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도 문학기행 '청산도에 다녀오다'
합천문협이 지난 12월 19일부터 20일까지 1박 2일 일정으로 청산도를 다녀왔다. 청산도는 영화 ‘서편제’와 ‘봄의 왈츠’가 촬영된 영화촬영지로 이름난 섬이다.
전라남도와 대한 해협 사이에 섬이 많은 바다, 다도해 최남단에 위치한 청산도는 다도해 해상국립공원의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섬 고유의 아름다운 자연풍광과 구들장논, 옛 담장 등 우리나라 섬 민속전통문화가 온전히 살아 숨 쉬는 곳이며, 아시아 최초의 ‘슬로시티(Slow City’로 지정받은 곳이다. 미국 CNN이 선정한 ‘대한민국의 가장 아름다운 섬 4위’, 한국관광공사가 선정한 ‘한국인이 꼭 가봐야 할 국내 관광지 100선’에 뽑히며 국내외적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1971년 국가어항으로 지정된 청산도는 난류의 길목에 위치해 있어서 바다의 평균 수온이 15℃를 유지해 예로부터 고등어와 삼치, 파시로 호황을 누리는 어업 전진기지이자 전복, 우럭, 놀래미, 광어 등 수산자원이 풍부한 황금어장으로 명성이 높다.
청산도 슬로길은 청산도 주민들의 마을 간에 이용되던 길로서, 이 길을 걸으면서 아름다운 주변 풍경에 도취되어 절로 발걸음이 느려진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나로서는 평소에 가보고 싶은 섬이었지만, 여의치 않아 미루어 두었다가 다행히 합천문협 회원들과 함께 2015년도 문학기행으로 다녀올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청산도 가는 길목에서
이날도 이화예식장 앞에서 손국복 교육장, 김숙희 지부장, 김상완 선생님, 최병태 부지부장, 정유미 사무국장, 박황규 간사, 윤경선, 이동실, 김현숙 회원들과 진주에서 합류한 이경식 회원까지 11명이 25인승 리무진 합천새천년관광 엔젤렌터카 합천영업소 대표(이오성 씨)버스에 탑승하여 남해의 완도를 향해 달려갔다. 대진 국도를 지나서 남해고속도로와 호남고속도로를 경유하여 목포-광양간 고속도로를 5시간 여 달려갔다.
미지의 세계로 가는 여행은 언제나 마음이 설레기 마련이다. 더욱이 청산도는 영화촬영지로 이름난 섬이라 뭍에 사는 사람들은 한번쯤 가보고 싶은 곳, 회원들은 출발 전부터 마음이 들떠 있었다. 정유미 사무국장과 젊은 회원들이 애써 준비한 먹거리를 차 안에서 나눠주고 권하는 모습에서 진한 동료애가 전해진다. 진주시 지편면을 지날 때는 진주 동녘 산 위에 달걀노른자 같은 붉은 해의 일출광경이 장관을 이루어 이날 회원들의 여행 기분을 아침 일찍부터 고조시켜주었다. 섬진강 휴게소를 지나 김현숙 선생님이 마이크를 잡고 먼저 동요를 부르게 하면서 회원들을 동심의 세계로 끌어들여 차안은 금방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그녀는 30대 초반의 젊은 새댁이지만 마이크를 한번 잡았다하면 청중들을 매료시키는 뛰어난 분위기 메이커이다. 각자 자유곡이 끝나자 그녀가 진지한 표정으로 봉고차 맨 앞자리의 김상완 선생님에게 마이크를 넘겨 묻는 것이었다. “김상완 선생님에게 묻겠습니다. 김상완 선생님은 지금 현재 마음의 나이가 몇이며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지 답변해 주시기 바랍니다”라는 질문을 시작으로 마이크를 넘겨가며 전 회원들에게도 같은 질문이 이어졌다. 현재 역연령(曆年齡)이 50대인 이동실 선생님은 그 마음이 20대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 시대로 돌아가 공부에 열심히 매달리고, 연애도 멋지게 하고 싶다고 한다. 그녀는 지금 삼가초등학교 상담교사로 재직 중이다. 2011년 대장경세계문화축전 때는 경상도사투리말하기 도 단위 대회에서 최우수를 수상할 만큼 말하기에 재질이 뛰어난 사람이다. 현재 합천군 문화관광해설사로도 활동을 하고 있으면서 명관광해설사로 각광을 받고 있다.
