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실
경북 영양 출생.(전)그랑학원장. 합천문인협회 회원. 향파 이주홍기념사업회 간사.
문화관광해설사. 삼가초등학교 전문상담사.
주소 :경남 합천군 합천읍 중앙로 4길 18-12 궁전 나동 101호
메일 :dsl63@hanmail.net (디에스엘 63입니다.)
전화 :010 – 9439 -3245
<신인상 심사평>
수상작 이동실 -<멸치론>
멸치를 화소로 하여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보여주고 있는 글이다. 선물로 받은 멸치, 멸치와 관련된 유년의 기억, 멸치잡이 프로그램에서 본 멸치 떼의 힘, 식탁에서 빠져서는 안 되는 멸치를 생각하면서 자신을 돌아보는 글이다. 작지만 온몸을 던져 인간에게 베풀고 있는 멸치의 혜택을 전개하면서 독자들에게 공감을 유도하고 있다. 무심하게 방치했던 이타적인 삶을 가미하여 전하고자 하는 주제를 잘 구현하고 있는 점도 높이살 만하다. 하지만 익숙한 내용으로 너무 확연하게 의미화하고자 하는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수필이 문학임을 감안할 때 객관적 사실 이상의 무언가를 보일 때 독자들은 공감하게 된다는 것을 기억했으면 한다.
<당선소감>
초등학교 5학년 때였습니다. 교내 글쓰기 대회에서 창작동화를 발표해 상을 받았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 선생님께서 “동실이는 문학소녀가 되겠구나.”라고 하시던 그 말씀이 늘 가슴 한편에 자리하고 있었지요. 그러나 학교를 졸업하고 결혼을 한 후, 엄마라는 이름으로 살기에만도 힘들고 정신 없었습니다. 그렇게 시간은 빠르게 흐르고 어느 날 중년에 들어서 있는 자신을 바라보면서 그리운 친구처럼 ‘문학소녀’라는 단어가 떠올랐습니다. 그때부터 조금씩 글밭을 서성거리며 꽁꽁 언 땅을 녹이듯 무뎌진 내 감성을 깨우려 노력했습니다. 글을 쓴다는 게 쉽지만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수없는 좌절도 경험했습니다.
민들레 홀씨가 나비처럼 휘날리는 아침 저에게 전해 온 당선 소식은 한없이 기뻤고 또 부끄러웠습니다.
또 꿈 하나를 가져봅니다. 내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고 나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을 작품을 써야겠다는 것입니다. 열심히 정진하겠습니다. 합천문인협회 문우님들 고맙습니다. 부족한 제 글을 뽑아주신 ‘수필과 비평’ 심사위원님들께도 고개 숙여 깊이 감사드립니다.
-작품-
<멸치론>
언니가 통영특산물인 멸치를 보내왔다. 손가락 한 마디만한 게 맛있어 보여 얼른 가스 불에 프라이팬을 올리고 청양고추와 호두를 넣고 멸치볶음을 만들었다. 또 멸치 우려낸 육수에 표고버섯을 갈아 넣고 우거짓국을 끓였더니 남편이 맛있다며 두 그릇이나 비워냈다. 쪼그만 멸치로 하여 행복한 만찬이었다.
멸치 때문일까? 갑자기 친정어머니 생각이 난다. 초등학교 시절엔 친한 친구들 끼리끼리 둘러앉아 도시락을 열었다. 제일 인기 있는 반찬은 단연 계란말이였다. 어머니는 도시락에 콩장조림과 멸치볶음을 자주 싸주셨다. 철이 없던 나는, 계란말이를 싸달라며 반찬 투정을 부리곤 했었다. 당시엔 멸치반찬도 어머니가 큰 맘 먹고 싸 주셨을 텐데…….
