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기행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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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행코스
> 안동 도산서원, 이육사 문학관, 청량산 청량사, 천등산 봉정사 순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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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Ⅰ, 안동 도산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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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최고의 유학자이며 성리학의 대가인 퇴계 이황 선생의 제자들이 건립한 안동의 도산서원과 일제 강점기 민족의 독립을 위해 일제에 항거하다 순국한 이육사 선생의 문학관과 그리고 주변에 산수가 매우 맑고 수려한 봉화군 청량사와 천등산 봉정사 등 이들 문화유적과 명산대찰이 이번 합천문인협회의 문학기행코스로서 정해져 2007년 6월 6일 아침 여덟시에 이화예식장 앞에 회원과 가족들이 모여 오랜만에 문학기행을 떠나게 되었다. 달변인 초계고 교감 손국복 선생의 유창한 안내방송과 재치 있는 유모어가 차안을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상기(爽氣)시켜 나갔다. 문학기행을 앞두고 지난밤에는 설레임 때문에 새벽 세시에 깨어 잠을 설쳤다는 합천문인협회 김해석 회장의 인사는 천진무구(天眞無垢)한 동심이었다. 때묻지 않은 그 순수한 동심이 유유히 굽이쳐 흐르는 저 맑은 남정강을 대하(大河)의 서정시로 엮어 내었던 것이다.
> 우리를 태운 야로의 유재식 기사의 리무진 관광버스가 안동을 향해서 조용히 질주하고 있을 때 마침 그날이 현충일이라
10시가 되는 순간, 손교감 선생의 안내와 구령에 맞춰 조국의 독립과 국토수호를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에 대한 경건한 묵념이 있었다. 이용형 교수의 딸 아홉 살 배기 새봄이도 함께 어른들과 고개를 숙여 천진스레 묵념하는 모습이 여간 귀엽지 않았다. 요즘 다른 관광차 안에서는 보기 드문 색다른 풍속도였다. 오전 11시쯤 안동시의 군자촌(君子村)을 지나 지렁이처럼 휘어진 꾸불꾸불하고 단선으로 깔린 좁은 도산서원의 진입로 커브 길을 몇 차례 어지럽게 돌고 돌아 도착한 곳이 도산서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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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도산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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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서원은 퇴계 이황 선생이 후학들을 양성하여 가르치고 학문을 펼친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모시고 해마다 춘추로 제향을 올리는 곳이다.
> 근대 이후 서양의 중심 사상인 과학정신과 합리주의가 고도의 물질문명의 인간사회를 만들었지만, 그동안 물질문명에 눌려 외면되었던 인간가치의 문제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제기되면서 미국을 비롯한 서구사회가 그 해결을 위한 새로운 차원의 파라다임으로 동양철학에 관심을 돌리기 시작했고, 그 중에서도 퇴계의 성리학이 미국에서 활발한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특히 하바드 대학에서는 퇴계 선생의 성학십도(聖學十圖)를 교수의 방에 걸어 놓고 연구를 하고 있을 정도로 퇴계 선생의 심오한 철학과 학문의 깊이를 짐작할 수 있게 하고 있다.
> 우리 일행이 도산서원 개표소를 지나 도시공원 산책로 같은 울타리나무가 가지런히 잘 정리된 진입로를 따라 5분쯤 걸어 들어갔을 때 ‘추로지향’이라는 비문이 맨 처음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 도산서원 해설사 사무소에서 중년부인으로 보이는 미모의 해설사가 우리일행을 환영하는 인사와 함께 ‘추로지향’을 간단히 설명하였다. 그녀의 이름은 박순화였다.
>그녀의 해설에 의하면 <추로지향(鄒魯之鄕)은 공자의 77대 후손의 한 사람인 공덕성이라는 사람이 1980년 12월 8일 이곳 도산서원에 와서 퇴계 선생의 신위(神位)에 배알(拜謁)하고 강당에 올라 선생이 남긴 유규(遺規)를 읽고 흠모(欽慕)하는 마음 간절하여 이를 돌에 새겨 기록하다>는 비문이라고 해설하였다.
> 비문 전문이 아래와 같이 전서(篆書)와 행서(行書)로 음각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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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鄒魯之鄕 碑 추로지향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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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庚申 十二月 八日 敵洦 경신십이월 팔일 적백
> 陶山書院 拜 도산서원 배
> 退溪先生 講堂展仰 퇴계선생강당전앙
> 遺規益覺 欽遲刻 石爲紀 유규익각 흠지각 석위기
> 曲阜 孔德成 곡부 공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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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로지향(鄒魯之鄕)의 제자(題字)는 노나라 공자와 추나라 맹자의 고향과 같이 안동이 예절을 잘 알고 학문이 왕성한 고장임을 시사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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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산서원 앞마당에 이르면 서원에서 남쪽 방향으로 낙동강을 굽어 볼 수 있는데, 지금은 안동호수로 변한 호수 한복판에 마치 서원쪽으로 향해 달려오는 듯한 배(船) 모양을 한 한가로운 작은 섬 하나가 강 가운데 우뚝하게 돌출되어 있었다. 이름하여 시사단(詩社壇)이다.
> 시사단은 수몰되기 전에는 백사장과 솔밭이 시원스레 늘어선 강변이었다고 한다.
> 시사단은 1792년 3월, 조선 정조 때 규장각의 대신인 이만수(李晩秀)가 어명으로 도산서원에 내려와서 퇴계 선생을 위해 치제(致祭:공이 많았던 신하에게 임금이 내리는 제사)하고, 별과(別科)를 보게 했는데 응시자가 너무 많이 몰려와 서원 안에서는 과거를 치를 수 없어서 과거장소를 강변으로 옮기고 시사단에 서 있던 소나무 가지에 시험문제를 걸어 놓고 시험을 보게 하였다고 한다. 그 때 응시자가 7천여 명 이었는데 그 중에 답안지 제출자가3632명이었으니 아예 답을 쓰지 못한 선비들도 많았던 것 같다. 한양으로 답안지를 가져가 채점을 하고 7명을 합격시켜 시상했다고 하며, 왕이 전하는 교지(敎旨)와 제문(祭文)은 전교당에 게시하고 그때의 일을 기념하여 단(壇)을 쌓고 기념비를 세우니 그것이 곧 시사단이다.
