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통일과 대야성 합천 미인
사단법인 향토사연구전국협의회
합천향토사 연구회장 이 성 동
외교 전략에 뛰어난 김춘추는 김유신과 함께 삼국을 통일한 영웅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김춘추가 삼국을 통일하기 전 지금부터 약 1,350여 년 전 한반도의 동남쪽에 위치했던 신라의 과제는 국가존망의 상황에서 벗어나는 일이었다. 북방의 패자 고구려가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가운데 진흥왕의 한강 유역 차지로 이전의 동맹국이었던 백제마저도 적국으로 변한 상황이었다. 고구려와 백제는 때로 연합군을 결성해 신라를 공격하는 상황이니 신라는 언제 멸망할지 모르는 국가위기에 처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서라벌 출신의 진골귀족들은 자신들의 기득권 유지에만 모든 역량을 집중했다. <삼국사기>는 김유신의 아버지 서현과 숙흘종의 딸 만명부인의 결합을 ‘야합(野合)’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만병부인의 친정에서 서현이 가야계란 이유로 결혼을 격렬하게 반대했던 상황을 말해준다. 서현은 김해 금관가야를 개국한 김수로 왕의 후손이었으나 김해의 금관가야가 신라에 합병될 당시에 서현의 선조가 신라에 귀화하였으므로 신라의 진골 귀족들과는 뿌리가 다른 귀족이었다.
젊은 시절의 김춘추도 서라벌 출신의 다른 진골들과 마찬가지로 여색에 있어서 별다른 문제의식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가 김유신의 동생 문희와 은밀히 만나 그녀를 임심시켜 놓고도 모른 체 한 사실은 김춘추의 가야계 출신들에 대한 배타적 특권의식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김춘추에게 ‘고타소’라는 딸이 있음을 알고 있었던 김유신이 자신의 동생 문희를 춘추와 맺어준 것은 신라의 진골귀족들과의 품계에서 동등한 지위를 얻고자하는 의도가 엿보이는 책략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김유신의 책략은 다음과 같은 일화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삼국을 통일한 태종 김춘추 무열왕은 가간 용수(龍樹)의 아드님으로, 어머니 천명부인은 진평왕의 세 따님 중 한 분이었다. 태종이 즉위했을 때 한 백성이 머리는 하나인데 몸뚱이는 둘이고 다리는 여덟 개나 달린 돼지를 바쳤다. 점쟁이가 이것을 보고 말했다. "천하를 통일할 상스러운 징조입니다." 제 29대 태종대왕(太宗大王)은 삼국통일의 위엄을 달성한 왕으로서 김춘추(金春秋)라는 이름으로 더욱 유명하다.
태종대왕의 부인은 바로 김유신의 누이동생 문희로, 두 사람의 결혼에는 김유신의 꾀가 크게 작용했다.
김유신의 누나 보희가 하루는 서약에 올라가 오줌을 누었더니 서울 장안에 오줌이 가득 차는 꿈을 꾸었다. 아침에 일어나 동생 문희에게 꿈얘기를 했더니 문희는 대뜸 그 꿈을 팔라고 하였다. 보희는 우스웠지만 문희가 비단치마를 내겠다며 졸라대니 별 생각 없이 꿈을 동생에게 팔았다.
그런 일이 있고서 열흘쯤 지난 정월 보름날이었다. 집에 놀러온 김춘추와 공차기를 하던 유신은 일부러 춘추의 옷을 밟아 옷고름을 떨어뜨렸다. 유신은 옷고름을 달아주겠다며 춘추를 데리고 안채로 들어갔다. 물론 이것은 자신의 누이들 중 하나를 춘추와 맺어주려는 속셈이었다.
유신이 누나에게 옷고름을 달아 달라고 하니 보희는, "어떻게 그런 하찮은 일로 처음 보는 귀공자 옆에 가겠는가?"하고 거절하였다.
