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합천문화원 회원 전통과 사상의 고장 안동에 가다.
불교문화의 정수(精髓)이자 세계기록유산인 팔만대장경을 자랑하는 합천문화원 17개 읍면 문화가족들이 모처럼 유교 전통문화가 활발하게 살아 숨 쉬는 ‘한국 정신문화의 고장 안동’을 2015 합천문화원 국내유적지 답사코스로 선정하여 지난 5월 19일 전정석 원장의 인솔하에 15대의 버스에 분승하여 다녀왔다. 각 읍면별로 출발한 버스들이 아침 8시 20분, 정해진 시간에 맞춰 집결지인 군위 휴게소에 속속 도착하면서 아침부터 자욱하게 끼었던 안개가 마침 맑게 걷히는 순간이었다. 도착하는 관광버스마다 쏟아져 나온 500여명의 회원들이 한동안 만남의 광장을 메우고 서로 반가운 인사를 나누며 재회(再會)하는 모습들이 그야말로 정겨워 보였다.
이처럼 합천문화원이 해마다 주최하는 국내 선진지 순례 문화유적 탐방에 합천의 많은 문화가족들이 깊은 애정을 갖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은 우리나라 각 지역에 산재한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적과 역사현장을 찾아가 체험하고, 회원 상호간에 우의를 다지는 데에 깊은 의미를 느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해마다 회원 수가 늘어나고, 이번 행사에는 여기저기 여성회원들도 눈에 많이 띄었다. 80세가 넘는 고령의 회원들도 많이 보여 참여도가 가장 높은 문화행사임을 느낄 수 있었다.
탈춤의 고장 하회마을
일행이 하회마을 입구에 도착한 시각은 이날 오전 10시경, 버스에서 내려 10여분 정도 걸어가며 바라보는 하회마을은 조선조에는 반상의 차별이 엄격했을 법한데도 주변의 수려한 경관 속에 기와집과 초가집이 한데 어우러져 현재 주민 117세대가 오순도순 사이좋게 살고 있다.
이 마을은 경북 안동시 풍천면을 휘돌아 감고 흐르는 S자형 낙동강 연안에 위치하고 있으며 예부터 익살스러운 해학(諧謔)과 선비들의 풍류(風流)가 전해 내려오고 있는 전통마을이어서 마을 전체가 중요 민속자료 제122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마을의 “하회별신굿탈놀이”는 무형문화유산으로 옛날 지배계층인 양반들의 묵인 속에서 진행되어온 ‘야자타임’이다.
반상제도가 무너지고 만민이 법 앞에 평등한 사회가 된 이후에도 1년 중 하루 날을 정하여 전통적으로 시행하는 이 탈놀이는 옛날의 상민과 하인으로 분장한 사람들이 탈로 얼굴을 가리고 평소 양반으로부터 억눌렸던 감정과 불만을 털어놓는 마당극을 연출한다고 한다. 이 행사는 단순히 그 시절의 양반을 조롱하는 차원을 넘어 천대받고 고달팠던 서민들의 삶의 애환을 해학과 예술로 승화시켰다고 한다. 하회탈은 국보 121호이고 탈놀이는 중요무형문화재 69호다.
하회마을은 또 한편, 선비들이 풍류놀이로 즐겼던 “선유줄불놀이”가 현재까지 전승되고 있다. “안동국제탈춤페스티벌” 기간 중인 9월 마지막 주 토요일과 10월 첫 주 토요일에 두 번씩 재현되고 있다. 이 행사는 하회마을 부용대에서 강 건너 만송정 송림(松林)에 이르는 공중에 동아줄을 걸쳐놓고 뽕나무 뿌리로 만든 숯가루를 넣은 봉지를 줄에 매달고 점화하여 불꽃이 차례대로 타들어가며 허공을 은은하게 밝히는 장관을 보며 음주가무(飮酒歌舞)와 시회(詩會)를 즐기는 행사이다. 이러한 “고품격의 양반문화가 민중의 지지를 받아 보존될 수 있었던 데는 반상(班常) 사이에 화합과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존속될 수 있었다고 한다.