> 1974년 안동호가 축조되면서 이 유래 깊은 시사단도 수몰될 처지에 놓이게 되자 높이 10m, 반경 10m의 둥근 축대를 쌓아 수면 위로 부상(浮上)시켜서 역사적인 기념물로 남게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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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원에서 시사단을 내려다보니 그 옛날 35년 전 내가 군인이었던 젊은 시절이 회상되었다. 내가 안동 보병 제36사단 사령부에서 잠시 근무할 때 경북지역 군부대에 병기물자를 보급하거나 수리하는 업무를 띠고 커다란 샾(shop)차에 병사들과 함께 병기물자를 싣고 울진, 봉화지역의 군부대와 경찰서를 오갈 때, 바로 저기 시사단 근방을 통과하는 좁은 비포장 도로를 지나다니곤 했었는데, 내 젊은 날, 먼 추억의 그 길을 지금 저 안동호가 집어 삼켜버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잔잔한 물결만 무심하게 수면 위에 띄우고 있었다. 저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 다시 흘러내린 지나간 세월이 장구하기도 하지만 세월의 덧없음과 인생무상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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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놀던 옛 동산에 오늘 와 다시 서니
>산천의구(山川依舊)란 말, 옛시인의 허사(虛辭)로고
>예 섰던 그 큰 소나무 베어지고 없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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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팡이 도로 짚고, 산기슭 돌아서니
>어느 해 풍우엔지 사태져 무너지고
>그 흙에 새 솔이 나서 키를 재려 하는 구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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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난파 작곡의 ‘옛동산에 올라’라는 가곡이다. 이 가곡 가사에 담긴 서정과 35년 전 다니던 길을 삼켜버린 저 안동호를 바라보는 지금 나의 이 허무한 심회가 어찌 서로 다르다 하랴, 그러나 이 가곡 이면에 숨은 진정한 뜻은 1910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국권을 빼앗기고 식민지로 전락해버린 민족의 고통과 그 한을 은유적으로 묘사한 노래이다. 작시를 한 이은상이나 곡을 붙인 홍난파 두 분이 처음에는 일제의 조선 합병에 대한 분노로 이 가곡을 만들었지만 나중에 두 분 모두 친일로 전향하고 말았으니 이들의 변절 또한 인생무상이 아닐 수 없다.
>안동호는 그 넉넉했던 물을 전력생산과 공업용수, 상수도용 등 다목적 용도로 강수기가 오기 전에 미리 너무 많은 양을 인간들의 편익(便益)을 위해 내려 보내어 안동호 가장 자리는 어느새 물이 말라 속살을 드러내 보이고 저 외로운 섬 시사단도 물이 빠져 나갈수록 어쩔 수 없이 그 알몸을 드러내 보일 것이 뻔하니 괜히 안쓰러워지는 것은 필자만의 심정이 아닐 것이다.
> 시사단을 뒤로 하고 서원 정문에 들어서니 우리 일행을 고개 숙여 맞이하는 키가 큰 아주 정감이 가는 금송(金松)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해설사의 설명에 의하면 이 금송은 도산서원의 성역화 사업의 입안자였던 고 박정희 대통령이 청와대 집무실 앞에 심어 아끼던 것을 퇴계 선생을 위하는 마음으로 도산서원 경내를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 70년 12월 8일 이 자리에 옮겨 심은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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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순화 해설사의 친절한 안내와 열정적인 해설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도산서원을 답사하면서 어떤 것을 볼 것인가, 무엇을 배우고 갈 것인가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도산서원의 여러 가지 시설물들의 물리적인 구조와 배치가 어떻다는 등의 해설에는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퇴계 선생의 생애와 그의 교육사상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그의 생활공간 겸 후학들을 가르쳤던 도산서당, 그리고 그가 체계화한 성리학과 임금이 백성들에게 어진 정치를 할 수 있도록 도식화하여 선조에게 주어 공부하게 했던 성학십도에 관한 내용이 나의 지대한 관심사였다. 퇴계 선생의 정신과 그의 사상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도산서당과 유물관을 보고 이해하는 것이 도산서원을 찾은 보람이 되리라,
> 박순화 해설사의 녹음 테이프와 같은 기계적인 빠른 해설을 경청하면서도 나는 유물관 벽에 걸린 퇴계 선생의 업적에 관한 기록들을 초점으로 모아 부지런히 디지탈 카메라 안에 주어 담기 바빴다.
>. 서원 안에는 먼지하나 발견할 수 없을 정도로 누군가가 애써 손님을 맞을 준비로 쓸고 닦고 하여 말끔하고 단정하기 그지없다.
> 퇴계 선생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제자들은 이 도산서원을 짓고 마치 학교처럼 사용하였다. 정조는 선생과 그 제자의 뜻이 갸륵해 도산서원이라는 현판을 사액하였다. 힘이 넘치면서도 과하지 않은 절제된 필체로 쓴 이 현판은 바로 선조의 명을 받은 당대의 명필 한석봉이 쓴 글씨이다. 퇴계 선생의 위패는 제자 월척 주목 선생과 함께 상덕사에 모셔져 있다. 도산서원은 책을 만들어 내던 장판각이 있었다. 이곳은 마치 인쇄소와 같은 곳이었다. 일일이 손으로 가르침을 적은 목판본을 만들고 그것을 보존하며 두고두고 사용했다. 퇴계 선생을 위대한 스승이라 부르는 것은 그가 가르침의 실천자였기 때문이다.
>수많은 제자를 거느린 당대 최고의 스승이었지만, 그가 지낸 방은 좁고 너무 검소해 제대로 된 가구 하나가 없었다. 다만 방안 정면에 높은 턱을 만들어 책을 올려놓았다고 한다. 배움을 주는 책을 사람과 같은 자리에 놓을 수 없다 하여 방안에 턱을 만든 것이었다.
> 사람을 대함에 있어서는 선비들이 흔히 갖기 쉬운 엄격한 위세를 보이지 않고, 독서를 통해 내면의 욕망을 다스리며 따뜻한 성품을 가지려는 것이 선생의 평소의 모습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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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도산서당이 도산서원으로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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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퇴계 선생이 처음 서당을 짓기 위해 도산 남쪽에 서당 터를 잡은 것은 그의 나이 57세 때인 1557년이었다. 그러나 이 터가 마음에 들지 않아 그해 다시 지금의 자리로 옮겨 5년간의 공사 끝에 1561년 완공을 보았다고 한다. 이때 지은 집은 선생의 공부방인 도산서당과 학생들이 기거했던 기숙사인 농운정사(隴雲精舍), 두 채뿐이었다. 그러던 것이 당시 선생의 명망이 전국으로 퍼져나가면서 각지에서 많은 학생들이 선생으로부터 배움을 얻고자 몰려오면서 농운정사에 학생들을 모두 수용할 수 없어서 걱정하던 차에 정사성(鄭士誠 1545~1607)이 도산서당에 입학할 때 그의 아버지가 기숙사 별관으로 역락서재(亦樂書齋)를 지어주었다 한다.