멸치는 작지만 대단한 녀석들이다. 한 마리일 때는 보잘 것 없는 존재이지만 뚤뚤 뭉치면 상상을 초월 할 정도로 힘이 세지는 것 같다. 언젠가 TV에서 멸치잡이에 관한 프로를 본 적 있다. 멸치 무리가 흩어져 유영 할 때는 존재가 미미했는데 한데 뭉쳐 움직이니 거대한 물체 같아 보였다. 전설속의 바다괴물 ‘레비아탄’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멸치를 가득 잡은 그물을 육지로 끌어올리던 어부들의 비지땀 흘리던 모습도 그려진다. 볼락이나 돔 같은 어종들은 낚시로도 잡을 수 있지만 멸치는 워낙 작아 낚시로는 어림없다. 떼를 지어 다니는 멸치를 잡으려면 사람이 힘을 합쳐 그물을 던지고 끌어올려야 한다. 결코 얕잡아 볼 수 없는 대상인 것이다.
우리의 식탁에 꼭 필요한 멸치는 국물 맛을 맛깔나게 해주고 칼슘과 단백질로 건강까지 챙겨준다. 잔치에 반드시 동반되는 국수는 멸치육수가 제격이다. 겨울이면 연례행사처럼 만드는 국민 밑반찬이 김장김치다. 여기에 멸치젓갈을 뺀다는 것은 경상도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다. 그렇게 만들어진 풍성한 김장은 겨울에서 길게는 봄까지 우리들의 식탁을 책임지지 않는가.
묵은 김치로 만드는 돼지고기찌개나 고등어조림 등 다양한 조림과 찌개요리 역시 멸치젓으로 숙성된 김치면 한맛 더 난다. 김치전, 김치볶음밥도 멸치젓이 숙성시켜준 김치가 있기에 가능하지 않을까.
멸치잡이 영상 엔딩장면에 흘러나오던 제주도 민요가 아직도 뇌리를 맴돌았다. 인터넷으로 제주도 민요 <멸치후리는 노래: 멜 후림 소리>를 검색해 보았다. 역동적인 가락으로 불리는 이 민요는 멸치 그물을 잡아당기는 동작과 밀착되어 있었다.
‘어어야뒤야 어기여뒤라/ 동게코는 응그문여에/ 서게코는 소여군에 그물 부치곡/ 추자안골 사서 안골궤기/ 농겡이와당에 다 몰려놓곡/ 압궤기는 선진을 놓곡/ 뒷궤기는 후진을 노라/베 테우에 놈덜아/ 우베리를 살짝 들르라/ 한불로 멜 나간다/ 당선에 망선에 봉기를 꼽아/ 우리 옛조상덜 허던 일들/ 잊어불지말아 되살려보자/ 풍년 왓구나/ 농겡이와당에 돈풍년왓구나/ 어어야뒤야 어기야뒤라’
제주도 노랫말을 설사 이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물에서 멸치를 털어내는 장면이 그려지지 않는가.
나는 그 영상을 본 후론 멸치를 작다고 무시하지 않게 되었다. 또 우리에게 온몸을 던져 베풀고 있는 혜택을 생각하며 ‘멸치도 생선이냐?’는 우스갯소리도 삼가게 되었다.
솔직히 인간이 멸치만큼이나 누군가에게 제 자신을 던져 베풀 수 있다면 지금보다 훨씬 따뜻하고 정이 넘치는 세상이 될 것이다. 현대인들은 대부분 큰사람, 강한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 바다 속에서 큰 물고기는 포식자들이다. 인간 사회에서도 큰사람 강한 사람은 포식자와 같은 행동양식을 보인다. 누군가의 것을 빼앗아 내 것을 키우고 약자를 괴롭히기도 한다.
꼭 누군가를 짚어 말할 것도 없다. 나 자신은 누군가에게 몸 던져 베풀려고 생각해본 적이 있던가? 내 남편 내 자식 내 가족들에게 나를 던져 진국이 되려고 노력한 적이 있던가? 자기중심적인 생각으로 불만과 투정을 앞세우지는 않았던가?
곰곰이 생각해보니 가슴 시린 사람에게 따끈한 국물 같은 사람, 굶주린 사람에게 포만감을 주는 사람이 되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멸치에게조차 부끄러워지는 나 자신이 보인다.
멸치는 자신을 던져 모든 생명체를 부양하는 큰 고기다. 오늘도 저녁 식탁에 매콤달콤한 멸치 볶음과 멸치육수로 된장찌개를 끓여 올리고 가족들 사이에서의 내 역할을 생각해보련다.
