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력사항)
합천,용주,가호리에서 출생(1936년)
국세청에서 정년퇴직(1994년)
창작수필에서 수필로 등단(2000년)
현 재단법인 한마음선원 사무국장
한국문인협회 회원
창작수필문인회 회원
청다문학회 회원
남강문우회 회원
재경합천문인회회원
금천문학회 회원
창작수필문인회에서 동인문학상 수상
1) 용 문 정
류 상 훈
9월 중순이다. 찌는 듯한 늦더위는 한풀 꺾이는가 했더니 더 기승을 부린다. 조상의 묘소에 벌초 하기 위해 고속도로에 올랐다. 토요일이라, 오후에는 물밀 듯이 밀려 드는 차량 홍수에 길이 막힐 것 같아 아침 일찍 출발하였다. 내가 74년도, 대구에서 서울로 근무발령을 받고 올라 올 때 만해도 고속도로에 지나가는 차량들은 듬성듬성 하였다. 그 동안 산업의 발달이랄까 경제 성장이랄까? 하여튼 주말이 되면 고속도로에는 차량 행렬이 빽빽히 늘어 서서 그야말로 전쟁을 치러야 할 형편이다.
나는고향에 갈 때면 고향 마을에서 2㎞ 떨어진 곳에 위치한 용문정(龍門亭)에 꼭 들려본다. 오늘도 일찍 내려 가서 내일 오전 중으로 서둘러 일을 마치고 이곳을 들려 보기로 했다. 고향 하면 용문정 주변 경치며, 자연 정경에 매료되었던 옛 추억들이 주마등 같이 스쳐간다.
용문정 앞에는 덕유산에서 흘러 내리는 계곡으로 이어진 맑은 강물이 흐르고 강변에는 울창한 나무가 하늘을 찌르듯 우뚝 우뚝 서 있고 사방이 푸른 산봉우리로 둘러 쌓이고 군데군데 자리 잡고 있는 기암괴석! 자연의 현상이 조화를 이룬 아름다운 극치야말로 창조주의 예술품이리라.
겨울이 지나 얼음이 풀리고 풀밭에는 속잎이 파릇 파릇해지고 나뭇 가지에 싹이 트고 꽃이 피고 새가 우는 봄이 되어, 만물에 생명을 불어 넣는듯 따뜻한 봄 바람이 불때가 되면, 용문정을 찾는 유상객(遊賞客)들이 여기 저기에서 모여들어, 맑은 물과 푸른 숲에서 아름다운 정치(情致)를 즐기는 사람들의 정다운 모습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고기떼들이 서식하고 있는 강물에 낚시대를 던져 놓고 사름을 잊고 있는 강태공들의 한가한 모습들! 긴긴 겨울 추위에 움쳐러진 어깨를 펴고 한해의 작농(作農)을 위한 에너지의 충전을 위함인지 강변 나무 그늘 아래서 막걸리 잔으로 건배하는 모습들! 밝은 얼굴에 티없는 미소를 짓는 꿈나무들의 소풍길! 모처럼 나들이에 나와 오랫동안 안방 살림 살이에 얽매여 꽁꽁 얼어 붙었던 가슴을 시원하게 열어 제쳐 마음 구석구석에 맺혀있는 심회를 토해내는 흥겨운 아낙네의 모습들! 모두가 행복한 표정들이다.
아름드리 나무가 빽빽히 들어선 나무 숲속에서 지저귀는 새소리는 들 뜬 마음을 금방 가라 앉게 한다. 바위를 건너뛰며, 모래를 밟으며, 강물에 들어가 물장구를 치다 보면, 바위 사이로 콸콸 거리며 흐르는 물소리와 함께 나를 괴롭히던 번민은 어느덧 허공으로 사라져 버린다.
자연은 위대한 힘을 품고 있는지라 인세(人世)에 찌들어진 마음의 고갈을 없애고 마음의 갈등을 해소하고 마음의 상처를 씻어주기도 한다. 자연의 거룩한 조화에 동화되면 욕망과 고통, 번민이 사라지는 위대한 힘을 품고 있음을 느끼게한다. 해서 옛 부터 세파에 시달리고 인세에 해의를 느낀 선비들이 자연을 즐겨 찾고 자연을 사랑하고 자연을 벗삼아 노래하였던 예는 익히 알고 있다.
용문정은 나의 11대조이신 선조께서 중종조(中宗朝)에 기묘사화가 이르나자 벼슬을 버리고 이곳에 은거하여 장구소요 (杖 屨消遙)하시던 곳으로 후손들이 추모하여 정자 (亭子)를 건립하게 된것이다. 그때 선조께서 자연의 정취와 더불어 노래한 시(詩)를 떠올려 본다.
