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 권
이 동 실
8월 폭염이 한창이던 날, 선배언니가 전화를 해왔다. 먹을거리를 준비 할 테니 더위도 식힐 겸, 황매산 계곡으로 가자는 것이다. 얼마나 가고 싶었는지 같이 가면 ‘3대’가 복 받을 것이라며 축복의 말까지 덧붙였다. 3대가 복을 받는다는데 어찌 가지 않겠는가.
언니와 함께 황매산 계곡으로 향했다. 언니는 활짝 웃는 얼굴로 삼대가 복 받는 것뿐만 아니라. 복권에 당첨 된 줄 알라며 덤으로 공치사까지 했다.
아, 복권! 잊고 있었던 일 하나가 떠올랐다.
지난해였다. 친구가 출장을 다녀오면서 선물이라며 예쁜 포장지에 싼 편지 같은 걸 건네주었다. 풀어보니 연금복권이었다. 두 장을 구입했다며 당첨이 되면 매달 100만원씩을 달라는 조건을 달았다. 보관하고 있다가 당첨이 되면 내게 나눠 달라고 했더니, 당첨확률이 내가 더 높을 것 같아 주는 것이라 했다. 미련스럽게 살아가는 내가 답답해 보였을까. 한 번도 복권을 사 본적이 없는 나는 웃음으로 답하고 복권에 관해 알아보았다.
연금복권 1등 당첨률은 로또 1등 당첨률 보다 2배나 높다고 한다. 당첨이 되면 20년에 걸쳐 매달 500만원씩을 준다고 하니 노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다. 운명은 내 편일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친구의 고마운 마음을 담아 지갑 속에 소중하게 넣고 다녔다. 그리고는 까맣게 잊고 지냈는데 복권이란 말에 지난 일이 생각난 것이다.
주위사람들은 복권을 사면서 한마디씩 한다. 만일 당첨된다면 자식들 집을 사주고 싶다, 형제들에게도 돈을 나눠주고, 땅을 사서 농장도 만들고 전원주택을 멋지게 지어 여유로운 삶을 즐길 것이다 등.
나도 한동안 연금복권을 보면서 내가 당첨된다면 뭘 할 것인지 생각해 보았다. 먼저 세계여행을 떠나고 싶었다. 서부유럽을 한가롭게 돌아보고 프랑스 사크레괴르대성당에 모셔져있는 성모마리아의 자애로움을 배우고, 파리의 몽마르트 언덕에 올라 초상화를 꼭 그려보고 싶었다.
또 루브르 박물관에서 모나리자의 오묘한 미소도 보고, 상제리제의 화려한 함에 맘껏 취해보리라. 나폴리로 가서 바다의 풍요도 느끼고 나폴리의 밤을 아늑하게 맞이하고 싶다. 스위스 알프스의 영봉에 올라 만년설을 바라보며 꿈꾸는 알프스 소녀도 되어보고 싶고, 음악의 도시 소렌토에서는 세계 각국에서 온 여행객과 거리의 악사들과 어울러 젊음을 만끽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생각해보니 가고 싶은 곳이 정말 많았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행복했던가.
언젠가 신문에서 복권에 당첨된 사람들의 후일담을 읽은 적이 있다. 말로가 좋지 않다는 사실에 놀랐다. 갑자기 감당 못할 만큼 큰돈이 생기자 흥청망청 쓰고, 연이은 투자실패에 가정이 풍비박산 난 경우도 있었다. 그 기사를 읽으며 복권에 당첨 안 된 게 얼마나 다행이던지….
나는 일확천금을 꿈꾸기 보다는, 비록 가끔이지만 기쁜 순간을 맛보며, 소중히 간직 할 줄 아는 삶을 택하련다. 가정과 직장에 충실하며 개미처럼 착실하게 살아가리라. 계곡의 물소리가 무척이나 시원하고 청아했다.
