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칠십 고희(古稀)를 맞으며
40여 년 전 1967년의 한국 남자의 평균 연령이 59.7세였다. 따라서 1960년대는 한국의 남자는 예순을 넘기는 것이 흔하지 않아 61세가 되는 사람의 회갑이 오늘날의 고희보다 더 큰 경사로 축복 받았다. 그때는 마을 노인들이 회갑을 맞으면, 마당에 차일막(遮日幕)을 치고 멍석도 깔고 사람들을 모아, 때로는 장구 가락에 춤을 추고 흥을 돋우면서 회갑잔치를 열어 마을 전체가 축제의 마당이 되었다. 이날 마을 사람들은 회갑을 맞은 사람의 장수를 축복하고, 건강한 여생을 보내도록 기원하며, 음식을 나누어 먹으면서, 그날의 의미를 새기는데, 이러한 풍습은 우리나라 전래의 아름다운 전통관습의 하나였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의술의 발달로 사람의 수명이 부쩍 늘면서 회갑의 의미는 점점 사라지고 오히려 고희연을 큰 경사로 삼고 있어서 풍속도가 많이 변했음을 알 수 있다.
나는 슬하에 1남 3녀를 두었다. 젊은 시절 그 애들을 키우며 직장생활에서 앞만 보고 바쁘게 살다보니 60대를 지나 어느덧 70대의 생애에 접어들었다.
그동안 자식들이 성장하여 결혼하고 가정들을 꾸려, 민들레 솜털이 때가되면 바람타고 둥지를 떠나가듯, 자식들이 모두 떠난 후, 지금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다. 손자, 손녀들이 보고 싶어 눈에 아른거릴 때는 몇 번이고 망설이다 1년에 한 두 번쯤은 노부부 두 사람이 나들이를 겸해서 자식들이 사는 곳으로 찾아 나선다. 반대로 명절 때나 우리 두 사람의 생일 때는 어김 없이 자식들이 그들의 짝과 손자· 손녀를 앞세우고 우리가 살고 있는 시골집을 찾아온다. 그 애들을 만날 때는 늘 반갑고 좋아, 나는 사람이 늙어도 이런 낙으로 사는가 보다 하는 마음을 항상 느끼며 산다. 자식들이 되돌아갈 때는 자기들 집에 도착하였다는 전화를 받고 나서야 비로소 안심을 하게 되는 조바심이 있다. 노령의 나이에는 누구나 느끼는 어쩔 수없는 노파심(老婆心)이다. 그러면서도 때때로 자식, 손자들을 만나보고 또 열심히 농사를 지어 곡식과 양념거리를 자식들에게 보낼 때는 부모로서의 흐뭇한 마음과 보람을 느낀다. 그런데 이번에는 자식들뿐만 아니라 지난 5월 22일 서울 경운동에서 만났던 제자들에게도 마늘과 양파를 조금씩 포장해서 보내주었다. 이 일이 서울에 사는 다른 제자들에게 알려져 큰 파장을 일으켰다. 1982년도에 졸업한 Y고 내가 담임을 맡은 3학년 3반 딸들 몇 명이 반창회 모임을 조직하여 한달에 한번씩 만난다.지난 6월달 이 모임 도중에 민희가 나와 통화하던 전화를 인숙이에게 건내주어 받으면서 인숙이는 노골적으로 나에게 섭섭한 마음을 토로했다.
“섭섭해요 선생님, 왜 나만 빼 놓으셨어요?”
불혹의 나이를 훨씬 넘어 50을 바라보는 나이인데도 여고 시절 때처럼 시기심이 발동한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별로 다름이 없어 보였다.
“그래 미안하게 됐어, 바로 포장해서 너도 좀 보내줄게,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고 내가 보내주는 것 잘 먹고 여름 한철 건강하게 잘 지내라” 인숙이는 그말에 좀 멋쩍은 듯
“아닌데요 선생님, 제가 농담을 했어요, 정말이에요”
나는 그 전화를 받고 내가 일찍이 교직에 발을 들여놓았던 것이 일생일대의 큰 선택이었으며, 그 선택이 이렇게 큰 보람으로 다가올줄 몰랐다. 우리 노부부는 웃으며 그것을 받지 못한 다른 제자들 몫까지 추가로 세 개의 포장을 더 만들어 즐거운 마음으로 그것들을 똑 같이 담아 보내주면서, 그 제자들도 모두 내 자식이려니 생각하니 나처럼 행복한 사람이 이 세상에 또 없을 것이라고 느껴졌다. 그런 행복도 있지만, 나는 나의 노후 생활에 이 보다 더 진한 행복이 또 있다. 가끔 화상통화로 나날이 달라지게 자라는 네살난 손주의 모습을 보면서 대화를 나누는 즐거움이다. 이제 막 말을 배우는 손주 녀석이 헨드폰 영상에 나타나 “할아버지 할머니 사랑해요”를 앙증스럽게 말해줄 때는 우리 노부부에게 이보다 더 큰 즐거움이 없다. 그 손주가 자라서 결혼하고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을 볼 수 없음을 뻔히 알면서도 그 손주가 그렇게 귀엽고 예쁠 수가 없다. 자식 어릴 때보다 지금의 손자에게 더 애틋한 정을 느끼는 것은 우리 한국 할아버지의 공통된 마음일 것이다.
그러는 사이 흐르는 세월을 비켜 갈 수 없어서 나는 금년 5월 고희를 맞았다. “옛날부터 칠십을 사는 인생은 드물다”라는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를 사람들이 쓰기 쉽도록 줄여, 흔히 고희(古稀)라는 말을 쓰고 있는데, 지난 5월 27일이 나의 고희날일이었다.
나는 회갑 때처럼 고희도 아침에 미역국이나 한 그릇 먹고 그냥 알게 모르게 지나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자식들이 이제 나이가 들어 자식된 도리를 다 하려고 그런지 애비의 생각을 들어주지 않았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3년 전부터 매월 적금을 하며, 내 고희를 준비했다는 말을 듣고, 애들의 효심이 갸륵해 어쩔 수 없이 자식들의 제안을 수용하기로 했다.
직장생활을 하는 아이들의 편의를 위해, 생일을 며칠 앞둔 지난 5월 23일 토요일 오후 여섯 시, 인근 어느 한적한 시골마을 식당에 자리를 마련하고, 고희기념 연회를 벌였다. 나의 친가와 처가의 식구들만 60여 명 모인 단출한 모임이었지만, 나는 여태껏 살아오면서 그날만큼 행복한 날은 없었다.
둘째 사위가 이마에 흰띠를 두르고 마이크를 잡고 이날 밤 행사진행을 맡았는데, 나에게 마이크를 넘겨, 먼저 인사를 하라고 했다. 자식들 공부시켜 모두 직장 생활에, 짝들을 다 맞추어 놓았고, 그리고 손자 하나와 외손자 둘, 외손녀 셋 등 여섯 손자 손녀들을 보았으니,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고 생각한 그 순간, 나는 너무 행복했다. 마이크를 잡은 나는 원근(遠近)을 마다하지 않고 찾아와 나의 고희를 축복해주시는 양가 친척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먼저 전하고, 지나간 내 생애를 잠시 뒤돌아 보았다.
