질링은 싸구려 홍차 잎이 너무 많이 섞였어!”
하면서, 토핑이 들어간 수플레를 먹고 싶다 했다가 금세 또 버터 한 조각이 들어간 팬케이크를 먹고 싶다고 했다.
“팬케이크는 반드시 삼각으로요. 아니면, 에비후라이를 곁들인 프렌치토스트요. 맞아요, 토스트! 사실 이게 내가 제일 먹고 싶었던 거에요!”
둘은 서로의 기호에 대해서 구세기 80년대와 현세기 하고도 이 삽 십 년 뒤의 미래전망 간의 엄청난 틈에 빠져 허우적거리다 그녀가 먼저 발을 뺐다. 루는 익사한 얼굴을 한 채 카페를 나와선 등을 돌려 여자와 반대방향으로 내뺐다.
길 없는 등성이를 헤맨 루는 흙 묻은 스니커즈를 그루터기에 문지르고는 자신이 호강시켜줄 여자도 자신을 사랑해줄 여자도 없다는 사실에 짜증내며 춤 아래 손을 넣어 거웃을 긁어댔다. 그새 차교는 송이뿌리에 붙은 흙을 털어 자루에 넣은 다음 산타클로스처럼 울러 메고 있었다. 루는 자신은 여자에게 선물을 주는 인물도 아니며 더구나 스파이더맨이나 슈퍼맨같은 능력자도 아니라고 단념했다.
“까짓것, 결혼 안 하면 되지!”
그러나 싸움이란 것은 피한다고 해서 일어나지 않는 게 아닌 거였다. 시작한 전쟁 또한 맘대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루는 승산 없는 싸움을 하고 있음을 알았다. 혓바닥으로 마른 입술을 쓰윽 훑고는 투항했다.
“버섯을 안 캐는 게 아니라 못 캐는 거지…”
산길은 비탈로 이어졌다. 루는 발에 채이는 잔가지처럼 휘청하다 밟힌 풀처럼 고꾸라졌다.
“그래가지고 하산도 힘들겠다. 그리 걷다간 발목에 담비 이빨 박힌다. 아니, 산척에게 먼저 잡혀가겠군.”
루는 산척이란 말에 뜨끔했다. 산에서 호랑이, 표범 따위의 맹수를 잡고 약초 캐는 일을 업으로 여겨 살아가는 사람이란 것을 도시로 떠난 차교가 다짐처럼 곱씹어 말해주었다.
“산 속에 살면서 사냥하고 약초까지 캔 그들은 활과 사격까지 익혔어. 목궁이나 쇠뇌로 사냥해 구복을 채우며 연명한 이들. 당시 해가 저문 뒤에는 호랑이와 귀신 때문에 사람들은 산에 돌아다니지 않았는데 산척끼리는 서로 마주쳤거든. 짐승들도 산척 냄새를 맡고는 뒤돌아섰다. 그런 산척들이 날짐승 사냥감보다 반가워한 게 송이지.”
루는 호전성이 치솟아 곡괭이를 꼭 쥐었으나 식은땀만 흘러내렸다.
“송이 따는 게 장난이더냐!”
차교는 말은 이렇게 했지만 장난치듯 송이를 쉽게 주워 담았다. 그랬다. 루가 본 회사의 커플들은 모두 장난 같은 성애를 풀어헤치다 유희가 행복의 절정이 되면 돌연 성스러운 낯짝을 하고 청첩장을 던져주었다.
그 새 차교는 또다시 송이 한 송이를 따며 외쳤다.
“이건 1등급!”
차교가 턱없는 금새를 치는 동안 루는 바위틈으로 들어가 뒷주머니에서 꺼낸 밤알을 비틀어 씹었다.
“훑고 갔어도 있을 건 있다고!”
“어디 구하기 싫어 안 구합디까. 괜찮은 여자들은 다른 남자들이 다 낚아채가고 없으니….”
“그럼 넌 아직 내 품에 껴 젖 빨 테냐, 더런 놈아.”
모모의 입에서 튀어 나왔던 말이 귀를 할퀴었다.
