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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합천문학24호 작품 노부부와 자장면외3편 이동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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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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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 |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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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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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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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01 05:06:37 |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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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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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부부와 자장면
이 동 실
그날따라 바람은 온기라곤 한 점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냉혹했다. 살벌한 바람에 손끝은 저려오고 온몸은 바들바들 떨려왔다. 영하의 날씨지만 딸애에게 반찬과 옷가지를 갖다 줘야겠다는 생각에 길을 나섰는데, 시외버스터미널까지 천리나 되는 듯 멀게만 느껴졌다.
터미널로 들어서자 한 노부부가 눈에 들어 왔다. 할머니에게 당신의 목도리를 벗어 감아주는 자상한 할아버지 모습이었다. 그런데 왠지 낯설지가 않았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내 기억 저편에 어둠으로 채색되어진 얼굴이었다.
20대 초반, 유치원에 근무할 적의 일이다. 함께 근무하던 선생님들과 자장면이 맛있다고 소문 난 집을 찾았었다. 삐걱거리는 나무대문을 밀고 들어서는데, 자장면 그릇이 내 눈앞을 휙 날아가더니 바닥에 내동이 쳐졌다. 체구가 크고 얼굴도 우락부락하게 생긴 남자가 욕을 해되더니 밖으로 나가 버렸다.
대학을 갓 졸업하고, 결혼에 대한 풋풋한 호기심을 갖고 있던 내 꿈이 상처받는 순간이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안주인은 굳은 채로 서로의 손을 잡고 서 있는 우리를 살며시 끌어다 자리에 앉혔다. 미안해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그리고는 놀란 토끼눈을 하고 웅크린 딸의 손을 잡고 주방으로 들어서며 한숨을 내쉬었다. 작은 키에 동그랗고 하얀 피부, 선하게 생긴 그녀의 표정이 너무 슬퍼보였다.
“퍽 퍽 퍽!”
밀가루 반죽을 내리치는 소리가 한을 토해내는 아낙내의 울음처럼 들렸다. 얼마 후 자장면을 내온 여인의 눈가에는 보이고 싶지 않았을 흔적들이 묻어 있었다. 하얀 밀가루 눈물이었다. 나는 중국 음식을 좋아하진 않지만 그날 이후 자장면을 먹으러 자주 갔었다.
세월이 흘러 나도 가정을 꾸렸고 자식을 두었다. 어쩌다 자장면을 먹으면 그 부부의 모습이 떠오르곤 했는데, 정말 우연히도 터미널에서 만난 것이다. 젊은 연인처럼 빨간 점퍼를 커플로 입고 머리가 희끗희끗한 아내를 챙겨주는 그 남자의 손길은 익숙해 보였다. 반가움에 인사를 했더니 그들도 나를 기억해냈다.
“아이고 가게를 재미삼아 할라카이 딸이 못하게 해가 그만 뒀지. 조그맣던 딸이 시집을 가서 손자가 벌써 대학생 아이가. 잠바도 우리 사우가 메이커 사 주가 입고 다니는데 이기 참 따시다.”며 사위자랑을 늘어놓았다.
여전히 곱다는 내 말에 산전수전 다 겪고 보니 그래도 영감이 최고라며 웃으셨다. 한창 싱그럽던 젊은 날 우리가 받았던 그날의 충격을 기억이나 할까마는. 옛날의 그 남자는 짐짓 바람이 차다며 헛기침을 해됐다.
딸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산다며, 바람 앞의 등불 같아 보였는데 저렇게 노년을 멋있게 보내고 있다니 가슴이 뭉클했다. 나는 자판기에서 따뜻한 커피 두 잔을 뽑아 손에 쥐어 드렸다.
할머니는 그 세월을 어떻게 견뎌내셨을까? 면발을 뽑으며, 면처럼 질기고 질긴 인연의 이치를 터득한 것일까? 날씨처럼 냉혹하고 살벌한 시간들을 빗겨서며 마음 비워내는 연습을 한 것일까?
요즘 사람들 같으면 저 세월을 이겨내기나 할까. 지난해 한국의 이혼율이 OECD국가들 중에서 9위라는 충격적인 말을 들었던 터라 할머니가 더 대단하게 생각된 것이다.
오래전 할머니가 해주신 말씀이 떠올랐다. 혼례를 앞둔 어느 날, 내 손을 잡고 해주신 말이다. 남편이 미워지고 살기 싫어질 때는 소나기 지나가기를 기다리듯 엎드려 피해가라 하셨다. 그렇게 살다보면 웃을 일이 많아져서 살아 볼만한 것이 인생이라 했던 그 말씀을 잊지 않고 살아온 터였다.
