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봄 참 더디 왔다
김 돌담길
나뭇가지에 숨은
새빨간 발진
봄은
김 돌담길
열병이다
빨갛게 딱지
얹고야 마는
너를
열병하느라
온 세상이
토끼눈이다
심사평
시는 순간의 착상이다.
유성이 지나가듯 빠른 발상을 언어의 사슬로 묶어 맨 목걸이 같은 것이 시다. 항상 촉각을 곤두세우고 사는 시인만이 이 목걸이를 얻을 수 있다. 이 빛나는 장신구에는 외눈박이 보석이 박혀 있을 수 있고 열두 줄 염주가 꿰어져 있을 수도 있다. 사진이 한 순간의 찰나를 포착하여 살아 숨 쉬는 영상을 얻어내듯 시의 언어 역시 생동하는 찰나적 이미지를 포착해야 한다.
새삼스런 말 같지만 시는 산문이 아니기에 시다. 두 말할 것 없이 시는 압축생략 -그 속의 상징-을 생명으로 한다. 주저리주저리 긴 사설이 필요한 서사구조의 시를 쓰는 요즘 작단에 김영애씨의 시 “그 봄 참 더디 왔다"와 ”봄은“은 시가 어느 만큼의 정제와 절제를 해야만 할 것인가를 보여주는 경쾌함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할 말을 다 하기는 쉬워도 과감하게 압축하기는 어렵다. 불안하기 때문-그래서 사족을 붙이기 일쑤-이다.
일본에는 하이꾸가 있고 중국에도 두 줄 시 대구가 있다.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인네의 발랄함을 보듯 시 읽기의 즐거움을 더해주는 단시가 많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으로 김영애 씨의 두 작품을 추천한다.
심사위원/표성흠(글). 이일기.장윤우
당선소감
시의 길 마련, 새 계기 삼고자
오늘은 풀과 나무가 더 푸르다. 비 온 뒤라서 인가. 아, 아니다, 당선소식을 들은 때문이다.
소띠인 내가 요즘은 풀이 많아 보기만 해도 기분 좋은 계절이다. 풀도 풀이고, 나무도 풀이고, 꽃도 풀이다. 아니다 풀도 꽃이고 꽃도 꽃이고 세상이 다 꽃이다.
초등학교 입학 때 가슴에 손수건 달고 선생님이 하나 둘 하면 “셋넷”하면서 팔을 힘차게 흔들며 씩씩하게 나아가던 생각이 납니다. 이렇게 오늘을 제 첫 발걸음의 날로 영원히 기억하려고 합니다.
일찍 떠나온 고향 남해,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도, 때 없이 찾아오는 천형天刑같은 외로움도 이제 그 갈 곳을 마련한 것 같아 마음이 든든하며, 시인으로서의 사회적 책임감과 자신을 성찰하는 계기로 삼으려 합니다.
그리고 삼십년 전 고등학생이었을 때 글을 읽고 좋아했던 “풀과 나무의 집” 표성흠 교수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시를 배우고 있는 행운에 감사드리며, 제 글을 뽑아주신 심사위원님께 감사드립니다.
어머니의 대문
김 돌담길
비오는 밤의 창선 연륙교
대문 열어젖히고
방마다 불 밝혀
기다리시는
칠흑 속을 달린다
어린 날 기억 속으로 달린다
까마득한
유달리 고집이 세었던 나
창선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고 놀려대던 오빠
동네 머슴애들이랑 소 먹이며 수박서리 해 먹던 일
헤엄도 못 치면서 바다에 뛰어들어 친구를 놀라게 했던 무모함
빗줄기는
다리를 만들고
파이프오르간을 연주한다.
내 유년의 언덕을 지나
어느덧
나를 반기는
시계의 변천사
김 돌담길
너는
내 시계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시간을 지배하는
촘촘히 박힌 너의 속눈썹 사이로
시계는 간다.
바다를 닮은 너의 눈동자 너머로
시간은 간다.
수영을 못하여
물에 떠내려가기도 했다
바닷가에서 나고 자랐어도
어느 날 멈추어서버린
천 날 만 날 갈 것 같던 내 시계
이제 너는
내 시계가 아니다
너는 움직일 수 없다
내가 밥을 주지 않으면
인사발령
김 돌담길
산 너머 너머 그 곳으로
발령 나던 날
그 숱한 위로의 말 술
아래로 보다
위로가 좋아
쉬운 길 보다 등산길을 좋아하는 건
앞서가서 손잡아주던 그 사람이 붙여준 습관이다
기말고사 치르고서
구십육 점이면서 팔십오 점이라 말하고
혼자서 누리던 십 점이나 넘는 점수의 비밀
부모님 칭찬으로 끝이 나는
성적표가 나올 때까지의 벅찼던
이십년 전
인사이동 없는 부임지라 믿었던
그 사람 빛나던 언어, 눈동자
지금은
물속에 잠긴
봉황의 전설 내 부임지
갈비뼈
김 돌담길
너는 흙에서 왔다.
나도 흙으로 갈게다
그 토성에 갇혀 있는 너
누구도
무엇으로도 열지 못했던
수천 년 굳어진 성문
오늘밤
내 뜨거운 눈물로
견고한 성을 헐어버리고
갈비뼈를 지나 심장에 닿고 싶다
안으로 들어가고 싶다
몸서리치도록 안아보고 싶다.
시골버스
김 돌담길
유리창 흐린 버스가 지나간다.
유년의 기억이 휙휙 지나간다.
손님이라곤
돋보기 걸친 할머니와
외국인 닮은 손자가 전부
먼지 이는 시골길
비 오고 길에 물이라도 고일라치면
도로는 맛있는 고구마 죽
돌과 흙이 알맞게 범벅된
가을 고구마 추수 후
썰어 말렸다가
물을 부어 흥건하게 삶아
밥을 대신하던
삼십 수년 전
우리네 오빠들이 월남을 지키러 갔던
인연으로 왔을까
그미는
엄마와는 스무 살
아빠와는 마흔 살 나이 차
저 꼬마손님
이제 이들이 시골을 지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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