<쑥 향은 사랑을 타고>
이동실
서울에 사는 동서가 전화를 해 왔다. 새봄을 맞이하면서 우리 내외와 함께 봄을 만끽할 수 있는 곳으로 여행을 가고 싶다는 것이었다. 나는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내가 사는 합천으로 오라고 권했다. 강과 호수, 들과 산이 어우러져 봄의 생명력이 왕성하게 돋는 합천만한 곳이 어디 있을까. 수화기를 통해 동서의 미소가 전해져 왔다.
나는 집안 대청소에다 이부자리도 새로 씻는 등 손님맞이에 바빠졌다. 어떤 음식을 할까? 관광은 어느 곳으로 갈까? 즐거운 고민을 하다가 문득 쑥떡은 꼭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쑥에 얽힌 옛일이 떠올라서다.
원래 내 고향은 고추로 이름난 경북 영양이다. 합천으로 시집을 오니 시댁은 4대가 한 집에서 살고 있었다. 시조부께서는 쑥국을 유난스레 좋아하셨다. 그래선지 봄만 되면 시어머니께서는 친구 분들과 함께 햇살 따뜻한 언덕배기에서 쑥을 캐 오시곤 하셨다. 캐온 쑥에 조개나 굴을 넣고 들깨가루로 버무려 쑥국을 끓이기도 하고, 쑥버무리, 쑥 튀김 등을 해주셨다. 그런 날이면 시조부께서는 밥상을 깨끗하게 비우고 ‘흐으음’ 하는 특유의 기침소리도 맑으셨다.
그렇지만 나에게는 고통의 시간이었다. 자랄 때도 쑥을 그다지 가까이한 적이 없던 터라 시어머니가 몸에 좋다며 권하는 쌉쌀한 쑥국을 억지로 먹기는 먹었지만 쑥 향이 어찌 그리 진하게 풍기는지 한약을 먹는 느낌 같아서 정말 싫었다. 국자로 몰래 쑥국을 덜어내다가 야단맞기도 하고, 때론 다 먹도록 지키고 앉아 계시기도 하는 시어머니가 싫기도 했다. 그런데 이십여 년이 지난 어느 날 숟가락을 든 내가 어머니께서 하신 그대로 쑥국을 끓여놓고 자식들에게 잔소리를 하고 있음에 깜짝 놀랐다. 어느 덧 내가 그때의 시어머니 나이가 되어 있었다.
휴일 날 남편과 함께 바구니를 들고 들판으로 나갔다. 들판에 나가면 쑥이 지천으로 널려 있어 한 소쿠리를 금세 장만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오산이었다, 파릇파릇 한 것도 가까이 가서 보니 진눈개비처럼 좋지 않았고. 채 크지도 않은 것이 많았다.그런데 햇살 따뜻한 논두렁 아래를 보니 쑥이 소복하게 나 있는 게 아닌가. 오랜 친구를 만난 듯 얼마나 반갑던지! 햇살이 따사롭게 비치며 마른 풀잎들이 소복소복 쌓여 있는 곳에 쑥들이 토실토실하게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한참을 캐다가 남편을 찾아보니 논두렁 아래 저쯤에서 꿈쩍도 않고 쑥 캐는 일에 열중이었다. 결혼해서 지금까지 한 번도 본적 없는 모습이었다. 가족들이 모여 함께 봄맞이를 한다고 하니 남편도 신이 난 모양이다.
봄에 나는 나물은 냉이 달래 등 많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쑥은 그냥 나물을 먹는다는 것과는 다른 의미가 있다. 겨울 언 땅이 막 녹기 시작할 무렵, 그리고 천지에 첫 봄비가 내린 뒤 단단한 땅을 비집고 올라오는 짙은 향기의 쑥을 먹는다는 것은 바로 봄을 먹는 것이다.