사투리 대회를 회상하며
이 동 실
몇 해 전의 일이다. 합천 문화원에서 ‘사투리’ 대회를 개최한다는 안내문을 보았다. 순간 뇌리를 스치는 게 있었다. 내 고향은 경북영양으로 같은 경상도지만, 사물의 이름과 억양이 합천과 다른 게 더러 있다. 그런 점을 부각시킨다면 재미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시집살이를 하면서 겪었던 일을 소재로 하여 대회출전을 했다.
시어무이끼리 뭉치마 매누리숭보고, 매누리끼리 뭉치마 시어무이 숭본다 카데 예. 보이소 예! 지는 오늘 시어무이 숭보로 나왔습니더. 이런 날이 오마 떠 벌리 뿔라꼬 베루고 있었십니더.
지가 시집온 지 얼마 안 된 새색시 땐데요. 날이 꺼무리 침침한 저녁답에 퇴근을 하고 집으로 막 들어서는데 시어무이가 이천 원을 주시매
“매누라 니 자아 가가 소풀 퍼뜩 사 오이라 ”
“어무이 소풀말이라 예?”
“응 소풀이라 안 카나. 저녁 먹구로 퍼뜩 사온나.”
지는요. 요롱 소리 나게 달리빼가 점빵마다 삐꿈삐꿈 너머다 봤지 예. 근데 말가이 따듬은 쭉쭉 뻣은 대파, 땡기보고 시픈 굵은 당근, 얍시리한 배차, 통통한 징구지들이 나래비로 줄을 서가 목을 빼고 내를 치다봐 싸도, 일편단심으로 소풀만 생각하미 냉정하게 걷어차 삐고 합천 자를 뺑바꾸쳤습니더. 그래도 사오라 카는 소풀은 코빼기도 안 보이는 기라요.
지가 살던 친정 꼴짜는 들에 나가기마하마 천지가 소풀입니더. 그걸 낫으로 쓱쓱 비가 덤숭덤숭 썰고 그 위에 딩기 한박째기 털털 뿌리가 소를 주바 보이소. 누렁이는 쓰그락쓰그락 씹어 묵다가 좋아 싸서 힐긋힐긋 돌아 보미 콧구멍을 킁킁 그리 쌌습니더. 그라마 나도 좋아가 “낼 또 비다 주꾸마. 누렁아 마이 무라” 카던 그 흔한 소풀을, 돈 주고 사오라 카이 도통 이해가 안 되드마 돈을 주고 살라케도 없응께 미치삐겠데 예. 그래도 시어무이가 시킹께로 죽기아이마 까무라치기로 시장을 돌아 댕기 봤지만 말짱 헛 일이었십니더. 또 할무이들한테 물어봉께 벌써 다 팔릿을끼다 카데 예. 할 수 없이 빈손으로 대문을 빼꼼히 열어 봉께 시어무이는 매누리 지다리다 속이 터져 뿟는지 집안은 적막 강산인기라 예. 모기소리가 대가꼬
“어무이 소풀이 없던데 예.”
“야가 머시라캐쌌노. 요즘 거치 지천에 소풀인데 소풀이 없다카만 장사들이 머해가 돈 벌어먹고 사노. 고마댔다 밥이나 무라.”
식구들은 지다리다 밥을 다 무삐고 쪼구한마리가 상위에 앉아 하얀쌀 밥 한공기와 지를 지다린깁니더. 머러카지 말고 밥 주지 말지 머러케 가민서 밥을 무라카고, 또 밥도 안 넘어가게 자꾸 찌꺼리 싸씽께 숟가락이 달달 떨리데 예.
가슴에는 뭔지 모를 감정들이 썪기가 주말 돼야 볼 수 있는 신랑도 보고 접고, 친정 어무이도 보고 접고 참말로 얄궂데예
“여러분 이런 밥 무나 봤십니꺼?”
그래도 새색시가 입을 뿔퉁하게 내가 있으마 안 되것다 시퍼가, 눈물이 쏟아질라 카는 것을 억지로 참고 생긋이 웃으미
“어무이 화단에 깔아줄라꼬 소풀을 사 오라 캤어예?”
