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서재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 흔들리면서 피는 꽃이지만, 나에게는 이 세상 어떤 꽃보다도 더 아름다운 한 사람 제자가 있다. 누구보다도 자기 생애에 그야말로 거친 세파에 흔들리면서도 부러지지 않고 꿋꿋하게 살아가는 제자다.
나는 퇴직 후 그와 자주 만나 5년 째 소중한 사제간의 정을 나누며 고향에서 살고 있다. 내 집에 그를 초청할 때도 있지만, 내가 가끔 그의 집에 초청되어 가기도 한다. 그와의 사제지간 새로운 만남은 그가 D시에서 사업에 실패하여 귀향한 후며, 내가 공직에서 퇴임한 후다.
젊은 시절부터 평생 교직에 종사했던 나는 2000년 8월 퇴직 후 고향마을에서 부부 단둘이 단란하게 살고 있다. 민들레 솜털이 때가 되면 바람에 날려 둥지를 떠나듯, 딸아이 둘 결혼시켜 떠나보내고, 하나 있는 아들마저 직장 따라 떠났다. 나는 칠순이 지났는데도, 여기 저기 불러주는 곳이 많아 때론 바쁠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혼자 집에 있는 시간도 많다. 노령이 되면 누구나 외로워진다고 하는데, 나는 한가한 시간 외로움이 밀려올 때는 평소 아끼던 도서들을 서가(書架)에서 끄집어내어 보는 것이 유일한 낙이다. 그래서 필요할 때 바로 가까이서 책을 접할 수 있도록 안방에 서가를 두고, 서재(書齋)의 필요성을 별로 느끼지 않고 살았다. 그런데 우연한 일로 서재를 갖게 되었다.
5년 전의 일이다. 80년대 초 고향의 Y고등학교에서 재직할 때 가르쳤던 J라는 제자가 어느 날 찾아와 인사를 했다. 건축사업을 하다가 실패하고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는데, 남은 건축 자재를 처리할 곳을 알아봐달라고 내게 청탁까지 했다. 그는 사업 실패 후 신용불량자가 되어 꼬리표가 붙어 있었고, 부인과도 이혼을 한 딱한 처지가 되었다. 자기에게 맡겨진 남매를 어떻게든 부양해야 할 긴박한 처지인데, 신용불량자는 은행에 부채를 갚기 전에는 꼬리표를 뗄 수 없기 때문에, 재기(再起)를 위한 어떤 직장의 취업도 막혀있었다. 그는 능력이 있었지만,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처지가 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어쩔 수 없이 노동판에 뛰어들었는데, 그 노동일도 도시생활에서는 아이들 학비와 주거비를 충당할 수 없기 때문에, 아이들을 도시의 친척집에 남겨둔 채, 그는 결국 시골로 낙향하게 된 것이다. 그의 딱한 처지를 알게 된 나는 그의 사업실패의 애물단지인 남은 건축자재를 다른 사람에게 알아볼 필요도 없이, 내가 바로 사들였다. 그리고 포크레인을 운행하는 B제자를 불러 서재를 지을 자리에 땅을 고르고 토대를 만들어, J를 포함한 다른 시공자와 인부 몇 사람을 고용해서 우리집 마당 한쪽에 별체로 황토방을 짓게 된 것이다. 필요해서 황토방을 만든 것이 아니라, 제자의 어려운 처지가 내게 황토방을 만들게 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만든 황토방이 멋진 '나의 서재'가 되었다. 그런데 그 황토방이 서재로서의 가치뿐만 아니라 잠자는 공간으로서도 우리 부부에게 참으로 유용한 것이 되었다. 그러나 땔감이 문제였다. 땔감을 해결하기 위해 나는 직접 나무를 하기 시작했다. 산에 올라 나무를 꺾어 운반용 작은 수레에 싣고, 그것을 운반해서 집에까지 끌고 오면서 땀을 흘리며 많은 애를 쓰지만, 운동을 하게 되어 좋았고, 집에 와서 그 나무들을 톱으로 토막을 내고, 부엌 한쪽에 그것들을 차곡차곡 쌓을 때는 야릇한 성취감도 느낀다. 또 채취해온 나무들을 부엌 아궁이에 넣어 군불을 때는 것도 재미가 있었다. 황토방을 만들고 난 후, 늘그막에 새로운 일거리가 생긴 것이다.
젊은 사람도 자기의 일과 역할이 없으면 가정이나 사회에서 소외되어 삶의 의미를 상실하기 쉬운데, 나는 그 방에서 책을 보고, 틈틈이 글을 쓰며, 산에 가서 나무하는 일이 즐거운 일상이 되었다. 감기 기운이 있을 때는 나무를 부엌 아궁이에 가득 넣어, 뜨끈뜨끈하게 군불을 때고, 그 방에서 하룻밤 잠자고 일어나면 이튿날 감기가 어느새 사라지고 머릿속이 산뜻해진다.