그때 나의 머리에 떠오른 것은 그 자리에 나와 함께 나란히 앉은 나의 아내였다. 나에게 젊은 날 시집와서 .그동안 시부모 잘 봉양하며, 아들 딸 낳아 잘 기르고, 남편 내조는 물론이고, 시동생들 뒷바라지까지도 잘 하면서 한평생 내가족을 위해 헌신적으로 살아온 사람, 나의 아내에 대한 뜨거운 연민의 정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그동안의 아내의 노고를 거리낌 없이 그 자리에서 격려해주었다.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말도 했다. 그 순간 내빈들이 뜨거운 박수를 보내줬다. 그런다음 또 나는 나의 아들, 딸들이 바르게 잘 자라주어서 평소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고맙다는 말도 스스럼 없이 표현했다. 아내와 자식들을 자랑하거나 고맙다고 하면 팔불출(모자란 사람)이 된다는 우리 사회의 통념을 깨고, 이날만은 내가 좀 모자라는 사람이 되어도 좋다는 마음으로, 일가친척들이 모인 자리에서 평소의 나의 소회(所懷)를 유감없이 털어 놓았던 것이다.
이어서 장남이 준비한 70년 전 내가 태어나 자라나던 시대배경인 태평양전쟁과 1950년 발발한 6, 25전쟁의 참상을 동영상으로 모은 장면 , 그리고 젊은 시절 아내에게 장가올 때 찍었던 나의 모습, 꿈 많던 젊은 시절의 나의 인생 역정의 갖가지 모습들과 가족 그리고 형제자매들이 평소 내게 하고 싶었던 말들을 내게 전하는 장면과 그리고 아이들이 자라면서 찍었던 엘범사진들을 편집하여, 파워포인트 영상스크린에 상영하였다. 나의 인생역정을 단축시킨 이 영상물에 사람들은 어느 누구 할 것 없이 몰입하여 시선들을 집중시켰다.
그다음 순서는 큰 딸이 작사 작곡한 “할아버지 오래 사세요”라는 노래를 피아노 반주와 함께 손녀들이 부르며 춤을 출 때는 엊그제 병아리 같은 애들이 벌써 이 만큼 자라 이 할아버지를 이처럼 즐겁게 해주고 있으니 살아온 세월이 그저 무상한 것만은 아니었음을 느끼게 했다. 외손녀들의 춤과 노래가 끝나자, 이어서 노래방 순서가 되었다. 그 자리에 모인 사람 모두가 일어나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노래방 가요 리듬에 맞춰 열정적으로 노래를 부르며 즐거운 시간을 이어갔다. 우리는 그날 밤 자정이 가까울 무렵이 돼서야 잠자리로 모두 자리를 떠나면서, 간소했지만 화려했던 나의 고희 기념연회는 그 막을 내렸다.
자식들이 3년을 준비하여 지성으로 마련한 나의 고희연, 그날 나는 누구보다도 행복했고 자식 키운 보람을 느꼈다. 그러나 내 자식들이 내게 하듯, 나는 내 부모님에게 그렇게 해드리지 못했다.
나의 부모님 회갑은 그 당시 시골 여염집에서 모두 그렇게 하듯, 나도 우리집 마당에 잔칫상을 벌이고 떡과 단술, 묵, 돼지고기와 막걸리 등을 차려놓고 마을 사람들을 초청하여 초라한 회갑연을 열었다. 그때 농촌사람들의 식생활은 너무 열악하여 부농이 아니고는 쌀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던 시대였다. 보리밥이 일상이었고, 고기는 명절 때가 아니면 거의 먹지 못하였는데, 어쩌다 시장 날 부모님이 큰 마음 먹고 깔치나 고등어를 짚에 묶어 사들고 오실 때는 그날은 오랜만에 온 식구들이 호식하는 날이었다. 그때 부모님이 살았던 시대는 농경사회로 의식주 해결조차 어려웠던 시대였고,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시대는 첨단 정보화 시대로서, 삶의 질에서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크게 발전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러함에도 나는 부모님 살아 계실 때 정성들여 효도 못하고, 회갑연도 고희연도 잘 차려드리지 못한 점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큰 아쉬움으로 남아 그 죄스러움을 마음에서 지울 수가 없다.
희극배우였던 김희갑 선생이 가끔 그의 생전에 “불효자는 웁니다”를 가요무대에서 처량하게 부를 때는 나는 베개 깃을 아내 모르게 적셨고, 가수 태진아가 한서린 “사모곡(思母曲)”을 부를 때는 그날 밤 잠을 청하는 잔잔한 나의 심금을 여지없이 흔들어 놓아 잠을 설치게 한다.
한시외전(韓詩外傳)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樹欲靜而 風不止(수욕정이 풍부지), 子欲養而 親不待(자욕양이 친부대)
나무는 고요해지고 싶으나 바람이 그치지 아니하고, 자식이 부모에게 효도하고자 하나 그 부모가 기다려주지 않는다.
이 구절은 부모님 생전에 정성들여 효도하지 못하고 돌아가신 후 후회하는 지금의 내심정을 그대로 묘사한 글이다.
나는 이런 아쉬움을 달래는 마음으로 십년 전부터 지역봉사활동단체에 가입하여 불우한 이웃이나 독거노인들을 찾아다니며 옷가지와 음식을 배달하면서, 내 부모님에게 하지 못했던 효도를 대신한다고 ‘자원봉사’라는 활동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내 나이 칠순에 접어들면서 젊은이들에게 나의 역할을 맡기고 2008년 연말을 기해 봉사현장에서 떠났다.
비록 단체봉사활동을 떠났지만, 나를 필요로 하는 이웃이 있다면 나는 앞으로 언제 어디든지 혼자라도 그곳을 찾아갈 것이다. 비록 고희를 지낸 노령의 삶을 살고 있지만, 마음은 여전히 청년처럼 왕성한 활동을 하고 싶다.
그리고 나는 한결같이 나를 위해주는 아내와 자식들이 있고, 귀여운 손자와 손녀들이 있어, 나의 노후가 이처럼 더 이상 행복할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나는 살아 있는 날까지 아내와 함께 그리고 이웃과 더불어 살다가, 나의 사랑하는 가족과 그리고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교분을 맺고 정을 나누었던 모든 사람들과 그 인연이 다하는 날, 이 아름다운 세상 소풍왔다가 돌아간 천상병이 그렇게 떠났듯이, 나도 아무런 미련 없이 바람처럼 이 세상을 홀연히 떠날 것이다.
합천문인들의 제주도 나들이
설봉호 선상의 하룻밤
해마다 6월이 오면 합천문인들이 짐을 꾸려 문화유적이 있는 국내 명승고적을 찾아 떠나지만 이번만은 모처럼 내륙을 벗어나 현해탄을 건너 제주도를 향하는 문학기행이었다. 한해 농가소득의 효자작목인 양파와 마늘을 한창 수확하고 있는 바쁜 철인데도 이번 제주도 문학기행을 위해 수박공주 윤경선 회원은 며칠 동안의 일을 밤을 새우면서까지 한꺼번에 해치우고 남편과 함께 달려왔다.
우리 일행이 6월 5일 오후 3시에 가까운 시각 합천문인협회사무실 앞을 출발하여 부산연안여객선터미날에 도착한 것은 오후 6시가 조금 지나서였다. 이번 문학기행은 1980년대에 합천경찰서 관하 지역파출소에서 경찰공무원으로 근무하면서 그 당시 합천문인들과 뜻을 규합하여 합천문인협회를 선도적으로 결성한 김원욱 시인의 초청으로 이루어지는 나들이라 더 의미가 있고 회원 모두의 기대도 그만큼 컸다. 그는 평소 진급에 관심이 없고 자기 직무에 충실하면서 시 쓰기를 좋아하는 사람으로 정평이 나있고, 그래서 합천문인협회 회원들 간에 자주 화제에 오르던 인물이었기 때문에 언제가 한번 만나보고 싶었던 사람이다.