“야가 뭣이라 켓쌋노?”
그때까정 침묵하고 앉아 계시던 시할배께서 빙그레 웃으시미
“손부야 정구지는 아나?”
“예 할배요, 그거는 알지 예”
“시방까정 돌아댕기승께 배 고팠을끼다 얼릉 밥이나 무라”
시할배는 저녁이면 피곤하다고 박카스나 까자를 저고리 품에 감추가꼬 시어무이 몰래 주십니더 예. 달달한 꿀물을 타 드리마 숨카 둔 젤리를 손에 지이주곤 오늘도 “욕 봤다” 카시던 다정하고 따뜻한 시할배입니더. 근데 갑자기 투박하고 성난 목소리로 변해 뿌시더니
“애미야 심부름을 시킬라카마 손부가 말을 알아듣게 해가 보내야제. 니가 잘못했네.”
그카이 서슬 퍼런 우리 시어무이가 사달 나버린 소풀 꼬라지도 모른다꼬 찌꺼리 시는데, 그 이바구를 멍하이 듣고 있응께 지는 참말로 기가 막히데예. 우리 시어무이가 말한 소풀은 ‘찌짐 부치먹는 정구지’를 소풀이라고 켔고 지는 ‘소가 먹는 시퍼런 잡초’를 소풀이라고 생각한거지예.
“어무이 그기 우째 소풀이라예? 정구지지예”
“야야 그기 우찌 정구지고? 소풀이제.”
그제서야 식구들은 박장대소를 하며 웃어쌋고, 시아부지는 매누리 힘들게 했따고 시어무이하고 한판 하실 뻔 했십니더. 우리 시아부지도 지를 억수로 이뻐해 주싯습니더. 그카이 지는 쪼깨 위로가 되데 예.
말이 달라도 우째 이래 다른가 싶어가 지는 소풀에 대해 찾아 봤십니더. 그런 소풀을 제주도에서는 새우리, 전라도는 솔, 서울은 부추, 갱상도 말로 정구지 또는 소풀이라 칸다카이. 우리나라가 좁다캐도 말을 들어 보마 무지 너른기라 그지 예. 요고 참 재밌다 싶어가 요새 경상도 방언에 대해 요래조래 알아볼라꼬 관심도 가지게 되었십니더.
여러분!
비오는 날 소풀 한줌 비 가꼬 찌짐 한 넙띠기 척 부치가 막걸리 한잔 쭈욱 마시보이소. 시집살이 맵다캐도 고마 술술 다 넘어가삐는 기라요. 소풀맹크로 고로콤 시퍼렇던 우리 시어무이 서슬도 인자는 누런 소풀로 다 변해뿟고, 미운정 고운정 다 들어 뿟십니더. 인자는 척 카마 삼척이고 툭 카마 배 떨어지는 줄도 알미, 알콩 달콩 살아가는 시어무하고 매누리랍니더.
용기를 내어 출전한 사투리 대회에서 부끄럽게도 최우수상을 받는 기쁨도 맛보았다.
그날의 일을 글로 남김은, 훗날 이렇듯 재밌는 사투리가 있었음을 알아주었음 하는 마음에서다.
새삼 4대가 함께 하던 새댁시절이 그리워진다.
친정어머니
이 동 실
<수필과비평>모임에서 합평회를 가졌다. 그날의 토론 작품은 반숙자 선생의 작품이었다. 나는<가슴으로 오는 소리 >수필을 낭독하게 되었다. 한자 한자 틀릴까봐 정성을 다해 읽어 내려갔다.
선생은 장티푸스를 앓았는데 41도나 되는 고열을 다스리기 위해 약을 복용했다고 한다. 목숨을 건지는 대신 청력을 잃었다. 그 후 삶의 처절한 장면을 어찌 필설로 옮길 수 있으랴.