그러나 동생 문희는 선뜻 나서서 옷고름을 달아주었다. 춘추는 동생과 인연을 맺어주려는 유신의 속내를 알아채고 그날부터 거리낌 없이 유신의 집으로 찾아와 문희를 만났다. 얼마후 유신은 문희가 춘추의 아이를 가졌음을 알게 되었다. 유신은 일부러 화를 내며 이웃이 들릴 만큼 큰 소리로 떠들어댔다. "내가 부모님의 허락도 없이 임신을 하다니. 이 무슨 망측한 짓이냐? 집안을 욕되게 한 너 같은 계집은 태워 죽임이 마땅하다. " 소문은 순식간에 퍼져나가 서라벌에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이때 마침 선덕왕이 궁궐 밖으로 나와 남산으로 행차하였다.
유신은 미리 알고 일부러 그날을 잡아 문희를 화형하겠다며 마당에 장작을 쌓아놓고 불을 질렀다. 여왕이 남산에 올라 이곳저곳을 둘러보다가 이 연기를 보았다. 좌우의 신하들에게 무슨 연기냐고 물었다. 신하들은 소문에 들은 대로 말했다.
"김유신이 그 누이동생을 태워 죽이려나봅니다. " 여왕이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라서 그 까닭을 물었다. "그 누이동생이 시집도 가지 않고서 임신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래, 그것이 누구의 소행이라더냐?"
그때 옆에 있던 김춘추가 낯빛이 달라지며 고개를 돌렸다. 여왕은 눈치를 채고 힐책했다.
"바로 네 소행이로구나, 그런데 빨리 달려가 구하지 않고 어째서 여기 있단 말이냐?"
그제서야 춘추는 황급히 달려가 말렸다. 이 일이 있은 지 얼마 안 되어 두 사람은 곧 혼례를 올렸다.
이래서 동생을 춘추와 혼인시키려 한 김유신의 계획은 성공하였고, 문희는 언니에게서 꿈을 산 효험을 보았다.
진덕여왕이 승하한 뒤 왕의 이질 뻘 되는 김춘추가 왕위에 오르니 이분이 태종대왕이다. 왕이 김유신과 더불어 삼국을 통일하여 신라에 더없는 공을 세웠으므로 태종대왕이라 했다. 태종대왕은 문희 부인과의 사이에 여섯 아들을 두었고 그 외에도 다른 부인에게서 난 네 아들과 딸 하나가 있었다.
김유신의 책략은 그의 의도대로 성공한 것이다.
그러나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에는 유신이 35세 때인 진평왕 51년(629)부터 48세 때인 선덕여왕 11년(642)까지의 행적이 누락되어 있는데 이는 춘추에게 실망한 유신이 정치를 그 기간 동안 떠나 있었음을 뜻한다. 아마 둘 사이에는 처남 매부지간 같지 않은 한랭전선이 한 동안 막을 치고 있었던 같다.
그런데 김춘추에게 삼국통일의 문을 열게 한 역사적인 한 사건이 발생했다.
642년(선덕여왕11) 대야성(지금의 합천읍)을 둘러싸고 신라와 백제 사이에 벌어진 싸움이다. 이보다 2년 전 640년 무왕(武王)에 이어 왕위에 즉위한 백제의 의자왕은 국내정치의 안정을 도모한 다음 신라에 대하여 적극 공세를 취하였다. 그는 642년 친히 군사를 이끌고 신라의 서쪽 변방 40여성을 빼앗았으며, 장군 윤충(允忠)으로 하여금 군사 1만으로 대야성을 공격하도록 하였다.
이때는 김춘추가 보위에 오르기 전의 일이다. 그의 사위 김품석(金品釋)은 벼슬이 이찬(伊湌)에 올라 대야성의 도독이 되었다. 대야성은 지금의 경남 합천군 · 합천읍 · 합천리 황강변에 있었던 성(城)이다. 이 대야성은 신라로서는 서쪽으로, 백제로서는 동쪽으로 진출할 수 있는 군사적 요충지였다.
<삼국사기> 권 47 <죽죽전>을 보면, 대야성 성주인 김품석의 부하 중에 사지(舍知)의 벼슬에 있는 검일 (黔日)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아내는 합천 출신으로 빼어난 미모(美貌)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품석은 아내(김춘추의 딸) 고타소낭과 함께 성 안에서 기거하고 있었으므로 객고가 쌓일 리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검일 아내의 미색을 탐하여 그의 아내를 빼앗아 버렸다.
