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우 안병국 교수의 ‘이야기’ 시리즈 제 1
도깨비
—안병국(安炳國)
1.
도깨비는 한국인에게 무척 친숙하다. 초등학교 어린이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도깨비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도깨비의 비상한 능력과 그 막무가내의 저돌성, 단순함과 그 우매스런 고집과 심술, 그리고 그 밉지 않는 장난끼. 변화무쌍한 변신, 때로는 요염한 여자로 사람을 유혹해 놓고 한 개의 빗자루로 화하여 허욕을 응징하는 그 특유의 윤리성, 한편으로는 두려움의 대상이나 다른 한편으로는 매혹의 대상이기도 한 도깨비는 어떻게 보면 한국 특유의 체취와 멋과 욕망 등 무의식이 복합되어 만들어진 유정물(有情物)이라 할 수 있다.
도깨비는 잡귀(雜鬼)로 객귀(客鬼)⋅객신(客神)⋅잡신(雜神) 등과 함께 개념상 귀신의 한 내포가 되고 있다. 임동권은 귀신을 분류할 적 여섯 번째로 이 도깨비를 들었고[任東權(1975), ｢鬼神論｣, 語文論集, 第10輯, 中央大學校, 國語國文學會.], 김태곤은 귀(鬼)와 신(神)을 선(善)과 악(惡)의 대칭적 입장에서 선신(善神)과 악귀(惡鬼)로 구분하고, 악귀의 범주 속에 이 도깨비를 넣기도 하였다[金泰坤(1976), ｢民間의 鬼神｣, 韓國思想의 源泉, 博英社, pp.98∼126.]. 그러나 도깨비를 ‘비상한 힘과 괴상한 재주를 가져 사람을 호리기도 하고 짓궂은 장난이나 험상궂은 짓을 많이 한다’는 정의를 수용한다면 선⋅악의 이분법적 사고로의 재단은 적절치 못하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도깨비는 특징이 다양하여 그 개념 정의가 매우 어렵고, 또 귀신과의 차별성도 모호하다. 단지 귀신과 구별되는 특징이라면 도깨비가 자연물이 변한 하나의 ‘물(物)’ 내지는 ‘체(體)’라는 점이다.
도깨비는 귀신과 달리 놀기를 좋아한다. 노래도 좋아하고 춤도 잘 추며, 그리고 여자도 좋아한다. 화가 나면 무섭지만 용서도 잘하고 인간을 잘 도와주기도 한다. 근거없이 허욕에 찬 인간에게는 ‘혹’을 하나 더 붙여 골려 주는가 하면, 개암 열매로 방망이를 훔쳐가려는 맘씨 나쁜 형을 ‘기형인’으로 만들기도 하는 심술도 부린다. 손진태는 이 도깨비가 장난하기를 좋아하며 때로는 보화(寶貨)를 가지고 오는 수도 있어 이러한 경우(童話中에서는)에는 “spirit, ghost보다 fairy의 성질을 가졌다[孫晋泰(1981), 孫晋泰全集 6, 太學社, P.189.]”고 하였다. 정 준 사람에게 그의 비밀을 털어놓고 후회하는 경박한(輕薄漢)인가 하면 토지에 말뚝을 박아 그것을 끌고 가겠다는 우매한 얼간이기도 하다. 제 몫 팥죽 한 그릇을 못 먹어 약속한 보(洑) 쌓기를 거부하여 비만 오면 그곳만 물이 새게 하는 사보타주에는 쟁의(爭議)하는 노동자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와당(瓦當)이나 막새 기와에 새겨진 도깨비의 모습은 공포감보다는 변형된 하회탈이라도 보듯 해학적이다. 반구형(半球形)으로 크게 융기된 눈, 중앙부에 뭉뚱하게 돌기(突起)된 들창코, 날개 편 박쥐 모양의 입, 좌우에 길게 솟은 송곳니, 아는 성(姓)이라야 김가(金哥)뿐인[李瀷, 성호사설(星湖僿說) 卷之四, 萬物文, ‘箕仙’ 條. “我國之鬼物作怪者 俗謂之獨脚 皆自稱姓金 古今無不然.”] 머리도 좋지 않고 건망증도 심하다. 그러다 보니 빌린 돈을 갚은 줄도 모르고 자꾸 가져다 준다. 그 행동거지가 밉상스럽지 않다. 눈감으면 코 베어 가는 이 영악한 세상에 남을 믿기도 잘하고 속기도 잘하는 이 헛점 많은 도깨비야말로 잃어버린 우리의 향수요 마음의 고향인지도 모른다.
2.
국어사전에 의하면 도깨비는 “동물이나 사람의 형상을 한 잡된 귀신의 하나”로 정의한다. 우리 민속학 사전에는 “비상한 힘과 괴상한 재주를 가져 사람을 호리기도 하고 짓궂은 장난이나 험상궂은 짓을 많이 한다는 잡귀신의 하나”라고 설명되어 있다.
대개 이 도깨비를 귀화(鬼火), 즉 인화(燐火)가 그 본체(本體)라고들 한다. 입과 코가 한곳에 붙어 있으며 ‘헛것’, ‘허깨비’ 등과 구별하기 어려운 경우도 많으며, 아랫도리는 너무 길어 끝을 볼 수 없거나 아예 뼈뿐이라 한다.
도깨비는 한문 글자로 독각(獨脚), 망량(魍魎), 이매(魑魅), 신치(神
光鬼
) 등으로 문헌에 기록되어 있으나 독각 외 후 삼자는 중국의 신화에 나오는 용어를 차용한 듯하다. 그러나 어느 것이고 간에 ‘귀(鬼)’와 그 구별이 명확하지 못하다. 의미상 그 행위를 보고 우리는 ‘도깨비’라 명명하고, 그 모습과 성정을 이해하는 것이다. 현대에 이르러서도 학자들의 어원에 제설이 있다.