음향이 모두 떠나 간 선생의 가슴에는 항상 바닷속 같은 적막이 고여 있었다. 하늘하늘 풀잎이 흔들리면 바람이 거기 있는 줄 알고, 미루나무 꼭대기 까치의 꽁지깃이 나풀거리면 그제야 환청 같은 ‘깍깍’ 울음소리가 가슴에 와 닿았다. 듣지 못하는 대신 눈의 직관력은 좋아졌다. 빗소리가 귀로 들리는 것이 아니라 후드득후드득 가슴으로 묻어온다고 했다.
그러나 이어지는 사람들의 수모와 질시를 견딜 수 없어 결국 삶을 포기하기에 이른다. 붉은 포도주에 40알의 수면제를 쏟아 붓고 마시려는 순간-까지를 읽었는데 목이 메여오면서 소리 내어 울고 싶었다. 울음을 삼키며 끝까지 읽어 내려갔다.
선생의 작품세계에 대한 문우들의 토론이 이어졌다. 문우들은 작품에 대한 각자의 의견을 말하고 있었지만 나는 어머니의 얼굴을 떠올렸다. 어머니가 너무 보고 싶었다. 아니, 당신의 심중을 헤아리지 못해 죄송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었던 것이다.
내 발표순서가 되었다. 나는 울음을 꿀꺽 삼키며 고해성사를 하듯 속내를 털어 놓았다.
“작품을 읽으며 엉엉 울고 싶은 걸 억지로 참았어요. 저는 이 수필을 읽으면서 비로소 듣지 못하는 고통을 이해하게 되었답니다. 친정머니께 그동안 얼마나 불효했는지를 알게 되었지요.”
올해 팔십 여섯 되신 어머니는 청각 기능이 80%이상 상실된 상태다. 언제부턴가 말 수도 줄고 그저 우리를 바라만보며 웃으시기만 한다. 그리고 꼭 하실 말만 들릴 듯 말듯 말씀하신다. 어머니와 마주하고 앉을 때면 손을 꼬옥 맞잡고 쓰다듬으며 “야야! 몸은 괜찮나? 지 몸은 지가 알아서 챙겨야 한데이. 아이들 살뜰하게 잘 챙겨주고, 남편은 니가 섬겨야 나가서도 어깨펴고 힘을 내는 법이다 그라이 우짜든동 잘 해라. 어른들에게는 찬물 한 그릇도 마음으로 드리고 군소리 하지 말거래이.” 반복해서 그 말만 하는 어머니 목소리는 점점 작아져 갔다. 나는 그것이 나이 들면 오는 자연스런 현상이라 여겼다. 오남매 출가 다 시켰고. 장손 결혼 하는 것 보는 소원도 이뤘고, 증손자까지 안아보셨으니 복 받은 노인네라 생각했다.
뿐만 아니다. 나는 큰 목소리로 말하는 게 힘들어 적당히 대답하고 그저 마주보는 것이 대화라 생각하고 짧게 말했다. 어머니는 형제들이 웃고 떠드는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다 슬며시 방으로 들어갔다. 자식과의 대화가 단절되기 시작한 것이다. 보청기를 해드린다 했지만 당신이 마다했다. 나이 들어 눈과 귀가 어두워지는 것은, 적당히 보고 적당히 들으며 스스로 자성하는 시간을 가지는 것이라고 내 자신을 정당화 시켰다.
그런데 반숙자 선생의 수필 <가슴으로 오는 소리>를 통해 장애가 주는 아픔과 서러움이 얼마나 큰지를 알게 되었다.
고백하건데 나는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불효여식이다. 한 번도 힘든 내색을 않으셨기에 당연한 줄로만 알았던 어머니의 불편함이 가시처럼 내 몸을 찔렀다.
나는 최면을 걸 듯 마음속으로 다짐을 했다.
‘어머니!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더 잘할게요.’
찬바람이 불기 전 따뜻한 꽃 이불이라도 사서 어머니께 보내드려야겠다.
외롭지 않게 오남매를 안고 포근히 주무시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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