아내를 빼앗긴 검일은 그 분통을 참아내기가 참으로 어려웠을 것이다. 이 세상에 자기 아내를 빼앗기고도 아내를 빼앗은 그 상관에게 충성할 부하가 어디에 있겠는가?
그래서 그는 대야성 맞은 편에 진을 친 백제의 갈마산성에 투항해 간 옛 동료 모척(毛尺)과 은밀히 내통하면서 복수의 칼을 갈고 있었는데, 드디어 642년 백제의 윤충이 거느린 군대가 대야성을 공격해 오자, 복수심에 불타던 검일은 적군과 내통하면서, 대야성의 군량미 창고에 불을 질러 온 성안이 흉흉하고 병사들이 두려워하고 있을 때에, 백제군사들이 총공격해오자 대야성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이 때 김품석의 보좌관 아찬(阿湌) 서천(西川)이 성벽에 올라가 백제장군 윤충에게 “만약 장군께서 우리를 죽이지 않는다면 성을 들어 항복하고자 합니다”고 하자 윤충이 “만약에 그렇게만 한다면, 그대와 더불어 다 같이 좋은 방향으로 할 것인 바. 이 말에 거짓이 없음을 저 밝은 해를 두고 맹세하겠다”라고 전하자 서천이 권고해 품석과 여러 장수들이 성을 나서려 하였다. 이 때 죽죽이 만류하면서 말하였다. “백제는 늘 뒤집어 배신하는 나라인지라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윤충의 말이 달콤한 것은 반드시 우리를 유혹하려는 것입니다. 만약 성을 나가면 틀림없이 적들에게 잡힐 것이니, 달아나 엎드려 삶을 구걸하기보다는 차라리 용감하게 싸워 죽음에 이르는 것이 낫습니다.”
김품석은 죽죽의 충언을 받아들이지 않고 성문을 열었다. 사졸들이 먼저 나가니 , 매복해있던 백제의 병사들이 나타나 이들을 모두 죽였다. 김품석은 죽죽의 충언을 무시한 것을 후회했지만, 때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김품석은 그의 처 고타소낭과 자식을 죽인 다음,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하였다.
이는 미인에 눈이 멀게 된 자신이 스스로 화근을 만들었기 때문에 그로 인한 당연한 인과응보의 결과였던 것이다.
이 모습을 지켜본 죽죽은 남은 군사를 수습해 적을 물리치고자 전열을 정비하였다. 동료 장수 용석이 죽죽에게 이르기를 “지금 전쟁의 형세가 이러하니 반드시 성을 보전할 수 없을 것이다. 차라리 살아서 항복함으로써 후일의 성공을 도모하는 것이 낫다”라고 하니 죽죽이 대답하기를 “그대의 말도 맞다. 그러나 나의 아버지가 나를 죽죽(竹竹)이라고 이름 지은 것은 나로 하여금 대나무와 같이 한 겨울에도 시들지 않는 절조(節操)를 지켜, 비록 부러질지언정 굽히지 말라는 뜻이니 어찌 죽기를 두려워하여 살아서 항복하겠는가”라고 말하고 성이 함락될 때까지 끝까지 싸우다 용석(龍石)과 함께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이 전투에서 백제의 윤충은 김품석의 목을 베어 백제의 수도인 사비성(泗泌城 :지금의 부여)으로 보내고 신라의 백성 천여 명을 포로로 잡아 데려갔다.
훗날 합천사람들은 대야성을 대밭마루 또는 죽봉산(竹峯山)이라고 불렀다. 신라의 죽죽장군이 백제군과 싸워 마지막 충절을 보인 이곳에 장군의 애절한 혼이 대밭으로 변했다는 이야기 때문이라고 한다. 지금도 대야성에는 동쪽 기슭에 유유히 흐르는 남정강을 굽어보면서 옛 대야성지를 지키고 있는 ‘연호사’라는 절이 있는데, 이 절은 그 때 대야성 전투에서 장렬하게 싸우다 죽은 죽죽과 신라 장병 2천 명, 그리고 성주 김품석의 아내였던 고타소낭의 애절하게 죽은 영혼들을 위로하고 천도하기 위해 지어졌다고 한다.