그런데 산에 올라 나무하는 나의 일상의 즐거움을 방해하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고향에 사는 제자들이다. 그들 중에는 J도 있었고, 포크레인과 작업차량을 운행하는 B기사, K기사도 있어서, 그들이 작업장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 공사장이나 산에 버려진 나무들을 한 차 가득 싣고 와서, 우리 집에 내려놓고 돌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돌아가면서 "선생님 저희들이 나무를 갖다 드릴 테니 앞으로는 산에 가서 나무하시면 안 됩니다".라고 당부를 하는 것이다. 나무 한 차 분량이면 그 방에 두 달 때고도 남는데, 내가 구태여 나무를 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그들은 우리 집 앞을 오가며 나무가 떨어질 만하면 잇따라 나무를 차에 가득 실어 가져오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들은 나의 나무하는 수고를 덜어주기 위해 나무를 해오지만, 나무하며 하루 생활을 즐기는 나의 그 낙을 앗아간 것이다. 노부모가 늙어서 일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여 일을 못하게 하는 자식들의 그 효성과 비슷한 마음이다. 그렇지만 나를 생각하는 제자들의 그 갸륵한 정성을 어찌 모르며, 고맙지 않으랴, 그들이 있어 나는 지금 평생 교직에 종사한 것에 큰 보람과 행복을 느낀다.
그런데 나에게 황토방을 짓게 해준 그 J가 이곳 시골에서는 일거리가 없어서 거제의 모 회사 소속 관거(貫渠)공사장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밤에 그로부터 전화가 급하게 걸려 왔다. 공사도중에 갑자기 쓰러져 거제시 K병원에서 뇌수술을 해야 하는데, 가족이 와서 수술 동의서에 도장을 찍어야 수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가 가장 어려운 처지에 있을 때 다른 어떤 사람보다 내가 그의 의지처가 되어, 나에게 알려왔으니, 당장이라도 쫓아가고 싶었다. 부모님 일찍 돌아가시고, 부인과도 이혼한 처지라, 사고무친(四顧無親)의 이 가련한 제자를 위해서 이튿날 동이 트자마자 나는 승용차를 몰고 집에서 3시간 거리의 그 K병원을 향하여 쾌속 페달을 밟으며 찾아 갔다. 그가 입원한 K병원에 가서 제자를 우선 안심시고, 동의서에 날인하여 수술 절차를 마친 후, A간호사에게 잘 간호해주기를 부탁하고 집에 돌아왔다. 수술이 성공했다는 사실은 3일 후 A간호사와 제자로부터 연락을 받고 알 수 있었다.
J는 퇴원 후 다행히 건강이 좋아져 노동일을 계속하면서 아이들의 학비를 마련해주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라고 하듯이 그 후 그는 그의 인생에 반전기(反轉期)를 맡는다. 아들이 군대에 입대하고 딸은 대학 졸업 후 지금은 H항공사의 스튜어디스로 취업을 하여 그의 각박한 생활이 어느 정도 여유가 생겼다. 그는 '신용불량자'라는 사회적 냉대와 주위의 무관심 속에서도 좌절하거나 방탕하지 않고, 성실한 생활을 일관해온 끝에, 다행히 그의 인생 후반기에 새로운 반려자를 만나게 되어 지금은 행복한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있다. 부인이 부산에서 철물점을 하고 있어서 그와 우선은 주말 부부로 살고 있다. 내가 살고 있는 가까운 어느 마을에 비록 흙냄새 나는 슬래트 지붕 초라한 두칸 집이지만, 이 집에 내가 가끔 초청되어, 부산에서 그 부인이 준비해 온 음식을 먹으며, 사제간 정담을 나눈다.
그러든 어느 날, J가 사업할 때 건축자재로 쓰던 두꺼운 육송 긴 판자 7개를 가져와 나의 서재의 규격에 맞게, 자로 재어 끊어서, 큼직하고 중후(重厚)한 서가(書架)를 하나 만들어주고 갔다. 서재와 서가가 그럴 듯하게 격(格)을 갖춘 것이다. 그리고 그는 며칠 후 자기 심정을 노래한 것과 똑 같은 도종환의 시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를 1연으로 줄여서 자신이 직접 판각하여 만든 시판(詩板) 하나를 가져 왔다. 그 시판이 지금 나의 서재, 서가 맨 윗칸에 세워져 매일 읽어보고 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우연히 만들어진 '나의 서재'는 그 속에 한 제자의 애환이 고스란히 묻어 있다. 그리고 사제지간의 각별한 정으로 엮어진 방이기 때문에 나는 거기서 여느 서재보다 더 특별한 의미와 애정을 느낀다. 우리집은 냇물 건너 월광사가 있고, 가야천과 이천천이 만나는 모듬내 강변에 위치해 있어서 흐르는 시냇물과 30여 년 세월을 여기서 흘려보내며 인생의 희노애락을 함께 했는데, 머지않아 가야천 정비사업이 시작되면 밀려나가게 될 처지에 있다. 다른 장소로 이사하게 되더라도 그 서재만은 자재들을 해체해서 옮겨 다시 세우고 싶다. 그래서 나의 그 서재에서 앞으로 그 J와 다른 제자들이 찾아오면 언제든지 그 방에 그들을 반가이 맞아들이며, 나의 삶이 다 하는 날까지 거기서 여생을 보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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