평화주유소에서 잠시 휴식을 마치고 회원들이 승차하자마자 마이크는 김숙희 지부장의 차례가 되었다.
마이크를 잡고 그녀가 말하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남편을 일찍 여의고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 때의 이야기다. 시어머니(그녀는 시어머니를 어머니로 불렀다)를 봉양하고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귀가하면 늦게까지 밖에 나와서 기다리시던 시어머니, 그 시어머니가 노쇠(老衰)해지면서 변을 가리지 못해 배설한 것을 그녀는 전혀 더럽다고 생각하지 않고 사랑하는 내 아이의 변을 치우는 듯 했다고 말한다. 그때 며느리의 그 모습을 지켜보는 시어머니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세상을 떠난 아들을 대신하여 가족의 생계를 감당하며, 자기를 친 어머니처럼 정성으로 돌보는 그 며느리에게 깊은 연민의 정을 느끼며 진정 사랑스러웠는지 모른다. 그래서 시어머니는 종종 며느리에게 “나는 니를 사랑하는데 니는 나를 정말로 사랑하나”라고 묻기도 했다고 말한다. 내가 아니면 누가 살피랴, 자기를 믿고 살아가는 그 시어머니를 보살피고 의지하며 살아왔던 파란만장(波瀾萬丈)한 인생 역정(歷程)의 주인공 김숙희 지부장은 그동안 가슴에 묻어두었던 소회(所懷)를 유감 없이 털어 놓고 차안에서 소리 내어 흐느껴 울었다. 그런 그녀의 절절한 삶의 애환이 담긴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 회원들도 함께 눈시울을 적시며 차안은 한 순간 숙연해지는 분위기가 되었다.
제주도에 노부모를 버리고 자식들이 내몰라라 자취를 감추는 현대판 고려장 불륜이 자행되는 이때에, 가슴을 훈훈하게 적시는 이런 아름다운 이야기가 우리 주변, 그것도 바로 우리 합천문협 회원들 중에 그 미담의 주인공이 있었으니 가슴 뿌듯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정유미 사무국장은 여느 여행 때나 마찬가지로 회원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 준비부터 여행과정의 분위기 조성에 이르기까지 최선을 다 하며, 이번 여행의 백미역할을 했다. 그녀의 특이하고 청아한 보이스칼라로 부르는 노래들은 듣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다. 그녀의 마음은 올해 48세에 머무르고 싶으나 6~7세부터 20대~ 40대에 이르기까지 하루에도 몇 차례 마음의 나이가 바뀐다고 말한다. 어리고 젊은 사람들과 어울릴 때는 그 나이대로, 성숙한 사람들과의 만날 때에는 그 사람들과 연령대를 같이 하고 싶은 마음의 표현일 것이다.
손국복 합천교육장님은 마음의 나이가 백살이 된듯하다고 한다. 그만큼 시달리고 과중한 업무 속에 살지만, 그의 바람은 한 백살 마음으로 살면서 쉽게 지지 않는 노을 고운 석양처럼 세상을 아름답게 물들게 하면서 쉽게 지지 않고, 오래 그 색깔과 무늬를 지니고 살았으면 하는 소망을 가진 마음이라고 말한다.
합천에서는 예총회장에 교육장을 겸임하고 있으며, 합천사회에서는 뭇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부러움을 사고 있지만, 그 영광의 이면에는 직무 수행에 따르는 고충이 따르고 있어서 나이가 빨리 가기를 바라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지금 그의 그러한 고충이 합천예술을 발전시키고 미래인재육성에 초석을 다지는 반석(盤石)이 될 수 있도록 우리는 그의 일상의 고충을 위로하면서 더 한층 성원하고 싶은 것이다.
청해진 장보고 공원에서
이런 숙연하고 아기자기한 분위기 속에서 정오가 가까워지는 시간, 차는 완도군 신지도와 고금도를 잇는 연륙교 건설공사가 한창 진행 중인 완도의 해변가에 조용히 자리잡고 있는 ‘청해진 장보고 공원’ 앞에 멈췄다.