북문 흉화 홀경심 (北門凶禍忽警心)
투불 남래 복차심 (投绂南來卜此沈)
궁달 원래 무이치 (窮達元來無二致)
강호 풍월 상오금 (江湖風月爽吾襟)
『북쪽 조정에 일어난 흉화에 깜짝 놀라서 벼슬과 모든 인연을 저버리고 남쪽으로 내려와 이곳에서 깊이 자리를 정하도록 마음을 굳혔다.빈궁하거나 영달함이나, 원래 같은 삶의 길 일지니 강가에 불어오는 바람과 물위에 떠는 달빛이 내 마음을 시원하게 하느구나』
세속에 얽매여 부귀영화에 여념이 없고 오욕칠정에 사로잡혀 서로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서로 모략하고 살육을 일삼는 세파에 환멸을 느꼈기에, 미련 없이 모든 것을 훨훨 털어 버리고 여기 푸른 하늘과 온 산에 황홀한 신록의 바다를 이루고 돌 사이로 굽이쳐 흐르는 맑은 물! 이 평화스러운 자연의 정경을 바라보며 가슴속에서 녹여 내는 노래일것이다. 아니 한스러운 마음에서 세상을 원망하며 울부짖은 절규일지도 모른다. 이 시정 에서 자연의 오묘한 질서로부터 지혜를 배우게 한다. 자연과의 친근하고 조화로운 관계를 체험함으로써 생명력을 가지는 자연의 위대한 힘을 느끼게 하고 마음의 걸림이 없는 자유를 느낄 때 진정한 인생의 정신적 행복이 무엇인지를 깨우쳐 준다.
허나 과학의 발달과 더불어 산업의 발전은 생활의 윤택을 가져오고 물질문명의 발전은 가져 왔지만, 자연의 위대한 힘은 생기를 잃어가고 있다. 오손 도손 정겨운 이야기 꽃을 피우면서 걸어 다니던 오솔길, 맨발로 모래알을 밟으면서 돌 뿌리에 발가락이 채이면서 걸어 다니던 다정스런 길은 아스팔트로 변해 버렸다. 땜수문(水門)에서 흘러 나오는 강물은 검푸르게 흐르고 매연을 품은 강바람에 나부끼는 나무 잎사귀는 빛을 잃어가고 있다 .안타깝다! 이것이 세상물정의 흐름인가! 벌써 이곳까지 세정의 오염이 밀려 왔는가.
나는 산 기슭에서 외로이 자리 하고 있는 용문정을 바라 보았다. 용문계곡이 오염 되고 세상은 변했어도 푸른 강물에 몸을 담그고, 시원하게 찾아오는 풍월에 마음을 씻고, 세속의 영달을 과감하게 떨치고. 세진을 털어버린 선조의 맑은 영혼을, 용문정 너만은 영원히 지키리라.
2) 물 길
류 상 훈
초등학교 시절이다. 소낙비가 쏟아지던 이튿날 아침, 나는 강가에 서서 강물의 흐름을 살폈다. 강 건너에 있는 학교에 가기 위해서다. 허겁지겁 십 리 길을 달려 왔지만 세차게 흐르는 강물은 시기나 하는 듯 내 등교 길을 가로 막고 있다.
그토록 쏟아 부은 소낙비는 내가 건너야 하는 강으로 몰려 들었다. 시원지는 덕유산, 약 30키로미터의 상류지점이다. 골짜기마다 흘러 들어오는 물과 합세하여 그 위세가 등등하다. 폭이 약 300미터나 되는 넓은 강이다. 갑자기 불어나는 홍수의 힘은 강바닥을 파헤치기도 하고 떠내려 오는 모래를 쌓아놓기도 한다. 황토 물로 뒤 덥혀 강바닥이 보이지 않으니 깊이를 가늠할 수도 없다. 넓은 강폭을 메운 강물은 등교하지 못하고 서 있는 내 답답함을 헤아리지 못한 듯 비정하게도 물결만 출렁일 뿐이다.
망망(茫茫)한 강물을 보고 진퇴양난의 고심에 빠진다. 되돌아 갈려니 새벽부터 땀 흘리며 애써주신 어머니의 정성을 생각하면 발길을 돌릴 수가 없다. 뿐만 아니라 잦은 결석으로 인하여 생기는 학업의 어려움은 물론, 생소해지는 수업 분위기가 마음에 걸린다. 그렇다고 해서 무작정 건너가는 어리석음을 저지를 수는 없다. 강바닥이 고르지 못하니 한길이 넘는 수심이 군데군데 도사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세찬 물살을 감당해 내기도 어려우니, 자칫하면 목숨을 잃을 위험마저 있기 때문이다.