당시 신라의 조정에서는 이들의 죽음을 전해들은 선덕여왕이 크게 슬퍼하면서 죽죽에게는 급찬(級湌), 용석(龍石)에게는 대나마의 관등을 내려주고 처자식에게는 상을 내리고 수도 경주로 옮겨 살게 하였다.
<삼국사기> 권제47 (죽죽전)
B. 파스칼은 그의 <명상록>에서 말하기를,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조금만 낮았더라면 세계의 역사는 달라졌으리라”고 했다. 그렇다! 만약에 검일 아내의 미모가 없었더라면, 우리 역사가 어떻게 달라졌을지 궁금한 일이다.
<삼국사기> 권 47 <죽죽전>에 의하면, 딸 부부의 전사소식을 들은 김춘추가 “식음을 전폐하고 기둥에 의지하고 서서 종일 눈도 깜짝이지 않고 사람이 눈앞으로 지나가도 몰랐다”고 기록될 정도로 그는 딸의 죽음에 충격을 받았다. “내가 대장부가 되어 어찌 백제 하나 삼키지 못하랴”라고 탄식한 춘추는 완전히 다른 인물로 돌변했다. 그는 왕족마저도 백제의 공격으로 죽음을 당하는 현실을 타개하지 않으면 신라의 미래는 없다고 판단했다. 이런 상황에서 신라를 다시 세우기 위한 김춘추의 뼈를 깎는 개혁이 그의 한이 서린 마음에서 진행된 것이다.
기필코 백제를 멸망시켜 딸의 원수를 복수할 뿐만 아니라 국가 위기를 극복하고 백제 정복의 기회로 삼을 것을 결심한 것이다.
김춘추는 서라벌 출신 진골 중심의 신라 지배층으로는 이런 결심이 실현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주목한 인물이 바로 김유신이었다. 그러나 김유신 자신은 나름대로 계책을 세워 자기 집에 김춘추를 불러 축구를 하면서 춘추의 옷고름을 떨어지게 하여 그것을 문희가 달아주도록 해서 김춘추와 문희를 맺게 해주었고, 전대미문의 화형식을 서슴치 않는 승부사의 기질을 발휘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는 목숨 걸고 따르는 든든한 가야계가 있었다. 그러나 김춘추를 토룡(土龍)으로 치부한 김유신은 그를 신뢰하지 않고 있었다. 그럼에도 김춘추는 김유신을 자파로 만들기 위해 먼저 자기 헌신의 길을 걷는다.
그리하여 김춘추는 고구려로 백제정벌 구원병을 얻고자 사신을 청하여 갔다. 그러면서 그는 김유신에게 “내가 고구려에 들어갔다가 해를 당한다면 공은 무심할 것인가?”라고 물었다. 김유신은 고구려 사신길을 자청한 김춘추가 과거의 그가 아님을 알아차렸다. 김유신은 “그대가 가서 돌아오지 않는다면 나의 말발굽이 반드시 고구려 백제 두 임금의 뜰을 짓밟을 것이다”라고 답변했다.
이는 신라에 전혀 새로운 성격의 지배집단이 형성되었음을 의미했다. 이는 김춘추의 혈통적 정통성과 그로부터 차별받던 가야계 김유신 지배 세력의 결합을 의미했다.
이렇게 자식의 원수에 대한 분노가 계기가 되어 백제를 무너뜨리기로 결심을 하게 된 김춘추는 백제정벌을 위한 구원병을 청하기 위해 고구려 대막리지 연개소문을 찾아갔다. 이 때가 서기 642년의 일이었다. 그러나 고구려에서는 신라가 점령한 한강이남 땅을 내어 놓으라고 하며 오히려 김춘추를 볼모로 잡아 감금하고 말았으니, 고구려 원병을 얻기는커녕 스스로 적의 땅에 찾아든 꼴이 되었다. 이 때 불행 중 다행으로 선도해(先道解)라는 승려를 만나 구토지설(龜兎之說 :별주부전 이야기)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김춘추는 이 우화에서 암시를 받고 계략을 꾸며 마침내 구사일생으로 고구려를 탈출하여 신라로 돌아오게 되었다.