천추에 전해질 ‘징비록(懲毖錄)’
이 마을이 또 유명해진 것은 선조 때 영의정이자 도체찰사로서 임진왜란의 급박한 상황과 실상을 가장 가까이서 목격하고 뼈아픈 전쟁사를 기록한 <징비록>을 남긴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이 벼슬을 마치고 이곳 향리로 내려와 초가삼간에서 청빈하게 살다가 별세한 곳이기 때문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591년(선조 24) 이조판서에 임명된 서애는 수상하기 그지없던 일본의 정정(政情)과 동태를 살피기 위해 임금께 상주하여 통신사를 일본에 파견토록 건의한다. 전례가 없이 우의정에 이조판서를 겸직한 서애는 국사의 중요 부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해낸다. 당시에는 당쟁이 극심할 때여서 통신사로 일본에 갔던 동인 황윤길(黃允吉)과 서인 김성일(金誠一)이 돌아와 서로 상반된 정탐보고를 할 때 임금은 왜국의 침략이 없을 것이라는 김성일의 보고를 안일하게 받아들이고 만다.
징비록을 보면, 임진왜란을 일으킨 왜구(倭寇)가 파죽지세(破竹之勢)로 조선 조정을 향해 몰려올 때, 류성룡이 위기를 피하려는 선조 임금을 강경하게 만류하였다는 대목이 나온다. 그는 선조가 도성을 버리고 도주하려 할 때는 도성사수론(都城死守論)을, 평양을 버리려고 할 때는 평양결전론(平壤決戰論)을 주장하고, 요동으로 도주하려 할 때는 “대가(大駕:임금이 탄 어가)가 국토 밖으로 한 걸음만 떠나면 조선은 우리 땅이 아니다”라고 저지하며 올곧은 선비의 기개(氣槪)를 보였다.
그는 또 선조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으로 하여금 거북선을 만들게 하여 임진왜란을 사실상 조선의 승리로 이끈 뛰어난 정세판단과 전략전술(戰略戰術)에 능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7년 임진왜란을 겪으며, 백성들은 도탄에 빠지고 국토는 황폐화 되었다. 임금과 조정의 무사안일한 대응이 부른 참극이었다.
시경(詩經)에 ‘징전비후(懲前毖後)’라는 글귀가 있다.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여 미래를 대비한다는 뜻인데, 여기에서 취하여 책의 이름으로 삼았다. 전쟁의 비참상, 무너지던 나라의 처참한 상태, 그런 비극을 다시는 겪지 않게 하기 위해 서애는 나라의 재건을 위한 비전을 제시했으니 그게 ‘징비록’이다. 이제는 영어로까지 번역되어 관심 있는 사람은 누구나 읽을 수 있다. 그 책 하나만으로도 서애는 영원한 역사적 인물이 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서애는 그만한 공훈을 세우고도 당파싸움으로 실각하게 된다. 류성룡은 임란 때 속오군(束伍軍)을 두어 양반들에게도 병역의 의무를 지우게 하고 천민들도 종군(從軍)을 조건으로 면천(免賤)해주며 나아가 공을 세우면 벼슬까지 주는 신분타파책을 과감히 실시했다. 양반 사대부들은 자신들의 신분적 특권을 침해하는 이런 류성룡의 정책에 격렬하게 반발했다. 여기에 류성룡의 실각을 둘러싼 의문의 해답이 있다. 류성룡의 이런 전시 정책에 큰 불만을 갖고 있던 양반 사대부들이 선조와 공모해 류성룡을 실각시킨 것이다. 류성룡이 실각된 선조 31년(1598년)11월 19일은 공교롭게도 그가 천거한 이순신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날이다. 이 마지막 해전은 안전한 철수를 요청하는 일본군에게 이순신이 “이 원수들은 결코 놓아 보낼 수 없다”고 거절해 벌어진 전투다. 의병장 조경남(趙慶男)의 「난중잡록」은 이 전투에서 “이순신은 친히 북채를 들고 판갑선의 선두에서 적을 추격했다고 전한다. 이순신은 류성룡의 실각이 곧 자신에게 닥칠 미래임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융복(戎服)을 입은 이순신이 판갑선의 선두에서 북채를 들고 싸웠다는 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행위였기에 자살설이 끊이지 않았다.
류성룡의 진가를 제대로 알아본 사람은 정조 임금이다. 그는 『홍제전서((弘濟全書)』「일득록(日得錄)」‘인물조’에서 이렇게 말했다. “저 헐뜯는 사람들을 류성룡이 처한 시대에 처하게 하고 류성룡이 맡았던 일을 행하게 한다면 그런 무리 백명이 있어도 어찌 감히 류성룡이 했던 일의 만분의 일이라도 감당했겠는가, 대저 그는 젊었을 때부터 이미 우뚝 거인(巨人)의 뜻이 있었다.
