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시킨·차이콥스키의 고향 상트 페테르부르크를 가다
70대 중반을 넘은 나이에 해외 장거리 여행을 떠난다는 것이 무리인줄 알면서도 메르스가 창궐하던 지난 6월 2일 오후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를 향해 인천공항에서 대한항공 여객기편으로 출국하였다. 여객기를 타고 비행하는 시간이 9시간 15분, 오랜 시간 벨트에 몸을 묶고, 불편을 감수하며 날아갈 수 있었던 것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는 러시아의 역사와 문화, 예술의 모든 것들을 보며 중세기 유럽의 인문적 사색과 비주얼(Visual)의 감동을 느낄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특히 여기에서는 하얀 밤의 추억, 백야(白夜)의 신비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근래에는 한국인을 비롯한 러시아에 여행하는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빼놓지 않고 방문한다고 한다.
러시아 하면 연상되는 것이 있다. 1917년 제정러시아를 무너뜨리고 볼세비키 10월혁명으로 세계 최초로 공산주의 국가를 세운나라, 조선인들을 연해주에서 타슈켄트로 강제 이주시키고, 1950년 김일성에게 탱크와 전투기를 지원하여 6,25 한국전쟁을 배후에서 사주한 스탈린이 떠올라 부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2008년 우리나라와 전략적 협력동반자 관계를 구축하여 새로운 한-러 협력의 시대를 열어가고 있는 우호적인 나라가 되었다.
어느 나라, 어느 마을에 가도 세상의 주인은 나무다. 높게 서서 하늘을 이고 사람들을 내려다본다. 여기 내가 잠시 머무르고 있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콘스탄티노프스키 26번가는 크레스톱스키 지하철역이 5분 거리에 있고, 주변에는 쭉쭉 뻗은 자작나무 그늘과 노란 민들레가 지천에 깔려있는 아름다운 정원 사이를 네바 강 검푸른 물결이 유유히 흐르는 쾌적한 강가 마을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강어귀에 발달된 면적 45.6㎢에 이르는 커다란 삼각주에 발달된 항구로, 예로부터 발트해(海) 제일의 무역항을 이루었다. 네바강은 전유로(全流路)가 항행이 가능할 뿐 아니라 백해(白海)∼발트해를 연결하고, 모스크바~볼가강(江) 유역의 도시, 카스피해∼흑해를 잇는 중요한 수상교통로 구실을 한다.
라도가호에서 발원한 검푸른 네바강 너울물이 밀물처럼 흘러들어와 시가지를 적시는 아름다운 도시, 유서 깊은 이곳은 65개의 샛강이 흐르고 500개가 넘는 다리를 놓아 운하의 도시로 만들어졌다. 이태리의 베네치아처럼 아치형 다리 밑을 유람선들이 쉴새 없이 드나들고 있다. 거기에서는 사공이 배를 젓지만 여기서는 엔진을 단 동력선(動力船)이 운항되고 있다.
자연과 경관이 아름다운 곳에서는 심미적(審美的)인 감성(感性)을 가진 예술인들이 많이 태어난다고 한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푸쉬킨, 차이코프스키 같은 유명한 예술가들의 고향이며 6~8월에는 사람들이 거리에 보이지 않는 백야의 적막이 신비로운 문화예술의 도시다.
이곳은 밤 시간이 가장 짧을 때는 30분에서 많을 때는 두 세 시간 밖에 안 되고, 낮과 밤 경계점에서 저녁노을이 금방 여명(黎明)으로 바뀌며 해가 떠있는 시간이 계속되는 ‘백야(白夜)’ 현상이 있는 곳이다. 백야는 ‘북방의 베니스’라 불리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상징이 되었고, 이 도시를 유럽의 대도시들과 구별시키는 신비스러운 관광자원이 되었다.
대낮 같이 밝은 밤시간, 나는 아름다운 이 도시 백야(白夜)의 적막이 흐르는 네바 강변을 라일락 꽃 향기를 맡으며, 몽유병 환자처럼 여기 저기 떠돌아 다녔다. 이 아름다운 도시를 두 번 다시 찾아 올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세운 주인공은 바로 표트르 대제였다. 표트르 대제1682-1725)가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을 자신의 상징적 모델로 삼고 이 도시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곳의 신화에는 ‘물과 돌’이 등장하는데 도시가 세워지기 전 물이 있었던 늪지대에서 표트르 대제는 돌로 건축을 시작했다고 한다.
여기에도 파라오의 권위를 상징하는 피라밋과 진시황의 그것을 상징하는 만리장성에서처럼 이 도시를 건설하기 위해 늪지대에 돌을 깎아 세우고 건물을 쌓으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농노(農奴)들과 죄수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을 것이다. 역사는 그 소중한 인명의 대량 희생에 대한 표트르의 대죄를 묻기보다는 그들의 희생 위에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세운 그의 업적만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가 세운 상트페테부르크는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의 축소판이자 제정러시아 황제들의 황금 휴양지 겨울궁전과 각종 보물로 치장한 엘카테리나 궁전(호박관), 세계 3대 박물관의 하나인 에르미타쥬 박물관(여름궁전)과 백조의 호수나 신데렐라 같은 발레 공연을 하는 마린스키 극장, 무려 40년에 걸쳐 건립된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규모를 자랑하는 ‘상트 이삭 대성당’과 알렉산드르 2세가 피를 흘리면서 숨을 거둔 피의 사원, ‘그리스도 부활 성당’ 등 러시아의 300년 정치, 종교, 역사와 전통문화예술이 살아 숨 쉬는 곳이다. 이곳들을 모두 섭렵하려면 적어도 10일 정도가 소요된다.
