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산과 일곱 왕자
합천문인협회 이 성 동
40여 년 동안 천직으로 알고 봉직했던 공직생활을 2000년 8월 말 마감하고 앞만 보고 달려오기만 했던 내가 이제 나의 취향에 맞는, 뜻있는 노후생활을 궁리하다 보니 평소 좋아했던 산이 떠올라 산행을 벗하기로 하였다.
내가 산행을 결심하게 된 것은 산에는 사시사철 꽃이 있어서 좋기도 하지만, 산이 주는 신선한 공기를 마시고, 계곡을 흐르는 시냇물 소리, 그리고 이름 모를 온갖 풀벌레들의 여린 울음소리와 청아한 새들의 지저귐이 조화된 대자연의 경외(敬畏)로운 심포니를 감상하면서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를 수 있기 때문이다. 산은 사람의 심성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인가. 산을 오르면, 나는 삶에 고뇌했던 온갖 시름이 심저(心底)에서 어느 순간 정화(淨化)되어 사라지고 그 빈자리에는 그저 순수하고 아름다운 천심(天心)이 자리함을 느낄 수 있다.
산에서는 처음 만나는 사람도 반갑고, 나누는 수인사도 정겹다.
공자는 지혜로운 사람은 강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고 했지만. 나의 산행 체험으로 얻은 느낌은 산이 사람의 마음을 어질게 만든다는 확신이다. 산은 그렇게 자신의 포근함과 선(善)한 심성을 말없이 나그네의 마음에 전이(轉移)하는 것이리라 생각된다.
산을 좋아했던 나는 교직생활 중에도 주말이나 방학 때를 틈타 주변의 가야산을 자주, 그것도 거의 혼자서 오르기를 좋아하였다.
내가 사는 곳은 지금부터 1440여 년 전 대가야의 마지막 왕자, 월광 태자가 신라 군사에 쫓겨 은신하면서 청산과 모듬내에 비친 달을 벗하며 여생을 보냈다고 하는 이곳 경남 합천군 야로면 월광리 월광사가 인접한 곳인데, 월광사와 야천을 사이에 둔 푸른 기와가 덮인 외딴 집이다. 이 집에서 노부부가 한적하게 살아가고 있다. 여기에서 가야산 등산로 입구까지는 승용차로 15분 거리이다.
퇴직 후 나는 먼저 가야산부터 오르기 시작하였다. 일주일에 두세 번, 처음에는 백운동 가야산관광호텔 쪽에서 오르는 코스를 택하였는데 해발 1430m인 정상까지는 천천히 걸어도 두 시간 반쯤 걸린다.
백운동 국립공원사무소에서 걷기 시작하여 10분쯤 지나면 백운 제1교를 만나게 되는데 거기서 다시 5분쯤 지나면 길 오른쪽 북동쪽으로 기암절경을 보게 된다.
태초에 신(神)이 이 세상을 창조할 때에 더 많은 애정을 가지고 가야산을 만들고, 저렇게 아름다운 절경(絶景)도 조각하였을 것으로 생각될 만큼 신비로운 만물상(萬物相)이 눈에 펼쳐진다. 첫 번째 나타나는 기암(奇巖)은 아무리 보아도 연꽃들의 모양이다. 암석으로 연꽃밭을 조각했음이 틀림없다. 만개(滿開)한 큰 연꽃 한 송이와 바로 그 우측에 반쯤 핀 연꽃 한 송이가 나란히 피어있는가 하면, 주변에는 군데군데 봉우리 맺힌 연꽃들이 한 군락(群落)을 이루고 있다.
연꽃은 처염상정(處染常淨), 즉, 더러운 진흙 속에서도 그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항상 아름다운 자태와 싱그러운 향기를 간직하는 꽃이다. 연꽃은 중생의 탐욕과 화냄, 어리석음의 마음을 깨치고 밝고 청정한 부처님 세계로의 승화(昇華)를 상징하는 꽃이다.
가야산 입구를 바위연꽃으로 장식한 것은 가야산이 불교와의 어떤 관련성을 보여주는 의미 있는 메시지이다. 가야산이라는 말도 석가모니 부처님이 도를 깨친 인도의 마가다국의 부다가야와 의미상으로 어떤 관련성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연꽃 군락(群落) 위에는 또 다른 여러 아름다운 형상들로 장관을 이룬 기암(奇巖)들이 마치 금강산의 만물상 중에 한 쪽을 떼어 내어 이 곳으로 옮겨온 듯한 절경을 뽐내고 있다.