“여기 또 한 송이! 새벽 이불 곧추세우는 *대가리네.”
음나무 맞은편에서 들린 차교의 외침 뒤로 아까시 나무 사이에서 버섯을 캐러 온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루가 헐렁한 백팩을 두 어깨로 튀기며 송이를 따지 못한 초초함에 종종걸음을 재촉했을 때 차교는 상투가 국수버섯 솟듯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버섯은 추진 낙엽 아래 돋는 곰팡이 덩어리지. 그게 다른 식물의 뿌리나 줄기에 기생하며 영양분을 뺏어 먹고 산단다. 그러니 우선 좋은 소나무부터 찾는 게 빠를 거다.”
‘남자도 영양분이 가득 찬 능력남이여야 할까!’
루가 헤아리는 사이 차교는 말을 이었다.
“일 송이, 이 능이, 삼 표고, 그 다음이 사 석이!”
“아뇨! 일능이 이표고 삼송이-, 아, 아니 일표고 이능이 삼송이라던가?”
“그거 다 원래는 송이가 맨 앞에 오기 때문에 허풍선이들이 일부러 송이를 뒤로 넣은 거지. 넌 표고를 따 먹겠냐, 송이를 따먹겠냐? 허허, 누구나 최고가 되고 싶어 하잖더냐?”
루는 뚝향나무 아래 퍼질러 앉아 예의 여자라는 족속을 떠올리며 남자의 능력을 따르는 우월남주광성의 종을 생각했다.
“송이 중에서도 말이야, 조선 때는 서울 남산 밑에서 나는 송일 최고로 꼽고 일제 땐 양주(楊州)망월사 것이 좋다지만 내 보기엔 여기 천양 균추산 솔비늘에 박힌 게 최곤가 싶구먼…”
루는 노르께한 낯으로 차교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이 놈의 문은 담작균문, 아문은 주름균아문, 강은 주름균강, 목은 주름버섯목, 송이버섯과에 송이속이다!”
차교가 송이의 문아문강목과속(門亞門綱目科屬)을 읊는 동안 루의 낯빛은 거무께하게 바뀌었다.
‘나의 목과속은 어떤가. 학벌, 재산, 집안, 또한 얼굴은. 이래봬도 신언서판 바르다는 소린 쭉 들어왔었는데.’
그러나 사람들이 자신을 대할 때 하는 말은 직장이 어디이며 결혼은 안 하는지 하는 질문뿐이었다. 시골 사람들은 그 질문에 신통찮은 대답을 듣고 나면 루의 아버지를 잘 안다는 말씀으로 넘어갔다.
아버지는 균추산 자락에서 마을 어른들로 부터 평판이 좋았지만 식구들과는 집안의 가구와 같이 바지런히 제 있을 곳에 있을 뿐 종일 말씀 하나 없이 적막하게 자리를 지켰다. 아버지가 추상처럼 떠오른 건 루도 아버지 생전에 애정의 인사 한 번 건네지 못한 일 때문이었다. 좋아하는 여자를 만날 때면 루가 입이 얼 듯 속을 숨겼다. 차교가 모는 트럭이 마을로 접어 들면서 루는 아버지의 형상을 쉬 지우지 못했다. 루가 눈을 뜨자 아닌 게 아니라 모모의 목소리가 튀어 나왔다.
“애비는 니 장가가는 것도 못보고 가셨다.”
모모의 말투는 그 묘가 왕릉이 되든 묵뫼가 되든 상관 않는다는 말이었다. 아들의 형편에 더 관심 있다는 말이었다. 눈앞에 자식이 빨리 장가를 갔으면 하는 바람뿐이었다. 루도 자신의 아내보다 모모의 며느리를 염두에 두어도 보았다. 그러나 그건 오히려 결혼을 짐으로 여기는 구실이 될 뿐이었다.
