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박6일 간의 일정에 따라 중국을 거쳐 백두산 여행에 나선 8월 16일의 아침은 입추 지나고 처서를 며칠 앞둔 때인지 제법 선선한 기운이 감도는 상쾌한 초가을 날씨를 보였다. 동남아 몇 나라와 유럽 6개국을 순방한 경험이 있는 나로서는 비행기 타고 외국에 간다는데 별다른 설레임은 없었지만 유독 이번 여행이 기다려져 온 것은 바로 나의 탯줄이자 우리 민족의 시원이라고 하는 백두산과 천지를 만날 것이라는 기대가 내심 깔려있었기 때문이었다.
비행기로 중국 심양 까지는 잠깐이다. 이웃 나라라는 말이 실감나는 2시간 여 만의 비행 끝에 만주족의 근간인 심양에 내린 나의 눈에는 이곳이 중국이 아닌 마치 우리나라 어느 지방 도시에 와 있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익숙하게 다가 왔다. 낯익은 누렁 얼굴 고만고만한 키에 조그마한 몸집 지저분한 뒷골목과 허술한 건물 수양버들 가로수 어디를 둘러보아도 내가 사는 이웃 마을과 다를 바 없는 친숙한 인상이다. 15억 인구를 자랑하는 중국의 다섯 번 째 큰 도시 7백만 백성이 운집하여 사는 동네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소박하고 정겨운 사람 냄새나는 마을이다. 일찍이 누루하치가 중원을 평정하는 전초 기지로서 서간도 심양에서 발원하여 북경을 향해 진군할 때 그는 이 광활한 평원을 가슴에 품고 말고삐를 당겼으리.
연길에서 북간도 용정은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다.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만주 벌판은 참으로 광활한 대륙이다. 끝간데 없이 펼쳐진 평원 낮은 구릉과 굽이굽이 샛강 키자란 옥수수밭과 콩밭 그 사이사이로 노니는 순한 소 몇 마리가 마치 외갓집 뒷동산을 떠올리게 한다. 그렇구나 백년 전 우리 선조께서 자의든 타의든 이 땅에 흘러 와서 이 거칠고 황량한 들판을 얼마나 파고 뒤집었기에 이렇게 옥토로 바꾸어 놓았을까. 연변 조선족 자치구인 연길에서 백두산으로 가는 길목에 민족시인 윤동주의 유년 시절과 만나는 용정중학교에 들렀다. 교문을 들어서니 운동장에는 어린 학생들이 제복을 입은 군인들의 지도로 제식 훈련을 받고 있어 아직도 중학교에서 군사 훈련을 하느냐고 기념관 연구사님께 물었더니 군사 훈련이 아니고 상급 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몇 시간 정신교육을 받는 과정이라고 한다. 윤동주 그는 100년이 지난 지금 이곳 용정 조선족 자치구에서도 민족의 자부심 어린 혼불로 빛나고 있었다. 일제 치하에 항일 운동을 주도하신 문익환, 김좌진 등 애국지사들과 함께 아직도 광활한 만주 벌판을 지키고 있었다. 기념관에 방명하고 시비 앞에 머리 숙이니 까닭 모를 눈물이 난다. 지금은 중국 땅, 하지만 내 형제 내 동포가 살 부비며 억척스레 살아냈을 눈물겨운 그 날들이 생각난 것이다. 용정 외곽으로는 우리 이민족이 어머니의 강이라고 애지중지하는 해란강이 얕게 흐르고 멀리 산봉우리에 일송정 기념각이 세워져 있는 것을 먼 발치로나마 보고 지난다.