‘씨앗’이나 ‘불’ 등을 뜻하는 ‘돗’과 ‘애비’가 합쳐진 낱말로 ‘풍요로움을 가져다주는 성인 남자’로 풀이하는가 하면, 언어학 전공 학자는 “방언에서 이 도깨비를 ‘도체비’라 불리우고 있어 이 도체비에서 ‘돛’을 유도해 낼 수 있다. … 이 ‘돛’은 ‘범(帆)’의 뜻을 지녔으므로, 도체비는 ‘돛 모양의 뿔을 지닌 아비’”라 하였다. 그런가 하면 서정범 교수는 이 도깨비가 15세기 문헌에는 ‘돗가비’로 표기되어 있다고 고증하고 “‘돗가비’는 ‘
도ㅺ
’과 ‘아비’의 합성어이다. ‘
도ㅺ
’의 원형은 ‘돗’이다… ‘도섭’이라는 말은 능청맞고 수선스럽게 변덕을 부리는 것을 뜻하는데 어근은 ‘돗’이다. ‘돗아비’에 ㄱ이 첨가되어 ‘돗가비’가 되었는데, ‘돗가비’는 수선스럽고 능청맞게 변덕부리는 아비라는 뜻”으로 풀이하였다.
도깨비의 성정은 심술과 장난이 심하고 씨름이나 가무를 즐기는 것으로 이야기한다. 그리고 때로는 신통력을 발휘하여 사람에게 재물을 주거나 협력해서 발복(發福)의 기회를 마련해 주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윤리관도 있고 인간에게 은혜를 미침으로써 사람과는 우호적 관계를 맺기도 한다.
도깨비는 심술과 장난끼가 그 특징이다. ‘외양간의 소를 지붕 위에 올려두는가 하면 논밭에 자갈 등을 넣어 농사를 망가뜨려 놓기’도 하는데 그러나 이 유의 설화들의 행간을 읽어보면 이 심술에는 다소간 근거가 있다할 수 있으며, 그 보복에는 그럴만한 개연성도 가지고 있다.
성현(成俔)의 이웃에 당대의 명현 기(奇) 재추(宰樞)가 있었는데, 어렸을 때부터 그의 손자 유(裕)와 더불어 사귀어 왔었다 한다. 그러자 재추가 죽고 곧 얼마 아니 되어 주택이 흉가로 변해 사람들이 들어가지 못하고, 기재추의 손자 유도 또한 다른 곳으로 떠나버렸다 한다. 다음 설화는 이 뒤에 이어지는 것으로 성현이 그 이웃으로부터 들었다는 것이다.
어떤 아이 종이 문밖에 서있었는데, 문득 그 등에 무슨 물건이 붙어 견딜 수 없으므로, 어리둥절하여 들어가서 찾아보았으나 물건은 볼 수가 없고 꽤 오래 되어 풀어지매 온 몸에 땀이 흘렀다고 한다. 이 뒤로도 괴상한 일이 많아서 사람이 밥을 짓고자 하면 솥뚜껑은 그대로 있는데 똥이 그 속에 가득하였다. 밥은 뜰에 흩어져 있고 혹 소반과 바리를 집어서 공중에 던지며, 혹은 큰 솥을 들어 공중에 돌리다가 이를 치면 소리가 큰 종소리 같았다. 혹은 남새밭 채소를 모두 파서 거꾸로 심어 잠깐 사이에 말라버리게 하고, 혹은 옷장을 자물쇠로 잠그었으나 옷을 모두 꺼내어 대들보 위에 늘어놓고 폭폭이 모두 제자(題字)를 붙여 과두문자(科斗文字)의 전자(篆字)와 같이 하였다. 혹은 사람 없는 아궁이에서 불빛이 갑자기 일어나고, 만약 끄는 사람이 있으면, 불이 문간방에 옮겨 붙어 다 태워버리니, 이런 까닭으로 집을 버리고 거처하지 않은 지가 이미 여러 해 되었다. 유가 분연히 말하기를 “선조가 살던 집을 오랫동안 수리하고 있지 못하니 어찌 사람된 자로써 선조를 받드는 뜻이겠느냐. 대장부가 어찌 귀신을 두려워할 이가 있겠느냐” 하고, 곧 들어가 거처하였더니, 괴상한 일이 또 다시 일어나 밥바리를 옮기거나 똥으로 사람 낯을 칠하기도 하였다[成俔, 용재총화(慵齋叢話). “有僮入門外 忽有物附其背 重不能甚 狼狽而入 覓之不見物 良久而釋 流汗被軆 自後多怪社 人若炊飯 則鼎盖如舊 而糞滿其中 飯散于庭 或取盤盂擲于空 或取大釜環空中而擊之 聲如洪鍾 或見圃中菜蔬 皆掘而倒植之 須臾而枯 或見衣籠牢鎖 而衣裳盡排梁上 幅幅皆着署 如科斗篆 或見無人竈間火光忽起 如有人捧之者 來觸廊廡 廊廡盡燒 以故棄而不收者已多年 裕憤然曰 先祖家室 久未修茸 豈人子奉先之意乎 大丈夫豈有畏鬼之理乎 則入居 怪亦復作 或移飯鉢 或以糞穢塗人面.”].
