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축년 12월의 유감
작년 기축년은 미국발 금융위기의 파장과 신종플루 확산, 김수환 추기경 선종(善終)과 두 대통령의 서거, 북한의 핵실험 등 굵직굵직한 대형 사건들이 많이 발생한 그야말로 다사다난했던 한 해였다. 그런데 필자가 이들 사건들보다 더 크게 충격을 받고 가슴앓이를 했던, 그것도 두 인재를 12일 사이에 한꺼번에 잃은 사건이 작년 기축년 12월에 발생했다. 그중 한 사람은 한국예총 합천지부장을 역임했던 김해석 선생이다. 어릴 때 남정강에서 멱감고 강변을 뛰놀며 꿈을 키웠던 고인은 중년이 되어서도 젊은 시절 못다한 문학에 대한 애정과 남정강이 그리워 대구 시청에서 근무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공직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낙향하여 남정강을 벗삼고 남정강을 노래하며 살았다. 그는 남정강 시조로 1995년 3월 "현대시조 신인상에 당선되었다. 그는 17년 전에 문학의 불모지였던 합천에 문인협회를 결성하여 발기하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실질적으로 합천문협을 이끌어 왔다. 합천예총지회장 재임기간에는 타고난 문학적 재질(才質)을 발휘하여 군민이 스스로 참여하고, 함께 어울리는 합천예술제로 합천의 문화예술을 한 차원 높게 발전시켰다. 그리고 그는 지난 12월 10일 숙원 사업인 향파이주홍선생 기념문학관 건립기공식을 마치고 5일 후인 12월 15일에 <남정강이나 노래하다 죽으렵니다>라는 평소 입버릇처럼 했던 말대로 짧은 생을 마감하고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머나먼 길을 떠났다.
그는 비록 돌아올 수 없는 먼 길을 떠났지만, 평소 인정많고 소탈하며 고향과 친구를 소중히 여기고 남정강을 사랑했던 따뜻한 마음은 그와 각별한 정을 나누었던 문화예술인들과 그를 아끼고 존경하는 모든 사람들의 가슴에 오래도록 잔잔한 그리움으로 남을 것이다.
또 한 사람은 합천신문 발행인 박환태 사장이다. 그는 1995년 뜻을 같이 하는 동지 몇 사람과 함께 합천신문사를 설립하였다. 합천신문사를 운영하며 초기에는 시련도 많았다, 한 때는 영어(囹圄)의 몸이 되기도 하고, 합천신문이 폐간(廢刊)될 위기를 맞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이 같은 시련을 극복하며, 합천신문사를 계속 보존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일념으로 오직 성실과 근검절약의 정신으로 오늘의 합천신문사를 발전시켰다. 그동안 그는 합천신문을 통해 지역민의 정서와 여론을 반영하며 지방자치시대 풀뿌리 민주주의를 실현하는데 향도(嚮導) 역할을 해왔으며, 지역의 정치, 사회, 문화 등의 각종 새로운 정보와 지식전달로 사회교육(社會敎育) 발전과 문화창달(文化暢達)에도 선구적(先驅的) 역할을 해왔다. 타고난 천성이 근면 성실한 그는 하루 네 시간의 짧은 수면을 취하면서 취재활동과 신문편집은 물론, 신문을 직접배달하면서, 틈틈이 합천의 향토사를 비롯한 우리지역의 사회, 역사, 문화와 설화, 전설, 민속 등에 관한 연구를 토대로 칼럼을 쓰는 등 매일 자정까지 그의 서재에는 전등이 꺼지지 않았다. 타고난 근면성과 뛰어난 문장력으로 수많은 지역민과 출향 독자들에게 많은 정보와 지식을 전달하며 그들에게 감명을 주었던 이 시대의 가장 근면 성실한 언론인으로서, 그리고 자신을 위해 깔끔한 양복 한번 제대로 입지 않았던 몸에 베인 근검절약을 생활신조로 실천하면서 뜻을 같이하는 몇 사람들과 지방신문사로서는 유일하게 2003년 합천신문 문화장학재단을 설립하고 장학기금을 마련하여 군내 6개 고등학교 14명의 장학생들에게 매년 60만원씩, 총 840만원의 장학금을 지급해오고 있었다. 그동안 2억원의 장학기금을 모금하면서, 일부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의 협찬도 있었지만, 고인이 솔선하여 마련한 장학기금 중에는 수년 전 장남의 결혼축의금 전액을 장학금으로 희사한 바가 있었고, 지난 달에 치룬 차남의 결혼 축의금과 자신의 장례 조의금까지도 운명 직전에 장학금으로 전액 내놓으라는 유언까지 남기고 지난 12월 27일 오후 4시에 세상을 떠났다. 고인은 미래사회 국가와 민족의 명운(命運)을 백년대계(百年大計) 교육에 기대했던 이 시대의 훌륭한 언론인이며, 사회교육의 선구자였다.
