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강 물굽이를 뒤돌아보며
박 태 일
황강 물굽이가 누랬습니다. 물을 차며 뛰는 사람들 가운데서 연호사, 함벽루를 건너다보았습니다. 장전 성채 벼랑도 바라보았습니다. 임북리 지붕들도 눈여겨 찾았습니다. 두 해 앞서 한자리 모셨던 제 집안 묘역도 설핏 지나치는 눈 끝으로 밟았습니다. 사람들은 혹 첨벙 첨버덩 주저앉고 혹 옆으로 쓰러지기도 하면서 즐거워했습니다. 황강 물살을 마음에, 몸에 새겼던 것일까요. 오랜만에 들어선 황강, 곧 남정강 물길이었습니다.
황강수중마라톤에 자주 참석하리라 했지만 늘 뜻 같지 않았습니다. 여름휴가 기간과 맞물려 오가는 걸음길이 가장 바쁜 때였던 까닭입니다. 그래도 열다섯 해째, 올해는 기어코 걸음을 다잡았습니다. 그리고 지난 8월 1일. 십 킬로미터를 뛰었습니다. 어느 해 합천에 들렀다 황강 물줄기 위로 곧장 벋어 진주로 나가는 다리며 한길을 보고 기겁을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읍에서 내다보는 아름다운 경관을 널찍한 칼로 죽 그은 듯한 국도 확장이었습니다. 그래도 그 일이 합천을 위해 도움 되는 쪽이라 그런가 보다 하고 넘겼습니다.
올해 봄 집안 아저씨 상일을 당해 잠시 읍에 들렀습니다. 조문 연락을 받고 곧장 읍으로 들어왔을 때였습니다. 모처럼 걸음이라 잠시 황강 줄기를 둘러보고 상가로 향할 계이었습니다. 합천중학교 교정을 가로 지르고 둑길을 따라 늘 그렇듯 연호사 못 미쳐 멈추었습니다. 묵밥집에서 한 그릇 시켰습니다. 돌아가신 할머니께서도 묵밥을 자주 해 주셨고, 그걸 배워 어머니께서도 가끔 묵밥을 내어 주셨던 기억이 새삼스러웠습니다. 묵밥집에 혼자 앉아 묵밥 한 그릇에 막걸리 한 통을 비웠습니다.
그런데 묵밥을 비우고 함벽루에 올라서서 건너다 본 황강 풍경에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아뿔싸. 맞은쪽 대나무 숲이 깡그리 없어진 것이 아닙니까. 언젠가 겉귀로 함벽루 아래쪽으로 산책길을 내어 함벽루를 못 쓰게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려니 하고 있었던 터였는데, 그뿐만 아니었던 셈입니다. 합천이 자랑할 만한 대표 경관 가운데 하나였던 남정강 대나무 숲을 아예 지워버린 것입니다. 너무 놀라웠습니다. 어느새 어느 물가 읍이나 도시에서 흔히 볼 수 있을 유원지 가운데 한 곳으로 바뀌어버린 참혹한 변고였습니다. 그렇지만 그 모래톱에다 차를 대어 놓고 아내와 저는 황강수중마라톤에 참석했습니다. 그리고 애써 즐거운 하루 아침이고자 했습니다. 풍덩풍덩 무자맥질을 쳤습니다.
제가 무슨 달리기 선수도 아니고, 달리기 아니면 못 살 위인도 아닌 처지에 말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러나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합천으로 들어오는 길은 너무 멀고, 합천으로 들어서는 길은 늘 가파릅니다. 팔순을 넘기신 고모할머니께서는 아직도 성치 않으신 몸으로 읍 둘레 몇 개 장터를 돌고 계십니다. 내 파시는 팥이며 수수가 하늘별이나 동전 무더기처럼 바뀔 일이 없을 터입니다만 그 일을 아직 놓지 않고 계십니다. 김 회장님 영결식 날, 읍에 들렀다 버스정류장에서 내린 나는 눈이 붙어버렸습니다. 고모할머니께서 읍내 장터에 내 파실 물건을 차에서 내리고 계셨습니다. 저를 보면 불편하실까 인사도 삼가고 조용히 물러났습니다. 혼자 공원 영결식장으로 걸어가면서 이미 파묘해 버린 충혼탑 아래 증조부 산조 터까지 곁눈으로 가늠하면서 마음 더욱 무거웠습니다.
김형, 김해석 회장님. 어느 부름이 옳을지 모르겠습니다. 저로서야 늘 김 회장님이라 불렀건만 당신께서는 늘 박형, 그렇게 넉넉하게 불러주셨지요. 고향 후배 한 사람 챙기는 즐거움, 너그러운 속웃음이 저에게 박형이라 불렀던 그 부름말 속에 담겼음을 저는 진즉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2층 흐릿한 바둑교실이 무슨 생계에 보탬이 되었겠습니까. 10년을 넘긴 합천문학회 회장 자리가 무슨 큰 명예를 얹어 주었겠습니까. 김 회장님은 합천을 사랑했지만 합천은 그 안의 모든 것을 품기에 너무 굽이가 많은 고을입니다. 당신은 남정강을 사랑했지만 남정강은 너무 변했고 합천도 많이 달라졌습니다.