가야산의 절경, 만물상을 뒤로 하고 다시 정상 쪽으로 올라가는 계곡에는 언제나 푸른 하늘이 맑게 비치는 청정한 명경지수(明鏡止水)가 나를 기다려주고 있는데, 한 모금 떠서 마시고 나면 저절로 가슴속까지 시원해진다. 여기서 삼십분쯤 다시 오르다 보면 서성재에 이르고, 서성재에서 10여분 거리 남쪽에 봉우리가 하나 보이는데, 이 봉우리가 바로 상아덤이다. 상아덤에는 지금부터 2000여년 전 성스러운 기품과 아름다운 용모와 그리고 착한 마음을 지닌 가야산 여신 정견모주(正見母主)가 시집갈 때 탔다는 가마바위가 있다.
서성재에서 정상까지는 약 한시간 정도 소요된다. 정상까지 오르는 데는 돌이 많고 경사가 급하지만 지금은 철계단이 여러 곳에 놓여 있어서 산을 오르는 데 그렇게 큰 어려움이 없도록 해주어 나에게는 수월해서 좋다.
여느 산도 마찬가지지만 높은 산일수록 정상에 오르면 그 순간의 기분은 지상에서는 맛볼 수 없는 희열감을 얻는다. 생사를 넘어 눈덮인 히말리아 봉우리들을 정복하려는 알피니스트들의 강열한 도전의 의미를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다.
정상에서 내려다보이는 가야산은 사시사철 다른 모습으로 나를 황홀하게 한다. 소쩍새 우는 봄부터 늦가을까지 가지가지 꽃들이 피고 지는데, 솔나리, 동자꽃, 붓꽃, 백리향, 제비꽃들이 다투어 피어난다. 백리향은 진한 방향(芳香)을 멀리까지 뿜어내어, 이 산을 찾는 산행인들의 마음을 즐겁게 해주고, 특히 단풍으로 물든 만추(晩秋)의 청명한 날에는 정상에서부터 산 아래까지 오색 아름다운 비단 천을 온통 깔아 놓은 듯한 현란한 장관을 연출한다. 하늘나라에 사는 한 선녀가 그 장관에 홀려 그곳에 살포시 내려와 앉으면, 이때 이 모습을 지켜본 칠불암 일곱 바위가 왕자로 현신하여 그녀를 먼저 만나려고 서로 다투어 뛰어 내려가는 듯한 정경을 연상케 한다.
한 겨울, 눈이 소복이 쌓인 날, 그 깨끗하고 아름다운 가야산은 나뭇가지마다 하얀 꽃망울을 터뜨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雪國)’을 또 연상케 한다.
겨울 산행 길에 찾아든 온천 마을에서 ‘게이샤 고마코’를 만난 ‘시마무라’는 그녀의 청결한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그녀를 만나듯이, 나는 함박눈이 내린 하얀 겨울날, 가야산을 오르면서 설국의 남자 주인공처럼 ‘고마코’ 같은 눈 속의 청결한 여인을 만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산을 오른다. 산 정상위에 가끔씩 흰구름이 두둥실 떠 있을 때는, 내가 만나기를 바라는 그 여인이 그 구름 위에 요염하게 앉아서 정상으로 오르는 나를 처음부터 끝까지 내려다보며 기다리고 있는 듯한 착각을 준다. 아마도 이 산상(山上)에서 가장 청결하고 아름다운 여인은 가야산 여신 정견모주가 아니겠는가!
가야산은 영남의 제일봉으로서 자연경관이 수려하여 예로부터 “조선팔경의 하나”, “해동 제일의 명산”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는데 민족의 영봉(靈峰), 백두산의 정기를 받아 남쪽으로 길게 뻗친 백두대간 남단 소백산의 한 자락에 위치해 있다.
가야산은 6가야국의 주산으로서 정견모주(正見母主)라는 여신이 상아덤 봉우리에 머물면서 천신(天神) 이비가(夷毗訶)와 감응(感應)하여 두 아들을 낳았는데, 큰아들 뇌질주일(惱窒朱日)은 대가야의 시조 이진아시왕이 되었고, 뇌질청예(惱窒靑裔)는 금관가야의 시조 김수로왕이 되었다.