결혼에 대한 생각은 그 후 아버지의 묘를 찾을 때면 되살아났다. 묘가 물이 찼을 때 이장을 두고 이견이 갈라졌던 숙부들 때문에 묘를 방치해버려 벌초시기를 놓쳐버렸다. 그 후 분묘를 찾았던 때, 묘 터 주위 소나무는 칡넝쿨에 녹아 흘렀고, 늘어진 거미줄은 고사목을 허옇게 둘렀다. 왜송이 휑하니 둘러싼 묘지에는 잔디 째 떨어져나간 황토 흙덩이가 나뒹굴어 있었다. 산짐승에게 할퀸 당신의 몸은 결혼 못한 아들을 두고 떠난 이승의 여한보다 따가웠으리라. 상석의 문면을 두드렸으나 대답은 없었다. 제위답을 팔려던 백부를 탓할 것도 아니었다. 아까시나무 뿌리에 얽힌 건 루의 죄책감이었다.
묘막이라도 사서 붙여 둘까, 아, 아니 결혼을 하면 이 모든 문제가 해결될까, 되뇌며 당산을 내려올 때 루의 어깨를 들치는 소리,
‘굴총(掘冢)할 놈!’
그 후로 루는 아버지의 묘를 더 이상 찾지 않았다. 산으로 떠돌기 시작한 건 그 때 부터였고 이명인지 환영인지 루의 귀에 대고 떠드는 목소리가 뒤따르기 시작했다.
“왜? 송이에게 겁이라도 질렸냐? 송이는 지나가다 눈에 띄게 하는 거야. 넌 송이를 손에 쥐려하고 있어. 무언가를 잡아 내 손아귀에 넣는다는 게 뭔지 아는지? 그건 위험한 일이지. 풀 뜯는 노루가 날 잡아먹으려 덤빈 일이 있었다니까.”
차교는 당시 마밭을 지나갈 때 논에 들어가 있는 놈과 눈이 마주쳤다고 했다. 지렁이를 파먹는 멧돼지인줄 알았으나 노루가 맞았다. 녀석이 나락을 뜯으며 머리를 숙이고 있을 때 차를 세워 장총에 장전을 했다. 다시 노루와 눈이 마주칠 때를 기다렸다. 노루는 풀을 씹는 입을 멈추고 몇 초간 고개를 빳빳이 세워 이쪽을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다시 노루가 고개를 숙이는 순간 차교가 방아쇠를 당기는 것이다. 고구마 줄기를 다시 뜯을 때 총성이 울렸다. 목을 휘청거린 노루는 일어나 포성의 메아리가 스며든 산으로 내뺐다. 놈은 사흘 뒤에 나타났다. 이번에는 녀석이 먼저 운행 중인 터럭으로 달려들었는데 뿔은 범퍼를 깨트렸고 노루의 네 발은 하늘을 향했다고 하며 차교는 콘솔을 열어 담배를 찾았다.
“그 놈이 맞을 거야. 그 흔한 고라니는 아니었으니.”
차교의 수렵기가 끝난 후 루의 귀에 들린 건 루가 여자를 놓친 것에 대한 모모의 잔소리였다. 루는 대답했다.
“어머니, 나와 눈이 마주치고 다시 만난 여인은 없었어요. 한 번 만난 후 모두 떠나갔지요.”
엊그제 모모는 자정 넘어 들어온 루에게 소개해준 여자에게 사진은 보내줬느냐, 문자말고 통화는 해봤냐고 입술을 뾰족이 세우고 물었다.
“발치에 온몸이라도 던져봤어?”
모모의 말은 지난 주 신부장이 위크 브리핑 때 농삼아 연애 이야기로 한 말과 다름없었다. 눈치만 보고 기회만 보다간 이 무한경쟁 대로 위에서 로드킬 당한 네 발 짐승 꼴이 난단 말이었다. 그러니까 새벽 두시에 루를 집에서 나오게 한 건 여러 일들이 뒤섞여 깔때기로 들어갔지만 모두 한 꼭지로 빠져나온 단 하나의 이유였다. 루는 결혼이란 걸 하지 못했던 그 이유를 더 이상 캐지 않기 위해 백팩을 꺼냈다.