봄은 생명 순환의 시작을 알린다. 봄을 잘 지내야 이어지는 여름과 가을 그리고 다시 겨울로 돌아갈 때까지 삶의 선순환이 이루어진다. 농사짓는 것도 봄에 ‘땅심’을 잘 돋궈주는 시작이 중요하고 가축도 봄에 잘 먹여둬야 한 해를 제대로 부린다. 사람도 첫 단추를 잘 꿰어야 모름지기 나머지 과정이 순탄한 것이다.
한국인과 쑥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쑥을 먹고 사람이 된 웅녀이야기도 단군신화에 나오지 않는가 하늘이 열릴 때 쑥은 한민족 상징이 되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우리민족의 애환을 함께 해왔다.
경사가 있으면 쑥으로 인절미 떡을 만들어 나누었고, 제를 지낼 때면 쑥을 태워 잡냄새를 물리쳤다. 흉년에 먹을 것이 귀하거나 일제 수탈로 양식이 턱없이 부족했을 때 쑥은 죽으로. 쑥버무리로, 국으로, 나물로 우리의 식량이 되어주었다. 그뿐인가. 몸이 아플 때는 쑥 다린 물이나 환으로 또는 훈증으로 약이 되어주었으니 쑥은 우리 민족의 길흉애경사에 늘 함께 해 온 셈이다.
마당에 봄볕이 따뜻하다. 얼마 후면 동서 가족이 봄볕보다 환한 웃음으로 마당에 들어설 것이다. 시어머니께서 서울로 올라가신지 여러 해가 되었다. 시동생 건강이 좋지 않아 시어머니께서 살림을 맡아 해주며 동서가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형편이니 어찌 그들의 나들이가 반갑지 않겠는가. 다들 고생을 하고 있는 안쓰러운 현실 앞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항상 고맙고 미안하다는 말뿐이었다.
올 봄엔 어머니께서 내게 해주셨던 것처럼 “어머니 많이 드세요. 몸에 좋잖아요.”하며 향기 진한 쑥국을 상에 올려야겠다. 그리고 시동생 내외에게도 단군신화에서처럼 그런 기적이 일어나기를 기도하며 정성껏 장만해야겠다.
‘어쩌면 지금 내 사랑을 타고 동서네 집에 쑥 향이 전해지지 않을까?’란 싱거운 생각을 하며 노래를 흥얼거렸다.
<콩 심은 데 콩 난다 >
이 동 실
다문화가정의 한 어머니가 전화를 해 왔다. 두해 전 상담을 맡았던 선이 어머니였다. 선이의 문제점이 가정환경 때문인 것 같아, 가족 상담을 권했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응하지 않았던 터였다. 그런데 다시 연락을 해 온 것이다.
학교근무로 시간이 없어 다른 기관으로 연계해 준다고 해도 꼭 나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했다. 퇴근하는 즉시 부랴부랴 약속장소로 갔다. 선이 어머니는 예전보다 안색이 안 좋아 보였다. 근래 들어 부쩍 딸아이가 거짓말도 잘하며 동생을 때리기까지 한다는 것이다. 남편은 딸에게 인간되기 틀렸다며, 눈앞에서 사라지라 한다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나는 상담에 앞서 선이의 장점부터 말씀해 보라했다. 그랬더니 머리를 절래절래 흔들며 칭찬할 일이 한 가지라도 있으면 안아 주겠다는 게 아닌가. 고집도 세고, 하지 말라는 짓만 골라서 한다며 단점을 마구 쏟아냈다. 부모 입장에서 보면 얼마나 속이 상할까. 그런데도 나는 어머니보다는 선이가 더 안쓰럽다는 생각이 드는 것을 어쩌랴.
선이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으로 가족들 가슴에 수시로 비수를 꽂았고, 그 스트레스로 우울증에 걸린 어머니는 화풀이를 딸애에게 쏟아 붓곤 한다. 내가 기억하기론 부정적인 말투와 욕설은 아버지뿐만 아니라 어머니도 그랬다. 한번은 동생에게 욕을 한다며 선이를 나무랐더니 “엄마는 욕하면서 왜 나는 못하게 해?”라며 힐난하더라고 했다. 순간 전기에 감전 된 듯 온 몸이 굳어지고 자신이 했던 일들을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그 사실을 잊고 사는 어머니.