위와 같은 심술에도 그 나름의 이유가 있다 하겠다. 즉, “유가 꾸짖으면 공중에서 외치기를 ‘기도사가 어찌 이와 같이 하느냐’ 하니, 얼마 아니 되어 유도 병을 얻어 죽었다. 사람들이 모두 ‘유의 표제(表第; 외종제) 유계량(柳繼亮)이 난리를 음모하다가 사형 당하더니 그 귀신이 집에 의지하여 빌미[祟]를 일으킨다’ 하였다. 유계량은 난을 음모하다 처형을 당하였기 때문에 그 장례가 충분하지 못했을 것이며, 후손으로부터 어떤 사후의 위로도 못 받았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또 그의 친척인 기유의 조부는 고관이었으므로 그의 구명운동을 해주었으면 목숨을 건질 수 있었을 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원한이 남아 이런 빌미를 일으켰다고 할 수 있다[成俔, 上揭書. “裕若叱之 則空中唱云 奇都事敢如是乎 未幾裕得病而卒 人皆云 裕之表弟柳繼亮謀亂被誅 而其神依家作祟也.”]’”고 그 나름의 개연성을 유추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특별한 경우 외에는 장난끼로 해보는 심술이 대종을 이루고 있다. 경북 영덕에 오십영천(五十鈴川)이라는 내[川]가 있는데 이 내를 단단히 막은 보(洑)가 있다. 이 보는 도깨비가 쌓은 보라고 알려졌다. 옛날 이 고장 사람들이 이 보를 쌓는데 아무리 단단히 쌓아도 무너지고 무너지고 하여 걱정을 많이 하였다 한다. 그러자 하루는 도깨비 떼가 나타나 자기들한테 메밀묵 한 동이씩을 해주면 보를 잘 쌓아 주겠다고 하였다. 그래서 이 고을 사람들은 의논하여 메밀묵 여러 동이를 쑤어서 도깨비들에게 주었다. 메밀묵을 먹은 도깨비들은 암톨, 숫톨을 맞추어 보를 쌓았는데 그런데 그들 가운데 도깨비 하나가 메밀묵이 모자라 먹지 못했다. 심술이 난 이 도깨비는 자기가 쌓아야 할 곳을 쌓지 않았다. 그래서 그 뒤로 많은 비가와도 다른 부분은 터지지 않았지만, 메밀묵을 먹지 못한 도깨비가 쌓은 한 곳만은 사람들이 아무리 큰 바위로 막아 놓아도 터져 버린다고 하였다.
또 어떤 이가 가을철이 되어 게막을 짓고 게를 잡았다. 하루 저녁에는 게가 신기하도록 많이 내렸다. 그래서 가지고 간 구럭에 가득히 담고 그래도 모자라기에 입고 간 바지를 벗어 게를 담았다. 새벽녘이 되었다. 누가 밖에서 “김서방, 게 많이 잡았오” 하기에 수상히 여겨 내다보니 구척대인(九尺大人)이 킬킬대며 달아나는 것이었다. 날이 새어 김서방은 집에 돌아오려고 게 구렁을 들었더니 너무나 가볍기에 이상해서 속을 들여다보았다. 그랬더니 밤새도록 잡은 것은 게가 아니라 쇠똥만 가득하더라 하였다.
3.
이 도깨비는 만물정령(萬物精靈)의 신앙에서 형성된 잡된 귀류(鬼類)의 하나이지만 귀신과는 좀 다르게 인식되고 있다. 귀신은 원통하고 분하게 죽었거나 원한을 품고 죽은 영혼들이다. 몸은 비록 죽었지만 이승에 대한 한이 아직도 많은 넋들이 대부분이다. 술몽쇄언(述夢𤨏言)에 “세상에는 간혹 원한을 깊이맺어 독기가 엉기고 맺혀서, 죽어서도 오히려 흩어지지 않고 귀매(鬼魅)가 되는 일이 있다[金大鉉(1989), 述夢𤨏言, ‘仇怨’ 條, 韓國佛敎全書, 第十冊, 東國大學校 出版部.]"고 하여, 원과 한이 이 귀신을 만든다고 하였다.
이렇게 귀신은 원통하고 원한에 찬 넋들, 이승에 대한 탐착과 미련이 많은 넋들이라면, 이 도깨비는 사람들이 일상 생활에서 사용하다 버린 물체―빗자루⋅절구공이⋅부지깽이⋅헌 신발 등 사람의 손때가 묻은 것이나 사람의 피―특히 여인의 피가 묻은 자연물이 도깨비로 잘 변한다고 하였으며, 그저 밉지 않고, 그렇게 무섭지도 않은 그런 한 ‘체(體)’나 ‘물(物)’로 나타난다.
이익(李瀷)도 “오래 묵은 빗자루나 절구공이 따위”가 도깨비로 변한다 하였다[李瀷, 前揭書. “(今世人家鬼變甚多 或猝急驚散現) 其本相則必是帚杵等 陳舊之物.”]. 길을 가다 씨름을 요구하는 도깨비를 만나 그를 잡아 나무에 묶어 놓고 이튿날 가보니 위의 물건들이 나무에 묶여있더라는 이야기를 우리는 많이 듣는다.
정도전은,
회진(會津)은 큰 산과 우거진 숲이 많고 바다에 가까우며 사람이 사는 동네는 거의 없다. 그래서 이내[嵐; 저녁나절에 멀리 보이는 산 같은 데 떠오르는 푸르스름하고 흐릿한 기운]가 떠오르고 장기(瘴氣)가 스며들어 자주 흐리고 비가 많이 온다. 그 산해(山海)의 음허(陰虛)한 기운과 초목⋅토석(土石)의 정(精)이 스미고 엉겨서 그것이 화하여 이매망량(魑魅魍魎)이 되는데 사람도 아니고 귀신도 아니며 유(幽)한 물건도 아니고 밝은 물건도 아닌데, 역시 하나의 물(物)이었다[鄭道傳, 三峯集, ‘謝魑魅文’. “會津多大山茂林 僻近於海 曠無人居 嵐蒸瘴泄 易陰以雨 其山海陰虛之氣 草木土石之精 薰染融結 化而爲魑魅魍魎 非人非鬼 非幽非明 亦一物也.”].