어찌 고인의 이 아름다운 마음을 야박한 사람으로만 매도하리오, 그는 평소 그가 가진 재력과 사회적 지위에 상응한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정신을 실행하지 않은 냉혹한 사람으로 평가 받아왔다. 그러나 정치자금의 명목으로 온갖 비리와 부정한 방법으로 거액을 수뢰(受賂)하여 검찰에 소환되면서까지 자기는 깨끗하다고 외쳐대는 오늘날의 일부 파렴치한 정치인들의 행태에 비하면, 오히려 때묻지 않은 고인의 근면성실성과 검소한 기품이 그의 진면목을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오래도록 기억되리라 생각한다.
두 사람이 떠난지 벌써 열흘이 가고 보름이 지나가도 여느 주검 앞에서도 초연했던 필자가 이토록 애석한 마음이 사라지지 않고 서러움이 때때로 북받치는 것은, 결코 두 사람이 필자에게 준 각별한 정 때문만이 아니고, 이 두 사람이 우리 사회에 빛과 소금같은 존재로 살다가 더 일할 나이에 아쉽게 세상을 떠난 사람들이기 때문이리라 생각한다. 아직도 할 일이 많은 이두 사람이 한꺼번에 혜성처럼 사라진 지난 기축년 12월이 너무 야속하고 유감스럽다. 삼가 두 분의 명복을 빈다.
이 봄엔 모두가 아파야 한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란 말이 있다. 시절은 분명 봄이 왔지만 봄 같지 않다는 말이다. 따뜻하고 화사해야 할 봄날에 때 아닌 눈발이 날리고, 살을 에이는 광풍이 몰아치는 것은 불의에 공격을 받고 졸지에 수장된 천안함 46인 꽃다운 청춘 영령들이 외치는 비통의 절규이다. 장마철 같은 장대비가 연사흘 쏟아지기도 했다. 이 궂은비는 이들이 흘리는 통한의 눈물이다. 예년엔 이맘때 볼 수 없었던 참으로 이상한 기상 이변이다. 시절에 맞춰 피었던 꽃들도 망울들을 얼어붙은 땅에 흐트려 놓았다. 새파랗고 노랗게 흐트러진 꽃망울들이 죄 없이 순절한 청춘들의 넋인가 싶어 연민의 정으로 가슴에 다가온다. 벗었던 겨울 내의를 다시 꺼내 입었지만, 마음이 안온(安穩)하지 못하고 을씨년스러운 것은 이상기온 탓만은 아니다. 어제는 천안함 수병들의 마지막 가는 모습을 TV중계로 지켜보았다. 46인 유가족의 슬픔은 물론, 시신으로도 돌아오지 못해 유품과 손 발톱으로 그것을 대신하는 장례식에서 "오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보내나 엄마 한번 보고 가 불쌍한 내 아들 진선아 " 하며 오열하는 그 어머니의 모습, 빈 관을 화장터에 넣을 때마다 높아지는 가족들의 오열에 내 가슴은 무너졌다. 조국수호를 위해 숨진 전우들과 함께 동행하지 못하고 살아서 돌아온 것이 큰 죄라도 지은 것처럼, 고개를 떨구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생존 병사들의 침통한 얼굴을 보고 나도 목이 메였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이 처절한 고통과 불행은 유족들, 그리고 순국한 전우와 동고동락했던 생존 장병들만의 몫이어서는 안된다. 누구의 소행인지는 아직 모르지만, 46인 꽃다운 청춘을 서해 바다에 침몰시킨 잔인한 계절, 이 봄엔 모두가 아파야 한다. 국군 통수권자인 대통령도, 국방장관도, 772함대 사령관을 비롯한 지휘계통의 상관들 모두가 아파야 한다. 그들의 죽음을 미연에 방지하지 못한 책임들이 있기 때문이다. 국민 모두도 자기 자식이나 형제를 잃은 것처럼 비통해하고 있다. 적에게 공격을 당하고도 한 달이 지나도록 정황으로만 사건 배후가 북한일 것이라고 추정하고, 아무런 처리도 대응도 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 너무 초라하고 안타깝다.