고구려에 갔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사지(死地)에서 겨우 살아 돌아온 김춘추는 원수를 갚기 위해 절치부심(切齒腐心)하다가 5년 후에는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서기> 대화 3년(647년)조에 “대아찬 김춘추가 공작 한 쌍과 앵무새 한쌍을 헌상(獻上)해옴에 따라 그를 인질로 삼았는데 그는 또 얼굴이 잘 생기고 담소를 잘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김춘추가 왜 일본에 찾아갔는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지만, 미루어 짐작컨대 청병외교의 목적으로 찾아갔을 것이라 여겨진다.
일본에서 돌아온 김춘추는 다음 해에 아들 법민(후일의 문무왕)을 데리고 唐에 입조(入朝)하여 태종에게 나당(羅唐) 연합을 하여 백제를 먼저 쳐 멸한 연후에 남북 양쪽에서 협공하여 고구려를 쳐 없애자고 제안하였다.
당시 당태종은 수양제 이래 고구려 공격이 실패를 거듭함에 따라 전략적 대전환을 시도한 때였다. 바로 이 해 11월에 “신라재상 김춘추가 그 아들 법민과 함께 당나라 조정을 찾아왔으니 당태종으로서는 자신의 전략적인 시도가 시의적절(時宜適切)하게 실현될 수 있는 호기(好期)를 맞게 된 것이다.
이때 당나라는 춘추의 요청에 따라 관복을 주고, 동복도 하사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듯이 당태종의 이들 부자에 대한 대우는 각별했으며, 이들 부자의 청병외교는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자치통감>에 의하면, 당나라 조정에서는 애초부터 백제를 칠 의도는 없었으나, 춘추 부자의 요청을 받아들여 “신라 재상 김춘추가 그의 아들과 함께 입조하니, 춘추를 특진시키고 그의 아들은 좌무위장군(左武衛將軍)으로 삼았다.”고 한다.
이때 김춘추 부자의 대당(對唐) 외교가 없었더라면, 당나라가 백제를 치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백제는 신라보다 당나라에 번번이 조공하였음에도 당나라가 고구려보다 먼저 백제를 치게 된 것은, 아마도 당나라 전략이 지상전에서 해상전으로 전환된 시점에서 김춘추가 백제정벌을 요구했기에 결정된 것으로 보인다.
이때 당나라에서는 고구려 공격을 목표로 준비되어 있는 선단(船團)을 남으로 돌려 백제를 먼저 점령한다면 고구려를 남북으로 공격할 수 있어 수(隋) · 당(唐)의 오랜 숙원이었던 고구려를 정복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신라 김춘추의 청병외교는 수나라 때부터 공격하여 실패를 거듭한 고구려를 당으로 하여금 해상전략으로 바뀐 바로 그때에 고양이에게 생선을 준 격이었다.
이와 같은 전천후 외교를 벌인 김춘추의 심리 저변에 자식에 대한 복수심이 깔려있었다고 본다면 이 일로 삼국통일의 계기가 되었으니, 이것은 곧 합천 미인이 이 거대한 삼국통일의 역사적 사건에 휘말리게 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래서 예로부터 경국지색(傾國之色)이라 하였던가? 경국지색 또는 경성지색(傾城之色)이라는 말의 원래의 뜻은 ‘나라를 위태롭게 하다’는 뜻으로 漢書에 나와 있는 말이다. 경국지색이란 나라 안에서 으뜸가는 미인이란 뜻이다. 임금이 혹하여 나라가 뒤집혀도 모를 만하게 빼어난 미모를 두고 하는 말이다.
이런 와중인 647년(선덕여왕 16년, 진덕여왕 1년) 상대등 출신의 이찬 비담(毗曇)과 염종(廉宗)의 반란사건이 발생했다. “여왕은 정사(政事)를 잘 하지 못 한다”는 남성 우월적인 명분으로 일으킨 이 반란에는 서라벌 출신의 진골귀족들이 대거 가담했으므로 김춘추와 김유신이 절대적으로 불리했다.
더구나 한밤중에 김유신 군(軍)이 주둔한 월성에 별이 떨어지는 흉사까지 있었는데, <삼국사기>는 당시 별이 떨어지는 곳은 피를 흘린다는 속설이 신봉되었기 때문에, '비담 군사들의 사기(士氣) 충만한 고함소리가 땅을 진동했고, 여왕은 무서워서 어쩔 줄을 몰랐다'고 적고 있을 정도로 열세였다.
