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그렇게 빼어난 인물이랄 수 는 없다.
선한 눈매 탓인지 전체적으로 품위를 유지했고 볼이 살짝 패인 채
웃는 모습이 상큼하게 눈에 띄는 복스런 여자다.
그녀와 나의 인연은 나의 언니가 그녀의 새언니가 되고부터다.
그때부터 그녀와 나는 동기동창이 아닌 이상한 사이가 되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와 내가 만난 지가 이십년이 훨씬 웃도는 세월이 되었다.
단발머리 소녀 시절,
그녀를 학교에서 마주칠라치면 종횡무진 당당하게 내 앞에서 이유 없이
우쭐대던 통에 난 어쩐지 지은 죄 없이 주눅이 들고 조심이 되었다.
친구들 앞에서 그러는 그녀가 밉기도 했지만 그녀가 언니의 하나밖에 없는 시누이라서 내
가 그녀 눈에 거슬리면 언니가 흉잡힐 것 같아 어린 마음에도 처신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던 건 사실이다. 자연히 학교에서 그녀를 마주치기가 무서웠고 내 좋은 언니를 내어 주고도 속이 상했던 그런 날은 어김없이 난 엄마에게 툴툴거렸으며
그럴라치면 엄마는 내게 미안한 눈빛이 되어 말씀하셨다
"마, 셈난 아제비가 참는 기다, 우짜것노. 눌 사돈, 설 사돈 있다 안 카나, 아가! 생이 봐서 참아야 한데이!"
그래서 그녀와 나의 좋은 여고 시절은 서로가 못본체 스치며 지나가는 사이가 되어 서먹 하기만 했다.
졸업 이후 제 각자의 삶을 살면서 그녀와 나는 한 번도 만나지 못 했지만 명절로 만나는 언니를 통해 그녀의 소식을 종종 접할 수가 있었다.
그녀의 복스런 얼굴 탓이지 싶다.
공무원인 남편은 걱정 없이 진급이 잘 되었고 슬하에 남매를 둔 그녀는 아이들마져도 무탈하게 공부를 잘하여 내노라 하는 수재들만 다니는 대학에 진학을 했으며 알뜰한 그녀는 재산 증식에도 귀재를 보였다고 했다.
시누이 자랑을 내 앞에서 실컷한 언니는 시누이의 순탄 대로인 삶이 내심 부러웠나 보다.
오히려 제 동생에겐 뼈있는 한 마디를 던진다.
"민경네 한테 니 자랑 좀 해봤음 싶데이!"
나이가 들어 사십줄이 넘은 난 언니와 같이 늙어가는 기분이 새삼스레 든다.
해서 언니에게 한 마디 내가 눙친다
"부자는 육시 먹는답디까?"
어느새 나는 그녀가 잘 산다는 것이 나의 행복인 양 같이 기뻐해 줄 요량도 생긴 중년이 된 것이다.
큰방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 보면 백일홍 두 그루가 눈앞에 버티고 섰다.
다홍도 아니고 선홍도 아닌 것이 묘하게 촌티를 벗은 색상의 꽃.
백일홍의 색깔을 빗대어 표현 할라치면 봄 바람난 여인의 한복 색상처럼 자유로움이 배인 색깔이라고 할까. 백일홍에 대한 상념이 이어 지는데
전화벨이 요란스럽게 울린다. 어쩐지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는 기분이다.
언니의 화급을 전하는 목소리가 반 울음이다.
그녀가 몹시 아프다고 했다. 예삿병이 아니어서 마지막 준비를 서둔다고도 했다.
날 꼭 보잔다는 그녀의 청을 거절하지 말고 곧장 만나러 왔으면 싶다고 했다.
병실에서 만난 그녀는 피골이 상접한 채 형형한 눈빛만이 다정함을 내 보였다.
와 주어서 고맙다는 그녀의 인사에 시선을 마주하고 그녀를 쳐다 볼 용기가 없던 나는 애꿎은 손가락만 비틀어대며 병실 바닥을 줄곧 쳐다보며 서 있었다.
물기가 젖은 그녀의 두 번째 소리가 들렸다.
"나 많이 흉하제?"
항암 치료를 받다보니 머리가 다 빠졌다고 했다.
모자를 쓴 그녀의 모습을 올려다 보지 못한 채 애써 참으려 했지만 나의 의지와는 달리 소리없이 들썩거리는 어깨를 어쩔 수가 없었다
"니가 참 많이 보고 싶더라. 새언니를 친언니로 가진 니가 부러워서 나는 니를 이유없이 싫어했다아이가!"
그녀의 진심이였다. 그 말을 꼭 전해야만 했기에 아무도 만나기 싫다던 그녀가 언니를 통해 날 만난 이유라고 했다.
열여섯 계집아이들의 철없는 생각이 빚어낸 서로가 서로를 할퀴었던 감정의 찌꺼기에 후회스러워 하는 모습이다.
형제를 나누어 갖는 사이처럼 허물없는 사이가 어딨을까?
지금 아는 이 모든 것을 열여섯, 그때는 까마득히 몰랐던 것이다
애써 평정을 찾은 나는 다음 세상에서 우리가 다시 만난다면 한 번 더 사형지간이 되고 싶다고 그녀에게 얘기했다. 단지, 나는 오빠를 가진 쪽이고 그녀는 언니를 준 입장으로 바뀌어서 만나자고 말했다. 그러면 세상에서 젤 멋진 동기동창이 될 것 같다고 그녀는 환하게 웃음으로 화답했다.
나 먼저 가려고 남을 떠밀며 가는 숱한 사람들 속에서 '와 이라노, 와 이리 떠미노' 하며 걸어온 바보 같은 우리네 반평생...
그녀의 삶이 내 삶인 양 애처롭긴 마찬가지다
그 날, 그녀를 만나고 돌아오는 버스 속에서 남 부끄러운 줄 모르고 서럽디 서럽게 통곡했었다
꿈 길에서 그녀를 만났다.
단발머리에 흰 깃을 세운 교복을 입은 채 우리는 소풍을 가고 있었다.
이름 모를 꽃들에 둘러싸인 그녀가 상큼하게 볼이 살짝 패인 이소를 보이며 유난스레 하이얀 잇속을 드러낸 채 날 보고 어서 오라고 손짓했다.
가야지 싶으면서도 발이 떨어지질 않아 혼자 용을 쓰다가 잠이 깼다.
자정이 훨씬 넘었는데 빗소리가 요란하다.
언제부터였을까. 밤비가 내리기 시작했나 보다. 갑자기 내 가슴에도 후두둑 비가 내린다.
석 달 열흘만 피어 있다는 꽃, 이 비가 그치면 백일홍꽃이 지고 말 것 같은 불안에 내심 떨린다.
그랬다. 꼭 집어 이름을 붙일 수 없었던 그녀의 꽃 이름...
그녀는 모란도 장미도 아니었다.
선홍도 아닌 것이 다홍도 아닌, 그래서 더 애절한 색깔이었던 백일홍꽃이 그녀였었다.
하이얀 잇속을 보이며 웃는 모습이 무척 아름다웠던 그녀.
그녀의 볼우물이 자꾸 그리워지면 난 어떻게 해야 하나.
그녀의 병실에도 비가 유리창을 때릴 것 같다.
이 밤, 허망이라는 단어를 씹으며 그녀도 나처럼 깨어 있을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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