그는 제주도에서도 작은 섬마을만을 외골수로 찾아다니며 섬주민을 지키는 파수꾼이 되기를 자청한다고 하며, 현재 그의 근무처와 직책은 서귀포경찰서 관하의 비양도 파출소장이다. 우리가 그를 찾아 낯선 섬 비양도를 찾아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들이 탑승한 배는 동양고속선박회사 소속인 현대설봉호였다. 부부동반 다섯 커플과 싱글을 포함하여 18명인 우리 일행은 교실 같은 2035호실을 배정 받았다. 주위의 시선과 관심을 차단할 수 있는 독립된 우리들만의 영역이었다. 우리들은 여기서 여장을 풀고 먼저 준비해온 케익에 촛불을 켜고, 최병태 회원의 새로 맞은 신부 이미애 씨의 생일을 축하하는 노래를 부르며 즐거운 한 때를 보냈다.
설봉호에는 초저녁 잠들지 못한 선객들이 복도에 나와 멀리 가물거리는 등대와 고기잡이 배들이 밝혀놓은 아름다운 바다위의 불야성을 지켜보고 있었고, 선실 안에는 희미한 전등불 밑에 카드놀이와 고스톱으로 시간을 메우는 군상들도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자정이 지나면서 순한 양처럼 베개 하나에 아무런 불평 없이 종횡으로 무질서하게 누워 잠을 청하는 사람들도 보였다. 잠도 자지 않고 놀이도 하지 않은 군상은 할 일 없이 선상을 여기저기 몽유병 환자처럼 배회하는 사람도 많았고, 뱃머리 한쪽에 모여 가곡과 동요를 부르고 그 리듬에 맞춰 춤을 추며 선상무도회를 연 무리도 있었다. 합천문인협회 회원들이다. 주변에서 이를 흘깃흘깃 지켜보는 사람들의 입가에 미소가 담긴다. 그저 순수하고 우스꽝스럽게 보이는 그들의 행태가 방관인(傍觀人)들의 눈에 싫지 않은 모습으로 비친 것이다. 그 사이 연안여객선 설봉호는 내부의 온갖 행태와 무질서를 포용하고 정해진 시간과 항로에 따라 뿌연 운무를 가르며 질서 있는 항해를 계속하고 있었다.
새벽 5시쯤 선창에 여명이 트이고 곧 이어 5시 50분경 설봉호가 제주항에 도착하였다는 선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우리 일행이 제주항구를 빠져나오자마자 기다리고 있던 김원욱 시인을 만나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나로서는 그가 초면이지만, 오랜만에 해후한 동료들의 틈에 끼여 나도 그와 간단한 눈인사를 하였다. 그는 건장한 체구에다 호남형의 얼굴에 강한 의지와 성실성이 비쳐 보이는 전형적인 경찰상을 지닌 사람으로 보였다.
그와 간단히 인사를 끝낸 후, 대기중이던 버스에 탑승하여 5분정도 달려서 제주시 건입동에 있는 금아빌라 하층에 있는 해동이네 식당에 들어가 아침식사를 하면서 손회장님의 소개로 그와 내가 정식으로 인사를 하였다.
제주아트랜드에서
제주섬 전체가 자연상태 그대로 공원일 만큼 제주도는 생태적으로 빼어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는 섬이다. 그 섬안 성읍민속마을 부근 한적한 들판 한쪽에 “세계 최고의 예술촌”으로 꾸민 제주아트랜드에 우리가 도착한 것은 해동이네 식당 앞을 출발하여 새로 난 97번 도로를 따라 표선방향으로 달린지 40여분이 지난 오전 8시 가까울 무렵이었다. 제주아트랜드는 글자 그대로 제주의 예술촌이라는 의미이지만, 이곳은 국내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대자연 속의 문화예술 공간을 간직한 곳이다. 여기에는 초대형 미술관인 우산(愚山)미술관과 분재공원 그리고 여러 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는 대형 아트갤러리가 있고 반달곰을 만나볼 수 있는 반달공원도 있었다.
나는 개인 미술관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라고 하는 우산미술관에서 대가들의 작품을 둘러보았다. 솔직히 나는 미술에 대한 식견은 전혀 없다. 그러나 사람은 누구나 아름다운 대자연과 그것들을 묘사한 미술작품을 자주 대하고 감상함으로서 자신도 모르게 심미적(審美的) 감성을 기를 수 있다는 것쯤은 어렴풋이 알고 있다. 우산미술관을 둘러보고 나오는 출구에서 운보 김기창 화백의 코너에 들려 그의 어록이 실린 접시 한 세트를 샀다. 김기창 화백 그는 소리를 들을 수 없는 장인이었다. 평소 아내와 아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친구들과의 대화도 그리고 모든 사람들과의 교감도 단절된 상태에서 그가 화가로서 대성을 이룬 것은 귀가 있으나 들을 수 없고, 입이 있으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뼈저린 고통과 고독을 극복하며 자기 내부의 잃어버린 것에 대한 대상(代償)을 얻기 위해 피나는 작품활동을 하여 자기실현을 이룬 것이라 생각한다. 따라서 그가 국내 최고의 서양미술의 독보적인 존재가 된 것은 들리지 않는 귀가 모티브로 작용한 것이 아닐까 싶다.
두모악(Dumoak) 김영갑 갤러리에서
제주아트랜드 답사를 마치고 다음 코스를 향해 우리 일행을 태운 버스가 민속마을을 지나 서귀포시 성산읍에 있는 두모악김영갑 갤러리에 도착한 것은 오전 9시가 조금 지난 시각이었다. 김영갑의 세세한 손길을 거쳐 만들어진 작품들이 빽빽이 쌓여 있는 돌무덤과 수림이 어우러진 정원을 지나 두모악김영갑갤러리라는 현판이 걸려있는 그의 작품전시실에 들어섰다.
전시실 안에는 김영갑의 모든 것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의 작품을 통해 그는 사진작가로서의 재능뿐만 아니고 조각과 시에도 일가견을 가진 종합 예술인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어쩌다 그가 독신으로 살았는지는 몰라도 서울 속의 고독을 탈피해 전국을 돌며 사진작가 로 활동을 하다가 1982년 우연히 제주도에 밀려와 그 아름다움에 빠져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루게릭병으로 숨을 거둘 때까지 근 20년 세월을 제주도의 들녘과 오름을 드나들며 이곳의 아름다움을 찍고 이것들을 포토샾(Photoshop)으로 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러나 그의 제주도 생활에도 많은 애환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섬에 내가 있었네”라는 자서전적 그의 저서를 읽고 알게 된 사실이지만, 반평생을 넘어 30년 동안 심혈을 기울여 만든 그의 사진 작품들이 서울 올림픽으로 들떠 있던 1988년 여름 어느 날 제주도에 집중적으로 퍼부었던 폭우로 인해 한순간에 망가져버렸다. 그때 그가 얼마나 애통했는지 짐작이 간다. 그러나 그는 상처를 딛고 오뚜기 처럼 또 일어섰다. 이뿐이 아니다. 밥벌이가 되지 않은 일에 매달려 영혼을 바쳤던 사람인 그에게 인근 주민들의 냉대와 비웃음도 이만저만이 아니었고, 카메라를 들고 산으로 바다로 다니는 그의 초라한 행색이 간첩으로 오인되어 경찰에 붙들려가 취조를 받은 것도 한 두 번이 아니었으나 그는 여기에 초연하였다. 그리고 그는 우직하게 한 길을 걸었다.