인도의 아유타 왕국의 공주 허황옥(許黃玉)이가 삼국시대 초기에 지금의 진해 용원 앞 바다에 표류해 와서 김수로왕의 왕비가 되어 열명의 왕자를 낳았는데 첫째 아들 거등(居登)은 수로왕의 뒤를 이어 제2대 금관가야의 왕이 되었고 두 번째, 새 번째 아들은 왕후 허씨(許氏)의 성을 받아 허씨의 시조가 되었으며 나머지 일곱 왕자가 가야산에 입산하여 왕비의 오빠 장유화상의 지도로 칠불봉 밑에서 3년간 수도생활을 하다가 생불(生佛)이 된 후, 하동군 칠불사로 떠났고 지금은 가야산 정상에 칠불암이 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는데, 내가 정상에 올라 아무리 헤아려 보아도 그럴듯한 짐작이 가는 바위가 근처에 서너 군데 있을 뿐 칠불암은 확인이 어렵고 다만 상봉에서 남쪽으로 두 번째로 높은 봉우리에 칠불암(七佛巖)이라고 적혀있는 바위 하나가 우뚝 솟아 있다.
이와 관련하여 해인사 일주문 바로 옆에 영지(影池)라는 못이 있는데 그 옛날 수로왕의 아들 일곱 왕자가 가야산에 입산수도할 때에 어머니 허왕후가 일곱왕자를 만나러 가야산으로 오르려다가 아들들을 만나지 못하고 이 못에 비친 아들들의 모습만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돌아갔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일곱 왕자가 가야산을 떠나 정착한 지리산 반야봉 기슭에 자리 잡은 하동 칠불사, 쌍계사 말사인 이 도량은 절 자체가 선원(禪院)이라 할 만큼 선(禪)과 깊은 관련이 있을 뿐 아니라 문수보살의 상주도량(常住道場)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왕자들이 가야산에서 3년간 수행하다가 101년 지리산 반야봉 아래 운상원(雲上院)을 짓고 더욱 열심히 정진해 수로왕 62년(103) 음력 8월15일 모두 성불(成佛)했다고 한다. 성불 소식을 들은 수로왕은 크게 기뻐해 그곳에 큰 절을 짓고 일곱 부처가 탄생한 곳이라 하여 ‘칠불사’(七佛寺)라 이름 지었다고 전해진다. 지금도 그 때 일곱 왕자가 수행했던 선방의 자리에 한 번 불을 지피면 한 달이나 온기가 지속된다고 하는 신비로운 “아자방(亞字房)”이라는 선방(禪房)이 그대로 보존되어 남아 있다.
김수로 왕의 아들 일곱 왕자가 득도하여 떠난 가야산은 대가야국이 신라에 병합된 후 240여년이 지난 뒤 신라 애장왕 3년(802년) 대가야국 후손인 순응(順應)과 이정(利貞) 두 선사(禪師)에 의해 지금의 자리에 대화엄(大華嚴)의 법보종찰(法寶宗刹) 해인사를 창건하여 불교성지(佛敎聖地)가 되었다.
지금도 세계의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팔만대장경판을 봉안하고 있는 해인사 내에는 대가야국 시조의 어머니 정견모주를 모셨던 “천황사”라고 하는 자리에 해인사를 창건할 때 심은 고목 한 그루가 고사(枯死)되어 앙상한 모습으로 남아 있어, 사바세계의 천이백년 세월이 부처의 세계에서는 한순간의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임을 말없이 보여주고 있다, 그 위에는 ‘국사단(局司壇)’이라는 자그마한 전각이 있는데, 이 전각은 해인사 가람을 수호하고 있는 수호신을 모신 곳이라 하며, 해인사가 창건된 후 일곱 번의 화재에도 이 건물은 한 차례도 화재가 미치지 않았다고 한다.
가야산은 이 산 북쪽과 동쪽에서 발원(發源)한 가천과 야천을 흘러내려 각각 50km, 40km쯤 흘러 경북 고령군 고령읍 회천 유역에서 서로 만나 ‘회천(會川)’이라는 큰 강을 이루었는데, 옛날 선사시대부터 강유역 정착민들에게 논밭을 일구며 살 수 있는 삶의 터전을 만들어 주었던 어머니의 젖과 같은 산이다.
또한 가야산은 초기 가야제국의 맹주국이었던 금관가야의 시조 김수로왕과 금관가야가 쇠퇴(衰退)하던 5세기부터 가야제국의 맹주가 되었던 대가야의 시조 이진아시왕을 탄생시킨 모태(母胎)가 가야산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나는 가야산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두 시조의 탄생설화(誕生說話), 물론 신화(神話)이긴 하지만, 신화의 매력이 문학으로 발전한 고대 그리스, 로마 신화는 세계인들의 훌륭한 문학으로 승화되어 애독되어 지고 있다.
김수로 왕이 탄생한 김해의 구지봉(龜旨峰)은 대학국어 교과서에 오를 만큼 문학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듯이, 가야산의 가야국 시조 탄생설화도 우리가 가꾸어 반드시 문학으로 발전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 나는 오늘도 가야산을 오르고 또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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