모모가 쿡티비로 보고 있던 드라마를 껐을 때 루는 스니커즈를 신고 현관문을 나왔다. 버섯을 줍는 데 등산화를 꺼낼 필요는 없었다. 아니, 모모에게 산에 또 간 것을 들키기 싫었다. 루는 밤의 집을 벗어났다. 집은 밤이었다. 결혼을 하지 않는 이상 루가 사는 집은 낮의 공간이 될 수 없었다.
서재밑등 바위비탈을 타고 머구재 넘어 주춤바위를 지나 구준봉을 이마 앞에 둔 루는 송이 없는 중대가리나무 아래 퍼질러 앉아 담배를 집었다. 햇볕은 키 작은 아주까리 우듬지 틈새로 스미더니 금세 키 큰 서어나무 수지 끝에 걸렸다. 는개가 여우볕을 쫒아내며 더기를 적실 때 루의 이마는 비 젖은 땀에 끈적거렸다. 날이 밝기 시작하고 너나없이 몰려드는 버섯꾼의 행렬을 보니 땀이 턱 선을 타고 줄줄 흘러내렸다.
“송이도 못 따는 놈들이 뭐하나 제구실을 할 리 없지. *대가리 제대로 쓰지도 못하는 놈들이 무슨 *대가리보다 빳빳한 송이를 움켜쥔다고.”
차교는 루에게 기운을 주려 저 아래 올라오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쏘아 붙였다. 루는 그 소리가 자신에게 하는 것만 같았으나 이내 기운을 차렸다. 루는 송이를 발견하면, 그러니까 눈에 번뜩 들어온 송이를 보고서 갓을 손끝으로 튕긴 후 대강이를 움켜쥐면 결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송이를 따는 일은 점점 골똘해지기 시작했다.
‘송이를 따고야 말테다!’
송이를 따기만 하면 결혼은 염두에 두지 않을 테다. 루는 자신이 바보라서 결혼을 하지 않는 게 아니라 하기 싫어서 안 하는 것이니까. 그러나 송이를 하나도 못 딴다면 무슨 불구처럼 스스로가 바보인 거다.
자웅으로 핀 꽃 사이 두 마리 노란 새가 포르르 지나갔다. 야생 속 건장한 생물들은 암수 붙어 짝짓기를 준비하고 있을 테다.
“서둘러! 다음에 딴다 생각 말고. 송이도 핀 건 값 떨어진다!”
루는 멀찌감치 떨어진 차교 뒤에 대고 말했다.
“나도 여자도 만나고 결혼도 할 거요. 아직은 내 아랫도리가 불끈 솟은 송이란 말이오!”
그러나 루는 자신이 딴 송이 구경을 못하고 있다. 거기다 루의 귀에 바짝 대고 대꾸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엊그제 회사 주보에서 본 내용인지 차교가 한 말인지 장목 틈에서 흘러나온 소린지는 알 수 없었다.
“녹나무가 쇠할 무렵엔 왕성하게 꽃을 피우는 법이고 소나무는 죽기 전에 잔 솔방울을 무겁게 이는 법이다. 네가 여자 생각이 왕성하게 일 땐 네 몸이 이미 쇠했다는 말이다. 일찍이 유방도 형양성에서 굶주려 주검이 되어갈 때 구복을 채우는 것보다 계집 생각이 먼저 났다 하지 않더냐.”
루는 메아리를 떨치려 스틱으로 도리깨질 놀리듯 솔가리를 치며 머다랗게 솟은 정상을 올려다보았다. 맘만 먹으면 곧 닿을 것 같다. 하지만 진즉에 맘을 먹고 실행에 옮기려한 결혼은 멀었다.
해는 커다란 서어나무 수지 끝에 섰다. 갈화가 핀 자리에 녹아 시든 소나무를 비비적거리다 듬성드뭇 솟은 대청가시풀 사이 봉긋한 젖꼭지큰갓버섯을 보았다. 루는 도톰한 여자 젖가슴을 떠올리며 스틱을 던져두고 맨손으로 문질러보았다. 그러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 부아가 치밀어 막대를 팩 던졌다.
“응? 너 아직 한 뿌리도 못 캤냐. 나랑 와서 송이 한 송이도 못 따간 이 없대두?”