김영갑은 자신이 불치의 병인 루게릭 병에 걸려 죽음을 앞둔 것을 알고 그의 작품을 펼쳐 전시할 수 있는 공간을 구상하다가 2003년 여기에 갤러리를 만들었다. 갤러리 그 안에 자신의 생명과 바꾼 주옥같은 작품들을 남기고, 2005년 그가 그토록 사랑한 제주 땅 한라산의 옛 이름을 딴 두모악 갤러리 뒷마당 감나무 밑에 한줌 재로 돌아갔다.
20여 년 동안 사진에만 몰입하며 내가 발견한 것은 '이어도'다. 제주사람들의 의식 저편에 존재하는 이어도를 나는 보았다. 제주 사람들이 꿈꾸었던 유토피아를 나는 온몸으로 느꼈다. 호흡 곤란으로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있을 때 나는 이어도를 만나곤 한다.
시작이 혼자였으니 끝도 혼자다.
울음으로 시작된 세상, 웃음으로 끝내기 위해 하나에 몰입했다.
흙으로 돌아가, 나무가 되고 풀이 되고 꽃 피우고 열매 맺기를 소망했다.
대지의 흙은 아름다운 세상을 더 눈부시게 만드는 생명의 기운이다.
흙으로 돌아갈 줄을 아는 생명은 자기 몫의 삶에 열심이다.
만 가지 생명이 씨줄로 날줄로 어우러진 세상은 참으로 아름답다.
천국보다 아름다운 세상에 살면서도
사람들은 또 다른 이어도를 꿈꾸며 살아갈 것이다.
<그 섬에 내가 있었네> - 김영갑 지음 - 중에서 발췌.
김 영갑 그는 주변의 비웃음과 냉대를 받으면서도 제주도를 지극히 사랑하며, 제주인과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그곳의 아름다움을 알리기 위해 거기에 정착하였다. 그리고 그는 루게릭병으로 고통 속에 죽어가면서도 지극한 사랑의 손을 멈추지 않고, 셔터를 누를 수 있을 때까지 그 아름다운 제주 산천을 카메라에 담아, 그것들을 다시 포토샾 걸작품으로 세상에 남겨 놓았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제주인에게 일탈자(逸脫者)도 아니요, 이방인도 아니다. 제주인의 가장 추앙받는 예술인으로, 그리고 가장 성실한 이웃으로 진정한 제주인이 되어, 그곳에 묻혀 있다. 그가 만들어 놓은 두모악김영갑겔러리 뒷마당 감나무 밑에 영원한 안식처를 마련하고, 거기서 그는 지금 편히 쉬고 있는 것이다.
성산일출봉에서
우리 일행이 두모악김영갑갤러리에서 방향을 동쪽으로 돌려 30분쯤 달려서 도착한 곳이 성산 일출봉 공원 입구였다. 성산 일출봉(천연기념물 제402호)은 제주도의 동쪽 끝 남제주군 성산반도에 바다가 쓴 왕관처럼 우뚝 솟은 커다란 바위산이다. 해발 182m 머리 한 가운데 3만여 평의 큰 분지를 가지고 있는 이 봉우리는 바다 속에서 수중폭발하여 굳어진 화산체라고 C기사가 버스 안에서 마이크로 안내해줬다.
내가 학창시절부터 자주 불렀던 장일남 작곡의 “기다리는 마음”의 가곡이 만들어진 곳이다.
화산폭발로 형성된 천연요새, 자연 석성 아래로 깎아지른 바위절벽, 짙푸른 바다 물빛이 성산일출봉을 감싸고돌아 자연의 신비를 더 느끼게 해주는 곳, 여기에 한맺힌 민족의 분단역사와 성산주민의 비애가 서려있다. 성산일출봉은 제주 4·3사건 때 민병대에 끌려온 성산 마을 주민들이 앞 사람이 총에 맞아 죽는 것을 보고 이어서 차례가 되면 자기도 총에 맞아 죽어간 바로 그곳이다. 죽은 시신을 처리하기 가장 적절한 장소이다. 분화구에나 바다에 시신을 밀어 넣으면 매장하는 수고를 덜게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제주 4,3 사건은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5, 10총선을 저지하기 위해 1948년 4월 3일을 기해서 제주도 전역에 걸쳐 북한의 사주를 받은 남조선노동당 계열의 좌익분자들이 공무원과 경찰을 살해하고 그들의 집을 불태우며 폭동을 일으키자 경찰과 뭍에서 진군한 당시 국군 경비대 병력들이 이들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빚어진 대규모 학살사건이다.
지금의 제주도 아이들은 그때 그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성산일출봉 그 바다에서 멱을 감고 자기 조상의 피를 마신 해변에서 논다. 이곳 주민들이 전해오는 구전(口傳)에 따르면 성산 마을의 한 여인이 경찰의 손에 남편이 끌려가는 것을 봤다고 한다. 그녀는 남편의 시신이라도 찾으려고 일출봉을 오르고, 또 그 해안을 헤매며 이리저리 찾아 다녔지만, 보이는 것은 암벽이요, 들리는 것은 바닷가의 물새소리 뿐이었다. 그녀는 남편의 시신을 찾지 못한 채 몇 달을 헤매고 다녔다. 남편을 잃고 혼자 사는 여인의 삶은 차라리 죽음만 못하였지만, 아이를 키우기 위해 그녀는 그 후 고달픈 삶을 이어갔다. 남편을 끌고간 경찰이 어느 날 그녀에게 빠져 청혼을 했다. 얄궂은 운명의 여인은 그 청혼을 받아들였다. 경찰은 그가 처형했던 남자의 아이를 키우고 자기 아이처럼 사랑했다. 그러나 이 아이가 자라서 성인이 되었을 때, 자기 생부를 죽인 그 의부를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드라마나 영화에서 볼 수 있는 픽션이 아닌 실재하는 이야기이다.
감동적이면서 잔인한 역사, 슬프면서도 삶의 욕구로 가득 찬, 이 아이러니한 삶이 한맺힌 제주인의 모습이다.
한국 가곡계의 대표적인 작곡가 장일남 선생이 그의 생전에 주옥같은 가곡 2편을 작곡하고 2006년 9월에 세상을 떠났는데, 비목과 기다리는 마음이다. 그는 이 두 가곡에서 한국인의 한(恨)의 정서를 음악에 접목시켜 우리로 하여금 이곡을 애잔하게 부르도록 작곡하였다.
나는 널판 계단을 밟으며 성산주민의 한 서린 일출봉 암벽 밑을 내려갔다. 짙푸른 거센 파도가 애꿎은 바위를 때리고 부서지며, 붉은 피보다 더 진한 하얀 포말을 토하며 신음하고 있는 그곳에서, 나는 제주 4,3사건 그때, 천길 벼랑에 내몰려 총맞고 떨어져 죽었던 원혼들의 한 맺힌 절규를 들었다. 그리고 피를 토해내는 원혼들의 끝나지 않은 시위(示威)도 보았다.
이념의 대립과 분단의 민족역사가 만든 제주 4,3사건의 비참한 주검의 원혼들이 이제는 편안하게 영면하기를 마음속으로 기원하면서 나는 다시 널판 계단을 올라 기다리는 버스에 탑승하였다.
드라마 올인의 촬영장 ‘섭지코지’를 들리다.