사건 초기부터 군은 허둥대는 모습을 보였고, 대응 태세와 보고내용도 확인체계에도 허술한 면을 보였다. 책임감을 가져야 할 정치권은 남의 일처럼 논리에 맞지 않은 가설과 추론을 거침없이 쏟아냈다. 마음이 편치 못한 생존 장병들이 침몰 당시의 상황을 국민에게 알리기 위해 몸을 추스르고 병원에서 나와 기자회견을 하고 있을 때도, 이들의 아픔을 위로해주기는 커녕 "어딘가 짜 맞춘 것 같다"고 사려 깊지 않은 말로 구사일생으로 생환한 장병들 마음에 더 큰 상처를 입혔다. 살아 돌아온 장병 중 일부는 천안함 침몰 당시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수면제를 먹어야 잠을 자는 병사가 있다. 이들 중 6명이 급성 스트레스 장애 진단을 받았고, 13명이 고위험군 17명이 중위험군으로 판명되었다.
미확인 수중 폭발물에 의해 천안함이 두 동강 나고 물속으로 침몰하는 함수에서, 일촉즉발 생사의 갈림길에 있을 때. "바다에 뛰어들면 죽는다. 뛰어들지 말고 끝까지 기다려라"고 외치고, 침착성을 잃지 않게 격려하며, 부하들을 해경고속정에 먼저 탑승시키고 자기는 맨 나중에 옮겨 탔던 진정한 군인, 최원일 함장도 급성 스트레스 장애 진단을 받았다. 부하를 형제처럼 사랑한 그는 "눈을 감으면 숨진 병사들의 모습이 보인다"고 했다. 최 함장도, 57인 생존 병사들도 살아남았다는 죄책감 때문에 고통스러워한다. 그들은 "나만 살아서 부모님을 만나 즐거울 수 없다"며 가족들의 면회도 거부했다.
사건 초기 전사자 가족들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기도 했지만, 전사자 가족과 생존 장병들이 면담을 통해 가슴에 맺힌 응어리를 털어냈다. 전사자 어머니들은 "너희라도 살와와서 고맙다 너희들은 죄인이 아니다"라며 아들과 같은 생존 수병들을 위로했다.
4월 29일 천안함 희생자들이 국립대전현충원 묘역으로 떠나는 날, 생존 장병 58명이 평택 분향소를 찾아 조문을 한 뒤, 나재봉 천안함전사자가족협의회 대표에게 "먼저 간 전우들을 위해 마지막으로 허드렛일이라도 하게 해 달라"며 울먹였다. 나 대표는 유족들에게 요청하여 이들에게 영정 봉송을 허락했다.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을 쏟으며 오열하는 이들의 영정 봉송 모습도 46인의 희생 병사들과 함께 우리 국민은 오래도록 기억할 것이다.
국가를 위해서 젊음을 바치고 산화한 이들 순국 병사들을 국립묘지에 안장하고 무공훈장을 추서하는 데 그치지 말고, 지금 전후방에서 불철주야 국토방위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는 우리 국군의 명예와 사기진작을 위해서도 국가는 그 유가족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의 보상과 위로를 다 해야 한다.
그리고 살아 돌아온 58인 장병들! 그들이 살아 돌아온 사람들이라고 죄인일 수는 없다. 한 사람이라도 더 살아 돌아왔어야 했다. 그들이 살아 돌아온 것은 불행 중 다행이다. 순국한 병사뿐만 아니라 살아 돌아온 장병들도 우리의 서해바다 NLL을 지켜낸 영웅들이다. 그들을 내 가족처럼 따뜻하게 대해주고 전우들과 천안함을 잃은 그들의 고통과 슬픔을 어루만져주는 것은 이제 우리 국민이 해야 할 몫으로 남았다.