조선족 자치구 연길에는 2백만 조선족 중 12만 명 정도가 모여 살고 있다. 우리 조선족은 심양 용정 도문 백두산 일대 등 서북간도 드넓은 만주 지대에 분포하며 우리 고유의 억척스런 민족성으로 이곳 56개 소수민족 중 가장 우수하며 능력있는 민족으로 추앙 받고 있다고 한다. 실제로 시내 곳곳에 조선족 취업 우선 모집 광고 전단이 보이며 임금도 타민족에 비해 1.5배 정도 더 받는다고 한다. 그리고 북간도 어디를 가도 우리 한국 지폐가 위력을 발휘하고 있었는데 미국의 달러나 중국 위엔화 보다 훨씬 선호하고 있어 기분이 좋았고 또 달라진 조국의 위상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최근에 불어닥친 한류 열풍과 남한의 관광 러쉬가 조선족의 주가를 더 높여 우리 조선족들이 모국에 대한 자부심이 한껏 고조되어 있다는 현지인의 설명이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연길과 도문 등 우리 조선족의 흔적이 묻어 있는 북간도 소재 시내 곳곳에 우리 한글로 된 간판이 즐비하게 늘려 있어 깜짝 놀랐고 한편으로는 그 어려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우리말과 글을 사수해온 우리 조선족이 참으로 자랑스럽게 생각되었고 조국애와 민족적 자부심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으며 또 같은 한민족으로서 그 각고의 세월이 죄송하면서도 감동적이었다. 시대의 변화도 변화려니와 워낙에 우리 민족의 부지런한 근성이 이곳에서도 인정받고 있지 않나 싶다. 우리 조선족의 근면성은 다음날 백두산 대능선을 오르면서 광활하게 펼쳐진 백두대간 옥수수밭 콩밭을 보고 절감하면서 저절로 고개가 숙여질 정도였다.
백두산 그리고 천지, 나는 사진이나 TV 화면을 보면서 고만고만한 적당한 산이거나 호수일 것이라고 늘 대수롭잖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 막상 백두와 천지를 대면하고 난 순간 얼마나 오만불손하고 건방진 생각이었던가 반성하고 또 반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연길에서 백두산 북쪽 방향에서 백두대간에 오르는 산능선은 하늘길로 통하는 신비로움이요 경이의 연속이다. 자작나무와 사스레나무 즐비한 관엽수림이 빼곡한 능선엔 철늦은 야생화가 지천이고 굵게 패인 계곡 위로 도두라진 능선은 마치 힘 좋은 청년의 팔뚝같이 장대하고 우람하다. 아직도 그 위력적인 힘과 용기 패기가 온 몸에 서려 있어 산을 오르는 내 몸이 스무살 청년으로 돌아 간 듯 힘이 넘친다. 백두산은 온갖 동식물을 품고 있는 천혜의 명지로서 백두산 호랑이 담비 반달가슴곰 산삼과 영약이 넘치는 생명의 보고이다. 조선족이 노점에서 약초를 팔고 있는 길가에서 잠깐 휴식을 하는데 나는 20년 된 장뇌 한 뿌리를 헐값으로 사서 백두산 정기를 받는 셈치고 우둑 씹어 먹었다. 쌉싸름한 맛이 특이한데 이곳에 사는 들짐승들은 노상 명약초를 상용하고 있으니 참 복도 많다 싶다. 들풀이나 길짐승이거나 사람이나 한 세상 풍미하고 제 운명대로 돌아가는 길은 매 일반인데 어떤 종과 개체가 더 행복한가 따지는 것은 이 백두에서는 의미가 없다. 비교적 잘 닦인 차로로 백두산을 오르는데는 대략 여섯 시간 정도가 소요되는 장대한 길인데 산 중턱까지 차로 옆으로 개간하여 옥수수와 콩을 심어 놓은 것이 백두산만큼이나 대단하다. 나의 좁은 식견으로는 저 끝없는 밭작물을 누가 심고 거두는지 누가 풀을 뽑고 가꾸어 저렇게 알토란처럼 튼실히 키웠는지 불가사의 하기만한데 더구나 산기슭 간간히 보이는 소작 마을이 이곳에 보이는 사람의 전부라 도저히 그 비밀을 모르겠는데 가이더는 영농철이면 연변 심양 더 멀리 북경에서까지 사람들이 몰려와 단숨에 파종과 수확을 그것도 낫과 괭이로 해치워 버린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그 말을 듣고서도 도무지 나의 감각에 와 닿지 않았지만 좋은 기계와 운반용 차라고는 보이지 않는 이 광대한 밭을 누군가는 경작하기에 곡식을 심었음에는 분명하리라. 안내원은 덧붙여 중국인이 15억 명이나 된다는 사실을 상기해 보라고 했다. 그렇구나 그래서 중국산 농작물의 가격이 싸고 대륙의 큰 힘이 여기에 있었구나 싶다. 신비한 백두산 능선의 밭을 보면서 다시 한 번 인류의 창조적 기능과 더구나 우리 조선족의 근면성에 진심으로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백두산을 오르면서 나는 백두산 호랑이를 만났다. 백두산 호랑이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이 장대한 산하 길목 길목에 턱 버티고 서서 민족의 영산을 지키고 있었다. 바로 우리 조선족 동포야 말로 백두산 호랑이요, 진정한 이 땅의 주인이었다.