나는 해마다 집 앞 화단에 고추 서너 포기를 심는다. 먹는다는 즐거움 보다 자라는 모습이 더 잔잔한 재미를 주기 때문이다. 문득 자식농사와 채소농사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어두고 아무 탈 없이 잘 자라주면 좋으련만 벌레도 생기고 잎이 노랗게 녹아내리는 등으로 속을 태우기 일쑤다.
그럴 땐 식물의 속성에 맞게 물의 양도 조절하고, 거름도 주며, 지지대도 꽂아주고, 일조량이 골고루 미치도록 정성을 들이는 만큼, 잎은 다시 싱싱해지고 튼실한 열매도 거둘 수 있었다.
자식도 마찬가지 아닐까. 정성을 다해 키우려하지만 곳곳에 복병이 진을 치고 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도 신경 써야 하고, 형제간의 우애나 예의범절도 가르쳐야하고, 학교생활에서는 선후배나 친구와의 관계도 주의 깊게 관찰해야한다. 요즘은 인성교육으로 서로 어울려 살기를 가르치기보다는 성적위주의 주입식 교육이기에 우리가 자랄 때와는 다르다.
얼마 전 TV에서 과학이 말하는 언어의 힘에 관한 것을 보니, 사람의 뇌는 매일 사용하는 언어에 세뇌된다고 한다. 평소 언어습관이 우리 몸 전체 신경계에 영향을 주어 감정을 좌우한다는 것이다. 이렇듯 자신도 모르게 형성되어 버린 나쁜 습관은 짧은 기간에 고치기가 어렵다. 또한 어린 시절 언어폭력을 들으며 자란 아이들의 뇌는 그렇지 않은 아이들보다 해마부위가 위축되어 있으며 심지어 뇌에 손상을 입고 있었다 한다.
《물은 답을 알고 있다》저서에서 물에게 사랑과 감사라는 긍정적인 말을 들려주었을 때 물은 아름답고 조화로운 결정체를 만들어 내고, 반대로 죽인다거나 부정적인 말을 했을 때 물의 결정체는 일그러지거나 깨지는 것으로 나타난다고 했다. 물도 좋은 말과 싫은 말을 들을 때 그에 따라 반응을 보이는데 하물며 아이들은 어떨까? 우리의 몸은 70% 이상이 물로 되어 있다. 나쁜 말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그대로 일그러뜨리고 마는 셈이다.
많은 이야기를 나눈 후 선이 어머니의 두 손을 꼭 잡아 주었다. 지난 아픔을 딛고 새로 씨앗을 뿌리고 가꾸는 심정으로 딸애에게 다가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이 난다’는 옛말을 선이 어머니뿐 아니라 나 자신도 되새겨봐야겠다.
<밀사리와 촌놈>
이 동 실
6월의 따사로운 햇살이 창문까지 뜨겁게 달구는 아침나절이다, 2교시를 마치고 밀사리 체험이 있으니 뒤뜰로 나오라는 교내 안내방송이 들려왔다. 나는 소녀처럼 가슴이 설렜다.
여러 사람이 떼를 지어 남의 밭의 밀을 몰래 훔쳐다가 불에 구워 먹는 '밀서리'와 달리 ‘밀사리’는 보릿고개 시절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덜 익은 밀 이삭을 모닥불에 살라 까먹던 것을 말한다. 불에 사른 밀알을 손으로 비벼 껍질을 벗긴 다음 입김으로 날리면 손바닥에 남은 고소한 밀알을 맛볼 수 있다.
오래 전, 우리 집에도 밀농사를 했었다. 내 기억으론 보리 비슷한 게 살에 닿으면 콕콕 찌르고 꼬투리에 붙은 알맹이가 보리 알맹이보다 컸던 것 같다. 타작해둔 밀을 한 옴큼을 입안에 넣고 씹으면 껌처럼 되었다. 또 어머니는 선홍빛 밀을 불려서 사카린과 소금을 넣고 찰밥처럼 만들어도 주셨다.
나는 아이들과 함께 뒤뜰로 나갔다.