가사문학의 정취와 죽향이 어우러진 곳 담양에 가다
이성동
예년에 늘 그랬듯 금년에도 현충일에 우리는 문학기행을 떠났다. 이번 문학기행코스는 가사문학의 정취가 서린 고장, 죽향이 그윽한 전남 담양이다. 회원들이 소지품 백을 챙겨들고 이른 새벽부터 서둘러 이화예식장 앞에 모여들었다. 합천문협행사에 좀처럼 거르지 않는 이동배 시조시인도 어김없이 참석했다. 나와 송영화 시인은 미리 나와 대기했던 해인사 톨게이트 앞에서 7시 50분에 합류하여 열두명 회원이 25인승 소형 버스에 몸을 싣고 담양으로 향했다.
'혼불' 문학관에서
출발한 지 2시간 조금 지나서 우리는 중도에 남원시 사매면 서도리에 위치한 혼불문학관에 들렸다. 논밭을 매립 성토하여 마을 전체를 문학촌으로 조성할 목적으로 2004년에 문학전시관을 포함한 혼불공원과 주차장 등 18,132㎡ 부지에 혼불문학관을 우선 완공하였다고 한다. 2년 전에 찾아갔던 하동 평사리 마을 박경리 토지문학관보다 더 넓고 한적하며 아담하고 고풍스런 대가집 모양의 '혼불문학관'이 넓게 펼쳐져 있는 마당 한쪽에 노적봉을 뒤로 하고 조용히 자리잡고 있었다. 문학관을 들어서는 입구에는 최명희의 '혼불'이라는 시가 암면(巖面)에 새겨져 있었다.
<나는 원고를 쓸 때면/손가락으로 바위를 뚫어/ 글씨를 새기는 것만 같다/ 날렵한 끝이나 기능 좋은 쇠붙이를 가지지 못한 나는/ 그저 온 마음을 사무치게 갈아서/ 생애를 기울여/ 한마디 한마디 파나가는 것이다/```
그녀는 또 '혼불' 서두에 "쓰지 않고 사는 사람은 얼마나 좋을까, 때때로 나는 엎드려 울었다``` 핑계만 있으면 안 써보려고 일부러 한눈을 팔던 처음과 달리 거의 안타까운 심정으로 쓰기 시작한 이야기 '혼불'은 드디어 나도 어쩌지 못할 불길로 나를 사로잡고 말았다.
아마도 그녀는 생전에 '혼불'을 쓰며 그녀의 내면에 깊이 잠재한 무엇인가의 요구에 매양 시달림을 받았던 같다. 그러면서도 그것을 결코 뿌리칠 수 없어 써야한다는 강박관념에 늘 고뇌한 것이다.
난소암에 신음하면서도 꺼져가는 자기 혼에 불을 지피듯, 정신력을 다 쏟아 대하소설 '혼불'을 집필 중 한순간 희열을 느끼는 어떤 길에 오르고서는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생을 마칠 때까지 그 길따라 달려온 것이다. 고통과 인내와 극복의 연속, 그러다가 그녀는 드디어 소중한 성취를 얻은 것이다. 대하소설 '혼불'은 마치 오랜 수행 끝에 도를 깨친 석가모니처럼```, 위대한 성취를 한 것이다.
누구나 유연하고 유유작작하게 쉽사리 글을 잘 쓰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글 창작의 어려움을 가장 잘 표현한 시가 미당 서정주의 '국화옆에서'가 아닐까.
한 송이 국화꽃은 완성된 하나의 위대한 작품이며 이것이 완성되기까지는 작가의 작품에 대한 고뇌와 시름이 따르는 진한 진통이 있기 마련이다. 미당은 이 진통을 소쩍새와 천둥의 울움에 비추어 묘사했다.
최명희는 분명 타고난 문학적 소질을 그녀의 내면 깊은 곳에 묻어두고, 정신적인 고뇌와 인내 그리고 그 극복을 통해 그것을 끄집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녀의 정성과 혼이 담긴 '혼불'은 펜을 잡은 지 17년이 되는 1996년 12월 대하소설로 전5부 10권으로 출간됐다. 하지만 그녀는 '혼불'이 완간된 지 2년이 채 못된 96년 12월, 향년 52세로 '아름다운 세상, 잘 살고 간다'는 짧은 유언을 남기고 지병인 난소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신(神)은 그녀가 '혼불'이라는 대하소설을 훌륭하게 엮어내도록 하기 위해 그녀에게 인내와 극복의 집필과정에 난소암을 더 부과하였다. 그리고 그 진한 고통 속에 작품이 완성되자 휴식의 기회도 주지 않고 그녀를 곧 바로 저 세상으로 데려간 것이다.