장보고는 이곳 완도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젊은 시절 당나라로 들어가 큰 공을 세워 군중 소장이 되어 귀국하였으며, 신라 흥덕왕으로부터 청해진 대사로 임명되어 1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들어와 이곳 완도에 군사보루(軍事堡壘)인 청해진(淸海鎭)을 설치하고 서남해안 일대에서 활동하던 해적들을 소탕하였다. 청해진은 그 후 군사요충지가 되었는데 장보고가 주변국 해적들의 노략질을 막고 한국· 일본· 중국을 잇는 대외 해상무역기지를 만들어 청해진을 중심으로 중국과 일본을 연결하는 중계무역을 하였으며 이슬람 세계와도 교역에 성공한 우리나라 최초의 해상 무역왕이 되었다.
동아시아의 해상권(海上權)을 장악한 장보고는 이후 신라 왕실의 왕위 계승 분쟁에 휘말리게 되어 귀족인 김양의 사주를 받은 염장에 의해 841년 암살당하였다.
그의 체취가 묻은 청해진 유적은 1991년부터 2001년까지 10년간 발굴조사를 통해 성벽과 건물지, 성 입구의 ‘ㄷ’자형 판축유구와 우물, 성 주변을 두른 목책과 묻혀있는 유구를 비롯해 2,100여 점의 유물(遺物)이 출토되었다.
이날 우리 일행이 성문 안에 들어가 살펴본 진영(鎭營)은 그 내부에 바다를 감시하는 3개소의 망루(望樓)와 성채(城砦)가 잘 정비되어 있었고 바닥은 금잔디로 깔려 있었다. 성곽 위에 올라보니 전개(展開)되는 서남해 멀리 저쪽에는 섬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고, 여기저기 가두리양식장들 사이로 어선들이 떠다니고 있었다.
완도군에서는 장보고의 업적을 기리고 해양 개척정신을 재조명하여 전 국민의 귀감으로 삼고자 이곳에 완도 청해진 유적(사적 제308호)과 장보고기념관, 장보고동상 등, 청해진 역사 유적지를 복원하고 운영을 하고 있다.
“역사를 잊고 사는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는 단재 신채호 선생의 말씀을 새겨, 여로(旅路)에 있는 소중한 역사 유적지를 간과(看過)하지 않고 들렸다가 해상왕 장보고의 진영(鎭營)을 걸어보고 지나가는 것도 의미 있는 문학기행이 되리라고 생각했다.
완도에서 청산도로 가는 뱃길
이날 일행은 정오를 40분쯤 지나 완도항에 내렸다. 완도항 주변에는 200여 개의 군도(群島)들이 여기저기 점 같이 둘러싸여 있다. 이 섬들 가운데에는 바로 옆에 인접해있는 장도 청해진 유적지, 명사십리 신지도, 고산 윤선도의 풍류가 흐르는 보길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슬로시티 청산도 등 아름다운 한려수도의 섬들이 한반도 남쪽 끝자락에 모여서 대자연 속의 다도해 해상국립공원을 이루고 있다. 일행은 부둣가 ‘상화식당’에서 전복을 스페샬로 점심식사를 마치고 오후 2시 청산도행 ‘청산아일랜드호’에 승선하였다. 회원들 모두 2층 선실 바닥에 짐을 내려놓고 휴식에 들어갔지만 평소 바다를 동경(憧憬)했던 나는 연말이 되면서 격무에 피로가 누적되어 누워서 안식을 취하는 손 교육장을 깨우지 않고, 최병태 원장과 함께 망망대해가 펼쳐지는 2층 선실 중앙복도 선창(船窓)에 섰다. 청산도 방향의 바다를 향해 선두(船頭)에 매단 태극기와 새마을기 깃발이 저 멀리 푸른 해원(海原)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탈지아의 손수건처럼 펄럭이고 있었다.
이렇듯 흔들리는 마음으로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펄럭이는 깃발은 늘 가슴에 그리는 이상향일 때가 많다. 물결치고 나부끼며 푸른 창공을 배경으로 저렇게 활달하게 펄럭이는 깃발에서 우리는 내일의 밝은 미래를 소년처럼 꿈꾼다.