> 이것이 한 때 시행했던 “기부금 입학의 시원이 되었을 것이다”라는 말이 있었는데, 가볍게 듣고 흘려버릴 이야기가 아닌 것 같다. 정사성의 아버지가 준 기부금은 그의 아들이 이미 입학한 후에 낸 헌금이기 때문에 오늘날의 입학을 전제로 한 기부금과는 그 성격상 차이가 있는 것이다. 어쨌든 당시 도산서당은 학생들이 기숙하면서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이 매우 열악했던 것은 분명한 것 같다.
> 퇴계 선생의 생전에 지어졌던 건물은 여기에다 ‘하고직사(下庫直舍)라고 하는 관리 주사(廚舍)를 덧붙여 지은 것이 전부였다. 이 세 가지 건물은 이 서원의 다른 건물과 비교해 보아도 검소하고 조촐하면서도 조용한 분위기를 띠고 있는 것은 이런 연유가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 1570년 퇴계 선생이 세상을 떠나고 3년상을 지나면서 제자들이 선생을 모실 사당과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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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산서원 전경 도산서원 상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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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학문을 이어받을 서원을 짓기로 결의하고 도산서당의 위쪽 산을 절토하여 선생 사후 4년 뒤인 1574년에 착공하여 이듬해인 1575년에 낙성을 보게 되었다. 그리하여 새로 들어선 건물이 서당 위쪽으로 진도문, 전교당, 동재, 서재라는 강학공간과 내삼문, 전사청, 상덕사(尙德祀)라는 제사공간, 그리고 상고직사(上庫直舍)라고 부르는 서원관리소와 인쇄원판을 보관하는 장판각(藏板閣) 등 부속건물을 갖추어 제대로 된 서원을 완성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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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조선 성리학의 큰 별 퇴계 이황 선생의 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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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서원의 답사는 무엇보다도 퇴계 이황 선생의 삶과 사상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기리는 마음이 있어야 그 참뜻이 있다고 생각한다.
> 해설사가 막힘없이 유창하게 설명하는 퇴계 선생의 일생은 우리가 모르고 있는 면모들이 많이 있다.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도 동양철학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들은 퇴계 선생이라 하면 성리학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으면서도 조선시대의 성리학자, 조금 더 안다면 이기론자(理氣論者), 주리파(主理派) 정도를 말할 뿐이다. 그 밖에 더 안다고 하면 천원짜리 지폐에 그의 얼굴이 나온다는 것뿐이다. 이런 상식으로는 도산서원을 찾아온다고 해도 수박 겉면만을 보고 돌아가는 것 밖에는 얻을 것이 아무 것도 없다.
> 인간 퇴계의 면모를 알기 위해서는 이상은(李相殷)의 「퇴계의 생애와 학문」(서문당1973)과 정비석의 「퇴계 소전(小傳)」(퇴계학 연구원 1978) 등이 일반적인 것인데, 내용이 난해하여 쉽사리 이해되지 않고, 한결 같이 위대함을 장식하고 있어 어떤 점이 위대한지 그 핵심을 들춰내기 어렵다. 물론 선생은 지(知)와 정(情)과 덕(德)을 갖춘 전인적(全人的)인 인물임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나 그래도 한 사람의 일생을 논할 때 객관성을 놓치면 그 사람의 진면목을 비켜 갈 수 있기 때문에 존경하는 대상일수록 객관성을 가지고 설명하고 묘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 그런 객관적인 측면에서 기록해 놓은 눈여겨 볼 수 있는 대표적인 예를 들어 본다. 「퇴계전서」에는 언행록(言行錄)이 있는데 그 속에 그의 문인(門人)들이 퇴계 선생의 일거수일투족을 증언한 것이 실려 있다. 거기에는 인간 퇴계의 참모습과 스승으로서의 자세가 아주 생생히 묘사되어 있다. 그중에는 “도(道)란 가까이 있으나 사람들이 스스로 살피지 못한다. 어찌 일상생활 밖에 다른 도가 별도로 있겠느냐”(김명일 증언) 이와 같은 도학자적 면모부터 “밥상에는 가지, 무, 미역 등 세 가지뿐이었다” 등 일상의 모습도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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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퇴계 선생의 성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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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퇴계 이황 선생은 이언적(李彦迪)의 주리설(主理說)을 계승, 주자(朱子)의 주장을 따라 우주의 현상, 즉, 자연, 인간, 사회의 원리를 이(理)와 기(氣)로 설명한다. 만물은 氣의 움직임에 의해 생성, 소멸되지만 기의 근원을 이루는 근본법칙은 이(理)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선생의 주리론은 우주만물의 궁극적 실재(實在)를 이(理)로 보는 것이다.
> 이와 기는 서로 다르면서 동시에 상호 의존관계에 있고, 기는 결코 항상 존재하지 않고 생멸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나아가 이는 항상 존재하는 것으로 기를 움직이게 하는 근본 법칙을 의미하고 기는 형질을 갖춘 형이하적(形而下的) 존재로서 이의 법칙을 따라 구상화(具象化)되는 것이라고 하여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주장한다. 따라서 심성론(心性論)의 주요 논제인 사단칠정(四端七情)을 설명함에 있어서 심성 내부에 존재하는 천부적인 선한 본성인 이(理)가 발동한 것이고, 선과 악이 섞인 칠정(七情)은 기(氣)가 발동한 것이라는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주장하여 주자의 이기이원론을 발전시켰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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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율곡 선생과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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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퇴계 선생과 율곡 선생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성리학자로 이기론 등 학문적 입장만을 고려하여 단순히 경쟁자로 파악하는 것이 보통이나 퇴계 선생과 율곡 선생은 선후배의 관계였을 뿐만 아니라, 사제지간과 다름없는 존중과 애정의 정을 나누었다. 그것은 율곡 선생이 퇴게 선생을 대할 때 언제나 최대의 예의와 존경의 뜻을 갖추었던 일로 미루어 볼 때 충분히 짐작이 되는 부분이다.
> 퇴계 선생이 돌아가시자 율곡 선생은 제문을 써서 올렸으며, 그의 평생의 행적을 적은 행장(行狀)이 쓰이지 않았는데도 선조에게 속히 시호(諡號)를 내려달라고 간청한 사실 등 퇴계 선생에 대한 존경심을 나타내고 있다. 퇴계 선생과 율곡 선생은 서로의 이론을 전개하는 과정과 토론을 통해 학문적인 심도와 성숙도를 갖추어 나갔다.