루는 어지럽게 널브러진 뚝향나무 가지 아래 바위에 쪼그려 앉아 담배를 씹어 물었다. 집과 회사에서 쌓였던 욕지기가 연기와 함께 풀풀 흘러나왔다. 봄날 소소리 바람을 엊그제 맞았는데 내일이 벌써 백로다. 스트레스는 모지라지지 않았다. 루는 꽁초를 털고 늘펀하게 고쳐 앉았다. 피로감이 나른함으로 바뀌었지만 신경은 곤두섰다. 연하를 헤쳐 힁한 머리를 털고 힁허케 내려가려니 소리는 뚝향나무 잎사귀를 타고 들렸다. 아닌 게 아니라 이번엔 처녀 곡하는 소리였다. 누군가 이걸 고라니 울음소리라고 했던 게 기억나 억지로 짐승소리라 믿었다. 교미하는 소리인가. 하지만 영락없는 여자 목소리였다. 둘러봐도 여자는 없었다.
“내 옆에 여자가 붙어야 저 소리가 달아날까. 나는 결혼에 대해 겁을 먹고 있는 게 아니다!”
다짐을 곱씹으니 환청은 더 커졌다. 소나무 껍질로 송절을 고아 먹을까, 팔선소주를 증류해 마실까. 차교가 알려준 이명에 좋다는 걸 떠올려 봤다. 루는 백팩을 열어 자루에 든 것을 전부 쏟아 붓고 침을 탁 뱉었다. 갈고리를 자루에 넣고 끈을 확 쪼아 당겼다. 빈 백팩을 짊어지고 발걸음을 홱 돌렸다.
‘나머지, 떨거지, 쭉정이에 앉아 있는 내 몰골. 그니까 …병신, 씨팔. 이럴 줄 알았다. 산꼭대기 등산이나 가는 건데…’
미간이 찌그러진 루는 욕을 뱉은 낯을 그대로 환에게 비추며 팩 쏘았다.
“나 내려갈라요!”
차교는 굳이 만류하는 소리는 아니지만 큰 소리로 대꾸했다.
“산 속의 사람들은 밖으로 나가고 싶어 하고, 산 밖의 사람들은 산으로 들어오고 싶어 하지.”
결혼을 한 사람은 후회하고 안 한 사람은 결혼 해보려 한다는 걸 루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루는 더 이상 입을 닫았다. 소개팅에서 만났던 여자들에 대해서, 그리고 모모에 대해서도 입을 닫기로 했다. 내내 말을 걸어온 산의 목소리에 대고도 침묵했다. 그래 자신은 병신이 맞다. 앞으로 결혼 같은 건 꿈도 꾸지 않고 살 테다.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하산 길은 힘들지 않았지만 숨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루는 성긴 조릿대를 정강이로 내치며 가파른 나뭇길을 타고 급히 산을 내려왔다. 한참을 내려왔는데도 뒤에서 산대 휘비는 소리가 났고 바투 차교가 따라 붙어 있었다. 그 때 맞은편 저 아래 갈매나무 틈에서 나뭇길을 따라 올라오는 누군가가 보였다. 루가 걸음을 멈춘 건 앞 뒤 두 사람이 말을 섞은 탓이다.
“오랜 만이네. 버섯 캐러 왔는가?”
“한 송이도 안 보이는데요.”
“올라가봐. 비탈에 쫙 깔렸어.”
사내는 서재밑등으로 올라갔다.
“저 남자가 누군지 아나? 가산 이리에 살았던 남자다.”
마을이름을 헤아리다 루는 무릎이 휘청했다. 나병자들이 사는 촌이었다. 그런데 방금 그 남자는 얼른 보기에 몸이 성했다.
“이리에 참말로 어여쁜 여자가 있었다. 얼굴 하나는 절세미인이었지.”
차교는 걸음을 멈추고 수양목 그루터기에 앉아 송이를 건지는 낯빛으로 말했다.