섬은 아직 오리무중(五里霧中)에 묻혀있었고, 멀리 까맣게 보이는 점 하나가 출항한 지 30여분 지나서야 등대의 윤곽으로 나타났고, 그곳을 10여분 지나면서 운무(雲霧) 속에 가리어있던 우리의 목적지 청산도가 그 수려한 자태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완도부두에서 출항한 지 55분, ‘청산아일랜드호’는 청산도 선착장에 서서히 정박하고 있었다.
청산도에서의 멋진 투어
곱살스러운 빨간 등대와 하얀 등대가 양쪽에 서서 반가운 손님을 맞이하듯 여행자들을 반겨주는 청산도의 관문을 지나 청산도항에서 하선한 일행이 부두에 내리자마자 미리 대기해 있던 ‘보적산장’의 봉고차에 탑승할 수 있었다. 부두에서 15분 거리에 있는 보적산장에서 내린 일행은 여장을 풀고 산장 주인이 알선한 전라도 사투리를 구사하는 50대로 보이는 문화관광해설사 오안옥 씨를 만나 그의 봉고차를 다시 바꿔 타고 이날 오후 4시 청산도 일원 투어에 나섰다.
그녀는 봉고차의 핸들을 잡고 청산도 황금 1코스인 미항길에 들면서부터 해설을 시작했다. 청산도의 면적은 여의도의 5배, 청산도에 딸린 섬은 유인도 5개, 무인도가 9개, 가장 높은 산은 해발 384m의 매봉산이고, 종교시설로는 교회 6개, 암자 1개, 지(池)씨가 주 토착민으로 집성촌을 이루고 있으며, 이곳의 인구는 2,311명, 1981년도에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청산도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42.195km의 슬로길이다. 슬로길은 자연과 전통문화를 잘 보존하면서 사람이 사는 따뜻한 공동사회를 만들자는 운동으로 1999년 이탈리아에서 처음 시작했다고 한다. 살기 좋고 안락한 나라를 모토로 인간적인 삶을 추구하는 슬로시티는 국내에서는 담양, 장흥, 완도, 신안군이 선정됐다.
단순히 현재의 삶을 거부하고 원시적 자연상태의 과거로 회귀하고자 하는 것이 아닌, 코발트색 도시문명의 카테고리에서 잠시 벗어나 한적하고 자연친화적인 산간 또는 해안 벽촌의 길을 천천히 걸으면서 느릿하게 먹고, 여유롭게 생각하며 인간답게 살자는 운동일 것이다.
요즘 각박한 도시생활에서 기계처럼 살다가 귀촌 귀향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추세는 이런 느림의 문화를 사람들이 은연중에 선호하고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런 취지에서 느릿느릿하게 걸을 수밖에 없는 자연적인 생태의 길을 완도군에서 슬로길로 꾸며놓은 것 같다. 여기에는 미항길, 사랑길, 고인돌길, 낭길, 범바위길, 용길, 구들장길, 다랭이길, 돌담길, 들국화길, 해맞이길, 단풍길, 노을길, 미로길 등 총 11개 슬로길을 관광명품 길로 만들어 세계 슬로길 제1호로 지정받았다.
쌈배추 봄동(똥)이 길연도 들판에 파랗게 수놓인 동구정길을 경유하여 해설사 오씨가 서편제길 입구 삼각지 전망대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봄에는 유채꽃과 가을에는 코스모스가 만발하여 주변을 아름답게 수놓는다는 이 길에서 ‘서편제’ 주인공 유봉이가 의붓딸 송화(오정해 분)와 진도 아리랑을 함께 부르며 덩실덩실 춤을 추던 영화장면을 연상하고, 우리 일행들도 이날 돌담사이에서 흘러나오는 진도 아리랑 곡에 맞춰 흥에 겨워 덩실덩실 춤을 추웠다.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응응응 아라리가 났네
문경 새재는 왠 고갠가
구부야 구부구부가 눈물이구나”
~
임권택 감독의 영화 ‘서편제’에 나오는 진도아리랑은 남도민의 정서가 담긴 민족 고유의 향토색 짙은 노래로 남도민 뿐만 아니라 한과 흥을 아는 민족,대한민국 국민이면 누구나 흥에 젖어들 수밖에 없는 흥겨운 노래이다. 이 소리로 영화 ‘서편제’는 상영 1년도 채 안되어 관객 100만을 동원해 1993년 영화진흥공사에서 주최하는 제31회 대종상영화제에서 최우수작품상, 감독상, 신인여배우 주연상 등 6개부분을 석권했다.