그러나 김춘추와 김유신은 자신들에게 역사적 정당성이 있다고 확신했다. 김유신은 한밤중에 불붙인 허수아비가 달린 연을 날린 후 “떨어진 별이 다시 올라갔다”는 소문을 내서 인심을 수습하는 한편 별이 떨어진 자리에 제사를 지내고 비담이 진주한 명활성으로 진격했다.
가야계가 주축인 관군은 비담의 반란을 진압하는데 성공했다.
이 반란을 진압함으로써 김춘추와 김유신은 명실상부하게 신라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했다. 이는 신라 지배층 내부의 정치개혁을 성공시키는 초석이 되었다.
그러나 김춘추의 목적은 신라내부의 정치개혁이 아니었다. 내부의 정치개혁은 ‘삼국통일’이라는 새로운 국가비전을 실현하기 위한 전제조건에 불과했다.
이렇게 명분과 실리를 다진 결과 김춘추는 진덕여왕 사후 군신들의 추대를 받아 즉위할 수 있었다. <삼국사기> 김유신 조는 “진덕여왕이 돌아가고 후사가 없자 김유신이 재상 알천과 의논해 춘추 이찬을 맞아 653년 즉위케 했다”고 적고 있는데, 이는 군사권을 장악한 김유신의 실력으로 김춘추의 덕망을 명분삼아 임금으로 추대했음을 뜻한다.
멀고 험난한 과정을 거쳐 김춘추는 왕좌에 올랐으나 그 미래가 순탄해 보이지 않았다. 먼저 그는 패위당한 진지왕의 손자라는 약점과 진골출신으로서 왕위에 올랐다는 약점이 있었다. 당초 군신들이 그 대신에 이찬 알천을 추대하려 했던 데서 알 수 있듯이 신라에 진골은 많았다.
그가 사망하면 군신들은 그의 아들 대신에 다른 진골을 왕으로 추대할지도 몰랐다. 이를 막는 길은 후계체제를 빨리 갖추는 것이었으나 구세력의 동의 없이 태자 책봉을 강행할 경우 반발을 받을 우려가 있었다.
김춘추가 53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면서 그는 구세력과 타협했다. 재위 2년째 되든 해에 이찬 금강(金剛)을 상대등으로 삼는 대신 그의 장자 법민(문무왕)을 태자로 책봉한 것이다.
그리고 둘째 아들 문왕(文王)을 이찬, 노차(老且)를 해찬으로 삼아 태자를 보좌하게 했다. 재위 7년(660년) 정월 상대등 금강이 사망하자 김유신을 그 자리에 임명함으로써 오랫동안 꿈꾸던 국왕 김춘추와 상대등 김유신 체제를 구축할 수 있었다. 이제 김춘추 왕권 체제에 도전할 세력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김춘추의 목적은 단순한 왕권강화에 있지 않았다. 그가 험난한 과정을 거쳐 왕위에 오른 이유는 ‘삼국통일’이라는 최종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강한 집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부체제 정비를 끝낸 이듬해인 서기 660년 8월 신라는 드디어 백제 정벌에 나섰다. 당나라의 소정방이 13만 대군을 거느리고 서해를 건너자 그는 직접 태자 법민, 상대등 김유신 등과 함께 5만군을 거느리고 전쟁터로 나갔다.
18만 나당 연합군과 대적하는 백제는 지형을 잘 이용하여 결사 항전함으로써 전세는 오히려 처음에는 백제에게 유리하였다.
<삼국사기> 권 47, 계백전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계백은 장군이 되어 결사대 5천명을 뽑아 나당 연합군을 막게 되었다. 그가 말하였다. “한 나라의 백성으로 당과 신라의 대군을 맞이했으니, 이 나라의 존망을 알 수 없도다. 내 처자자식이 적들에게 잡혀 노비가 될까 두려운 바. 살아서 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장쾌하게 내 칼에 죽는 편이 나으리라.” 마침내 계백은 칼을 빼어 자기의 처자식을 다 죽였다.