“그런데 그녀는 손발이 모지라진 문둥병환자였다. 방금 저 자는 그 여자의 남편. 알고 있겠지만 가산은 담배가 쑥쑥 자라나는 곳이다. 해마다 풍년인 담배 재배를 원래 거기 주민들인 문둥병환자들이 하고 있었고 정부 사회 환업 사업으로 재배권까지 가지고 있었지. 나라서 하는 담배공사인가에서 담배 이파리 값도 많이 쳐줬어. 그런데 이웃 마을 사람들은 그 마을의 환자들이 모두 다른 곳으로 떠나길 바랐지. 병든 손으로 담배 잎 만진다고 여론도 안 좋아지고. 그 여자가 마을의 특산물 사업을 통째 넘겨주고 그 돈으로 환자를 모두 섬으로 데려간 후 더 이상 마을에 나병환자가 없어졌단다. 이웃 마을에서 그 여자의 소원을 들어 주기로 했고 그 여자는 담배 가격을 부를 때처럼 거침없이 소원을 말했는데 그것은 결혼을 하고 싶다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 여자처럼 한센병을 앓고 있는 총각은 이웃마을에 없었다.”
“쯧쯧…”
“병든 그 여자와 결혼한 남자가 방금 그 자다. 문둥병 마을을 이전하는 데 함께 일했던 남자는 그녀의 어여쁜 볼우물에 빠져버린 게지. 경증인 여자에게 남편은 잘 해줬지만 아이는 생기지 않았고 남자가 잘 해줄수록 그녀는 밤마다 목 죄어 울었다. 거울을 마주하고서 말이다.”
“옛날에 담배밭 조 도령 애타게 기다리는 아가씨가 넙죽고개서 죽은 이야기보다 더 슬프네.”
차교의 느짓한 말투는 팽팽해졌다.
“그 조도령 이야기야 사랑 타령이고. 그러나 이건 씁쓸하기만 해. 그 여자는 섬으로 떠나기 싫었으나 자신의 몸이 남자의 몸과 달랐단 걸 알았어. 그러나 그걸 인정하지 않았지. 얼마 후 여자는 제사 때 질그릇을 씻은 곳이라고 전해들은 우물 속으로 들어가 버렸고. 누군가가 건져 아까 그 소에 남몰래 던졌더래. 네 부친의 묘가 이장한 이유도 연못에 떠오른 시신 때문이란 말도 난 들어봤네.”
그때부터 연못에 순채가 피고 환자들이 그걸 따 먹으러 오는지도 몰랐다. 루는 조용히 되물었다.
“그 남자는 어떻게 됐수?”
“그 때부터 남자는 도꼬마리와 차가버섯을 캐러 다녔다. 나병에 좋은 것을 차곡차곡 모아 소록도에 가져다준다지. 아내를 돌보았던 심정으로 말이다. 그러니까 저 남자는 명주자루에 개똥처럼 허름해 보이지만 기실 빼어난 명주 고름이다.”
차교의 말을 들은 루가 그간 자신이 처자권속을 부양하는 일을 쓸데없는 일로 여긴 것과 혼인을 처성자옥으로 여긴 것을 뉘우쳤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앞으로는 혼자인 것을 홋홋한 자족으로 착각하지 않겠노라 생각했다. 루의 어깨는 탱자나무 소로를 지나며 파르르 떨렸다. 가시덩굴을 다 빠져나왔을 때 손등을 긁은 가시에 짧은 신음을 내뱉자 메아리가 되돌아왔다.
“그러나 너는 변하지 않았다.”
루는 어디로 가야할지 몰랐다. 정상은 까마득하고 송이도 캐지 못했다. 결혼에 대한 생각이 가시덩굴처럼 머리를 찔러대기 시작했다. 되돌아 산꼭대기로 갈까했으나 산길은 칡덩굴로 얽혔고 귀밑머리로 흐르는 땀이 쭈그려 트려 놓은 뺨에 쇠파리가 또다시 웅웅거렸다. 루는 어쩔 수 없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하산 길을 탔다. 눈에 마지막으로 보이는 소나무 몇 그루가 허묘 옆에 서있었다. 밤밭골을 지나 산모롱이를 돌기만 하면 산줄기가 끝나고 국도가 나온다.