“서편제”는 광주, 강진, 보성, 해남, 진도지방을 중심으로 이어져 내려오는 애절하고 섬세한 여성적인 소리가 특색인 반면 “동편제”는 운봉, 구례, 순창 지방에서 전해 내려오는 웅장하고 호탕하며 상쾌한 남성적인 소리를 특색으로 하고 있다. 한국인은 한(恨)의 문화를 흥으로 풀어내는 특별함이 있다. 한의 정서는 억눌림에서 연유했고 흥은 해원(解寃)의 춤에서 시작됐다. 한을 흥으로 풀어내어 정화(精華)했던 슬기로운 민족, 입으로 노래하고 몸으로 원을 그리며 춤을 추는 강강술래, 가난과 곡절을 승화시키기 위한 광대들의 마당놀이, 흥겨우면서도 애절한 풍의 각설이타령 등이 한국적인 심성을 담은 노래들이다.
우리 합천문인들도 리듬을 타는 예술인들이라 흥겨운 가락에 취해 서편제 길을 오르면서 덩실덩실 춤을 추며 한 순간 모두가 서편제의 주인공들이 되었다. 여기에는 다만 흥이 있을 뿐, 사회적 지위도 남녀노소의 구분도 없었다. 노래를 부르며 서편제 길을 따라 슬로길을 곧장 올라간 일행은 에메랄드 빛 초겨울 바다와 그 사이 우리 일행이 숙박하고 있는 도락마을이 내려다보이는 당리마을 언덕위의 하얀집에 들어갔다. 벽에 붙은 영화장면 판화들을 감상하고 일행은 다시 차에 탑승하여 사랑길 당리재를 넘어 권덕리에서 청계리로 향하는 매봉산 산길을 따라 청산도 슬로길 제2코스인 당리 초분(草墳)을 옆으로 보며 지나갔다. 당리 초분은 섬 지역에서 사람이 죽은 뒤 시신을 땅에 바로 묻지 않고 짚이나 이영을 엮어 덮어 두었다가 2~3년 뒤 뼈만을 골라 인근에 마련해 놓은 묘지에 정식으로 매장하는 장례풍습이었다. 청산도 사람들은 초분을 만드는 것을 ‘집안의 자랑이자 명예’로 생각한다고 한다. 당리재를 지나 범바위 언덕 입구에 차를 멈췄다. 여기서 범바위에 이르는 슬로길에 팔짱을 끼고 정답게 오르내리는 청순하고 아름다운 연인들의 모습들을 옆으로 비켜보고 지나며 우리 일행은 슬로길을 15분여 올랐다.
보적산 8부 능선의 가파른 곳에 위치한 이곳은 앞에는 무인도인 상도와 여서도가 보이며 맑은 날에는 좌측 저 멀리 여수시 거문도와 우측으로는 제주도를 볼 수 있는 곳으로 청산도의 푸른 바다를 조망할 수 있는 관광명소이다. 범바위는 권덕리에서 보면 어미 범이 뒤따라오는 새끼 범을 돌아보는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한다. 이 범바위가 강한 자성(磁性)을 띠고 있어서 주변 바다를 운항하는 배들의 나침반이 그 기능을 하지 못한다고 하는데, 이를 모르고 주민들은 그 범바위를 영험이 있는 바위로 신성시하고 있다고 한다.
일행은 범바위 언덕에 서서 자연이 빚은 범바위와 매뚜기 바위, 그리고 바다로 향하는 암수 두 마리의 거북이바위에 얽힌 전설 같은 이야기를 들으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여기에도 오름 방향으로 망원경이 걸쳐있는 전망대가 있었고, 그 위로 100m 쯤에 ‘언덕 위의 하얀 집’이 있었다. 이 집에 들른 일행은 잠시 휴식에 들어가 젓갈로 담은 이 지방 특유의 김치와 맛있게 구워 내놓은 찌짐을 안주로 청산도에서 빚은 하얀 막걸리를 들이키며 잠시 망중한(忙中閑)을 보냈다.