계백은 지금의 논산시 연산면 신량리 일대의 황산벌에 이르렀다. 그러나 넓은 들판에서 열 갑절이나 많은 대군을 정면 상대할 수는 없었다. 계백은 험한 곳을 이용해 세 개의 군영(軍營)을 설치하고 나당 연합군을 기다렸다. 이곳은 지금의 황령산성과 산직리산성, 그리고 모촌리산성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는 <손자병법>에서 “미리 충분한 준비가 되어 있는 자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자를 공격하면 반드시 이긴다”는 이론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군사들에게 맹세해 말하였다. “옛날 월(越) 왕 구천(句踐)은 5천 명의 군사로 오(吳)의 70만 병력을 쳐부수었다. 오늘 우리는 마땅히 각각 힘껏 용기를 다해 승리를 쟁취하여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리라.” 마침내 치열하게 싸워 한 사람이 천명을 당해내지 못하는 이가 없을 정도이니, 신라군이 그만 퇴각하였다. 이와 같이 맞붙어 싸우고 물러나기를 네 번이나 하더니, 힘이 다해 백제의 병사들은 모두 장열하게 싸우다 죽었다. 나당 연합군이 네 차례나 물러났던 이 전쟁에서 ‘관창(官昌)의 죽음’이 전세(戰勢)를 바꾸어 놓았던 것이다. <삼국사기> 권 47, 관창전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관창(官昌)은 신라 장군 품일(品日)의 아들이다. 위의(威儀)와 풍채가 우아하여 소년 시절에 화랑이 되었는데, 사람들과 잘 어울리더니 나이 열여섯에 말 타고 활쏘기에 능숙하였다. 당 현경(顯慶) 5년 경신(660)에 왕이 군사를 출동해 당나라 군사와 함께 백제를 칠 때 관창을 부장으로 삼았다. 황산(黃山)의 들에 이르러 양국 군사가 서로 맞서게 되자, 아버지 품일이 그에게 일렀다. “네가 비록 나이 어리나 큰 뜻과 기개가 있으니, 오늘이야말로 공명을 세우고 부귀를 차지할 때이거늘 어찌 용맹함이 없을 수 있겠느냐?” 관창이 “그렇사옵니다”하고 곧 말에 올라 창을 비껴들고 바로 적진에 쳐들어가 말을 달리면서 두 사람을 죽였으나, 사로잡혀 백제 장수 계백(階伯) 앞에 끌려갔다. 계백이 투구를 벗기게 하더니 그가 어린 나이에도 용맹한 것을 아깝게 여겨 차마 죽이지 못하고 탄식해 말하였다.
“신라에 빼어난 인물이 많구나, 소년조차 이러하거늘 하물며 장사들이야 어떠하겠는가!”
계백은 관창을 살려 보내도록 하였다.
계백이 자기 부하 사졸 두 명을 죽인 관창을 생포했지만, 너무 어린 장수였기에 살려 보냈던 것이다. 생포한 적을 살려 보내는 이러한 계백의 태도에는 ‘살생유택’의 어진 마음이 그에게 있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출정하면서 자기 가족을 무정하게 베었던 계백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관창은 신라 진영에 돌아와서 말하였다. “내가 적진에 들어가 적장을 베지 못하고 깃발을 뽑아오지 못한 것이 몹시 한스럽도다, 다시 가면 반드시 공을 이룰 수 있으리라.” 말을 마치자 손으로 우물물을 움켜 마신 다음 다시 적진에 달려들어 매섭게 싸우니, 계백이 그를 잡아 베어 죽이고 그 목을 말안장에 매어 돌려보냈다. 품일이 아들 관창의 머리를 잡고 소매로 피를 닦아주며 말하였다. “내 아들 얼굴 모습이 살아 있는 듯하구나, 나라의 일에 훌륭하게 죽었으니 후회할 것이 없다.”
신라 진영의 군사들이 그 광경을 보고 의기가 끓어올라 마음을 떨쳐 일으켜 북을 울리고 함성을 지르면서 나가 쳐부수니 백제군이 크게 패하였다. 계백도 전사하였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닌가? 나당 연합군과 백제의 결사대가 마지막 결전을 치루었던 옛 황산벌은 지금은 논산 훈련소가 자리하고, 그때 서로 적국이었던 신라와 백제의 후예들이 그곳에 모여와 함께 부르는 훈련소 군가가 오늘도 논산일대에 우렁차게 메아리치고 있다.