하여, ‘산과 바다의 음허(陰虛)한 기운과 초목⋅토석(土石)의 정(精)이 스미고 엉겨서 그것이 화하여 도깨비가 된다’하여 자연물이 변한 것으로 보았다.
귀신은 주로 죽은 사람의 한이 응결된 관념물이라 사람들에게 감정적 감각을 준다. 무섭다든지 섬쩍지근하다든지 하여 사자(死者)의 실체 모습을 생각케 한다. 그러나 이 도깨비는 귀신과는 달리 죽은 사람의 원혼처럼 그렇게 처절한 감정을 주지는 않는다. 귀신은 인간의 생명을 앗아가는 결정적인 가해를 하지만, 도깨비는 ‘잔인하거나 악의에 찬 가해’가 없다. 도깨비에게는 의도되지 아니한 불특정에 대해 투사(投射)나 대사(代射) 감정을 가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삼봉은 귀신을 도깨비와 구별하여 말하였다. 즉, 초목⋅토석(土石)의 정(精)이 스미고 엉겨서 그것이 화하여 도깨비[魑魅魍魎]가 되는데, 그것은 ‘사람도 아니고 귀신도 아니며 유(幽)한 물건도 아니고 밝은 물건도 아닌, 하나의 물(物)’이었다고 하였다.
김안로의 ｢용천담적기(龍泉談寂記)｣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채씨 성을 가진 한 유생이 황혼 무렵 산책을 나섰다가 한 부인을 만난다. 옅은 화장에 낮은 쪽을 찐 여인은 한 눈에 보아도 보통이 아닌 미인이었다. 유생이 여인의 미소에 정신이 빠져 “아름답고 한가로운 때 미인을 우연히 만나니 솟아나는 정을 억제할 수가 없다”고 수작을 건다. 그러나 부인은 얼굴만 약간 붉힐 뿐 싫어하는 기색 없이 “군자는 어떤 분이시기에 오다가다 만난 아녀자에게 이다지 정중하신가요. 미천한 계집에게 혹시 마음이 계시다면 저의 집으로 오심이 어떨까요”하고 말한다. 유생은 너무도 기뻐 소매를 서로 잡고 여인을 따라갔다. 여덟 겹 대문으로 들어섰다. 흰 돌로 기둥을 한 누각의 웅장한 집이 나타났다. 한 소녀가 그 옆에 깊숙하고 아늑한 방으로 유생을 안내한다. … 여인이 몸종을 시켜서 주안상을 들려오게 한 후 쌍룡이 어우러진 백옥 잔에 술을 따라 권하면서 말한다. “미천한 계집의 운명이 기구하여 어려서 부모를 잃고 자라서도 배우자마저 잃어 긴 한숨 속에 세월을 보내다가 밤 풍경 완상차 길거리에 나갔다가 낭군을 뵙게 되었다…체면에 손상되지 않는다면 평생을 모시고 싶다”고 말한다… 술이 거나하게 취하자 몸종이 살며시 들어와 유생의 의관을 받아 횃대에 걸더니 금침을 깔고 촛불을 내어간다. 두 남녀는 벌이 넘나 노는 듯, 나비가 춤추듯 기이한 상봉을 기뻐한다. … 이윽고 유생이 새벽녘의 종소리가 들리고 천둥을 치는 듯한 소리에 벌떡 일어나 보니 그는 태평교(太平橋) 다리 밑에서 흙투성이 돌을 베개하고 거적을 이불하여 누워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옷과 갓은 다리기둥 틈에 걸려있고 주위에는 송장이 썩는 듯한 악취가 진동한다. 이제막 다리 위에는 장작을 실은 수레가 요란스럽게 가고 있었다. 유생이 소스라쳐 놀라 미친 사람처럼 집으로 되돌아와 며칠이 지나서야 겨우 안정되는 듯하였으나 아직도 망연히 마음이 울적하여 마치 하늘에 오르다 떨어진 기분이었다. 고개를 빼어 혹시나 한 번 더 만나볼 수 있을까 초조해 하였으나 곧 요망스런 도깨비한테 홀린 줄 알고 무당이 굿을 하고 의사가 뜸도 뜨는 등 약물과 기도를 백방으로 행하여 겨우 병이 낫게 되었다[金安老(1985), ｢龍泉談寂記｣, 국역 대동야승⋅Ⅲ 소재. 민족문화추진회, pp.482∼484.].
우리는 귀신에게는 ‘씌었다’하고 도깨비에게는 ‘홀렸다’라고 한다. ‘씌었다’와 ‘홀렸다’라는 두 동사에는 어감상 차이가 있다. 즉 ‘씌었다’는 수동형이고 ‘홀렸다’라는 말은 행위자의 의지가 반영된 능동형이다. ‘씌었다’에는 공포성이 있지만 ‘홀렸다’에는 그것이 없다. 공모 내지는 동감한 의미가 있다.
‘도깨비 대동강 건너가듯’ 하는 속담은 일의 진행이 눈에는 잘 뛰지 않으나 그 결과가 신속할 때 쓰는 말이고, ‘도깨비도 수풀이 있어야 모인다’라는 말은 도깨비의 거소는 주로 엄습한 숲속임을 말하는 것이며, ‘도깨비를 사귀었나’는 도깨비와 교유하여 부자 된 이가 많다는 민간 신앙적 속설을 표현한 말이다.
4.
우리 도깨비 설화에는 많은 골계나 해학 이외에도 지나친 욕심은 금지해야 한다는 교훈적 메시지가 담겨 있다. 우리 한국인의 가장 큰 덕목인 효제(孝悌)가 강조되어 있는가 하면 정직의 윤리관도 깃들어 있다. 설화 속의 도깨비는 메밀묵을 좋아하는 서민의 친구이고 어두움을 좋아하는 수줍은 야행자(夜行者)이며 우매함⋅심술⋅건망증이 많은, 노래도 잘하고 노름도 좋아하고 여자도 좋아하고 장난끼도 많은, 고향 청보리 핀 논둑가에 함께 놀던 우리 ‘옛친구’로 나타나 있다. 화를 내는 경우가 많지만 별 무서움을 주지는 않고 사람을 쉽게 용서도 하고 어리숙하게 나타나 있다.