범바위 언덕에서 내려온 일행은 다시 차에 올라 보적산장을 가는 길목의 양지리 구들장논을 옆으로 지나갔다. 다랭이 논의 형태로 비탈에 만들어진 구들장논은 논바닥에 돌을 구들장처럼 깔고 그 위에 흙을 부어 만든 것으로 자투리땅도 놀리지 않았던 섬사람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었다. 돌담의 전형적인 마을, 상서마을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이 마을 돌담은 제주도와는 달리 층층돌 사이에 통풍구가 거의 열려 있지 않았다. 이것들이 거센 바닷바람에 무너지지 않고 튼튼하게 버티고 서 있는 것은 곡선으로 쌓은 석축의 역학적 기술과 담쟁이 넝쿨이 빽빽하게 이 담장들을 둘러싸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돌담길을 따라 둘러본 상서리, 이 마을에서 우리는 옛날 농경시대의 포근한 농촌마을의 옛 정취를 느껴보기도 했다.
상서리 돌담길을 돌아서며 이날 오후 청산도 일원의 긴 투어를 마치고 슬로길을 통해 느림의 의미를 체험하고 보적산장에 돌아온 일행들은 오후 6시경 시장끼를 느끼는 시간에 식당으로 가서 만찬을 즐겼다. 섬의 음식이라 으레 회가 나오리라 기대했는데, 회 대신 뭍에서 온 객(客)에게는 매우 귀한
‘뿔소라’를 주 메뉴로 혀를 콕콕 쏘는 적당히 발효된 홍어와 국물 없이 비벼놓은 탕, 고동조림, 고등어, 군소, 시원한 해조국, 생선구이, 양념게장 등, 스무 가지가 넘는 말 그대로의 산해진미(山海珍味)로 차려놓은 음식을 맛있게 먹었다. 만찬이 끝난 후 일행은 이 산장에서 운영하는 노래방에 들어가 서편재길에서 못다푼 여흥을 마저 풀어 즐겼다.
보적산장에서
이날 우리 일행이 보적산장 침실에 든 것은 밤 9시경이었다. 9시 뉴스를 시청하고 있는 시간에 옆방에서 현숙이가 까만 색안경을 끼고 머리에는 반짝거리는 장식을 달고 들어와 잠시 무료했던 방안 분위기를 화려하게 바꾸기 시작했다. 남은 여성회원들이 뒤따라 들어오고, 현숙이의 재치 있는 레크레이션 프로그램이 진행되었다. 식단차리기 빙고게임부터 시작하여 ‘합천문협’이라는 네 글자를 첫 자로 하는 4행시 짓기, 회원 전체를 두 그룹으로 나누어 동요대사도 지었다. 두 팀으로 나누어 경쟁했던 동요대사는 합천을 배경으로 하는 가사로만 작성되어야 했다. 그 룰(rule)에 맞춰 두 팀이 작사한 가사들은 합천문협사에 기리 보존해야 할 불후(不朽)의 명작(?)으로 생각되어 여기에 소개한다. 먼저 유미팀의 동요대사이다.
제목 : 황매산 뽀뽀길
황매산 철쭉길은 아름다운 뽀뽀길
붉은 꽃 마디마디 앵두처럼 달렸네
달콤한 그 향기가 콧구멍에 소~올~솔
온산에 산들바람 불어오면
불그레한 그 얼굴 황매산이 들썩들썩
<정유미 작사>
다음은 숙희팀의 동요대사이다.
제목 : 황강 별밤
황강물이 흐르는 야외 무대에
노래하는 시인과 문협식구들
달빛도 은은하고 별빛도 반짝인다
낭송도 기가찬다 군민한마당
<김숙희 작사>
이 동요대사들을 ‘과수원 길’과 ‘반달’ 곡에 맞춰 각 팀별로 번갈아 부르면서 우리들은 현숙이의 주도로 동심의 세계에 들어가 아이들처럼 웃고 또 웃었다. 코믹하고 익살스럽게 만들어진 이 가사들은 앞으로 합천문협행사나 예총행사 때에 재활용하기로 했다.