루의 스니커즈가 멈춘 곳은 서 너 그루의 소나무를 지나치면서였다. 루가 그 황망한 하산 길에서 발을 떼지 못한 채 스니커즈를 땅에 척 들러 붙여 놓은 건 이제 곧 하산한다는 낭패감도 아니고 그렇다고 모든 게 끝났다는 후련함도 아니었다.
“어… 어엇!”
루는 눈앞에 서 있는 걸 본 그대로 믿지 못해 떡하니 서서 곧 한 발 한 발 그쪽으로 걸음을 디뎠다.
“허어!”
솔잎에 싸인 도톰한 모양세가 이번에는 틀림없었다. 올랑올랑한 가슴 속 멈춰버린 숨을 억지로 들이켜고 맨 처음 여자의 가슴을 쓸어내렸을 때처럼 두 손은 갓을 애무했다. 루는 발기해오는 다리밋자루를 느꼈다.
“송이 봤다고 좋아하기는…”
솔잎을 비집으며 윙윙거리는 소리는 이어졌다.
“아랫도리도 없이 살고 있는 놈이!”
솔잎을 비집으며 윙윙거리는 소리가 났다. 장수말벌 소리인지 차교가 쏜 목소리인지 알 수 없으나 루는 따가운 귀를 비벼 털며 꽈릿빛으로 총총한 눈자위를 부릅떠 버섯을 노려봤다. 팽팽히 힘줄을 세운 팔로 불끈 송이를 쥐었다. 대강이를 볼에 비벼댄 후 구준봉을 향해 치켜들었다. 산 공기는 비거스렁이로 찹찹했지만 루의 낯짝엔 열이 후끈 차올랐다. 햇살은 주춤바위에서 동남향으로 뻗어 마루를 휘감고 배수 하는 계곡으로 내리쬐었다. 싸한 버섯 향이 햇살에 녹아 산 위로 타올랐다. 정오의 태양빛은 운무를 녹이며 설탕이 과실에 스미어 발효되듯 온 나무와 바위를 끓여 놓았다. 머리를 치켜드니 구준봉이 또렷하게 드러났다. 잘 익은 발효주를 들이켜듯 송이 향을 크게 들이마셨다. 햇빛은 갈참나무 우듬지에 앉았다 금세 밑동까지 비췄다. 순식간에 산이 부풀어 올랐다.
차교는 흙 묻은 들메를 쪼여 맨 후 바위에 깔린 솔잎 위에서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구준봉이 꼭 다이아몬드같이 반짝이군. 근데 저 쪼뼛한 정상 바위에서 보면 여기 능선이 더 멋질걸. 근데 잘 봐. 우리가 두 발을 딛고 섰는 여기서 저기 구준봉을 보는 것은 전혀 다른 풍경을 보고 있는 것 같지? 그런데 말이다 이 곳 균추산 머구재와 저기 구준봉, 두 곳은 같은 데다.”
루가 차교의 말을 들으며 더기 위 봉우리를 쳐다볼 때 차교의 목소리를 덮는 목소리가 들렸다.
“한 쌍의 커플을 보면 그 둘은 서로 같지만 서로가 지니고 있는 다른 풍경에 끌리는 것이야. 그러니까 네가 만날 여자는 너와 같으면서 너와 다른 사람이다. 그렇다면 여자를 만나는 걸 특별하게 생각하지 말아야 해. 사실은 너와 같은 부류거든.”
루는 그동안의 환청이 자기 입에서 맴돈 소리란 걸 알았다. 루는 찌그러진 갑 속에서 꺼낸 담배를 물고 길게 연기를 내뿜었다. 스니커즈를 사냥꾼의 설피처럼 신고 암사슴을 겨누는 산척의 눈으로 밤밭골을 내려갔다.
“이 버섯은 전부 택배 박스에 꽁꽁 묶여 소록도로 간다.”
루는 차교의 자루에 자신이 딴 쌍송이를 넣었다. 루가 스틱을 치며 산을 내려가는 동안 옆구리에 붙은 가막사리가 따갑게 찔러댔다. 흙이 묻은 스니커즈를 밤송이에 문질러 닦고 서둘러 밤밭골을 내려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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