현대차 상트페테르부르크 생산법인을 가다
러시아에서 세 번째 일정이 계속되는 날이다. 6월 5일 이곳에 있는 현대자동차 생산공장에서 보내준 택시를 타고 시내에서 북서쪽으로 25km 떨어진 카멘카 지역 이곳 현대자동차 생산법인 공장을 방문했다. 이날은 이 공장에서 일하는 근로자들의 가족들이 초청되어 자동차 생산라인을 견학하는 날이어서 사위가 이곳에서 근무하는 연고로 나도 함께 공장 견학을 하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사무실 입구에 붉은 색의 소형 승용차 ‘쏠라리스’(국내명 액센트) 한 대가 밤바 위에 새겨진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정몽구 현대자동차 회장의 세련된 사인을 자랑하며 스마트한 자태로 전시되어 있었다.
현대자동차 생산공장이 지난 2010년 9월 완공돼 이듬해 1월부터 본격생산에 들어간지 2년 7개월 만에 러시아 진출 외국 자동차 업체 가운데 가장 빨리 연간 50만대 생산기록을 세우고, 현재는 1일 920대를 생산해 금년 5월에도 생산 및 판매 수량 1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하고 있다. 공장은 현지에 진출한 외국 자동차 업체로는 처음으로 '프레스-차체용접-도장-의장 조립' 등의 전 공정을 하나의 공장에서 수행하는 완성차 공장(Full-cycle plant)' 설비를 갖췄다. 11개 부품 협력사도 동반 진출해 현대차를 지원하고 있다.
이 공장 K총무과장은 “프레스부터 완성차 생산까지 한 곳에서 이뤄지기 때문에 현지인들의 고용창출효과가 뛰어나다”며 “이 같은 효과 때문에 상트페테르부르크 주정부(州政府)뿐만 아니라 러시아 정부에서도 모범적인 해외기업 진출사례로 꼽히고 있다”고 강조하며 진열창에 진열된 푸틴 대통령이 수여한 상패를 가리켰다.
이 공장에서는 현재 현대자동차 생산 라인에서 2천100여명, 협력 업체에서 4천900여명 등 총 7천여 명의 러시아인들이 일하고 있어서 한-러 협력의 최일선에서 국익을 위해 현지 법인을 세운 정몽구 회장과 묵묵히 생산현장에서 생산공정을 일일이 감시감독하고 근무하며 한-러간 유대를 공고히 하는 가운데 외화를 벌어들이는 우리나라 현지 관리자 및 근로자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다.
유라시아 시대의 비전
‘상트페테르부르크’ 현대자동차 생산공장에 근무하는 근로자들뿐만 아니라 러시아에 진출한 한국기업에서 일하는 러시아의 모든 근로자들은 자신들의 직장을 갖게 해준 한국 기업과 한국인에 대해서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 같다. 이들이 받는 한 달 근로자들의 급료는 우리 돈 평균 150만원이지만 러시아 근로자들의 평균 소득을 훨씬 상회하는 수준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근로자들이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노사분규를 일으킬 불만이 전혀 없다고 한다. 러시아에 진출한 기업들은 현대자동차를 포함해서 2006년부터 LG, 삼성, 대우조선 해양, 롯데, 한국야쿠르트, 오리온, KT&G, LG 하우시스, STX 그룹의 조선소, 현대중공업 등 우리나라 대기업들이 러시아에 진출하여 대러 투자와 기업 활동이 활성화되고 있다. 이에 수반하여 늪에 빠졌던 러시아의 경제가 활성화되고 있다.
해외로 진출한 우리나라 기업은 러시아뿐만 아니다. 유라시아 역내 국가들과 경제협력을 통해 교역의 외연을 확장함으로써 경제활성화와 일자리 창출의 기반을 만들어가고 있고, 이를 위한 유라시아와의 협력이 주요 과제로 부상하고 있다. 동북아 끝자락에 위치한 한국이 대륙으로 뻗어 나가는 과제는 유라시아 국가들과의 경제협력을 위한 대륙간 철도망 구성이다. 이것이 박근혜 정부가 구상하는 유라시아의 ‘이니셔티브’이다.
우리는 150년 전 중국과 일본이 개방정책으로 변화하고 있을 때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통한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지금 제2의 개항이라고 할 수 있는 세계 여러 나라들과의 자유무역협정(FTA)과 IT 분야에서 세계를 선도하고 있고, 유라시아의 역내외 국가들과도 자유무역협정과 유라시아를 관통하는 대륙간 철도망을 추진하고 있어서 이러한 역사적인 프로젝트가 실현된다면 21세기 우리의 비전인 유라시아 시대를 우리가 주도적으로 열어갈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한다.
한반도가 통일이 이루어지는 날, 부산을 출발, 북한-러시아-중국-중앙아시아-유럽을 관통하는 21세기 실크로드 특급열차를 타고 여유롭게 여행하면서 백야의 적막이 조용히 흐르는 예술과 문화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다시 한 번 방문할 수 있는 기회가 내 생애에 한 번 더 도래하기를 간절히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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