> 그냥 웃고 넘길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는데, 퇴계 선생이 천원짜리 지폐에 나오고, 율곡 선생이 오천원짜리에 나오는 것에 대해 안동의 한 퇴계학통의 서생이 한국은행에 항의성 질문을 했다고 한다. 이 난처한 질문에 대하여 은행측에서는 기막히게 피해갔다고 한다. “더 훌륭한 분을 더 많은 사람이 자주 뵈어야 하기 때문에 퇴계 선생을 1천원권에 모셨습니다.”
> 응답을 했던 한국은행 관계자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정말 임기응변에 뛰어난 기지(機智)를 지닌 분이라고 생각한다.
> 퇴계와 율곡을 비교할 때는 퇴계가 이기이원론의 주리론(主理論)을 편 데 비해 율곡은 이기일원론의 주기론을 폈다는 것을 큰 차이로 꼽는다. 우선 퇴계 쪽에서는 율곡은 퇴계보다 35년 아래로 일찍이 퇴계를 찾아와 가르침을 받고 갔으니 퇴계의 제자일 뿐이라고 한다.
> 이에 대해 율곡 측에서는 퇴계의 학문을 더욱 진일보하게 완성시킨 것은 오히려 율곡이니 율곡은 퇴계를 딛고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고 한다. 그러나 영남의 퇴계학파들은 이런 논리는 천부당만부당하다는 것이다. 성리학은 퇴계에서 완성되었으니 율곡은 퇴계라는 호수에서 갈라져나간 한줄기 갈래에 불과하다면서 ‘퇴계는 퇴계고 나머지는 나머지’라며 퇴계와 율곡의 비교는 ‘베드로와 바울’의 비교가 아니라 ‘예수와 바울’의 비교 같은 것이란다. 이에 대하여 율곡학파는 또 조금도 지지 않고 퇴계의 이론은 주자의 이기이원론을 보완한 정도의 것이지만 율곡의 이기일원론은 중국에도 없는 조선 성리학의 완성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영남학파들이 퇴계 모시는 것 못지않게 극진하게 모신다.
> 예를 들어, 제상의 진설 순서가 각 지역마다 차이가 있지만 홍동백서(紅東白西)와 조율이시(棗栗梨柿)만은 전국 어디서나 공통이다. 빨간 것은 동쪽, 하얀 것은 서쪽, 대추·밤·배·감 순서이다. 그런데 기호학파의 어느 집안에서는 조율이시를 율조이시로 바꾸어 실시한다.
>율곡이니까 밤이 먼저라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퇴계가 하루 뒷간에 두 번 갔다는 것 못지않은 절대적 신봉의 결과이다.
> 그러나 명심해야 할 것은 퇴계는 결코 영남의 퇴계가 아니고 율곡은 결코 기호의 율곡이 아니다. 조선의 퇴계이고 조선의 율곡인 것이다. 대한의 퇴계와 율곡이며, 세계의 퇴계와 율곡인 것이다. 일찍이 박세채(朴世采)가 말했듯이 “성리학에 깊이 침잠한 것은 퇴계였고 경세제용(經世濟用)의 학을 담당한 것은 율곡이었다.” 이론적 지성의 퇴계와 실천적 지성의 율곡인 것이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쓴 유흥준은 “나는 우리 지성사에서 이 두 분을 모두 갖고 있다는 것은 큰 자랑이자 복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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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도의 철학과 실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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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퇴계 선생은 진리는 이론에서 찾는데 있지 않으며, 오히려 평범한 일상생활 속에 있다는 지(知)와 행(行)의 일치를 주장하였다. 오늘날의 지행합일설(知行合一說)이다. 또한 그 기본이 되는 것이 성(誠)이요, 그에 대한 노력으로서 경(敬)이 있을 뿐이라 하였다. 실제로 퇴계 선생의 학문과 인생관의 최후 결정은 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으로, 이를 70년의 생애를 통하여 실천하였다.
> 퇴계 선생은 “마음을 산만하게 하지 말고 항상 정신을 통일 집중된 상태로 지니고 모든 기거동작을 가볍게 가지지 말고 조심하고 삼가는 도를 지녀야 한다. 따라서 말할 때도 경해야 하고 움직일 때도 경해야 할 것이며 앉아 있을 때도 경해야 한다. 이는 일부러 조작하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심신이 숙연해지고 표리(表裏:겉과 속)가 하나로 되는 경지가 경(敬)이다. 이 경의 태도를 취하면 天理가 무엇인지 마음속으로 스스로 알게 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 임진왜란 이후 일본에서는 퇴계 선생의 저술을 일본각판으로 하였으며, 일본의 유학자들로부터 숭상을 받아왔다. 또한 일본, 대만, 독일, 미국 등 각국에는 퇴계학연구회가 조직되어 있다. 최근 일본의 큐슈지역에서는 퇴계 선생의 현창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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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퇴계 선생이 남긴 교육에 대한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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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몰라서 실천하지 못하는 것은 그 사람의 죄가 아니다.
> 2. 배우는 사람의 공부 가운데 심신을 닦는 것보다 절실한 일은 없다.
> 3. 진리가 가까이 있는데도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 4. 알면서 실천하지 않는 것은 참된 일이 아니다.
> 5. 빼앗을 수 없는 뜻과, 꺽이지 않는 기상과 흐르지 않을 앎을 늘 지니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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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매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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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42년(중종37)부터 1570년(선조3)까지 28년 동안 매화에 관하여 지은 시를 모아 엮은 책이다. 퇴계 선생은 특히 매화를 사랑하여 많은 시를 남겼다. 퇴계 선생의 매화시는 75제 107수에 달하며, 그 중에 61제 91수가 선생의 매화시첩에 수록되어 있다.
> 퇴계 선생은 뜰의 매화를 바라보며 매화와 정감어린 대화를 하고, 달이 밝으면 매화를 바라보며 시를 짓기도 하며, 매화가 겨울 추위에 손상되었을 때, 이를 개탄하는 아픈 마음을 시로 읊어 제자에게 보내기도 하였다. 서울에서 고향으로 돌아갈 때 매화분을 가져가지 못하여 그리워하다가 제자가 매화분을 보내주자 그 회상을 시로 옮기기도 하였다고 한다.
> 그의 매화 시 중 <도산 달밤에 매화를 읊다>를 아래에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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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밤기운 차거워라
> 창을 기대 앉았자니
> 두둥실 밝은 달이
> 매화가지에 오르누나
> 수다스레 가는 바람
> 불러오지 않더라도
> 맑은 향기 저절로
> 동산에 가득한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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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퇴계의 가장 큰 사랑은 매화였던 것 같다. 이 시에서 엄격하고 멋없는 유학자의 위품을 떠나 사실은 그가 대단히 인간적인 분이었고, 섬세한 감정의 소유자였음을 읽을 수 있다.