국가 존망의 위기 앞에서 이 땅에 수백년 지속되어온 반상제도를 과감히 혁파하고 국난극복에 주도적인 역할을 해낸 류성룡, 결국 그 때문에 불행한 종말을 맞이하게 되지만, 그의 결단은 애민정신(愛民精神)과 우국충정(憂國衷情)의 발로(發露) 아니고 무엇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충효당에서 멀지 않은 낙동강가에 서애의 서원인 병산서원(屛山書院)이 있다. 서애의 후학들이 서애의 학문을 기리고 후학들을 길러내기 위한 교육의 도장으로 세웠다. 요즘도 수시로 학회가 열리고 학술토론이 벌어지는 장소가 바로 그곳이다. 서애의 학문과 사상, 우국충정의 뜨거운 혼이 서린 곳이어서 학자들이 끊임없이 모여들고 있다.
하회마을 오찬과 간고등어
충효당과 이름난 하회마을의 유적들을 둘러보고 점심시간이 되어 일행 중 일부는 ‘T식당’에서 이 지역의 스페셜인 간고등어와 안동찜닭으로 오찬을 즐겼다. 짭조름한 간고등어도 일미(逸味)였지만 매콤달콤한 안동찜닭도 유명세만큼 맛깔 나는 음식이었다.
이처럼 맛이 좋은 안동간고등어는 동해안 영덕항에서 잡힌 고등어를 소금에 절여 내륙에 위치한 안동으로 가져와 먹던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예전에 보부상(褓負商)들이 영덕 강구항에서 안동까지 고등어를 운반하는 데에 이틀 정도의 시간이 걸렸기 때문에 쉽게 부패하는 고등어를 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안동에서 반나절 거리인 임동 챗거리 장터에서 소금을 쳤다고 한다. 이때 적당하게 숙성해진 고등어에 소금 간을 치면 가장 맛있는 간고등어가 된다고 한다. 이 소금을 친 고등어를 안동까지 가져와 팔면서 안동간고등어의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
한국국학진흥원
하회마을 T식당에서 오찬이 끝난 후 일행이 버스에 탑승해 30분 정도 이동해서 도착한 한국국학진흥원은 안동호를 조망해 볼 수 있는 경북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산 기슭에 자리하고 있었다. 2006년 6월 세워진 것으로, 국내 유일의 우리 전통 유교 문화를 접할 수 있는 공간이다. 절의(節義)를 생명보다 중시했던 선비들의 올 곧은 삶과 정신세계를 조명하고 우리 문화와 삶의 뿌리를 확인할 수 있는 전시관을 가지고 있다. 유교는 삼국시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불교, 도교와 함께 우리의 정신세계를 지배해온 이념이자 학문이며 문화이다.
유교문화박물관은 국내 유일의 유교전문 박물관으로 상설전시공간, 유교과학관, 재지사림(在地士林)의 생활공간, 유교문화기록관 등으로 나누어 유학자들의 사회활동을 보여주는 공간도 있고 유교와 수양, 사람되기 공간, 퇴계의 활인심방(活人心方) 등 유교와 미래사회의 가능성을 성찰해보는 공간으로 펼쳐진다.
입구 벽면에 ‘사람의 길, 대동의 꿈’이라는 글이 이러한 이미지를 잘 나타내고 있다.
유교는 개인의 ‘수기(修己 : 개인의 수양을 통한 도덕적 인격의 완성)와 안인(安人 :사회적 실천)을 통해서 인격을 완성하고 대동(大同)의 이상 사회의 실현을 추구하는 실천학문이며 사상이다. 수기(修己) 즉, 성인이 되는 첫 걸음은 소학(小學)이다. 소학의 방법은 물뿌려 청소하고 손님을 응접하며 집안에 들어와서는 부모님께 효도하고, 밖에 나아가서는 남에게 공경함으로써 모든 행동이 도리에 어긋남이 없도록 하는 것이다. 이런 것들을 먼저 실천하고 여력이 있으면, 그때야 비로소 일반적인 학문에 힘쓴다. 따라서 유교의 첫 교육과정은 소학을 배우고 실천하는 것이다.
한국· 중국· 일본 세 나라의 유교는 기본적으로 이와 같은 이상과 목표를 함께 하였지만, 다른 한편으로 각국의 고유한 역사적 전통과 문화적 토양에 따라 자기 나름의 독자적인 형태로 발전해 나갔다.
그렇다면 유교를 통해서 꿈꾸는 대동세계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대동(大同)은 유학자들이 꿈꾸는 이상 사회의 상징이다. 이 대동의 이상은 『예기(禮記』「예운(禮運」편에 다음과 같은 그 모습이 묘사되고 있다.