나는 지금 백두 정상을 향해 끝없이 경이로운 큰 길을 오르고 있다. 아쉬운 것은 북한 쪽에서 오르면 백두산이요 중국 쪽에서 오르면 장백산이니 내 조국 북한으로 오르지 못함이 가슴 저미나 백두 정상은 같은 산이요 천지는 하나라 위안해 본다. 관엽수림이 끝나는 지점에는 야생초가 화산 바위 언저리에 다닥다닥 붙어 있다. 갑자기 바람이 거세어 진다. 산의 초입에서는 날씨가 맑았는데 갑자기 날씨가 변덕을 부린다. 안내원의 설명에 의하면 1년 중 백두산 천지 정경을 온전히 보는 날은 20여일이 채 안되고 천지를 겨우 보는 것도 70일이 못 되니 오늘 등정의 행운은 하늘만이 아니 기도나 열심히 하란다. 백두 정상 16 봉우리 중 아홉 봉은 북한에 속해 있고 일곱 봉이 중국에 연해 있는데 불행이도 북한 쪽은 길이 열리지 못해 중국 쪽에서 오르는데 지금 우리 일행이 오르는 곳이 중국령 천문봉이다. 준령을 굽어 오르는 산길이 갈수록 험준한데 탁 트인 시야 밑으로 천하가 가소롭다. 워낙 먼 장도라 차로 정상까지 가는게 너무 아쉬워 다음 백두에 오르는 기회가 주어지면 8부 능선 쯤 차에서 내려 도보로 정상까지 산행을 하고 싶다는 동행한 아내의 말에 동의하면서 산의 정상 보다 정상에 오르는 계곡과 능선 바위와 야생초 바람을 눈으로 보면서도 그저 한없이 그립고 그리웠다. 정상 부근에서 하차하자마자 몸을 지탱하기조차 버거운 일진광풍이 거센 빗줄기와 함께 몰아친다. 아 오늘 이 시간 하늘은 나에게 행운을 거두어 가 버렸구나 천지를 볼 수 없다니. 갑자기 돌풍과 함께 좁쌀만한 우박까지 얼굴을 때린다. 천지 절벽 끝에서 이 돌개 바람을 만나면 작은 아이 쯤은 곧장 하늘로 날려버릴 기세다. 이대로 천지를 포기하기엔 너무나 원통해 바람과 비를 온통 맞고 저 운무 가득하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천애절벽 아래 천지를 바라보며 제발 당신의 발끝이라도 볼 수 있도록 애원 애원한 간절한 기도가 하늘에 닿았는지 그 캄캄한 운해가 일진광풍에 걷히고 갑자기 눈앞에 검푸른 남색 천지가 펼쳐진다. 오- 신령함이여 장대함이여 차라리 숭고함이여! 누가 이 하늘 길을 열고 이 하늘 호수를 우리 민족에게 선물하였는가!느낌도 순간 갑자기 운해에 천지가 숨어 버린다. 얼마 뒤 잠시 또 얼굴을 드러내니 수면 너머 맞은 편 절벽이 선명하다. 갓 피어나는 꽃이 아름다운 것은 그 완연한 모습을 보여 주기까지 아직 기다림이 남은 까닭이듯이 수줍은 색시 마냥 열 듯 말 듯 그 자태를 함부로 드러내지 않는 천지이기에 더욱 신비하리라. 총 둘레 30리 물 깊이 일천척의 거대한 하늘 호수 앞에 내가 마주 선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욕심이 없어졌다. 유럽의 거대한 대리석 유물도 동남아 천년의 사찰과 만리장성 석가와 공자 빌게이츠도 더 이상 부러움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여기서 이 번 여정을 접고 집에 곧바로 돌아가라고 해도 나는 원망치 않으리. 