누구나 알고 있는 도깨비 이야기를 몇 개 옮겨 본다.
｢예화 1｣
볼에 큰 혹이 달린 어떤 가난한 혹보노인이 있었다. 그는 불행히도 흉물스런 혹을 볼에 달고 있었지만 마음만은 착하고 낙천적이었다. 어느 날 산에 나무를 하러 갔는데 나무를 하는 도중에 비가 와 산중에 있는 폐가(廢家)에 들어가 비를 피하고 있었다. 이윽고 밤이 되었다. 밤이 되자 도깨비들이 많이 모여와서 방망이를 들고 두드리며, ‘술 나오라 뚝딱’, ‘밥 나오라 뚝딱’하며 술이며 밥이며 떡 고기며를 많이 나오게 했다. 도깨비들은 이것을 먹고 노래부르고 춤추며, 떠들고 놀았다. 이것을 본 혹보 노인도 저절로 흥이 나서 노래를 불렀다. 도깨비들이 이 혹보 노인의 노래를 듣고 좋아라 하며 자신들이 먹던 밥이며 술이며를 내 놓으면서 노래를 더 불러 달라고 하였다. 혹보 노인은 그들의 청대로 계속해서 노래를 불렀다. 재미있게 노래를 들은 도깨비들이 그렇게 아름다운 노래가 어디서 나오느냐고 하였다. 그러자 혹보 노인은 자신의 볼에 길게 붙은 혹을 가리키며 이 혹에서 나온다고 우스갯말로 대답하였다. 그러자 도깨비들이 노인의 혹을 탐내고는 노인을 졸라 금과 은을 주고는 혹을 떼어갔다. 이 노인은 흉물스러운 혹을 금은과 보화를 받고 떼게 되었다. 얼굴 모습이 달라진 잘 생긴 얼굴을 하고 돌아온 이 노인의 모습을 본 이웃의 심술궂은 노인이 어떻게 하여 그 혹을 떼게 되었느냐고 묻자 혹을 떼게 된 사실을 아야기 하였다. 이 이야기를 들은 이 심술궂은 혹보도 나무하러 산으로 갔다. 비가 오지도 않는데 폐가(廢家)에 들어가서 밤이 들기를 기다렸다. 과연 밤이 되니 예의 도깨비들이 나와 술이야 밥이야 고기야를 방망이를 두드려 나오게 하고는 신나게 노는 것이었다. 심술궂은 혹보는 도깨비 앞으로 나아가 노래를 불렀다. 노래를 들은 도깨비들은 “너 잘 왔다. 우리가 전 번에 금이야 은이야 주고 얻은 혹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이 나쁜 거짓말쟁이 같으니라구. 이거 도로 가져라” 하면서 착한 노인에게 떼내 온 혹을 이 심술궂은 혹보의 반대 쪽 뺨에 붙여 주었다. 이 심술궂은 혹보는 혹을 하나 더 달고 집으로 내려왔다.
｢예화 2｣
형제가 있었는데 형은 부자이면서도 늙은 부모를 동생에게 떠맡긴 욕심장이였다. 동생이 어느 날 날씨가 궂은 데도 산으로 나무를 하러 갔다. 나뭇잎을 긁어모으고 있는데 익은 개암 하나가 굴러 떨어졌다. 동생은 이 개암을 줍고는 “이것은 아버지에게 드려야지”하고 주머니에 넣었다. 계속해서 나무를 긁어모으고 있는데 또 개암 한 개가 떨어졌다. “이것은 어머니에게 드려야지”하고 주머니에 넣었다. 다시 나무를 긁어모으고 있는데 또 개암이 하나 굴러 떨어졌다. 그럴 때마다 동생은 “이것은 아내에게”, “이것은 아들에게”, “이것은 딸에게” 하고는 마지막 것을 주워들고는 “이것은 내가 먹자”하고 주머니에 넣었다. 이윽고 비가 오기 시작했다. 동생은 비를 피할 욕심으로 산속 좌우를 두리번거리다가 폐가(廢家)를 발견하고 그곳으로 들어갔다. 저녁이 되고 또 밤도 깊었으나 비는 그칠 줄 몰랐다. 할 수 없이 동생은 그곳에 머물며 밤이 새기를 기다랄 작정을 하였다. 이윽고 밤이 들자 도깨비들이 몰려왔다. 동생은 무서워서 대들보 위로 올라가 숨었다. 대들보에 엎드린 채 아래를 내려다보니 도깨비들이 방망이를 두드리고는 술이며 밥이며 떡 고기며를 나오게 하여 이것을 먹으며, 떠들고 놀았다. 이것을 본 동생은 시장기를 느껴 주머니에 넣었던 개암 하나를 꺼내 깨물었다. 개암이 딱 소리를 내며 깨어졌다. 그러자 이 소리를 들은 도깨비들이 이 집의 대들보가 부러지는 소리로 알고 도망을 쳤다. 동생은 대들보에서 내려와 술이며 밥이며 떡 고기며를 배불리 먹고는 날 밝기를 기다려 남은 음식과 도깨비 방망이를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동생은 혹시나 하며 도깨비들이 두드리던 방망이를 두드리며, ‘밥 나오라 뚝딱’, ‘옷 나오라 뚝 딱’, ‘돈 나오라 뚝딱’, ‘은 나오라 뚝 딱’하였더니 정말 외는 대로 되어 집도 생기고 논도 생겨 부자가 되었다. 동생이 부자가 된 것을 알게 된 형은 동생에게 그 연유를 물었다. 자세한 내용을 들은 형은 산으로 나무를 하러 갔다. 개암 하나가 굴러 떨어졌다. “이것은 내가 먹자”하고 주머니에 넣었다. 또 굴러 떨어지자 “이것도 내가 먹자”하고 주머니에 넣었다. 형은 개암이 굴러 떨어질 때마다 “이것도 내가 먹어야지”하며 주머니에 넣고는 비가 오지 않는 데도 동생이 말해 준 그 폐가를 찾아갔다. 밤이 들자 도깨비들이 몰려와 방망이를 두드리고는 술이며 밥이며 떡 고기며를 나오게 한 다음 이 음식을 먹으며, 떠들고 놀았다. 이것을 본 형도 대들보 위에서 주머니에 넣었던 개암 하나를 꺼내 깨물었다. 도깨비들은 개암이 깨지는 소리를 듣고 “저번에 우리 방망이를 훔쳐간 놈이 또 왔나 보다. 이 놈을 끌어내어 혼을 내주자”하고 대들보 위의 형을 찾아내고는 “이놈, 너 혼 좀 나봐라”하면서 형의 고추를 붙잡고 “한 발 늘어나라 뚝딱, 두 발 늘어나라 뚝딱”하면서 도깨비 방망일 자꾸 두들겼다. 그러자 형의 고추는 십 여발이나 늘어나 이상한 몸꼴의 사람이 되고 말았다.