김 회장님, 저와 첫 만남은 1990년대로 한참 내려갑니다. 1993년에 합천문학 창간호를 내고, 재외 향우 가운데 문인을 챙기시기 시작했을 때였습니다. 마산 제 일터까지 일부러 오시겠다는 전언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손국복 시인과 함께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횟집에서 처음 만났던 날을 기억합니다. 문학과 합천, 고향 사랑과 삶을 뒤섞어 말씀하실 때부터 저는 김 회장님 하시는 일에 온통 찬동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때 그 인연이 이제껏 이리도 오래 이어졌습니다.
김 회장님, 합천문학의 틀을 잡기 위해 노심초사, 겪으셨던 고초를 합천 문인뿐 아니라 지역사회는 기억합니다. 이주홍, 손풍산, 허민, 최인욱, 박산운, 심재언으로 내려오는 합천문학의 전통을 잇고자 하신 일, 내신 뜻이 굽이굽이 황강 물줄기 같았습니다. 저에게 연락을 주실 때마다 저도 걸음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김 회장님 덕분에 제 고향 걸음은 그만큼 풍요로웠습니다. 황동규 시인이 합천 땅을 두 번이나 밟아 가면서 합천 문인과 즐거운 친교 시간을 지닐 수 있었던 것도 새삼스럽습니다. 술을 너무 마셔 다음 날 여행 일정을 마무리 못하신 적은 그때 합천 걸음뿐이었다는 황 시인의 즐거운 고백이 뒷날 있었습니다. 김 회장님 마당에서 형수님이 준비해 주신 탕으로 넉넉했던 다음날이었습니다.
합천 예술문화 연구 창간호를 낸 때가 2007년, 엊그제 일이었습니다. 군 단위로서는 내기 힘든 그 일을 김 회장님은 밀어붙이셨지요. 기억할 일, 되새길 일이 어디 한둘에 그치겠습니까. 사람살이 한세상이 마냥 긴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안타까운 죽음이 너무 많아 슬픈 이승입니다. 김 회장님을 땅 속에 모신 날, 누이는 붉은 명정 위에다 울음을 마구 뿌렸습니다.
불쌍한 우리 오빠
우리는 우짜꼬
안 춥구로 매매 덮어 주이소
불쌍하게 살았어도
저승 가서 하고 싶은 것 다하고 사소
초계 들을 넉넉하게 내려다보는 비알에 김 회장님을 묻고 돌아선 지도 벌써 해를 바꾸었습니다. 누이가 몸부림치며 뿌렸던 눈물이 어찌 누이 한 사람의 것이었다 하겠습니다. 초계 들은 합천 문인 손풍산과 박산운이 자랐던 곳입니다. 한 사람은 언론인으로 꼿꼿하게 살다 갔습니다. 한 사람은 북한으로 넘어가 북한 최대 시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초계 들은 또 회장님을 이어 합천문학회를 뒷바라지하고 있는 손국복 교감이 노심초사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는 곳입니다. 가끔 교실 창밖으로 회장님의 무덤을 멀리 건너다보며 담배를 피워 문다고 합니다. 그런 손 시인의 목소리에 배어 있는 깊은 쓸쓸함을 저는 알 것만 같습니다. 아직도 담배를 끊지 못한 변명치고는 너무 가슴 아리는 변명인 셈입니다.
김 회장님, 해야 할 일, 돌볼 사람 그리도 많았던 이승입니다. 모처럼 황강 물줄기를 밟으며 뛰며 누우며 주저앉으며 회장님을 생각했습니다. 한때 재첩 잡기, 피라미 잡기가 그리도 즐거웠던 물기슭입니다. 사람 만남에 늘 이해가 앞서지만 그런 것을 떠나 그저 좋았던 몇 되지 않은 만남이 김 회장님과 얽힌 일이었다는 사실이 제 가슴을 더욱 미어지게 합니다. 황강수중마라톤에 가기 위해 합천으로 들어오면서 굳이 창녕으로 적포로 길을 잡아 초계 들을 지났습니다. 차창으로 회장님이 누워 계신 무덤자리를 멀리 눈대중하며 율곡으로 들어섰습니다. 앞으로 몇 철, 몇 차례나 제가 더 초계 들을 지나게 될까요.
이제 저승 고을에서 지내시는 일에도 이력이 붙으셨는지 여쭙습니다. 아는 이 모르는 이 통성명은 제대로 하셨는지요. 거기서도 바람 불고 비 오는지요. 울고 웃는 사람들 말소리 번잡스럽지는 않은가 궁금합니다. 저승 마을 어느 어귀에 소주라도 드실 술청이 있기는 있다는 말씀인지 여쭙습니다. 그래도 저승 생활에 정 많이 들이시기 바랍니다. 어느 세상에 강이 있다 한들 합천 고을 황강만하겠습니까마는 거기 강가도 자주 걸으시기 바랍니다. 모래가 맑고 물이 도는 곳에는 어디서나 좋은 벗이 있을 터입니다.
그러고 보니 돌아가신 뒤 처음으로 전해 드리는 소식입니다. 가끔 연락드리겠습니다. 저승길 저승 마을에서 평안하소서. 남정강 시인으로 행복하소서. 삼가 이승에서 먼 잔을 올려 드립니다. 곡 김해석, 곡 남정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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