성산일출봉에서 차를 몰고 남쪽으로 1132번 국도를 타고 10여분 달려와 도착한 곳이 버선코 모양으로 툭 튀어나온 ‘섭지코지’이다. 섭지코지는 신양리 해수욕장과 연결되어 있었다. 해안 여기저기에 물질을 하는 해녀들이 보였다. 제주도 해녀는 ‘좀녀’라고도 부르며 상군, 중군, 하군으로 분류하는데, 상군은 젊은 해녀로서 수심 30m까지, 중군해녀는 중년의 해녀로서 수심 15m 정도, 하군해녀는 70세 이상의 노인으로서 수심 10m 이내를 잠수하며 물질한다고 한다. 이들 해녀들은 자기 딸에게 만은 자기들의 가업을 전수하지 않으려고 뭍으로 딸을 시집보내기도 하고 공부시켜 다른 직업을 갖도록 하여 자기 대(代)에서 해녀를 끝내려고 작심들을 하고 있다고 한다. 제주도 민속의 하나인 해녀들의 모습들이 머지않아 제주 해안에서도 살아질 날이 온다고 생각하니 아쉬운 마음이 앞섰다.
안내원의 설명을 들은 다음, 섭지코지로 들어가는 입구에 “좌정 고맙수”라는 환영 현판을 보면서 우리는 드라마 “올인(All in)”에 나오는 수녀원을 향해 영화 폭풍우 언덕처럼 펼쳐진 오름길을 밟았다. 이곳의 유채꽃은 제주도 어떤 지역보다 화려하고 그 아름다움이 해안의 풍광과 어우러져 미(美)의 극치를 이룬다고 한다. 해안 저쪽 언덕에 제주도의 조랑말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모습이 평화로워 보였다.
섭지코지는 바다를 향해 툭 튀어나온 자루처럼 생긴 지형을 일컫는데, 끈으로 묶은 것처럼 목이 좁고 지명도 협지(狹地: 좁은 땅)라는 뜻의 ‘섭지’와 곶(串)이라는 뜻의 ‘코지’가 합해진 제주 방언이라고 한다. 이 언덕 한쪽에 올인 로케시에 카지노로 설치한 조립건물도 있었다는데 비바람에 날려가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주상절리 [柱狀節理]를 보며
이날 낮 정오를 약간 넘긴 시각에 일행은 합천사람 K씨가 운영한다는 서귀포시 포선면에 소재한 돈돼지흑돼지 식당에 들려서 제주도 민속촌산 흑돼지불고기와 제주도 근해에서 잡은 깔치를 진미로 차린 점심 식사를 하였다. 식사를 끝낸 후 우리 일행은 자연이 빚은 최고의 걸작품인 주상절리공원을 찾았다.
젋은 시절부터 여러 번의 제주도 방문이 있었지만, 나는 이번에 처음으로 이곳 “주상절리” 공원을 찾아 온 것이다. 한마디로 신이 아니면 저렇게 아름다운 예술작품을 조각해 낼 수 없다고 판단할 정도로 그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나는 한동안 그 신묘한 자태를 카메라에 담기에 분주했다. 탄성이 저절로 나온다. 이렇게 아름다운 신의 예술품을 나만 모르고 여기에 이렇게 오래 방기(放棄)해 두었던가 싶다.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의 유명한 조각가 “미칼렌젤로”나 “도나텔로”도 지금 지하에서 살아나 제주도 이곳에 와서 저 아름다움의 극치인 ‘주상절리’를 본다면 나처럼 그들도 저것을 절묘하게 빚어낸 대자연의 섭리와 그것을 창조한 신의 초능력에 한없는 경외감(敬畏感 : Sense of Reverence)을 느끼리라고 믿는다.
주상절리는 단면의 모양이 삼각형에서 육각형에 이르기까지 긴 기둥 모양을 이루는 절리를 말한다. 이것들은 화산암암맥이나 용암 등의 암석에서 보인다는데, 제주도 해안에는 기둥 모양의 주상절리가 절벽을 이루고 있으며, 유명한 정방폭포와 천지연폭포가 이런 지형에서 형성된 폭포라고 한다.
비양도로 건너가서
그날 오후 우리는 천지연폭포를 둘러보고 오후 4시를 조금 지나 한림항에 도착하여 비양도 도선을 위한 준비로 30여분 대합실 앞에 대기하면서 서귀포문인협회 회원들과 조우하였다. 서귀포문인협회 오승철회장은 이날 문학의 밤 행사를 비양도에서 함께 열기 위해 그동안 애써 행사준비를 했다고 하며, 우리일행과의 만남을 크게 환영하고 있었다. 제주도문인협회 회원 중에서는 한국문인의 거목이신 한기팔 시인과 이상범 시인 등이 포진되어 있었다. 우리는 선착장 대기실에서 그들과 약식인사를 나누었다.
우리가 탑승한 페리호는 거친 엔진 소음과 시커면 디젤 배기가스를 바다에 여운으로 남기며 오후 5시 20분, 한림항 출발 14분 만에 비양도 선착장에 도착하였다.
짐을 챙겨 선착장에서 하선한 우리일행은 김원욱 시인이 미리 정해 놓은 숙소인 아람민박집에 오후 5시 30분경 도착하여 여장을 풀었다. 저녁식사가 준비될 때까지 나와 내 아내, 이동배 시인 내외가 함께 비양도 섬주변 저녁 산책에 나섰다. 제주도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제주올레를 걸었다. 놀멍 쉬멍 걸으멍-제주 올레 길은 새로 만들어진 길은 아니다. 여기저기 숨은 길을 찾고 끊어진 것을 잇고 사라진 길은 되살렸을 뿐, 싱그러운 주변의 푸른 바다를 보면서, 향긋한 들꽃 향기에 취하며 귓전을 스치는 파도소리를 벗삼아 길을 걷는 것이 ‘제주 올레’라고 한다. 우리들은 이 올레를 밟으며, 비양도의 원시림과 그 속살을 훔쳐보았다. 제주에는 여기저기 봉긋봉긋 솟아 있는 오름이 많다. 한 가운데 달항아리 오름인 한라산을 빙둘러 올망졸망 어머니의 젖무덤 같은 오름들이 펼쳐져 있다. 비양도의 오름도 이 중에 하나다.
'비양도는 '고려 목종때(1002) 산이 바다 가운데에서 솟았는데 그 산에서는 네 개의 구멍이 뚫리고 붉은 물이 5일 동안 넘치다가 그쳤다고 한다. 그 붉은 물은 모두 용암이 되어 굳어지면서 섬이 된 것이다.(신증동국여지승람 제3권)
우리들이 섬을 한 바퀴 돌면서 이 섬 전부가 온통 검은 화산석임을 알았다. 화산탄도 여기저기 뒹군다. 코끼리 모양의 큰 암석이 바다 서쪽을 향해 섬을 지키고 있는 듯 보이고, 이를 비롯해서 섬의 후방에는 기이한 형상의 용암덩이를 모아 수석처럼 전시해 놓은 곳도 있다. 우리가 섬 일주도로를 한담을 나누며 한 바퀴 도는데 한 시간 정도 걸렸다.
제주도 삼다의 하나인 돌이 현무암의 돌덩이라는 것은 쉽게 납득할 수 있었다.