｢예화 3｣
과부 한 사람이 도깨비와 친하면 부자가 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도깨비가 좋아한다는 메밀묵을 준비 해 놓고 기다렸다. 밤이 이슥하자 도깨비가 왔고 메밀묵을 맛있게 먹었다. 그 뒤로부터 이 과부는 도깨비와 친해져서 금은 보화를 얻고 부자가 되었다. 그러자 과부는 도깨비가 싫어져 도깨비가 싫어하는 것이 무엇인지 물었다. 왜 그러느냐고 도깨비가 물었다. 당신이 싫어하는 것을 치워버릴려고 그런다고 하였다. 그러자 도깨비는 ‘말의 피(혹은 말의 대가리)’라고 하였다. 옳다싶은 과부는 이튿날 말을 잡아 말대가리를 사리문에 걸어놓고 주위로 말의 피를 뿌렸다. 밤이 되어 과부를 찾아왔던 도깨비는 기겁을 하여 도망치면서 “여자에게 속 주지마소(진심을 틀어놓지는 말라는 뜻), 여자는 믿지마소” 하였다.
｢예화 4｣
어떤 사람이 도깨비와 친해져서 도깨비가 가져다주는 돈으로 얼마간의 논밭은 사 놓았다. 애오라지 하나마 도깨비가 가져다 준 돈으로 어느 정도 살게 되자 도깨비가 싫어졌다. 하루는 도깨비더러 무엇이 무섭냐고 물어 보았다. 도깨비는 말의 피라 하였다. 그러자 도깨비는 이 사람에게 “당신은 무엇이 무섭냐”고 물었다. 돈이라고 대답하였다. 어느 날 도깨비가 이 사람집을 방문하니 대문 위에 말대가리가 걸려 있었다. 이놈이 나를 배신했구나 생각한 도깨비가 이 사람이 제일 무섭다고 한 돈을 마구 집으로 던졌다. 사람은 돈을 무서운 척 하며 이리 저리 피하며 죽는 시늉을 했다. 나중 인간이 무서워 한 것은 돈이 아니고 사실은 돈을 제일 좋아하고 있음을 안 도깨비는 이 돈으로 마련한 논을 떼 가겠다고 논의 네 귀퉁이에 말뚝을 박고 동아줄로 얽어매고 영차영차하며 밤내 끌고 있었다.
｢예화 5｣
경북 영덕에 오십영천이라는 내가 있는데 이 내를 단단히 막은 보(洑)가 있다. 이 보는 도깨비가 쌓은 보라고 알려졌는데 옛날 이 고장 사람들이 이 보를 쌓는데 아무리 단단히 쌓아도 무너지고 무너지고하여 걱정을 많이 하였다. 그러자 하루는 도깨비떼가 나타나 우리들에게 메밀묵 한 동이씩을 해주면 보를 잘 쌓주겠다고 하였다. 그래서 이 고을 사람들은 의논하여 메밀묵 수동이를 쑤어서 도깨비들에게 주었다. 메밀묵을 먹은 도깨비들은 암톨, 숫톨을 맞추어 보를 쌓았는데 그런데 그들 가운데 도깨비 하나가 메밀묵이 모자라 먹지 못했다. 심술이 난 도깨비 하나는 자기가 쌓아야 할 곳에 쌓지를 안았다. 그래서 그 뒤로 아무리 많은 비가와도 이 보는 터지지 않았지만, 메밀묵을 먹지 못한 도깨비가 쌓은 곳이 사람들이 아무리 큰 바위로 막아 놓아도 터져 버린다고 하였다.
｢예화 6｣
어느 시골에 인색하기로 유명한 영감이 살았다. 어느날 저녁에 누가 들창 밖에서 돈 닷냥만 꾸어 달라는 것이었다. 인색한 영감은 선뜻 돈을 꾸어 주었다. 그날 밤부터 떠꺼머리 총각이 와서 돈을 갚고 가는데 웬일인지 밤마다 닷냥씩 주고 가서 영감은 곧 부자가 되었다. 어느날 가족에게 부자가 된 까닭을 이야기 했다. 그때 마침 도깨비가 지나가다가 이야기를 듣고 생각하니 제가 돈을 꾸어 갔으나 한 번 갚으면 되는 것을 날마다 갚았다. 건망증 때문에 도깨비는 가난해지고 영감은 부자가 되었다. 도깨비는 화가 나서 그날 밤에 제 돈으로 산 영감의 논밭을 떼어 간다고 밤이면 야단법석을 부리고 논에 돌을 갖다 놓으며 여기 저기 말둑을 박아서 농사를 지을 수가 없게 만들었다고 한다.