어느새 움츠려 들었던 몸과 마음이 노부부의 정겨운 모습을 보면서 따뜻해졌다. ‘나도 저렇게 곱게 늙어가야지’ 다짐을 하면서 버스에 올랐다.
‘밀키스’ 여동생
이 동 실
여동생이 전화를 해왔다. 객지 사는 조카가 집에 온다는 말을 듣고 감주를 만들었으니 가져가라는 거였다. 언젠가 아들이, 이모가 만든 감주가 제일 맛있다고 한 말을 기억하고 있었나보다. 그 후 조카가 온다고 하면 바쁜 중에도 감주를 만들어준다.
수화기를 내려놓고 하얀 다기에 따뜻한 물을 붓는다. 찻잔에 녹차 잎을 띄우니 여동생과의 추억이 파르스름한 빛으로 함께 우러난다.
나는 다섯 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다정하기보다 버팀목 같았던 언니와는 9살, 우직한 장손 오빠와는 5살 터울이라 형제간의 위계질서가 철저했다. 부모님도 엄하셨지만 언니 오빠가 더 무서웠고, 그들의 말은 곧 법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존대어를 썼고 싸운 기억이라곤 거의 없다. 언니나 오빠가 부르면 나는 즉시 달려갔는데 성격이 활달한 동생은 달랐다. 그들이 심부름을 보내면 “예” 대답은 해놓고는 땅거미가 짙게 내린 밤에야 집으로 오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내 몫으로 돌아오는 심부름은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동네에는 내 또래 여자아이가 6명 있었다. 우리는 나무그늘 아래 모여 고무줄놀이나 소꿉놀이를 하면서 놀았지만, 3살 아래인 여동생 친구들은 20명이나 되었다. 노는 것도 나와는 차원이 달랐다. 마냥 신명난 그들은 오글오글 몰려다니며 이웃동내까지 원정을 가기도 했고, 산에다 두더지처럼 굴을 파고 그 안에 모닥불을 피워 놀며 동네 사람들을 놀라게도 했다. 어느 날은 이웃 집 과수원의 설익은 과일을 몽땅 따서 또래 부모님들이 사과를 하는 진풍경도 있었다. 그 뿐인가. 친구 집을 돌아가면서 닭서리하기 일쑤였다.
한번은 집 닭장 안의 닭다리에 새끼줄이 묶여 있었다. 동생의 소행임을 눈치 채고 물었더니 모른 척 해달란다. 오늘은 우리 집 순서라서 표시 해두었다는 게 아닌가. 그때 부모님도 짐짓 모른 척 해주셨던 것 같다. 금쪽같은 달걀이 심심찮게 없어진다는 말씀을 하면서도 캐묻지 않은 걸 보면.
왈가닥 동생과 나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대구로 유학을 갔다. 그런데 동생이 나 보다 덩치가 커서 그런지 사람들은 나를 동생으로 여겼다. 나는 동생 같다는 말이 듣기 싫었고, 동생은 언니 같다는 말을 싫어했다. 내가 그랬던 이유는, 나도 언니와 오빠처럼 동생에게 존재감 있는 언니가 되고 싶었다. 그런데 언젠가 동생도 가족모임에서 푸념을 했다. 언니는 태어날 때부터 보호본능을 갖고 태어났다며, 언니보다 체격이 커서 항상 손해를 봤다는 것이다. 심지어 보약도 언니만 챙겨주었다는 말에, 어머니는 오남매를 똑 같이 키웠다고 발뺌을 하셨다. 나도 특별대우를 받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데, 그렇다고 하니 그런 것 같다며 마주하고 웃었다. 이렇듯 우리는 이 십 여년을 함께 했는데 내가 결혼을 하면서 헤어지게 되었다.
나는 합천으로 시집을 갔다. 4대가 함께 살았지만, 외로워서 많이도 울었다. 신세대가 들으면 웃을 일이지만 친정어머니는 시어른들 계시는데 친정가족이 드나드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며 동생을 만류했다. 그래도 내가 너무 힘들어 하면 여동생은 엄마 몰래 다녀가곤 했다. 나는 그런 동생이 곁에 있으면 든든할 것 같아 합천으로 시집오라고 했고 그럴 때마다 동생은 고개를 흔들었다.
“언니! 나는 답답해서 이 골짜기 들어와서 못살아요.”
무슨 말인지 알면서도 ‘함께 지내면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 줄 텐데’ 하는 마음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시집온 지 2년 후 아들 창대의 첫돌잔치가 있었다. 음식상 차리는 걸 도와주러 온 동생에게, 남편의 후배가 ‘밀키스’ 음료수를 동생에게 내 밀며 당시 유행하던 광고 흉내를 냈다.