그날 저녁 우리는 민박집에서 저녁식사를 마치고, 이 마을 회관에 모였다. 먼저 상견례를 겸한 양쪽 문인협회 회원 소개에 이어 한기팔 선생님의 “문학적 감수성과 문학의 지역활성화를” 주제로한 간단한 강의와 이상범 선생님의 “문학을 삶의 일부로 실천해 달라”는 당부 말씀이 있었다. 그다음에는 양쪽 회원들이 교차적으로 나와 시를 낭송하였는데, 우리 쪽에서는 평소 숙련된 김숙희 부지부장과 김미숙 선생님, 그리고 김옥란 회원 등이 대표로 나갔으며, 서귀포문인협회에서는 오승철 회장을 비롯해 세 명의 회원들이 나와 양쪽 팀의 진지한 시낭송회가 벌어져, 이날 문학의 밤 행사분위기를 처음부터 격조 높게 고조시켜 나갔다. 연이어 계속된 2부 행사에서는 흥겨운 분위기 속에 가요경연 대회가 벌어졌다. 한기팔 선생님이 구성지게 부르신 “서귀포 칠십리”는 내가 옛날 아주 어릴 때 들었던 트롯트 노래여서 까맣게 잊었던 이 노래 유행시의 옛 정서를 느끼게 해주셨다. 이어서 합천문인협회 정유미 회원이 나가 가수 정미조의 “개여울”을 부를 때는 누구 한사람 넋을 잃지 않고 듣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모두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당연히 재창, 삼창의 요구가 빗발쳤고 그 응답으로 그녀는 심수봉의 “그때 그사람, 백만송이 장미” 이미자의 “동백아가씨” 등의 노래를 그녀 특유의 보이스칼라로 연이어 열창하여 노래가 끝날 때마다 뜨거운 박수갈채를 받았고, 이어서 마이크를 잡은 김옥란 회원도 윤복희의 ‘여러분’을 그녀만의 독특한 창법으로 불러 열정의 분위기를 이어갔다. 이렇게 해서 이날 문학의 밤은 최고의 피크를 이루는 가운데 양팀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서로 끈끈한 우정을 나눌 수 있었고, 자정이 가까울 무렵이 돼서야 우리들은 비양리 마을 회관을 나와 숙소인 아람민박집으로 향할 수 있었다.
그동안 이 행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부터 이날 밤 행사에 이르기까지 앞장서 애써 주신 시인 김원욱 비양도 파출소장님과 오승철 서귀포문인협회 회장님, 그리고 그 회원들이 우리들 합천문인협회 회원들을 따뜻하게 영접해준 환대에 합천문인협회 전 회원들을 대신해 깊은 감사를 드린다.
제주도 문학기행을 마치면서
우리일행이 이튿날 비양도 아람민박집을 나와 김원욱 시인과 그리고 서귀포문인협회 회원들과의 아쉬운 작별인사를 마치고 아침 9시 10분 비양도 선착장을 떠났다. 한림항을 향해 페리호가 서귀포칠십리 바닷길을 횡단하고 있을 때는 멀어지는 파란 비양봉 하얀 등대가 점점 시야에서 가물거리며 점멸(漸滅)하고 있었고, 곧 이어 우리는 한림항에 도착하였다. 제주의 낯선 섬, 비양도에서 김원욱시인과 그리고 서귀포 문인들과 만나 함께 보낸 시간은 비록 짧은 순간이었지만, 참으로 유익하고 소중한 시간으로 오래도록 우리들 기억에 기리 남을 것이다.
우리는 이날 오후 1시 제주발 김해행 제주여객기 탑승에 앞서 제주의 더 많은 것을 보기 위해 제주시 한림읍에 소재한 트로피칼(열대) 한림공원을 찾아 진귀한 것을 많이 볼 수 있었는데, 한라산이 폭발하면서 용암이 흘러내려 형성됐다는 협재굴 · 쌍용굴 등 동굴을 지나 남국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야자수 길을 걷고, 아마존강에서 채취한 대형기암괴석이 수문장처럼 우람하게 서 있는 다양한 분재작품들이 전시된 아름다운 분재공원을 감상하며 지나서 마지막으로 제주의 전통문화를 살펴볼 수 있는 재암민속마을을 둘러보고 제주국제공항으로 달려갔다.
공항검색 및 이륙시간에 맞춰 제주공항에 도착한 우리일행은 공항 검색대를 통과하여 제주항공의 7C 0574 제주여객기에 탑승, 제주국제공항 이륙 1시간 만인 이날 오후 2시에 김해국제공항에 안착하였다. 뭍으로 돌아온 우리일행은 합천으로 오는 도중에 진해 안골에 있는 청아대 횟집식당에 들려 합천문인협회 회원들만의 오붓한 자리를 마련하고 2박 3일간의 긴 여정의 여독을 풀면서 즐거운 한 때를 보냈다.
마지막으로 나는 이번 제주도 문학기행에서 보여준 남녀노소 전 회원들의 진정한 협회 사랑의 마음과 협동하는 모습을 보았으며, 그 소속 회원으로서 뿌듯한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 아울러 이번 제주도 문학기행이 회원들 간의 우의(友誼)를 더욱 다지는 기회가 되고, 또한 제주도에서 보고 들은 견문들을 소재로 향후 회원들의 작품 활동이 보다 활발하게 진전되는 계기가 되기를 충심으로 바란다.
세계문화유산 팔만대장경을 지킨 김영환 장군
이 성 동
山水가 맑고 경관이 빼어나게 아름다운 역사와 전통이 살아 숨쉬는 유서 깊은 고장 합천의 명승지 가운데 가야산은 세계문화유산을 봉안하고 있는 해인사를 중턱에 안고 있다. 가람배치가 마치 녹색의 바다 속에 떠 있는 범선의 형태를 하고 있는 해인사는 세계문화유산의 보고(寶庫)이다.
신라 말 벼슬을 버리고 여기서 한동안 머물다가 신선이 되어 종적을 감추었다는 최치원 선생의 정자와 재실이 고즈넉이 서 있는 홍류동 계곡 입구에서부터 하늘을 떠받들듯이 솟아 있는 키 큰 노송 밑으로 느티나무, 은행나무 벚나무 등이 터널을 이루며 청초한 芳香을 풍긴다. 누구나 이곳을 지나면 주위 절경과 수림이 풍기는 신선한 내음에 쾌재를 연발할 만큼 아름다운 곳이다.
해인사는 신라시대에 그 도도한 화엄종의 정신적 기반을 확충하고 선양한다는 화엄십찰의 하나로 세워진 가람이다. 화엄경은 그 본래 이름이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이며, 그것은 광대무변한 온 우주가 모두 부처가 존재하는 세계로, 그의 만덕과 진리의 세계를 설하고 있는 경전이다. 이 경전에 해인삼매(海人三昧)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해인사의 이름은 바로 이 ‘해인삼매’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해인삼매는 우리 중생의 마음을 넓고 큰 바다에 비유하여, 거친 파도는 곧 중생의 번뇌 망상이라고 하며, 이러한 번뇌 망상이 멈출 때 비로소 우주의 참된 모습이 그대로 물(海)에 비치는(印) 경지라고 말한다. 이러한 세계가 바로 부처의 깨달은 모습이요, 중생도 깨달으면 이런 경지에 이른다는 것이 곧 해인삼매의 가르침이다. 이러한 정신을 바탕으로 하여 해인사는 해동 화엄종의 초조 의상대사(義湘大師, 625~702)의 법손인 순응 화상과 그 제자인 이정 화상이 신라 애장왕 3년( 802)에 왕과 왕후의 도움으로 지금의 대적광전 자리에 창건하였다고 한다.
해인사를 법보사찰이라고 하는 것은 곧 팔만대장경이라고 불리는 법보를 봉안하고 있는 까닭이다.
대장경은 고려시대에 국가정책으로 두 차례 판각하였는데, 처음 새긴 초조대장경은 거란의 침입을 불력(佛力)으로 막기 위한 발원에서 1011년 만들기 시작하여 1087년까지 무려 77년에 걸쳐 이루어진 것으로, 그 무렵에서는 중국의 장경에 견주어 내용이 완벽한 것이었다고 한다.