한국 현대문학의 새 지평을 연 소설「혼불」은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우리민족의 끈질긴 일본 식민지배에 대한 저항과 당시의 풍속도를 원고지 1만 2천장에 그려 낸 대하소설이다. 작품의 배경지인 사매면 노봉마을은 최명희 작가의 고향이자 소설 속 청암부인의 생가가 있는 곳으로 바로 이 자리에 혼불문학관이 자리하고 있다. 혼불문학관은 소설의 내용을 형상화한 디오라마와 작가의 유품 등이 전시되어 있으며, 주변에는 청호저수지와 서도역 등의 작품배경지가 있다.
담양에서 대통밥으로 점심식사
'혼불문학관' 탐방을 마치고 오후 1시경 대통밥으로 유명한 담양읍내 '박물관앞집식당'에 들려 별미인 대통밥을 먹었다. 기름진 대통밥에 밤과 은행을 기본으로 굴비와 양념돼지불고기, 어린배추잎, 구수하고 얼큰한 된장찌개, 게양념무침 등은 그런대로 시장한 과객의 식욕을 충족시키기에 충분했다.
이곳 담양사람들은 에너지를 가득 담고 얼었던 땅을 뚫고 봄에 올라온 죽순을 삶아 1년 넘게 숙성시킨 고추장과 함께 양념에 버무려 죽순회를 만들어 먹는다고 한다. 나는 대통밥에 그 죽순회를 죽향을 음미하며 맛있게 먹었다.
먹고 남은 대나무밥통은 1회용이다. 맛과 향이 두 번 우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살림꾼 동실 회원이 우리 식탁에 먹고 남은 죽통(竹桶)을 모조리 수거해 비닐봉지에 싸들고 나왔다.
메타세퀘아 가로수 길을 걸으며
담양 가사문학관에 이르는 중도에 메타세퀘아 가로수가 하늘을 찌를 만큼 장대(壯大)한 것들이 청록의 녹음을 드리우고 높이서서 지나가는 우리 합천문협회원들을 손짓해 불렀다.
그곳에는 많은 군중들이 개미떼의 군상처럼 메타세퀘아 터널 속을 오가고 있었다. 손잡고 다정히 거니는 연인들과 그늘 아래 자리 깔고 휴식을 즐기는 가족들의 모습이 모두 정겹고 행복해 보였다.
이곳은 '겨울연가'로 유명한 남이섬처럼 영화 '가을로'와 '화려한 휴가'를 촬영한 영화 촬영세트장이다. 메가폰을 쥔 감독과 촬영기사와 캐스트들 아무도 없었지만, 네발 자전거를 굴리며 오가는 연인들과 가족들이 메타세퀘아 가로수를 배경으로, 사랑과 행복을 연출하고 있었다. 그들이 그 시간 그곳의 주인공들이었다. 김숙희 부지부장이 밟고 있는 포장도로가 못마땅해서 투정하는 순간, 나는 작년에 다녀온 흙길 남이섬 연도가 불현듯 떠올랐다. 북한강 상류를 흐르는 춘천호 북쪽 강변의 작은 섬, 거기에도 이맘때쯤이면 메타세퀘아 가로수가 햇볕에 반사되어 눈부시게 푸른 터널 속 흙길을 연인들이 손잡고 맨발로 거닐며 사랑을 속삭이고 있었다.
가사문학(歌辭文學)의 산실 면앙정(俛仰亭)과 송강정(松江亭)에서
메타세퀘아의 진풍경을 보고 돌아 나와 우리는 고서천을 막아서 만든 인공호수 광주호 주변의 유원지를 지나서 2시 10분경 면앙정 주차장에 차를 멈추고 오름길을 5분쯤 올라서 우러러 볼만큼 높은 곳인 면앙정(俛仰亭)에 이르렀다. 가파른 오르막길을 오르면서 다리 아프다는 회원이 아무도 없었다. 일행 모두가 건각들이라고 생각했다.