“사랑해요 밀키스!”
모두들 달싹 웃으며 지나쳤는데, 그날 이후 처제를 왕비처럼 떠받들며 살겠다고 남편을 졸라댔다. 나 역시 그 후배가 듬직하고 직장도 반듯해 친정가족들께 제부 감으로 추천을 했다. 때마침 동생 혼사 말이 오가던 중이었다. 언니와 오빠는 인연은 정해져 있는 것이니 시간을 갖고 생각해 보자 했다. 나는 남편후배에게 관심이 있던 터라 다른 신랑감은 아예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미적거리는 동생을 앉혀놓고 다그쳤다.
“너는 뭐가 그리 잘났노? 그래도 형부후배가 제일 좋더구마.”
내가 던진 그 말에 순간 마음이 상했지만 얼마나 착실하면 언니가 저렇게 권하나 싶어 결혼을 결정했다는 게 아닌가. 나는 동생이 그 이야기만 하면 지금도 오금이 저려온다.
나의 바람대로 동생은 합천으로 시집을 왔다. ‘밀키스’로 인연을 맺게 된 여동생과 이야기 나눌 시간이 부족해도 그녀가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든든하다. 제부는 통이 컸다. 인정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은데다 황소고집이었다. 아이가 셋이나 되는데 어느 날, 직장에 사표를 던지고 사업을 시작했다. 여러 가지 사업 끝에 결국 음식점을 개업했다. 속도 없는 듯이 싱글거리며 식당을 운영하는 동생을 볼 때마다 가슴이 짠하다.
중매는 잘하면 술이 석 잔이고, 잘못하면 뺨이 석 대라고 했던가. 나는 제부를 만나면 신신당부를 해야겠다. 남은 세월 아끼고 사랑하며 알콩달콩 더 재밌게 살라고…….
그러면 훗날 여동생이 내게 술 한 잔을 권하며 “언니야! 나 합천으로 시집 오길 잘 한 것 같아요.” 하지 않겠는가.
봄 햇살이 따스하다. 퇴근길에 ‘밀키스 여동생’을 만나러 가야겠다.
찻잔에 담긴 사랑
이 동 실
저녁식사 후에 남편과 함께 여유롭게 차를 마시며 그날 있었던 일들을 주고받는다. 대화 내용이라야 소소한 것들이지만, 그와 함께 시간을 공유할 수 있는 행복한 시간이다.
오늘은 무슨 차를 마실까 생각하다가 오미자차를 마시고 싶다며 은근슬쩍 남편에게 말했더니 그가 벌떡 일어서며 물었다.
“오미자 어디 있노? 액은 얼마만큼 부어야하고 어떤 잔에 해야 하노?”
설명하는 게 더 번거로운 것 같아 일어서다가 책장 옆, 키 작은 장식장에 눈길이 가 멈췄다. 나의 보물 창고, 내 나름대로 인연 있는 소중한 물건들이 보관되어 있는 곳이다.
순간, 찻잔 하나가 눈길을 끌었다. 흰색바탕에 빨간 테를 두른 미니 찻잔이다. 오래전의 일이 떠올랐다.
시아버지는 경찰 공무원으로 집에서 한 시간 남짓 거리인 ‘가야 파출소장’으로 근무하셨다. 그곳은 해인사 아래에 자리하고 있어 풍광이 빼어났고 또 도예공예가 발달해 생활자기와 고급 도자기들이 생산되는 이름 난 곳이다.
관사에서 생활하는 시아버지를 위해 어머니는 일주일에 한 두 번씩 반찬을 마련해 가곤 했다. 아버님이 본가로 오시는 날은 시할아버지께서 편찮으시거나 집안 대소사나 본서에 행사가 있는 특별한 날이었다.
신혼시절이었다. 오전 학원 수업을 마치고, 점심식사 하러 집에 왔다가 맨발로 마당에 있는 화초에 물을 주며 더위를 식히고 있었다. 그때 제복차림의 아버지께서 모자를 벗으시며 들어오시는 게 아닌가. 화들짝 놀란 나는 화초를 손질하던 어머니 등에 찰떡처럼 바짝 붙었다. 그 모습을 본 당신께서는 서운하셨던가 보다.
“내가 괜히 왔나? 나는 며늘아기가 보고 싶어왔는데, 내가 그리 무섭나?”
“아니 온다는 말도 없이 우짠 일인교?”