검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남자 직원들이 불 위에 파란 밀을 베어다가 뭉텅뭉텅 올려놓고, 불이 꺼지지 않게 막대기로 들어주었다. 그 사이로 공기가 들어가서 밀대를 톡톡 터트리며 밀을 익혔다. 불은 활활 타오르더니 밀더미에 머물렀다가 검은 연기가 되어 빙그르르 하늘로 올라갔다. 한참 후 잿더미 속에서 연기만 솔솔 났다.
교장선생께서 꼬챙이로 까만 꼬투리를 끌어내더니, 아이들 키높이에 어깨를 낮추어 밀사리 하는 방법을 열심히 설명해 주셨다. 그리곤 손바닥에 올린 밀을 싹싹 비벼 아이들 손바닥에 올려주었다. 애들은 호기심어린 눈동자를 굴리며 들여다보더니 입안에 넣고 오물거렸다.
오물거리며 밀을 씹던 아이들은 환해진 얼굴들을 하더니 저학년 고학년 할 것 없이 막대기를 가지고 잿더미를 두더지처럼 파기 시작했다. 까맣게 사른 밀 꼬투리를 주섬주섬 주어다 땅바닥에 놓고 삼삼오오 쪼그리고 앉아 비벼댔다. 후후 부는 입김에 알맹이만 손바닥에 남는 것이 신기해 자기 볼을 톡톡 치며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어떤 개구쟁이들은 엄마 갖다 줄 거라며 까만 밀을 주머니에 넣고서는, 자기 얼굴에 묻은 숯검정은 생각 못하고 친구들을 놀려댔다.
매캐한 연기냄새를 맡으며 나와 선생님들은 아이들의 귀여운 모습을 보며 웃고 서 있는데 교장선생께서 부르셨다.
“옛날에 밀사리 해봤지요? 먹어봐요. 맛있어요.”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으며 우리 손바닥위에다 올려 주신 것은 그냥 밀이 아니라 교장 선생님의 정이 파랗고 통통하게 박힌 잘 익은 밀알들이었다. 이쪽저쪽을 다니시며 삭막한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요즘의 아이들이 밀처럼 옹기종기 모여, 밝고 정답게 살아가길 바라시는 훈화를 온몸으로 전하고 계신 것이었었다.
훈훈하게 어울리는 사랑의 밀사리 체험은 아이들의 가슴을 데우며 훗날 또 하나의 추억으로 빛나겠지.
웃음소리를 타고 어느새 나는 여고생이 되어 있었다.
그땐 내가 시골출신이라는 게 몹시 부끄러웠다. 나는 고등학교부터 대구에서 유학을 했는데 경북 영양이 고향이라고 하면 친구들은 “촌놈이 정말 출세했다”고들 했다. 그때마다 ‘내가 저들과 다른 점이 뭘까? 내 놀이가 복숭아서리나 땅따먹기 등이라 그런가? 산에 올라가 나무타기와 자연 썬텐으로 까무잡잡해진 얼굴 말고는 저들보다 못하는 게 없는데…….’ 그때는 왜 그리도 촌놈이란 말이 듣기 싫었는지.
그래서 어머니가 끓여 주신 구수한 청국장과 어머니 손맛이 묻어있는 깻잎장이 먹고 싶어도 촌놈들만 먹는 음식인 줄 알고 먹지 않으려 했었다.
이제야 철이 드는가. 촌놈이라는 게 오히려 자랑스럽다. 도시에서 맛볼 수 없는 추억들과 인심들이 시골에는 얼마나 많은가.
오늘따라 어릴 적 친구들인 동순, 순옥, 영자, 영숙, 은호가 보고 싶다. 장댓골로 소 먹이 가서 감자산곳 해 먹던 그 때가 그리워진다. 그들도 나처럼 어릴 적 추억을 먹으며 살아가고 있으리라.
*장댓골 :경북 영양 석보에 있는 골짜기 중 하나.
*감자산곳 :어릴 적 소먹이 할 때 소는 풀을 뜯게 하고 동네친구들과 모여 돌 위에 흙을 바르고 구워먹던 감자구이.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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