｢예화 7｣
어떤 이가 가을 철이 되어 게막을 짓고 게를 잡았다. 하루 저녁에는 게가 신기하도록 많이 내려서 주체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가지고 간 구럭에 가득히 담고 그래도 그릇이 모자라기에 입고 간 바지를 벗어 게를 담았다. 새벽녘이 되었다. 누가 밖에서 “김서방, 게 많이 잡았죠” 하기에 수상히 여겨 내다보니 구척대인(九尺大人)이 킬킬대며 달아나는 것이었다. 날이 새어 김서방은 집에 돌아오려고 게 구렁을 들었더니 너무나 가볍기에 이상해서 속을 들여다보니 밤새도록 잡은 것이 게가 아니라 쇠똥만 가득하더라는 이야기다.
이상의 예화를 종합해 보면 도깨비는 광명한 대낮을 싫어하고 으슥한 곳, 특히 밤이나 비가 축축히 내리는 밤을 좋아한다. 전게한 성현의 이야기에도 ‘때는 컴컴한 밤, 하늘은 흐려 비가 조금씩 부슬부슬 내리는 우거진 풀숲(時夜向黑⋅天陰雨濕⋅林莽)’ 등으로 되어 있다.
삼국유사 소재 도깨비 설화에 나오는 비형랑도 보면 “밤에 활동하다 새벽을 알리는 절의 종소리가 들려오자 사라[三國遺事, ‘桃花女鼻荊郞’ 條, “鬼衆聞諸寺曉鍾各散.”]”진다. 이옥(李鈺)의 신병사전(申兵使傳)에 보면, “이매(魑魅)와 도깨비 따위가 혹시 휘파람 불고 춤추며 황홀히 날뛰는 것도 밤에는 있을 수 있겠으나 낮에는 나타나지 못하는 법이다[李鈺, 申兵使傳, “魑魅魈
鬼居
之類 時或嘯舞恍惚 而宜於夜 不宜於晝.”]”라 하였다.
도깨비에 홀려 정신을 잃은 사람은 ‘동쪽으로 난 복숭아 가지’로 얼굴을 쓰다듬거나 때리기도 하였고, 복숭아나무가지 중 특히 동도지(東桃枝; 동족으로 난 가지)가 귀류(鬼類; 도깨비⋅귀신)를 쫓는데 유효하다 하여 제야(除夜)의 구나(驅儺; 세모에 역귀를 쫓는 의식)에 사용되기도 하였다. 성현이 도깨비에 홀린 소년에게 “공이 동쪽으로 뻗은 복숭아 나뭇가지를 잘라 장도(長刀)를 만들어 거짓으로 그 목을 베니, 소년이 몸을 굴려 길게 울부짖고 죽은 것처럼 땅에 엎드려 깊이 잠들었다가 3일 만에 비로소 깨어나더니 광태가 갑자기 사라졌다[成俔, 前揭書, 卷之三. “公斫桃樹東枝作長刀 虛斬其頸 少年翻身長呼 作爲死狀 卽仆地昏睡 三日始覺 狂態頓除.”]”고 하였다.
그 나름의 당연한 논리로 “떠오르는 동편 하늘의 아침 해를 받은 복숭아 가지만 보면 무서워 도망”가는 것이다. 중국문헌에도 보면 “복숭아나무가 동남쪽으로 가지를 뻗고, 가지의 길이가 두 자 여덟치가 되고, 해를 향한 것이라면 귀신들이 그것을 무서워한다[太平廣記, 卷第 三百二十五, ‘夏侯文規’ 條. “桃東南枝長二尺八寸向日者憎之.”]”고 하였다. 동쪽으로 난 복숭아나무는 광명 내지는 왕성한 양기를 의미하기 때문에 음물(陰物)인 도깨비와 같은 귀물이 꺼려하는 것이다. 옛날 중국 신화에 나오는 예(羿)가 “복숭아나무로 만든 몽둥이에 맞아 죽었기로 귀신은 복숭아나무를 두려워한다[袁柯(1985), 中國古代神話, 北京; 中華書局, P.86⋅淮南子, ‘詮言篇’, 許愼注. “…桃木以擊殺羿, 由是以來鬼畏桃也.”]”는 기록을 남기기도 하였다.
다음으로 도깨비가 싫어하는 것은 말[馬]과 그 피[血]이다.
말은 동물 중 유일하게 자기 사촌을 알아 근친 교배도 부정하며, 누워서 자는 법도 없는 ‘생기 왕성한 짐승’이라고들 말한다. 유목민이 많은 나라에서는 이 말이 ‘모든 가축의 왕[馬是諸畜之王 駝是諸畜之首; 말은 모든 가축의 왕이고, 낙타는 모든 가축의 우두머리다]’이라 하여, ‘유목민에게 말의 존재는 목수에게 톱이 있어야 하는 것과 같다[牧人的馬 木匠的鋸]’고 본 것이다. 12지(支)의 일곱 번째 동물로, 말의 시[午時]는 11시부터 13시까지인데 해그림자가 가장 짧은 대낮이다. 이것은 도깨비가 생기(生氣) 넘치고, 근친간의 교접은 말과 같은 하등동물도 상피(相避)하는데 호연(浩然)한 기상을 소지한, 도덕적⋅군자적 인격체인 사람인 경우에 있어서랴 하는 암시의 ‘언외지의(言外之意)’를 담고 있다고 하겠다.