전라남도 기념물 제6호인 면앙정은 전라남도 담양군(潭陽郡) 봉산면(鳳山面) 제월리(齊月里) 망정마을 뒷산에 있는 정자인데, 조선 중기 사림의 한 사람인 송순(宋純)이 만년에 벼슬을 떠나 후학을 가르치며 여생을 보냈던 곳이다. 이 분이 바로 가사문학의 거장 정철의 스승이다. 그는 41세가 되던 1533년(중종 28)에 고향인 이곳에 정자를 짓고 ＜면앙정삼언가＞를 지어 정자이름과 자신의 호(號)로 삼았다 한다. 그 뒤 임진왜란으로 파괴되어 1654년(효종 5) 후손들이 중건하였다.
사림은 훈구세력들과는 달리 조선 건국 과정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던 중소지주 출신의 지식인들로서 지방에서 마련한 경제적, 사회적 기반과 성리학적 가치질서를 실천하면서 성장하여 성종 이후에 차츰 중앙 정계로 진출해 의리와 정통을 소중히 여기고 도학정치를 실현하려는 한편, 훈구세력의 독주와 비리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에 있다가 연산군때부터 조정에서 대거 몰락하여 지방에 낙향해 있으면서 특히 이곳 담양에 많은 누정을 건립하고 인재를 양성하면서 시단(詩壇)의 결성과 시회(詩會)를 통하여 훌륭한 시가문학을 창작하였다. 이 같은 시문학 창작의 전통은 국문시가(國文詩歌)의 하나인 가사문학(歌辭文學) 창출의 터전이 되었다.
송순(宋純)의 면앙정가(俛仰亭歌)는 그 내용이 서사, 본사, 결사의 3단으로 구성되어있다. 가사(歌辭)는 시조(時調)와 더불어 한국 고시가의 대표적 장르이다. 그 형식은 1음보 4음량에 1행 4음보라는 기본 율격을 지닌 유장(悠長)한 운문체로서 노래·읊조림·율독의 형태로 향유되었다.
담양군 고서면 원강리에 소재한 송강정(松江亭)은 송강 정철(1536~1593)이 조정에서 물러난 후 4년 동안 지내던 정자다. 그는 10살 때 담양의 창평 당지산 자락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10년을 보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임억령에게 시를 배우고, 김인후, 송순, 기대승 등 당대 최고의 학자들에게 학문을 익혔으며 이이, 성혼, 송익필 같은 또래의 유생들과 친교를 맺었다.
17세에 성산 지방의 부호였던 유강항의 딸과 결혼 4남 2녀를 두었다. 그는 27세에 별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후 첫 벼슬을 사헌부 장령으로 시작하여 1580년 강원도 관찰사에 제수되면서 임지에서 <관동별곡>과 <훈민가> 16수를 지어 시조와 가사문학의 대가적 기질을 발휘하게 된다. 그는 1584년 대사헌이 되었으나 동인의 탄핵을 받아 사직하고 고향인 이곳 담양 창평에서 은거하면서 이때 <사미인곡>, <속미인곡>, <성산별곡> 등의 주옥같은 한글로 된 가사와 수많은 시조와 한시를 창작하여 한국 문학사에 빛나는 업적을 남기게 된다.
송강정에 이르는 석축 계단 길 연도에 고송들이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고 산뜻한 솔향으로 우리 일행을 반겨주었다.
선비문화의 공간 소쇄원(瀟灑園)에 들리다.
소쇄원"은 담양군 남면 지곡리에 있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원림(園林) 이다.
사적 304호로 한국민간정원의 원형을 간직한 곳으로 조선시대 선비들의 만남과 교류의 장으로 경관의 아름다움이 가장 탁월하게 드러난 문화유산의 보배라고 한다.
양산보(梁山甫, 1503~1557)가 조성한 것으로 스승인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가 이곳에서 가까운 화순군 능주면 남정에 유배를 당하여 죽게되자 이곳에 와서 자연과 더불어 살았다. 소쇄원은 양산보의 호인 소쇄옹(瀟灑翁)에서 연유하였고 그 뜻은 선비의 기상을 상징하는 맑고 깨끗하다는 뜻이다.