위대한 유교의 이념이 행해지던 시대에는 정의로운 세상이 구현되었다. 어진 사람을 지도자로 뽑고 능력 있는 사람에게 관직을 맡겼으며, 신의를 가르치고 화목을 닦았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자기의 어버이만을 어버이로 섬기지 않았고, 자기의 자식만을 자식으로 여기지 않았다. 노인은 그 여생을 편안하게 마칠 수 있었고, 젊은이는 그 능력을 발휘할 일을 가졌으며, 어린 아이도 건전하게 자라날 여건을 보장 받았고, 의지할 곳 없는 과부와 홀아비, 고아, 병든 자도 모두 부양을 받을 수 있었다. 남자에게는 남자의 직분이 있었고, 여자에게는 여자의 직분이 있어서 근심거리가 없었다.
재화가 땅에 헛되이 버려지는 것을 싫어했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자기 것으로 쌓아두려고 하지도 않았다. 스스로 일하는 것을 싫어하지 않았으며, 자기 한 몸만을 위해서 힘을 쓰지도 않았다. 이런 까닭에 음모를 꾸미는 일이 생기지 않았고, 훔치거나 헤치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집집마다 대문이 있어도 걸어 잠글 필요가 없었다. 이런 세상을 ‘대동’이라 한다.
우리나라는 삼국시대부터 한자와 더불어 유교를 받아들이기 시작하여 고려시대까지는 주로 국가 경영을 위한 정치적 원리로 수용되다가, 조선의 건국과 함께 성리학이 새로운 국가의 통치 이념으로 채택되면서 사회 전반을 지배하는 사상으로 자리 잡았다. 그 결과 조선은 자타가 공인하는 명실상부한 유교 국가로 굳건히 자리 잡았다. 특히 심성론 분야에서는 최고 수준의 학술 역량을 자랑할 만큼 수준 높은 학문적 성취를 이루었다. 이와 같은 조선 유학의 저력은 도덕적 절의와 인격을 목숨보다도 더 소중하게 여기는 ‘선비 정신’을 낳으면서 특유의 지식인 문화를 꽃피웠다.
도산서원
안동 시내에서 도산서원 가는 길은 동북쪽 청량산을 향해 뻗은 35번 국도를 따라 옛날에는 예안길이라고 하는 지금의 퇴계로를 따라 차로 계속 달리면 푸른 수림 사이로 S자형 청량한 그늘이 드리우진 고갯길이 나오는데, 굽어진 길을 몇 굽이 돌고돌아 안막재에 오르면 길 오른 쪽 저 편에 안동호가 보이면서 도산서원으로 들어가는 진입로가 나온다.
지금에야 도산서원 바로 문턱까지 관광버스가 드나들 만한 반듯한 길이 닦여 있지만, 예전에는 낙동강 곁으로 난 조붓한 길을 통해 선비들이 도산서원을 드나들었을 것이다. 지금은 안동댐 담수에 잠겨 옛 길을 찾을 길이 없지만 18세기에 겸재 정선이 그린 도산서원도를 보면 넉넉한 낙동강 물이 서원 앞을 유유히 흘러갔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도산서원은 남명 조식 선생과 함께 영남 사림을 이끈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해 1557(선조 8)년에 지은 도산서당과 함께 퇴계가 세상을 떠난 후 제자들이 스승의 학덕을 숭모하여 1574년(선조 7)에 건립된 서원으로 퇴계(1501~1570) 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후손과 제자들이 해마다 향사하며 후학을 양성해 온 곳이다.
총 12채의 건물 중 농운정사는 학생들의 기숙사이고, 시습재는 학생들이 공부하는 방이다. 지숙료(止宿寮)는 잠자는 방이며, 마루는 관란헌(觀瀾軒)이다.
퇴계 이황은 도산서당 조영(造營)을 통해 성리학 본연의 정신에 충실하려 했다. 이러한 정신은 도산서원 건축으로 나타났다. 서원은 산수가 좋은 곳에 위치하여 심신의 건강과 지식 수양의 근원지가 되어야 한다는 신념인 것이다. 그래서 도산서원은 강당이 사당 앞에 위치하는 전학후묘(前學後廟)로 규범적인 강학공간을 따른 것이다.
퇴계의 학문과 사상
교과서에서 전하는 퇴계는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의 성리학자로 되어 있지만, 이 이론은 주자의 대표적인 이론이다. 그렇다면 퇴계 사상의 아이덴티(Identy)는 무엇인가? 성균관대학교 동양철학과의 안병주(安炳周)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북송의 유학자들이 존재론의 핵심을 이기론(理氣論)과 성정론(性情論)으로 펼친 것을 주자(朱子 : 朱熹)가 집대성하여 만든 것이 성리학(性理學)이다.