어머니의 반색에도 아버지는 대청에 앉아 한동안 말씀이 없었다. 나는 죄스러워 얼굴이 홍당무가 되었다. 얼른 수박화채를 만들어 대청마루로 석고대죄 하듯 올라갔다.
“아버지! 죄송합니다. 맨발로 서 있는 제 모습이 부끄러웠습니다.”
“내가 싫은 건 아니제?”
그제야 농담을 건네며 제복 호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셨다. 당신 성품으론 정복 주머니에 불룩한 물건을 넣어온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는데. 포장지에 돌돌 말려 있는 물건을 꺼내며 말씀하셨다.
“아가, 마음에 드나 봐라.”
포장지를 풀던 내 눈이 동그래졌다. 흰색바탕에 빨간 테를 두른 깜찍한 미니 찻잔 한 쌍이었다. 앙증스런 찻잔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좋아하는 내 모습을 보며 아버지도 흐뭇한 웃음을 웃으셨다. 전혀 상상도 못했던 선물을 받고 얼마나 행복했던가.
당신께서는 도예전시장에서 며늘애 생각하며 찻잔 한 쌍을 구입해 오신 것이다. 점잖은 체면에 호주머니에 넣어, 그것도 무더운 뙤약볕에. 내 점심시간에 맞춰서.
더 놀라운 일은 그로부터 열흘 후. 아버지께서 똑 같은 미니찻잔 아홉 쌍을 예쁘게 포장해서 갖고 오셨다. 학원을 운영하면서 그것도 4대와 함께 대가족살이하는 며늘애에게 고마움의 표시로 주문제작한 것이라 했다. 가슴이 뭉클했다.
나는 찻잔 열 쌍을 정성스럽게 닦아 장식장에 진열해두고 필요할 때만 요긴하게 사용했다.
당신 살아생전에도 아꼈는데, 돌아가시고 나니 그 찻잔은 유품이 되어 더 소중하게 여기게 되었다. 어쩌다 마음이 울적 할 때나 아버님이 그리울 적에 찻잔을 보면 당신을 뵌 듯 가슴이 따뜻해졌다.
그런데 행여 깨질까봐 애지중지하고 있는 엄마의 마음을 알 리 없는 애들은 찻잔을 자꾸 쓰자며 졸라 됐다.
어느 날인가, 대학생이 된 큰딸이 자취를 시작하면서 “엄마 저 커피 잔 한 쌍 주면 안돼요?”했다. 이제 딸아이도 그 잔의 소중함을 알 나이가 된 것 같아 선뜻 세 쌍을 내 주며 말했다,
“이 잔은 그냥 찻잔이 아니라 할아버지의 유품이란다. 소중하게 오래 간직 했으면 좋겠다.”
나는 아들과 작은딸에게도 각각 세 쌍씩을 나눠주기로 마음먹었고, 얼마 후 제 몫들을 다 챙겨갔다. 이제 내 품에 남은 건 한 쌍뿐이다.
찻잔을 자녀들과 나누어 가지니 마음이 더 풍성해 지는 것 같았다. 아이들도 그 잔을 나만큼이나 소중하게 여겼다. 아버님과나, 자녀들까지 3대가 ‘찻잔’으로 연결된 것 같아 가슴이 뿌듯하다.
“마님! 오미자차 대령했소!"라는 말에 상념에서 깨어났다. 나는 미니찻잔을 꺼냈다. 소중하고 귀여운 잔은 쪼르륵 소리를 내며 오미자차를 담아냈다. 우리는 한 모금씩 나누어 마셨다. 오미자의 예쁜 빛깔과, 시아버지의 사랑까지 합쳐져 맛과 향은 배가 되었다.
찻잔에 담긴 시아버지 사랑, 오늘따라 더 그립다.
처갓집 말뚝
이동실
마누라가 예쁘면 처갓집 말뚝에도 절을 한다는 속담이 있다. 그런데 남편은 아내인 내가 부족해서인지 처갓집 말뚝에 절하는 시늉도 안했고, 내색 또한 없었다.
결혼 후 어른들과 함께 살면서 연년생 아이들을 키우는 일은 녹녹치 않았다. 게다가 학원을 운영하다보니 허구한 날 지쳐있었다. 쉬는 날이면 산해진미도 싫고 잠을 실컷 잤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 그러다보니 특별한 일이 아니면 친정 가는 일도 그리 내켜하지 않았다.