또 도깨비는 초인적 능력을 가지고 있어 인간이 할 수 없는 일도 잘 한다. “하룻밤 사이에 구릉(丘陵)과 같이 쌓아놓은 황금을 신라 궁전으로 갖다 두는가 하면 신력으로써 하룻밤에 산을 무너뜨려 못을 메워 평지로 만들기도 하는[三國遺事, ‘武王’ 條. “以神力可輸 將金來矣 … 以神力一夜頹山塡池爲平地.”]” 괴력을 소유하여 ‘쇠솥뚜껑을 솥 안에 우그려 넣기도’ 한다.
또 도깨비는 사람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는 단순함과, 곧잘 속아 넘어가기도 하는 어리석음도 가졌다. 그래서 아무런 대가 없이도 도와주기도 하고 기분 내키면 금은 보화도 가져다주며 우정을 과시하기도 한다. 그러나 인간이 그를 배신하면 보복은 하되 그렇게 심모원려(深謀遠慮)한 꾀가 아닌 단순⋅우직한 방법이다. 논에는 자갈보다 쇠똥이 더 나쁘다는 말을 듣고 쇠똥을 논에 처넣는가 하면 소리와 관계없는 혹을 가지고 가 자기 신체 일부에 붙여 놓고 좋은 발성을 위해 목을 가다듬기도 한다.
도깨비의 기호 식품은 메밀묵이다. 메밀은 아시아 북중부가 원산지로 밭에 재배하고 한재(旱災) 때에는 벼의 대체 식물로 심기도 하다.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 기근(饑饉)을 해결해 주는 서민의 먹거리이다. 도깨비의 기호도 서민의 그것과 같이 한다고 할 수 있다.
5.
우리 민간 신앙에서 즐겨 이야기되는 도깨비는 그 비상한 능력과 그 막무가내의 저돌성, 단순함과 우매스런 고집과 심술, 그리고 그 밉지 않는 장난끼를 가지고 있다. 때로는 요염한 여자로 사람을 유혹해 놓고 한 개의 빗자루로 화하는 그 변화무쌍한 변신. 도깨비는 어떻게 보면 한국 특유의 체취와 멋과 욕망 등이 스며들어 있는, 우리 한국인들의 무의식이 가장 잘 용해되어 있는 ‘유정(有情)한 물체(物體)’라 할 수 있다.
잡귀 도깨비가 실존한다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도깨비는 상위 개념인 귀(鬼)나 신(神)―이를테면 조상신(祖上神)이나 무조신(巫祖神)과 같은 귀류처럼 신앙되거나 원귀(寃⋅怨鬼)들처럼 두려움의 대상이 되지도 않는다. 그러나 도깨비는 귀신 이야기 못지않게 우리 입에 즐거이 이야기 된다.
도깨비의 신통력은 그가 가졌다는 ‘방망이’로 대표되고 있다. 이 방망이의 무궁무진한 신통력은 서유기의 손오공이 가진 ‘여의봉(如意棒)’과 같은 구실을 한다. 이 ‘뜻대로 되는[如意]’ 방망이는 돈, 옷, 고기, 술, 지위… 모든 것이 마음대로 이루어지게 하는 요술을 부려준다. 그리고 쓰기만 하면 자기 실체를 감출 수 있는 감투(혹은 ‘탈’)도 가지고 있다.
도깨비는 그 괴상한 힘과 능력을 지녔으면서도 악행을 저지르지 않는다. 인간에게의 접근도 소극적이다. ‘도깨비에게 홀렸다’라는 말처럼 도깨비는 먼저 사람에게 반응을 떠보는 것이다. 상대의 반응을 바랄 뿐이지 강요하지 않는다. 집요한 목적을 가지고 작위(作爲)하지 않는다.
도깨비 이야기 속에는 가장 한국다운 원형질이 곰삭아져 있다. 옛날에도 이 도깨비를 ‘헛것’, ‘허체(虛體)’라고 하였고 지금도 경상 일부 지방에는 ‘허체비’라고도 하여 실재성을 믿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실존성을 부정하면서도 그 현상과 기능만은 즐겨 이야기한다. 이 모순 속에 우리는 우리 한국인의 무의식적 감정의 침잠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도깨비 방망이만 있으면 돈과 금은을 마음껏 가질 수 있고, 마음에 드는 여자도 고를 수 있으며, 도깨비 감투(탈)만 쓰면 자기의 실체를 감춘 채 상대를 볼 수 있다는 그 희한한 신통력이 우리 한국인의 꿈이자 환상인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한국인의 내부에 깊이 감춰진 리비도 내지는 성적(性的) 욕구를 다르게 표현한 것이라 하겠다. 이런 욕구―가지고 싶고 행하고 싶고 누리고 싶은―를 환상적으로 충족코자 하는 ‘욕구의 전이(轉移)’로 도깨비의 신통한 능력에다 가탁(假託)한 것이다.
일확천금을 하고 싶은 마음, 아무도 모르게 권력을 휘두르고 싶고, 고래등같이 큰 기와집에 살고 싶고, 산해진미를 먹고 싶다는 것은 우리 한국 옛 서민들의 무의식에 내재된 최고선의 하나였다. 아무도 몰래 도덕과 윤리에서 벗어나 마음껏 누리고 싶은 ‘하이드(Hyde; ‘지킬 박사와 하이드’로 널리 알려진 스티븐슨(Robert L. Stevenson)의 괴기 소설. 원제는 Strange Case of Dr.Jekyll and Mr. Hyde, 인간의 이중성 내지 양면성을 극명하게 묘사한 작품)’류의 본능―성욕⋅식욕⋅물욕⋅명예욕 등의 욕망이 도깨비를 만들었고, 도깨비 방망이나 도깨비 감투를 만든 것이다. 잡귀 도깨비는 우리 마음속에 있는 이런 욕망의 한 ‘물(物)’이자 ‘체(體)’요 ‘투사상(投射像)’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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