2011년 해인사 대장경 엑스포를 개최하게 된 것은 바로 이 초조대장경 제작년도 1011년을 기원하여 천년을 기념하는 역사적인 의미가 있다.
그러나 팔공산 부인사에 봉안된 이 초조대장경은 고종 19년(1232)에 몽고군의 방화로 소실되고, 그 4년 뒤에 다시 대장경 판각을 다시 추진하여 1251년에 완성하였으니, 16년에 걸쳐 완성한 이 큰 불사의 결실이 바로 지금 해인사에 봉안되어 있는 재조고려대장경으로 경 종류가 1,514종이며, 책권의 분량으로 6,802권에 해당되며 판수는 81,258판으로 되어 있다. 또한 그 체제가 정확하고 조각이 섬세하여 중국의 만력판(萬曆板)이나 또 후세에 다른 나라에서 만들어진 어떤 대장경도 따라 올 수 없는 독보적인 빼어남을 지닌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완성된 대장경은 처음에는 강화도에 봉안하였으나, 왜구의 노략질이 심해 서울의 지천사로 옮겼다가 그 뒤 조선 태조 7년(1398)에 해인사로 옮겨 봉안한 것이다.
대장경을 만드는데 들인 지극한 정성은 한 치의 어긋남과 틀림이 없는 엄정한 자세로 이루어졌다. 더구나 30여 명의 솜씨로 5천 2백만 자에 이르는 구양순체의 글자들이 그렇게 아름다운 것은 물론이려니와 한 사람이 쓴 듯 글체가 일정하며, 오자 탈자 없이 완벽한 장경을 이루었다고 한다. 이것은 불력(佛力)으로 나라를 지키겠다는 판각인들의 지극한 원력과 부처님의 헤아림이 한데 어우러진 ‘대불사’이며, ‘대서사시’이다.
1,238년 판각을 시작하면서 쓴 고려의 대문장가 이규보의 “군신기고문”을 살펴보면 나라를 구하기 위해 얼마나 간절한 마음으로 임했는지 경판의 판각동기가 잘 나타나 있다.
강화도에 대장도감을, 남해, 진주 등지에 분사도감을 설치하여, 1자 3배의 정성으로 만든 민족의 혼과 호국의 신앙을 담은 고려대장경은 현존하는 세계 최대의 규모성(81,258판)과 세계 최고의 역사성(760년)을 자랑하며, 다른 나라 대장경 연구의 모본이 되는 학술성, 한결 같은 구양순체의 예술성, 인쇄문화의 선진성, 판각기술의 신비성, 대장목록 구성의 독창성, 경판보존상태의 우수성 등 세계문화유산으로서 그 가치를 인정받아 장경각이 1995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고, 2007년에는 팔만대장경이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이러한 민족수호 의지가 담긴 세계문화 유산 팔만대장경은 해인사 창건 이래 일곱 차례의 화재에도 다른 전각은 불탔어도 장경각(수다라전과 법보전)만은 한 차례의 피해도 없었다고 한다. 부처님의 신통력인지, 아니면 장경각의 절묘한 과학적인 설계구조와 화재예방에 최선을 다한 장인들의 지혜 때문인지는 알 수 없어도, 그 불가사의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귀중한 세계문화유산인 팔만대장경이 한국전쟁 중에, 그것도 적의 소행이 아닌, 어떤 미 공군 지휘관의 무지로 불타 없어질 위기가 있었다고 한다.
한국전쟁 중 미군정당국과 협의, 한국공군 창설의 7인 주역의 일원으로 활동하기도 한 김영환 대령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T-6훈련기를 타고 적 전차와 차량을 공격하여 큰 전과를 세웠다.
인천 상륙작전이 성공리에 끝나고, 한미 연합군이 수도 서울을 수복하기 위한 작전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50년 9월 18일, 미 공군 사령부는 한국 공군에 가야산 폭격과 거기에 몰려있는 공비들을 소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출격명령을 받은 김 대령은 휘하 편대와 함께 4기의 전폭기에 500파운드의 폭탄, 로켓탄, 기관총과 네이팜탄 등을 전투기에 장착하고 출격지점인 해인사 상공에 도착하였다. 이때 미군 정찰기가 연막탄을 투하해 백색연막이 오르는 지점에 폭격을 유도하고 있었다. 연막탄이 막 피어오르는 곳이 대적광전 앞마당이었다. 네이팜탄 한 발이면 팔만대장경은 물론이고, 대적광전과 주변 해인총림 등 해인성지가 곧 잿더미로 변해버릴 일촉즉발 위기에 처해 있었다.
조종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기민한 판단력이다. 그 판단의 근간은 한 순간 국가를 위해 어떤 것이 옳고, 어떤 것이 옳지 않은 것인지를 인지할 수 있는 분별력이다.
이때 김 대령은 침착성을 잃지 않고 목숨을 걸고 미 공군 사령부의 폭격명령을 어기면서, 휘하 기장들에게 자기의 뒤를 따르게 하고 자신의 명령 없이는 절대로 폭격을 하지 못하게 하였다.
다시 미군 정찰기에서는 해인사 경내를 네이팜탄으로 폭격하라고 거듭 명령하고 있었다.
김 대령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편대기의 기장들도 편대장에게 폭격명령을 수차 요청하였으나 김 대령의 뜻은 단호했다. 일체 공격을 중지하라는 날카로운 그의 명령이 무전기를 통해 다시 한 번 각 기장들에게 전해졌다. 그리고는 기장들은 편대장 김 대령을 따라서 해인사 상공을 몇 차례 선회한 뒤 대적광전 서북쪽 뒷산 능선을 넘어 사찰을 피해 폭탄과 로켓탄을 투하하고 귀대함으로써 팔만대장경이 戰火의 위협으로부터 무사히 보존될 수 있었던 역사적 순간이 지났던 것이다.
그날 저녁 해인사 공격명령을 내린 미군 장교가 찾아왔다. 미군이 전시작전권을 가지고 한국군을 지휘하고 있을 때였다. 명령을 어겼으니 그 이유를 묻고 질책하기 위해 온 것이다. 함께 있던 편대원들은 바짝 긴장하며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나 김 대령은 여유 있는 모습으로 미 공군 소령을 맞이했다.
“공격목표를 알리는 연막탄 투하지점을 보셨습니까?”
“목표로 알려준 곳은 사찰이었습니다.”
“사찰과 전쟁이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대령님은 사찰이 국가보다 더 중요하다는 말씀이시군요?”
“아니지요, 사찰이 국가보다 중요할 것이야 없지요, 그러나 공비보다는 사찰이 더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대령님은 공비를 언제까지나 방치해 두자는 것입니까?”
“천만에, 해인사는 지리적 조건으로 보아, 패잔병들이 현 상황을 장기간 유지할 수 없는 곳입니다. 가야산은 지리산 근거지로 가는 길목에 불과합니다. 가야산에 출몰하는 공비 몇 백명을 살상한다고 해서 전쟁이 판가름 나는 것도 아닙니다. 그 절은 천년이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는 전통사찰입니다. 그 사찰에는 공비와 바꿀 수 없는 국보 팔만대장경이 있습니다. 대장경은 700년 전인 고려 때에 판각해 봉안해 온 것으로서, 우리민족의 귀중한 문화재이며 세계적인 보물입니다. 소령께서도 2차 대전 중에 미군이 문화재가 많은 파리와 일본의 교토를 폭격하지 않았던 사실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문화재는 한 민족의 것이면서도 동시에 인류의 재산입니다. 그 처참한 대전 중에도 이 두 도시는 총탄 한발도 맞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오늘날 두 도시는 인류의 귀중한 문화재를 그대로 보유하고 있지 않습니까? 미군이 승리보다 문화재를 소중한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 전례를 따랐던 것입니다.