이를테면 정이천(程伊川)은 마음의 문제에서 심즉성(心卽性)이고 성즉리(性卽理)라고 말하면서도 심즉리(心卽理)라고 하지 못했다는 것인데, 이 말은 마음이 곧 본성이고, 본성이 곧 근본 이치라면 당연히 마음도 곧 근본 이치가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마음이 선(善)으로도 나타나고, 악(惡)으로도 나타나기 때문에 마음이 곧 이(理)라고 말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이론을 보완한 것이 퇴계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과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이다. 이렇게 해서 퇴계는 유학 이론보완의 역사에 동참하게 되었고, 여기에서 동양사상사(東洋思想史)에 퇴계의 위치를 확고하게 했다는 것이다.
퇴계가 말한 사단칠정론이란 인성론에서 인간의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네 가지 마음씨, 즉 인의예지(仁義禮智)와 인간의 일곱 가지 감정, 즉 희노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慾)이 어떻게 일어나느냐를 설명한 것인데, 퇴계는 주자 이래의 학설에 따라 사단(四端)은 이(理)가 발한 것이고, 칠정(七情)은 기(氣)가 발(發)한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이 여기에 문제를 제기하여 장장 8년간의 서한을 주고받으며 이루어진 논쟁 끝에 퇴계는 자기 설을 수정하여 “사단은 이(理)가 발현(發現)하여 기(氣)가 거기에 따르는 것이요(理發氣隨之:이발기수지), 칠정(七情)은 기(氣)가 발현(發現)하고 이(理)가 거기에 올라타는 것, 즉 기발이승지(氣發理乘之)라고 결론지었다.
이것이 퇴계의 아이덴티, 즉 퇴계 학문의 정체성(正體性)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사단과 칠정에 관한 기대승과의 서한 토론에서 퇴계가 26세나 아래인 기대승의 사려(思慮)깊은 이론을 받아들여 자신의 학설을 정정했다는 것은 중국의 선유(先儒)들에게서는 찾아 볼 수 없었던 위대한 점이라는 것이다.
1926년 중국의 북경(北京)상덕여자대학(尙德女子大學)에서는 퇴계의『성학십도』를 목판으로 복각(復刻)해 병풍을 만들어서 널리 반포(頒布)하면서 대표적인 사상가 량치차오(梁啓超)는 찬시(贊詩)를 써서 그 제1연에서 “아득하셔라 이부자(李夫子: 이퇴계를 말함) 님이시여”라며 거리낌 없이 그를 부자(夫子 :성인)라고 호칭하였다.
퇴계의 학덕은 그의 생시(生時)와 한·중, 한·일 역사에서 크게 선양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는 세계에 그 명성이 널리 확산되어지고 있다. 1970년 서울에 퇴계학연구원이 창립되었고, 1972년대 경북대학교와 일본 동경대학, 대만 국립사범대학에 퇴계학연구회가 설립되었고, 근래에는 미국의 워싱턴·뉴욕·하와이와 독일 함부르크 및 본에 퇴계학연구회가 발족되었다. 1976년 국제퇴계학회가 창설된 이래로 거의 해마다 한국·일본·대만·미국·독일·홍콩 등지에서 학술회의를 개최하여, 세계 각국의 이 방면의 석학들이 회동해 주제 논문을 발표하며 진지한 토론을 거듭해 오다가, 2014년 7월 1일에는 세계 석학들이 21세기 인문가치포럼을 안동에서 열었다.
오늘날 우리들은 물질만능과 개인주의 등 지구촌이 앓고 있는 병폐를 치유하기 위해서 ‘인문가치’와 ‘정신문화’의 함양이 절실히 요청되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가장 주목 받는 새로운 가치도 ‘인문’, ‘정신’, ‘문화’이다.
이제 안동은 세계가 인정하고 주목하는 인문 전통의 고장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 중심에는 단연 퇴계 이황이 있다. 그의 가르침과 생활 철학이 21세기를 치유할 새로운 정신문화 패러다임으로 가능성을 인정받고 있다. '유교`와 유학'으로 대표되는 퇴계의 철학은 인간 본성을 되찾고 사람과 사회, 사람과 자연이 상생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을 제시해주고 있다.
합천문화원 주최 2015 국내유적 답사를 통해서 우리는 선비들의 삶과 정신세계, 그리고 퇴계의 학문과 사상을 접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가졌다. 이를 기획하고 시행한 합천문화원에 심심한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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