해서 나는 강을 건너갈 물길을 찾아본다. 강물의 흐름을 살핀다. 물결의 높낮이와 흐름의 속도가 가능 여부를 가늠하는 잣대가 되기 때문이다. 물결의 높낮이에 따라 강바닥의 높낮이와 물의 깊이를 짐작하고 흐름의 속도로 물살의 힘을 가늠해 본다. 물 흐름의 모습을 조심이 살피면서 강을 건너갈 방향을 설정한다. 물살을 따라 어느 정도는 떠 내려가야 하니 건너편 목표지점을 비스듬히 잡아둔다. 이렇게 나름대로 도강 작전을 세우고는 일행들의 의견을 들어본다. 가능성에 의견을 모으면 행동이 개시된다.
옷을 벗어 책보와 함께 허리띠로 묶어서 두 손으로 받쳐 머리위로 올린다. 그리고는 목표를 향하여 물살에 몸을 맡긴다. 머리가 물속에까지 잠겼다가는 물위로 떠오르는가 하면 양손에 받쳐올린 책보와 옷만이 물위에 둥둥 떠 내리는 광경이 펼쳐진다. 이렇게 몇 번 되풀이 하고 나면 도강에 성공하게 된다. 이것을 지켜본 어른들은 놀란 표정들이다. 이런 때 나는 무슨 개선장군이나 된 것처럼 의젓해 하기도 했다. 물론 처음 일은 아니다. 여름철이면 수없이 당해야 하는 일상 일이기에 강물을 건너는 데는 익숙해 있었다.
강물이 많이 불어나 위험할 때만 물길을 찾는 것은 아니다. 물이 줄어 들면 물의 색깔과 흐름의 속도를 살펴, 물길이 일직선만이 아니라 곡선일 수도 있고 파행일 수도 있다. 또한 바지만 벗기도 하고 바지가랑이만 걷어 붙이기도 한다. 등교할 때마다 왕복으로 건너니 물 길을 찾는 일은 생활화 되었었다. 요즘에야 교량이 세워져 자동차가 다니고 있으니, 물길 찾는 지혜야 옛날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어찌 강을 건너는 데만 길을 찾는 것인가. 인생살이에도 길을 찾아야 하지 않은가. 삶에 있어서 세심한 탐색, 치밀한 계획 없이 덤비다가 희생당하는 일은 얼마든지 있지 않은가. 우선 눈앞에 보이는 욕심에 끌리어 생기는 비리, 마구잡이로 쓰는 카드 빚 때문에 끔찍한 일들이 자주 일어난다. 나는 침착하지 못하고 서둘다가 낭패를 보는 어리석음에 핀잔을 보내기도 했다. 허지만 지난날의 내 어리석음 또한 예외일 수는 없었다.
80년대 초 박봉에 보탬이 되리라 부업 할 것을 살피던 중이었다. 마침, 스탠드 빠를 운영하는 코너를 분양한다는 신문광고에 홀렸다. 연예인 S씨가 등장하고 높은 소득으로 분배되어 입금된다는 것이다. 나는 뜻밖의 행운을 잡을 것이라 생각했다. 쓸데없는 허욕을 부리지 말라는 집사람의 만류에도 계약을 했다. 알고 보니 S씨도, 계약 명의자도, 본인들은 모르는 사실이었다. 피해자와 더불어 장본인들을 고소하고 수배해 보았으나 허사였다. 그때의 피해로 인하여 오랫동안 살아오면서 어려움을 겪었다.
나는 헛된 욕심으로부터 빚어지는 어리석음, 앞으로는 절대로 되풀이 하지 않으리라 다짐을 해왔다. 허지만, 지금도 은연중 신문을 펼칠 때면 ‘적은 투자에 높은 소득을 올린다’는 광고에 눈길이 끌릴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생각해 본다. 강물을 건너가기 위해서 물길의 높낮이와 흐름의 속도를 가늠해야 물길을 찾듯이, 인생의 길도 서둘지 않고 용의주도하게 찾아야 하거늘, 그렇지 못하니, 견물생심(見物生心)의 틀 속에 갇혀 길을 잃고 있는 탓이 아닌가 싶다. 강을 건너는데도 길이 있듯이, 인생에도 길이 있다. 탐욕에 가리어져 그 길을 찾지 못하면, 어려운 삶에서 헤맬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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