마지막 프로그램으로 일본 후쿠오카 아소팜빌리지에서 즐겼던 ‘해적룰렛게임’을 했다. 맨 처음 걸려든 사람은 김상완 선생님이었다. 현숙이가 미리 준비한 탈을 그에게 주어 쓰게 하고 노래를 시켰다. 평소 과묵하고 젊잖은 그도 현숙이의 지상명령(至上命令)에 어쩔 수 없이 탈을 쓰고 춤을 추며 노래할 수밖에 없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일행은 그야말로 배꼽을 쥐며 한 바탕 웃음바다를 이루었다.
룰렛게임과 회원들의 탈 쓴 노래가 계속되었고 그날 밤 우리일행은 자정이 가까워지는 시간까지 한 무리의 광대가 되어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어느 때보다 더 흥겹고 더 정다운 가운데 굳은 우의(友誼)를 다지며 이번 여행 분위기의 절정을 이루었다.
레크레이션이 끝나고 우리 일행은 잠자리에 들기 전 산장 밖으로 나가 청산도 하늘과 바닷가 청산(靑山)이 지켜보는 가운데 을미년 한 해를 보내고 병신년 새해를 맞이하면서 손에손에 불꽃을 밝히고, 각자 마음속에 소망을 기원하며 합천문인의 굳은 단합을 위한 다짐의 시간을 갖기도 했다.
이튿날 아침식사 메뉴는 전날 만찬 때와 같은 것들로 차려졌다. 아침 식사가 끝난 후 청산도항 승선시간에 맞춰 일행은 보적산장 주변 바닷가를 소요하며 여유를 즐겼다.
귀로에서
이날 13시 일행은 귀로의 완도행 ‘청산아일랜드호’에 탑승하였다. 물결은 전날처럼 잔잔했고 회원들이 선실 바닥에 둘러 앉아 음식을 나눠 먹으며 현숙이의 넌센스 퀴즈 문답에 분위기는 또다시 화기애애하게 조성되었다. 명랑하면서도 건전한 우리들의 선상 레크레이션은 여객선 안에서 한동안 진행되었다. 청산아일랜드호는 조용히 운항하면서 일행들을 50분 만에 완도항에 내려놓았다. 완도 부둣가의 ‘상화건어물상회’에서 선물을 구입하고 우리들은 전날 탑승했던 엔절렌터카 합천영업소 이오성 씨의 봉고차에 다시 탑승하여 귀로의 여정에 올랐다.
돌아오는 길은 전날 갔던 길의 역순이다. 마이크를 돌려가며 회원들의 조용한 노래가 시작되었다. 마음의 나이를 묻고 답하며 진지하면서도 유머스러웠던 전날 차안 분위기를 차주 이오성 씨는 “조용하고 교양 있는 우리들의 행태에 감명을 받고 이런 분위기는 처음 봤다”고 말했다고 한다. 중간에 보성휴게소에서 잠시 쉬고, 진주 이헌동 ‘하연옥’에 들어가 간단한 저녁식사를 마친 일행은 저녁 8시가 가까울 무렵 합천 ‘이화예식장’앞에 차를 세우며 이번 청산도 문학기행이 그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이번 문학기행에서도 나는 회원들의 따뜻한 정성과 배려로 편안하게 여정을 보낼 수 있었으며, 회원들과 단합을 다지는 마음으로 가장 소중하고 유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말로만 듣던 청산도에 가서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의 유순하고 친절한 사람들을 만나고, 에메랄드빛 초겨울 그림 같은 풍경에 둘러싸인 서편제의 길목에서 영화 ‘서편제’의 주인공처럼 덩실덩실 춤을 추웠던 일, 탈을 쓰고 춤추고 노래하며, 현숙이의 재치있는 주도(主導)로 흥미진진하게 레크레이션이 진행됐던 청산도 보적산장의 밤, 그리고 청산도를 오가며 경유했던 잔잔한 남해바닷길이 청산도의 추억과 함께 잔잔한 그리움으로 기리기리 남게 될 것이다. 이번 문학기행을 위해서 기획과정부터 애를 쓰신 김숙희 지부장님과 정유미 사무국장님, 박황규 간사님, 임원 및 회원 여러분에게도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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