그런 나와는 달리 남편은 처가에 가는 것을 좋아했다. 서너 시간을 족히 달려 처가에 간들 장모님이 씨암탉을 잡아주며 백년손님 대접을 해 주는 것도 아니었고, 한몫 챙길 재산이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리고 나 혼자 친정나들이 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함께 갔다가 남편이 돌아올 땐 어김없이 같이 와야 했다. 어쩌다 친정어머니가 “영이 애미 하룻밤만 더 있다가 가면 안 되겠나?”라고 부탁해도 바늘이 가면 실도 따라 가야한다며 앞세우곤 했다. 그뿐이면 다행이랴. 가족들과 함께 놀다가도 잠자리는 꼭 독방을 차지하는 사람이 남편이었다. 형제들은 정이 유별나다며 놀렸고, 나는 구속도 이런 구속이 없다며 투정을 부려도 곰 같은 남편은 막무가내였다.
요즘 추세는 친정 식구들과 여행을 다니는 것을 당연시하는 것 같다. 그래서 딸 가진 부모는 비행기를 탄다고들 하지만 그런 일도 나와는 무관한 일이라 여겼다. 친정어머니도 만날 적마다 시댁에 잘 하는 것이 여자의 본분이라고 귀에 딱지가 앉을 만큼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또 오빠내외가 효부다 보니 나는 친정엄마를 살뜰하게 챙기지 않았다.
몇 해 전, 어머니께서 동서 살림을 도와주러 서울로 가셨다. 4대가 함께 살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애들마저 유학을 떠나고 우리만 남게 되었다. 어느 날인가 남편이 올 휴가는 장모님과 함께 간다며 사전 의논도 없이 통보해왔다. 친정어머니를 보쌈 하듯 모시고 동해안으로 떠났다. 건강하실 때 잘 해 드리자며 친정엄마를 보시고 휴가철마다 여행을 가는 게 4년째다. 처음에는 불편해 하던 당신께서도 이제는 편안해하셨다. 어머니의 성품으론 사위 앞에 속옷차림을 보인다는 것도 큰 용기가 필요한데, 더운 여름 시원한 차림으로 두런두런 살아온 세월을 풀어 놓기도 하셨다. 나는 옛날이야기 같은 세월을 들으며 어머니 무릎에 누워 오남매 키우느라 쪼글쪼글 해진 엄마의 젖가슴을 만지는 행운까지 누렸다. 그렇게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나는 괜찮다 걱정하지마라” 하신 말씀은 “야야 참 외롭고 허전하더라.”는 어머니의 깊은 속내를 알게 되었다.
남편은 힘든 곳은 휠체어로 모시고 계단은 손을 잡아드리며 장모님을 편하게 모셨다. 거기다 알기 쉽게 설명까지 곁들여가며 어머니를 즐겁게 해 드리고, 후포 수산시장에 들러 가리비와 전복, 돌 문어와 백합 등 싱싱한 해산물을 사다 맛있게 요리도 해 주었다. 손질하는 사위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엄마는 내 허벅지를 꼬집으며 ‘니가 해라.’는 눈짓을 보냈지만 나는 짐짓 모른 척 남편이 해주는 요리를 맛있게 먹었다.
푸른 파도가 넘실대는 동해 바다를 배경삼아 남편은 엄마를 모델로 삼았다. 예쁘게 사진을 찍어서 아들 딸 들에게 보내자고 하니 “다 쭈그러진 애미 본들 뭐 하겠노.”하시면서도 손가락으로 하트를 만들며 소녀 같은 웃음을 지으시던 어머니는 결국 숨겨둔 사위 칭찬을 늘어놓았다. “우리 동네 회관에 가서 아바구해 봐도 사우가 해마다 휴가 데리고 댕기는 이는 아무도 없더라. 할마이들이 부러워하더라. 우리 강 서방이 최고라.”
엄마는 남편어깨에 최고의 힘을 실어주셨고, 그는 싱긋 웃으며 오래오래 건강하시라며 어머니 두 손을 꼭 잡아드렸다. 출렁거리는 동해의 푸른 물결을 보며 나는 가슴이 울컥했다.
가만히 돌아본다. 부부로 살면서 어찌 좋은 날만 있었으랴. ‘남편을 중고가격으로 처분합니다. 쓰던 물건도 덤으로 드릴 테니 필요하신 분은 언제든지 연락주세요’라는 유머에 나 또한 고개를 끄덕인 적도 있지 않았던가. 그러나 이제는 말 없는 남편의 속내를 알 것 같다. 내게 잘해주고 싶은 마음을 일일이 표현하지 못하고 처가라도 데리고 가야겠다는 자신과의 오랜 약속을 미련스레 지켜오고 있었음을.
“내 남편은 팔불출이랍니다. 처가 집 말뚝에 절을 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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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한 작품 감사합니다. 24호 원고 확인하였습니다. 이후 필요한 수정사항은 간사에게 개별 연락을 부탁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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