김 대령의 말은 나직했으나, 그의 말 속에는 소신과 패기가 들어 있었다. 김 대령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던 그는 감동하고 있었는지 굳어진 표정이 누그러지며,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부동자세를 취하고, 김 대령에게 깎듯이 거수경례를 하는 것이었다.
이해하고 존경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돌아갔다.
“김 대령님과 같은 훌륭한 상관을 모신 대한민국의 공군 장병들이 부럽습니다.”
미군 장교가 돌아가고 모두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사태는 만만치 않았다. 유엔군 사령부에서는 김 대령을 군법재판에 회부하여 명령 불복종 죄로 사형을 선고했다. 보고를 받은 이승만 대통령도 자세한 사정을 모르고 크게 노하여 사형이 마땅하다고 했다. 그때 김 대령의 친형이었던 김 정렬 공군 참모총장이 대장경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한 일이라는 것을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이 대통령도 김 대령의 진의를 알고는 그의 대장경 수호정신에 감동하여 사형을 면하게 해주었다. 유엔군 측에서도 사실을 알고서 더는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만일 이 때 김 대령이 미 공군 사령부의 명령대로 해인사를 폭격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리고 미 공군만의 단독 작전으로 해인사를 공격했더라면, 말할 것도 없이 우리의 귀중한 문화유산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은 ‘한국전사’라는 책속의 몇 줄 ‘한국전쟁 중 폭격에 의한 소실’의 기록만을 남기고, 한순간 화염의 연기로 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세계적인 문화유산 팔만대장경을 지켜낸 영웅 김영환 대령의 기민한 예지와 우리문화재 보호에 대한 투철한 수호의지가 있었기에 세계문화유산으로 기리 남게 된 것이다.
초대 공군참모총장 김정렬 장군의 친동생이기도 한 김영환은 1921년 서울 사직동에서 부친 김준원 선생과 모친 변상희 여사 사이에서 출생했다. 부잣집 막내이면서 귀공자로 성장한 김영환은 1939년 경기고(당시 제일고보)를 졸업한 후 곧바로 일본 지바켄에 있는 쓰다누마(津田沼) 비행학교에 입학하여 비행술을 배웠다. 이후 그는 일본 관서대학 항공과에 진학하여 비행에 대한 공부를 계속했고, 1944년에 귀국하여 연희전문에 수학하는 전형적인 엘리트 코스로 청년기를 보냈다.
그는 1954년 3월 5일 F-51 전투기를 조종해 사천에서 강릉기지로 향하던 중 불행하게도 악천후를 만나 미지의 세계로 영원히 잠적하고 말았다. 조국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 더 활약할 수 있는 34세의 패기만만한 젊은 나이에, 그를 알고 그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의 기대를 뒤로한 채, 한 순간 영원을 향해 산화했다.
그는 순직 후에 공군 준장으로 일계급 승진과 함께 을지·충무무공 훈장과 미 비행훈장, 미 공로훈장 등이 추서되었다.
김영환 장군은 짧은 생을 살다갔지만, 그가 남긴 일화는 많고 또 드라마틱하다. 우리 한국군에 공군이 창설되고 미국으로부터 L-4비행기가 막 들어왔을 때, 공군 초대참모총장 김정렬 장군의 집무실에 긴급 전화가 걸려왔다. 웬 비행기 3대가 한강 다리 아래 교각 사이로 비행을 했다는 말도 안 되는 내용이었다. 이 사람들을 잡고 보니 당시 공군 3총사로 이름난 김영환, 김신(백범 김구 선생의 차남), 장성환이었다.
이들의 행각은 이 뿐만이 아니었다. 다음에는 이화여대에서 또 전화가 걸려왔다. 비행기 3대가 수업 중에 자꾸 이화여대 위를 날아다녀서 수업에 지장이 있다는 탄원이었다. 물론 또 그 예의 3총사였다. 당시 김정렬 장군은 이들을 불러 혼을 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넘치는 객기(客氣)는 한국전 발발 후 두려움 없이 적의 대공포화 사이를 누비고 비행하며 목표물을 공격하는 용기로 재생되어 크게 전과를 올린 일이 많았다고 한다.
김영환 장군 그에게는 이 외에도 재치(才致) 있는 일화(逸話)들이 많이 있는데, 그 중에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한다. 그가 강릉 전진기지 사령관 시절, 형수 이희재 여사의 자주색 치마를 보고 조종복과 어울릴 것으로 생각하고, 주저 없이 형수에게 자주색 마후라를 만들어 달라고 했다. 치마단 자투리에서 우리 공군의 상징인 빨간 마후라가 나왔다는 사실이 조금은 우습기도 하지만, 그때 순식간에 전 공군부대에 빨간 마후라가 일색을 이룬 것은 김영환의 심미적(審美的) 감수성(感受性)이 누구보다도 뛰어났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세계 어느 공군에도 없는 빨간 마후라를 전 한국공군부대에 공급하여 한국공군의 자긍심과 사기를 올렸을 뿐만 아니라, 연예계에도 큰 선풍을 일으켜 영화와 그 주제곡까지 탄생하게 하여 우리나라 전역을 한 때 ‘빨간 마후라’로 물들였던 시대가 있었다.
신상옥 감독, 신영균 주연 최은희, 최무룡이 열연한 전쟁과 사랑, 사나이 우정과 애국심을 그린 1964년도 개봉된 인기 절정이었던, 지금도 눈에 선한 영화, 빨간 마후라, 헬멧 마스크를 들어 올리며 손가락으로 V자를 그려보이던 근사한 주인공의 모습에 젊은 여성들이 매혹되었던 그 영화가 바로 김영환의 빨간 마후라에서 연유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해인사 성보박물관에서 대적광전을 향해 가는 길 도중에 보현암과 약수암으로 갈라지는 길목 어귀에는 2002년 6월 17일에 제막한 김영환 장군의 공덕비가 서 있다.
그의 공덕비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쓰여 있다. <여기 화살 같이 흐르는 짧은 생애에 불멸의 위업을 남기고, 영원히 살아남은 영웅이 있다.> 그리고 김영환 장군이 어떻게 대장경을 보존했는지를 자세히 적고, 다음과 같이 끝을 맺고 있다. <참으로 목숨을 건 탁월한 판단과 애국심으로 이룬 불멸의 위업이 아닐 수 없다. 이에 대한불교 조계종 총무원 해인총림과 대한민국 공군이 뜻을 모아 그의 빛나는 호국 호법의 장렬한 공덕을 영원히 기리고자 이 공덕비를 세운다.>
그는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조국의 영공을 지키며, 수많은 전공을 세운 우리공군의 간성으로서 특히 한국전사에 기리 남을 세계문화유산 팔만대장경을 수호한 불멸의 위업을 남기고, 적진의 상공에서 생사를 넘나들며 분신처럼 운명을 같이 했던 애기(愛機) F-51무스탕 전투기와 함께 강릉기지로 향하던 중 홀연히 산화해 영영 돌아오지 못할 저 세상으로 떠났지만, 그를 아끼고,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의 가슴 속에 불멸의 영웅으로, 그리고 또한 애잔한 그리움으로 기리 남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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