> 꽃을 사랑하는 사람치고 마음이 아름답지 않은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
>
> 퇴계의 아름답고 인간적인 면모는 그의 임종에 잘 나타나 있다.
> 퇴계는 1570년 12월 8일에 세상을 떠났는데 4일 전에 조카에게 유서를 받아쓰게 하면서 비석은 조그만 돌 앞면에다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고만 쓰고 자신이 지은 명문을 새길 것이며, 奇高峰(奇大升)이 알면 비문을 장황하게 쓸 것이니 그에게 쓰이지 않도록 하고 그냥 간단히 쓰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임종 하루 전날에 제자 이덕홍에게 ‘책은 네가 맡아 관리하라’고 했고, 세상을 떠나는 날 아침에는 ‘저 매화나무 물 줘라’고 말한 다음 아무 말씀이 없다가 저녁에 일으켜 앉히니 앉은 채로 세상을 떠나셨다.
> ‘매화나무에 물 줘라’ 그것이 선생의 최후의 말씀이다.
> 지금도 퇴계 선생 묘소에는 조촐한 비석에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는 비문과 그 옆에 선생 스스로 찬한 명문(退溪自銘)이 이렇게 새겨 있다.
>
> 生而大癡(생이대치) 나면서 어리석고
> 壯而多疾(장이다질) 자라서는 병도 많아
> 中何嗜學(중하기학) 중간에 어찌하여 학문을 즐겼는데
> 晩何叨爵(만하도작) 만년에는 어찌하여 벼슬을 받았던고!
> 學求愈邈(학구유막) 학문은 구할수록 더욱 멀어지고
> 爵辭愈嬰(작사유영) 벼슬은 마다해도 더욱더 주어졌네
> 進行之路(진행지로) 나가서는 넘어지고
> 退藏之貞(퇴장지정) 물러서서는 곧게 감추니
> 深慙國恩(심참국은) 나라 은혜 부끄럽고
> 亶畏聖言(단외성언) 성현 말씀 두렵구나
> 有山嶷嶷(유산억억) 산은 높고 또 높으며
> 有水源源(유수원원) 물은 깊고 또 깊어라
> ·······
> 乘化歸盡(승화귀진) 조화 타고 돌아가니
> 復何求兮(복하구혜) 무얼 다시 구하랴
>
>선생은 평생을 검소하게 살았으며, 죽어서도 그의 무덤에 청빈한 뜻을 남겼다. 우리 일행의 바쁜 일정에 쫓겨 꼭 답사했어야 할 선생의 무덤과 그의 종택을 보지 못한 아쉬움이 내게 남아 있어서, 언젠가는 혼자서라도 이곳을 다시 찾아 올 것을 마음속에 다짐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이 살았던 토계 마을과 농암 이현보 선생과 교류하며 왕래했던 가송(佳松)리까지의 낙동강 칠백리 중 가장 아름답다는 길을 내 한번 꼭 가서 거닐어 보리라,
> 우리 일행이 서원 앞에서 기념 촬영을 마지막으로 도산서원 답사를 모두 마치고 정오가 가까워진 시각 우리는 다시 다음 코스인 육사 선생의 문학기념관을 향해 박순화 해설사와 작별인사를 뒤로 하고 도산서원을 떠났다.
> 도산서원에서 1.5km 쯤 가다보니 오른 쪽으로 퇴계종택이 차창 안에 나타났다. 저기에 잠간 내려갔으면 얼마나 좋을까를 혼자서 은근히 기대해 보았지만, 나의 의중은 전혀 개의치 않고 차는 그대로 달려갔다. 퇴계묘소도 차안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분명 이 근처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이육사문학관으로 가는 길은 협소한 도로에 언제 그랬는지 콘크리트를 입힌 포장도로로 바뀌었다. 35년 전 비포장도로를 지나 다녔던 나의 지난날의 정취를 페이브먼트의 문명이 말끔히 묻어 버렸다. 우리가 도산서원에서 출발한지 15분쯤 지나 이육사 문학관 앞에 드디어 차가 멈춰 섰다.
>
> 이육사 문학관에 우리 일행이 입장했을 때는 기념관 안에는 점심시간이어서인지 해설사도 보이지 않고 다른 관람객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이육사 선생의 흉상 앞에서 아내와 둘이서 기념 촬영을 하고 벽에 걸린 판넬과 그의 홍보 영상물을 보며 일제에 저항했던 선생의 생애와 문학의 자취를 살폈다.
>
>Ⅱ 이육사 문학관
>
> 이육사문학관은 일제 강점기에 17번이나 감옥을 드나들며 민족의 슬픔과 조국 광복의 염원을 노래한 항일 민족시인 이육사 선생의 흩어져 있는 자료와 기록들을 한 곳에 모아 육사의 혼, 독립정신과 업적을 학문적으로 정리해 그의 출생지인 원천리 불미골 2,300평의 터에 건평 176평 지상 2층 규모로 지었다.
>40여 년의 짧은 생애를 오로지 조국 독립을 위해 일제에 끝까지 저항하다가 이국땅에서 순절한, 식민지의 절망적 상황 속에서 조국의 광복에 대한 애타는 염원을 주옥같은 시로 남긴 저항시인 이육사. 그는 일제의 끈질긴 회유와 박해에도 끝까지 굴복하지 않고, 식민지의 백성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온 몸으로 실천해 보인 독립운동가요 위대한 저항 시인이었다.
>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
>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 단 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하략)……
> ―「청포도」―
>
>라고 노래하며 그렇게도 조국 광복을 갈망하다가 광복을 1년 앞두고 이국 땅 베이징의 차디찬 감옥에서 생을 마친 육사 이원록 시인. 그는 죽는 날까지 우리나라와 중국을 넘나들며 광복에 대한 간절한 염원을 주옥같은 시로 승화시킨 암흑기 최대의 저항시인이다.
>육사는 한국 유학의 본고장인 안동에서 조선조 대표적 유학자인 퇴계 이황 선생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그는 20대에 조국 독립 운동에 뛰어들어 죽을 때까지 국내는 물론 일본과 중국 대륙을 오가며 오로지 항일 투쟁에 신명(身命)을 다 바쳤다. 비록 길지 않은 40 생애에 무려 열일곱 차례나 피검, 투옥되는 고통을 겪었으니 그 생애가 어떠했는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더구나 그러한 역경과 시련 속에서도 그는 조금도 굴하지 아니하고 그 참담한 고통을 온몸으로 극복하며 광복에의 열망을 절제된 언어로 갈고닦아 만인의 심금을 울리는 시로 형상화시켜 우리 문학사에 길이 남을 「청포도」「광야」「절정」같은 주옥같은 작품을 남겼다.