우리 일행은 소쇄원에 이르는 도중에 봉황새를 기다린다는 뜻의 대봉대(待鳳臺)라는 초가지붕으로 덮인 정자에 올랐다. 육송으로 된 바닥에 송영화 시인만 스스로 밀려나가고 우리회원 11명이 빽빽이 끼어 앉아, 가지고 온 닭튀김과 돼지족발에 소주를 곁들이니 세상만사 그렇게 넉넉하고 부러울 것이 없었다. 빨갛게 잘 익은 수박이 달콤한 후식이었다. 묘목때부터 온도와 습도를 조절하며 교접과 순 고르기 등 6개여월 수고하고 땀흘린 결실을 이번에도 아낌없이 회원들에게 희사한 수박공주 윤경선여사와 그녀의 낭군 김서방에게 뜨거운 정을 느낀다.
소쇄원에 이르는 길 연변에 울창한 대나무 숲이 잘 보존되어 있어 벼슬을 버리고 이곳에 낙향하여 일생을 보낸 양산보의 굳은 의지와 선비의 기상을 엿볼수 있었다.
정원 내에 조성된 건축물, 조경물은 자연과 인공의 조화를 절묘하게 이뤄내며 그 안에 조선시대 선비들의 심상(心狀)과 기개(氣槪)가 오롯이 묻어나 있는 공간으로 이 속에 오래 머물러 있으면 선비의 고매한 기품이 젖어나올 것 같은 분위기를 느낀다.
한국가사문학관에서
우리는 이날 오후 2시 반쯤 문학기행의 목적지인 이곳 한국가사문학관에 들려 입구에서 입장권을 발매하던 이정옥 해설사를 만났다. 50대로 보이는 그녀는 담양의 가사문학의 태동을 서두에 간단히 소개한 다음 송순의 면앙정가를 해설하다가 나중에는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음률에 몸동작까지 섞어가며 순수한 전라도 사투리를 구사하며 아예 처음부터 끝까지 줄줄 외었다. 그녀는 가사문학에 자기의 신명(身命)을 바친 사람처럼 흥과 열정으로 듣는 이로 하여금 자기 해설에 푹 뻐져들게 하였다. 그리고는 끝머리에 심청 이야기의 모델이 된 실존 인물 원홍장의 고향인 전남 곡성이 이곳에서 멀지 않다며 심청이 이야기가 그녀의 구성진 판소리 가락에 맞춰 신명나게 펼쳐졌다.
" 심봉사의 딸 심청이가 아버지 심봉사의 눈을 뜨게 헐려고 청나라 상인들한티 공양미 삼백석에 몸을 팔고 떠나는디```심청이 떠나면서 아이고 ~ 아버지 나는 가요~,"라고 목청을 길게 늘려 뺀 다음, 말미에는 "임당수 깊은 물에 따이빙을 하면서 심청이 하는 소리, 이다지도 깊을 줄은 난 정말 몰랐었네~ 아아~진정 난 몰랐었네 " 이다지도부터는 갑자기 대중가요 트롯트 곡으로 곡을 바꿔 막을 내릴 때, 우리는 한순간 배꼽을 쥐며 박장대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진정 타고난 재치와 유머러스한 명해설가였다.
그녀와 아쉬운 작별을 하고 우리는 이날 마지막 여정인 순천만으로 향했다.
순천만과 갈대 그리고 들마루 길
우리 일행이 한국가사문학관을 나와 낙조(落照) 시간에 맞춰 순천만에 당도했을 때는, 반기려했던 석양은 우리와 숨바꼭질하며 짙은 구름 속에 깊게 파묻혀 매몰되고 말았다.
용산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순천만 갈대군락지는 그 사이를 S자형을 그리는 영산강 하구 강물 위에 날씨가 청명한 날에는 금은빛을 발산하는 낙조가 황홀할 만큼 아름답게 비춰져 전국에서 관광객이 많이 몰려오는 곳이라고 한다. 이곳에는 시베리아의 바이칼 호수에서 서식하는 천년기념물 228호 흑두루미가 겨울을 나기 위해 매년 10월에 이곳에 도래하여 이듬해 3월까지 머물고 가고, 세계적인 멸종 위기종인 천년기념물 205호인 저어새도 봄가을 이동시기에 순천만에서 잠시 왔다가 떠난다. 그리고 4월 중순에 찾아와서 번식을 마친 후 10월 중순에 남쪽으로 이동하는 쇠백로, 우리나라에 가장 많이 오는 종으로서 남해안에서 월동하고 봄에 번식지로 가는 민물도요들과 함께 많은 철새들이 머물다 떠나는 철새 도래지이다. 특히 이곳에서는 민요도요들이 머무는 동안 무리를 지어 주로 오후에 수백 마리가 군무(群舞)하는 광경을 볼 수 있다고 하는데, 순천만 낙조와 함께 대 장관(壯觀)을 이룬다고 한다. 갈대가 있어 여기에 몰려드는 것은 철새뿐만 아니다.