백제의 옛터전에 계백의 정기 맑고
관창의 어린 뼈가 지하에 혼연하니
울창한 호남무대 높이 우러러 섰고
대한의 건아들이 서로 모인 이곳이
오! 젊은이의 자랑 제2훈련소
상고사(上古史)인 <동사강목(東史綱目)>을 쓴 조선 후기의 실학자 안정복(安鼎福)은 “계백이 관창을 잡았다가도 죽이지 않은 것은 인(仁)이며, 두 번째 잡았을 때 죽여서 그 시체를 돌려보낸 것은 의(義)요, 중과부적(衆寡不敵:)해서 마침내 죽어버린 것(백제의 오천 결사대가 계백과 함께 이 전투에서 모두 옥쇄(玉碎)하였음)은 충(忠)이다”고 평가하면서, “계백은 장수로서의 이상적(理想的) 덕목(德目)을 모두 갖춘 불세출(不世出)의 영웅(英雄)이었다.”고 말하였다.
김춘추는 웅진성(공주)으로 피난했던 의자왕의 항복을 받을 수 있었다. 이때 김춘추는 대야성 전투에서 반역행위를 한 모척(毛尺)과 합천 미인의 남편이었던 검일(黔日)을 붙잡아 처형하였다.
개국 이래 700여 년간 계속되던 두 나라의 전쟁이 신라의 승리로 결판이 난 것이다. 김춘추의 딸 고타소낭이 대야성에 죽은 18년 전만 해도 이런 결과를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합천의 대야성 1차 전투는 일시적으로 백제가 승리를 하였지만, 이 전투를 말미(末尾)로 백제는 패망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으므로 대야성 전투의 역사적 의미는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신라가 대야성(大耶城) 전투의 패배의 위기를 극복하고 체제를 정립하는 과정에서 군권을 장악한 김유신(金庾信)과 외교권을 장악한 김춘추의 역할이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등장하면서 이후 양자가 연합해 새로운 왕실의 핵심 세력을 형성했으며, 바로 이들의 주도하에 삼국통일을 성취할 수 있었던 것이다.
비록 김춘추는 백제 멸망 이듬해인 661년, 재위 8년 만에 사망했으나 생전에 김춘추로부터 확실한 통치 수업을 받은 후사 법민(문무왕)은 고구려까지 멸망시켜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했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우리 역사와 강역(疆域)을 축소시킨 것으로 비난받았지만 신라의 입장에서 볼 때는 두 강대국과 사이에서 이룩한 빛나는 성취였다. 백제는 의자왕의 정치개혁 실패로, 고구려는 연개소문 사후 내부 분열로 어지러울 때, 신라는 삼국통일이라는 새로운 국가 비전을 제시하고 이를 실천할 새로운 지도자를 갖추어 국민 다수의 동의와 참여를 실현시켜 불가능해 보이는 과업을 완성했던 것이다.
한 여인의 미색(美色) 때문에 어이 없이 무너진 신라와 백제의 대야성 1차 전투는 긴 역사에서 보면 아주 작은 지역 전투에 불과하지만, 이 전투는 결과적으로 백제 멸망의 단초가 되었으며 나아가 삼국통일의 역사적 분기점의 의미를 갖고 있음을 웅변으로 말해주고 있다.
사랑하는 딸 고타소낭을 죽음으로 몰고 간 원수에 대한 김춘추의 분노가 백제를 무너뜨린 계기가 되었으며, 그 중심에는 한 여인, 대야성의 합천 미인이 있었다.
역설적으로, 합천 미인이 없었다면 대야성은 함락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대야성이 함락되지 않았더라면 삼국통일은 어떻게 되었을까?
지금까지 살펴본 합천 미인과 대야성 함락, 그리고 백제의 멸망에 이은 삼국통일의 과정에서 소개된 기록과 비화들은 정치, 외교 및 군사전략과 인간관계의 문제 등에 있어서 오늘에 사는 우리들에게 길이 교훈으로 삼을, 새겨들을 만한 이야기들이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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