>
>1. 아름다운 강마을 원촌리에서
>
>안동 시내에서 35번 국도를 타고 북쪽으로 26km 정도 가면 도산면 소재지인 온혜리에 이른다. 온혜 입구에 있는 도산면사무소 앞에서 오른쪽으로 온혜천을 따라 나 있는 길을 따라 6km쯤 가면 산 아래로 앞이 확 트이며 아름다운 원촌 마을이 한 눈에 들어온다.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의 마을, 마을을 끼고 흐르는 낙동강, 그 건너 고려 공민왕의 어머니가 홍건적의 난을 피해 와서 성을 쌓고 머물렀다는 왕모산이 안산(案山)으로 자리잡고 있는 전형적인 농촌 마을 원촌리. 마을 한가운데 평지에 포도 모양으로 다듬은 일곱 개의 화강암 받침대 위에 구리판으로 만든 육사의 얼굴 모습과 대표작 ‘청포도’가 새겨진 빗돌이 얹혀있다. 이곳이 바로 지절시인(志節詩人) 이육사가 태어난 곳이다.
>이육사는 구한말 조국의 운명이 풍전등화 같던 1904년 5월 18일(음력 4월 4일) 경상북도
>안동군 도산면 원천리 881번지에서 퇴계 이황 선생의 14대손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유학자인 아은(亞隱) 이가호(李家鎬)이고, 어머니는 한말 의병장 범산(凡山) 허형(許衡)의 따님이며, 육사는 5형제 중 둘째이다. 그가 사용한 이름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본명은 원록(李源祿)이고, 원삼이라고 불리기도 했었다. 자는 태경이었다. 그가 필명으로 주로 사용한 이름이 이활, 이육사였다.
>
>
> 이육사 문학관 원천마을 칠월에 익어가는 청포도
>
>육사는 일찍부터 유교적 세계관 속에서 자랐던 것 같다. 그는 멀리는 퇴계 이황의 후손이고, 가까이는 순조조에 사간원 대사간을 역임하고 종2품 가선대부에 오른 이귀운(李龜雲)의 6대손이다. 더구나 조부 치헌(痴軒) 이중식(李中稙), 부친 이가호, 외조부 허형 모두 유학자이니 육사가 유교적 가치관을 갖게 된 것이 당연하다고 하겠다.
> 어려서 조부 치현 이중직에게서 한학을 배우고 보문의숙을 거쳐 도산공립보통학교(요즘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선생이 보문의숙을 다닐 때 예안 만세 사건을 목도하게 된다. 1919년 3월 17일과 22일 2차에 걸쳐 일어난 예안 만세 시위는 안동에서 일어난 최초의 대규모 만세 시위였다.
> 아직 어려 시위에 참가는 못 했지만 이를 목도하면서 그는 민족의식을 키워갔을 것이다. 열일곱 나던 해인 1921년 육사는 영천(永川)에 사는 2년 연하인 순흥 안씨 일양(一陽) 여사와 결혼하고, 처가에서 가까운 영천의 백학학교에서 잠시 수학한다. 19세에는 잠시 그 학교에서 교편도 잡는다. 그 후 대구 교남학교에서 공부하였고, 가족들이 모두 대구로 이주하였으며 이 무렵부터 원기, 원유, 원조 등 형제들과 함께 어울려 다니면서 뜻을 도모하기 시작한다.
>
>
> 복원된 이육사 선생 생가 이육사동상과 시비
>
>2. 육사, 투사의 길로 들어서다
>
>형제들과 어울려 다니면서 민족과 현실에 눈을 뜨기 시작한 육사는 1924년 4월 학기에 맞추어 현해탄을 건너 일본 유학길에 오른다. 이때 관동대지진이 일어났는데, 조선 사람들이 이유도 없이 일본인들에 의해 참혹한 학살을 당하는 것을 목격하고 귀국한다. 육사는 귀국후 조양회관을 중심으로 문화활동을 벌였다.
> 1926년부터 중국 베이징 등지에서 유월한국혁명동지회에 참가해 조직활동을 펼쳤다. 1927년 여름에 조재만과 동행해 귀국했으나 장진홍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되어 대구형무소에서 1년7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그 때의 수인번호 二六四를 따서 호를 ‘육상(陸史)’로 지었다.
> 육사는 폭탄반입혐의를 뒤집어쓰고 감옥살이를 하다가 장진홍 의사가 잡힘으로 2년 6개월만인 1929년 5월 석방되었다
> 1930년 중외일보 기자로 재직하면서 첫 시 <말>을 발표했고 이후 총39편의 시를 남겼다. 이듬해 베이징과 난징에 머물면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의열단에서 설립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 1기생으로 입교해 6개월 과정을 마쳤다.
>육사는 1943년 7월 모친과 맏형의 소상에 참여하기 위하여 귀국했다. 고향 원촌까지 다녀간 그는 안동 풍산에서 일박하고 상경한 뒤 늦가을 동대문 형사대와 헌병대에 검거되어 베이징으로 압송되어 구금되는데, 구금 장소는 베이징 주재 일본총영사관의 감옥으로 추정된다. 감방에서의 육사는 밤낮으로 기침을 했다. 폐병으로 약한데다가 잘 먹지도 못하고 추운 감방에서 고생하니 몸이 더욱 약해진 탓이었다.
>1944년 1월 16일 새벽, 육사는 베이징주재 일본총영사관 감옥에서 그렇게도 간절히 염원하던 조국 광복을 보지 못한 채 40세를 일기로 순국한다.
>
>3. 다시 조명되는 이육사
>
>육사는 갔지만 나라 위해 목숨 바친 그의 고매한 정신과 주옥같은 시들은 세상 사람들의 가슴속에 남아 있어, 1968년 5월 고인을 추모하는 문인 및 일가친척들과 지인들에 의해 안동 시내 남쪽 낙동강 도로변에 ‘육사 시비’가 세워졌다(이 시비는 1978년 안동댐 민속박물관의 현 위치로 옮겨졌다). 이 시비의 전면에는 육사의 대표시 <광야>가 새겨져 있고, 후면에는 조지훈 시인의 육사를 추모하는 글이 쓰여 있다.