국내 최대규모인 2,3㎢인 순천만 갈대군락지는 개개비나 붉은머리 오목눈이와 같은 작은 새들에게 보금자리와 은신처를 제공할 뿐 아니라 질소와 은 등 물속에 녹아있는 유기물을 먹고 자라 수질오염방지와 정화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한다. 이렇게 소중한 구실을 하는 갈대밭을 잘 가꾸기 위해서 순천시에서는 매년 봄에 갈대를 베고 있다.
나는 들마루 길을 혼자 떨어져 걸으며,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가족이나 연인들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올해는 순천만 갈대밭을 찾는 모든 사람들의 가슴에 사랑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소망으로 강변 한쪽에 하트(♥) 모양의 갈대밭을 오망조망하게 만들어 놓았다. 갈대밭 사이로 난 Z자형 들마루 길은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손잡고 소근거리며 조용히 걸어야 제격일 것이다. 소슬바람이 스며들어 우는 연황색 추동절의 갈대밭이 아닌 초여름인데도, 이곳에서 나는 갑자기 스산한 가을날의 쓸쓸함을 느낀다. 나이탓일까, 아니면 미풍에도 곧잘 흔들리며 흐느끼듯 소리내어 울어대는 갈대 자체의 쓸쓸한 이미지 때문일까, 회색빛 야음(夜陰)으로 짙어가는 저녁노을을 바라보며 알퐁스도데의 '별'에 나오는 몽들뤼르의 약초 캐는 은자(隱者)처럼 나는 한순간 갈대숲속을 헤매는 고독한 늙은이가 되어버렸다. 일행은 벌써 갈대숲 저 멀리서 가물거리다가 용산전망대를 빠져나간다. 허둥대며 나오는 출입구에 배의 돛을 본떠 만든 천에 '순천만'이라는 시 걸개가 눈에 들어왔다.
순천만
당신이 외로울 때는 이곳에 오라
여기 더 오래된 외로움이 당신을 안아주리라
당신의 젖은 눈시울로 이곳 일몰을 바라보라
철새들의 비상(飛上)이 당신의 눈물을 닦아주리라.
흑두루미와 먹황새의 고고한 몸짓을,
저 노랑부리저어새들의 그 숨막히는 황홀한 군무(群舞)를
눈을 내려 바람에 속삭이는 칠면조 군락(群落)을
쓰다듬어 보라
당신이 돌아간 뒤에도
이 생명의 순롓길을 가슴속에 새겨두고
영혼의 발길로 되돌아 오리라
<순천시의 '순천만' 시를 축약 >
문학기행을 마치면서
우리는 이날 해가 지고 오후 7시가 넘은 시장기를 느낀 시각에 순천만 <궁중요리 들마루식당>에서 참숯오리 바베큐 정식으로 맛있는 저녁식사를 마치고 귀로의 차안에서 노래를 부르며 흥겨운 기분으로 이날의 여정을 마감했다. 이날도 나는 가장 순수하고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합천문협회원들과 격의 없는 마음으로 최명희 문학관과 가사문학의 정취와 죽향이 어우러진 담양에서, 그리고 회색빛 저녁노을의 순천만 갈대숲을 거닐며 함께 했던 소중한 시간들, 그 속에 유익하고 값진 많은 것들을 가슴에 담고 돌아왔다. 여느 해보다 더 보람 있었던, 세월이 흘러가도 결코 잊혀지지 않고 아름다운 추억으로 기리 남을 문학기행이었다. 기획부터 문학기행이 끝나는 순간까지 수고해주신 손극복 회장님과 임원 여러분, 헙찬해주신 분들과 그리고 수고해주신 회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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