우리 민족의 발원과 백두대간의 시원 백두산 그리고 천지. 당신을 우리 가슴에 품고 있는 한 우리 민족은 지상에 무궁하리라. 하산길 내내 백두와 천지의 신비에 젖어 종내 눈을 감고 있었다. 그 장엄하다 못해 숭고한 감동을 내 기억 속에 오래도록 색인하기에는 눈을 감고 꼭 감고 내려오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기에. 백두산을 벗어날 때는 이미 날이 저물었고 촉촉이 내리는 백두비에는 이미 가을이 묻어 있었다. 우리 일행은 뜨거운 백두 유황 온천에 몸을 담갔다. 다음날 눈물 젖은 두만강을 보면서 한반도와 대륙이 하나이며 동네 도랑만한 강 건너 사는 북한 동포를 불러 부침개에 막걸리라도 한 잔 나누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죽기 전 반드시 그런 날이 오고야 말 것이라고 되뇌이면서. 도문 조선족 안까이(부인)에게서 깨 반말을 샀는데 호텔에서 3박 비행기를 네 번씩이나 갈아타면서 이 깻보따리를 들고 다녔으니 요놈의 깨는 호강을 했거니와 나는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지금도 웃음이 난다.
연길에서 베이징은 비행기로 2시간 걸린다. 워낙 넓은 대륙이라 비행기로 이동하여도 아직은 북중국이다. 한반도의 50배가 넘는 땅은 오랜 역사와 전통 속에 찬란한 문화 유적과 걸출한 인물을 배출하여 인류 자존의 가치를 스스로 높이는데 한 몫을 하고 있지 않나 싶다. 금단의 땅 자금성, 구천 구백 구십 칸의 방과 갯수를 헤아릴 수 없는 금색 영롱한 기와 지붕 우람한 진자주 기둥과 황제 전용 길을 따라 옹위해 있는 대안문 안쪽 구중궁궐에는 천하를 호령하던 황제의 위용이 옥좌에 걸터앉아 있었다. 중국은 대단한 나라임에 틀림없다. 자금성이 그러하고 만리장성이 그러하며 개미떼 보다 더 많은 사람이 그러하다. 누가 저 높은 산등성이에 무슨 연유로 저렇게 높고 견고한 철옹성을 쌓았는지 지금처럼 첨단 장비도 없이 오로지 사람의 손으로 만리의 돌성을 축조했다니 그 엉뚱한 기개와 추진력에 경악할 뿐이다.
백두에 올라 천지를 만나고 내 동포 조선족과 우리말로 훗날을 기약하고 대륙의 심장 자금성에 발을 디밀고 만리장성에 올랐으니 더 이상 여정을 계속한들 무슨 감흥이 있으랴. 일찍이 백두 천지를 만나고 나서 곧장 귀국해도 좋다고 마음먹었는데 덤으로 대륙의 심장까지 훔쳤으니 과하면 탈이 나느니.
옆집 나들이 가듯 서해를 삽시간에 건넌 중국남방항공기는 미끈한 왕잠자리처럼 인천국제공항에 사뿐히 날개를 접는다. 백두산 산자락에 피어 있던 새빨간 코스모스가 여기 우리 논두렁 가에도 하늘거린다. 2005. 8. 25.
권갑상
2005-08-28 20:18:44
방학을 틈타 좋은 여행을 다녀오셨군요.
손선생님의 생각과 마찬가지로
창바이샨(長白山)이 아닌 백두산(白頭山)을 등정할 날을 손꼽아 기다려 보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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