>1970년대 안동다목적댐이 건설되면서 원촌 마을이 수몰될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이에 지방 민속자료 제10호로 지정되어 있는 육사 생가는 1975년 12월 31일 안동군 도산면 원천리 882번지에서 안동시 태화동 현 위치로 이건되었다. 옮길 당시는 도시의 변두리였으나 도시의 확장으로 인하여 지금은 도심의 빽빽한 주택가 한 가운데 위치하게 되어 관리와 선양 두 측면 모두에 문제점을 안고 있다.
>또, 1993년 안동군에서는 원촌 마을 물에 잠긴 육사의 생가터를 흙을 돋우어 높이고 선생을 추모하는 시비를 세웠다. 비는 포도 모양으로 다듬은 일곱 개의 화강암 위에 동판(구리판)으로 만든 육사의 모습과 대표작 ‘청포도’를 새긴 비를 얹어 놓았다. 그리고 육사 선생을 문학정신을 계승하고 기리기 위한 ‘육사백일장’이 초․중․고․일반을 대상으로 안동문인협회와 안동문화방송 공동주관으로 해마다 개최되어 오고 있다(2001년 제22회 대회 개최). 또 1994년도에 ‘이육사 기념사업회(초대 회장 : 김종길)’가 창립되어 해마다 육사의 기일을 기해서 ‘육사의 밤’을 개최하고 있으며 육사의 정신을 되새기고 선양하기 위한 강연회도 여러 번 실시하였다.
>2001년 1월 26일에는 '이육사기념관 건립추진위원회‘가 창립되어 안동시의 적극적인 후원 아래 도산면 원천리 육사 생가 부근 1,000평 대지 위에 육사기념관을 건립하고 육사 생가를 복원하기 위한 사업이 육사 탄신 100주년(2004년)까지 완공을 목적으로 추진되었다.
>이와 같이 육사는 가도 그의 나라 위해 몸바친 애국심과 문학 정신은 해가 갈수록 활발히 조명되어 영원히 이 고장 나아가 이 나라의 많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살아 있을 것이다.
>
> 이육사 선생의 생애를 조명한 영상 스토리를 영상실에서 10여분 동안 관람하고 선생의 동상 앞에서 기념촬영을 마친 우리 일행은 다음 세 번째 코스인 청량산 청량사를 향해 전세 버스에 다시 탑승하였다.
>
>Ⅲ, 청량산 청량사
>
> 1. 청량사 가는 길
>
>청량산 청량사는 도산서원을 찾는 이가 누구더라도 자연스레 길 따라 옆 동네 가듯 이어 갈만한 산수가 매우 맑고 아름다운 풍광이 펼쳐진 곳이다.
> 청량산은 작지만 아담하고 웅장한 기상이 있는 영남의 명산이다. 청량산 육육봉의 계곡물을 다 받아내어 제법 장한 물살을 이룬 낙동강이 산자락 낮은 곳을 타고 유유히 흐르는 자태에는 교향악 가운데 한 부분 심포니의 선율이 있다.
> 이 낙동강 물줄기를 따라 올라가며 청량산의 청량한 기상을 바라보는 것은 이번 문학기행의 클라이막스이다. 특히 작년의 묵은 가지의 잎들을 떨구고 새로이 단장한 유월초 연초록의 신록이 산들 바람에 흔들리며 싱그러운 방향(芳香)을 풍겨줄 때 더 없는 환희를 느낀다.
> 우리는 먼저 이곳을 다녀간 경험이 있는 손간사님의 알뜰한 안내로 청량사 입구 육각정자를 옆으로 지나, 가던 길쪽으로 직진하여 1km 쯤 지점에 차를 세우고 산허리에 생긴 노루와 토끼들이 다니는 오솔길을 찾아서 쉽사리 20여분 정도 걸려 청량사에 도착하였다.
>
> 2. 청량사 세심수를 마시며
>
> 청량사 경내에 막 들어서자 절 입구에 표주박을 엎어 놓은 세심정(洗心井)이 나를 기다려주고 있었다. 세심정은 탐진치(貪瞋痴)에 얼룩진 중생의 무명한 마음을 씻고 경내로 들어오라는 무언의 암시인 것 같아, 마침 목도 마른 차에, 억겁 동안 쌓아 온 나의 두터운 죄업을 씻듯 부처님께 참회하는 마음으로 洗心水를 마시고 또 마셨다.
> 지난 과오를 참회할 때에 불자들은 천수경에 있는 다음과 같은 참회진언을 염송한다.
>
>
> 청량사 세심정(洗心井) 청량사를 품에 안은 청량산
>
> 아석소조제악업 (我昔所造諸惡業) 아득히 먼 옛날부터 내가 지은 모든 악업
> 개유무시탐진치 (皆由無始貪瞋痴) 크고 작은 그것 모두 탐진치로 생기었고
> 종신구의지소생 (從身口意之所生) 몸과 입과 뜻을 따라 무명으로 지었기에
> 일체아금개참회 (一切我今皆懺悔) 나는 진심으로 참회합니다.
> --------- 중략
> 죄무자성종심기 (罪無自性從心起) 죄의 본성 본래 없어 마음따라 일어나고
> 심약멸시죄역망 (心若滅時罪亦亡) 마음 한번 없어지면 죄업 또한 사라지네
> 죄망심멸양구공 (罪亡心滅兩俱空) 죄도 업도 없어지고 마음 또한 공하여라
> 시즉명위진참회 (是則名爲眞懺悔) 이것을 이름하여 참 참회라 하네,
>
> 참회진언 옴 살바 못자 모지 사다야 사바하
>
>3. 청량한 기운 대지에 가득하고
>
> 1) 약사기도 도량 유리보전
>
>이 절의 중심이 되는 법당은 약사여래부처님을 모신 유리보전이다. 약사여래불은 병마에 시달리는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중생의 병을 치료하고 수명을 연장해주는 의왕으로서 신앙되는 부처님이다. 이곳에 모셔진 약사여래불은 다른 사찰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한지를 녹여 부처의 형상을 만들었으며, 그 위에 개금불사(改金佛事)를 하여 잘 보존하고 있다.
> 약사여래불을 본존불로 좌우측에 문수보살과, 지장보살을 협시불로 하고 있는데, 문수보살은 석가모니 부처님 10대 제자 중 지혜 제일의 제자로서 반야심경에서 부처님과 대화를 하는 보살이며, 지장보살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부촉을 받아 지옥의 모든 중생들을 단 한명도 남기지 않고 제도하기 전에는 성불을 하지 않겠다고 서원을 세우신 보살이다.
> 유리보전 뒤로는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하는 금탑봉이 청량사 경내를 굽어보고 있고, 앞으로는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오층석탑이 웅대한 자태로 서서 어린 소녀가 애써 절을 하고 있는 모습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심히 내려보고 있다.
>
>
> 청량사 유리보전 청량사 5층 석탑
>
> 2) 육육봉과 삼각우총
>
> 문수봉과 금탑봉, 연화봉, 반야봉이 주위를 두르고 있는 청량사 경내에 들어서면 산신각과 유리보전 요사채 등이 한 눈에 들어온다. 주지 지현 스님이 하루에 두차례식 3시간을 걸어 지게로 지어 날라서 만든 침목계단을 오르면 삼각우총이란 세 개의 굵은 가지가 뻗어있는 소나무가 보인다. 화엄종을 일으킨 원효와 의상대사가 청량사를 지을 때 뿔 셋 달린 황소가 재목을 운반했고 준공 하루 전 생을 다해 그 곳에 묻혔다고 전한다.
>
> 3) 응진전 그 아름다운 기도도량
>
> 청량사를 지나 오솔길에 있는 어풍대에서는 운무와 청량의 아름다움에 취하게 되는데 운무가 골짜기 위로 깔리면 이 작은 절이 모든 봉우리 위에 선명히 나타나 아름다운 청량사 전경을 드러낸다고 한다.
> 그 길을 따라 조금 더 가면 금탑봉 아래 원효대사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응진전을 만난다. 응진전은 청량사 부속건물로서 청량사와 같은 연대에 창건되었고 원효대사가 수도를 위해 머물렀던 곳이다. 응진전 뒤로는 거대한 금탑봉이 병풍처럼 둘려져 있고 아래로는 천길 낭떠러지, 바위가 마치 9층으로 이뤄진 금탑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층마다 소나무들이 테를 두른 듯 암벽에 뿌리를 내리고 있고 깎아지른 듯 병풍 같은 수려한 절벽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저절로 발길을 멈추게 한다.
> 응진전은 고려말 노국공주가 16나한상을 모시고 기도 정진한 곳으로 응진전 좌측 바위에는 부처님의 발모양을 닮은 불족암과 내청량산의 불수암이 자연과 오묘한 조화를 이룬 불국토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고 그 기묘한 형상에 걸맞게 기도 영험이 뛰어나기로 소문난 나한 기도도량이다.
>
> 4, 이상적 불국토 청량산
>
> 청량산의 최고봉인 의상봉은 화엄종의 시조인 의상대사께서 입산수도한 곳이라 의상봉이라 불리며, 이곳을 비롯해 보살봉, 연화봉, 축융봉 등 12개의 암봉이 있고 어풍대, 밀성대, 풍혈대, 학소대, 금강대 등 12개의 대(臺)와 자락에는 8개의 굴과 4개의 약수터가 있다.
> 현재 청량사에는 신라시대 대찰의 모습은 없지만 망월암 등 33개의 암자가 있었던 유지(遺址)가 있고, 문수보살, 지장보살, 16나한 등이 봉안되어 중생의 근기에 맞는 기도처로서 손색없는 도량의 모습을 띄고 있다.
> 공민왕이 은신한 공민왕당과 축융산성, 퇴계 이황이 수도하며 성리학을 집대성한 청량정사, 최치원의 유적지인 고운대와 독서당, 김생이 글공부하던 김생굴 등 주변에 많은 역사적 유적지가 있다.
>
> 5, 청량사를 내려오며
>
> 우리가 답사한 청량사는 내려오기 전까지는 맑고 수려한 경관과 화엄사찰의 풍모가 남아있어서 문화유적 탐방의 보람을 느끼며 경쾌한 마음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그러나 사찰입구를 나오는 순간, 입구까지 깔려있는 도로포장 콘크리트를 목격하면서 나는 지금까지 마음속에 간직했던 고찰 청량사에 대한 청량한 이미지가 한 순간에 여지없이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농촌의 마을길까지 포장도로가 밀려와 깔리는 것은 현대문명의 거역할 수 없는 수용으로 인식하지만, 사찰만은 납자나 불자, 관광객을 불문하고 비포장도로를 한참은 걸어 들어가고 걸어 나오는, 옛날 우리 어릴 적에 산사(山寺)를 찾아 어머니와 손잡고 발이 아프도록 함께 걸었던 그런 정서를 느낄 수 있으면 좋으련만, 오늘날은 사찰 경내까지 차가 들랑거리니 미관상 좋지 않은 것은 나만의 시선이 아닐 것이다.
>
> 6. 청량사 입구에서의 수박 회식
>
> 청량사 답사를 모두 마치고 우리일행이 버스를 탑승하기 위해 집결한 청량사 입구 육각정 앞에는 생각지도 않았던 수박잔치가 벌어졌다. 땀을 흘린 후의 휴식은 달콤한 것인데, 여기에 수박맛은 더욱 감미로웠다. 주인 몰래 따먹는 수박은 원래 더 맛이 있는 법인가? 수박공주가 남편이 애써 재배한 것을 몰래 두 동이를 따온 것이다. 집에 가서 남편에게 혼줄이 나는 것은 아닌지, 김영애 묘산면장님(?)의 얼굴에 걱정스런 빛이 역역해 보였다.
>수박회식이 끝난 다음 오후 네 시를 넘기면서 우리 일행은 마지막 여정인 봉정사를 향해 차를 몰았다.
>
>
>Ⅳ, 천등산 봉정사
>
> 1. 봉정사를 오르는 길
>
> 봉정사 일주문 덕휘루
>
> 천등산(575m)은 청량산에 비해 웅장한 기암 절경은 없지만, 소나무와 잡목들이 울창하고 산세가 온화하며, 수려하다. 주차장을 지나 산길을 접어들면 우거진 숲속에 맑은 산새들의 우짖는 소리와 계곡물 바위치는 소리가 어우러져 경쾌한 대자연의 협주곡으로 산사를 찾아오는 우리 일행을 즐겁게 맞이하여 주는 듯 하였다.
> 주차장에서 가파른 언덕, 솔 밭길을 두 세 굽이 지나가면 왼쪽 계곡 안쪽으로 퇴계 이황 선생이 봉정사에 머무르면서 공부한 곳을 기념하여 지은 창암정사(蒼巖精舍)와 명옥대(鳴玉臺)라는 정자가 나타난다. 이 정자는 퇴계 선생이 창암정사에서 공부하면서 자주 나가 쉬었다는 ‘낙수대’라는 정자 하나가 있었는데, 바위치는 계곡물 소리가 옥을 굴리는 듯 아름다운 물소리를 듣는 곳이라 하여 낙수대를 명옥대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 여기서 다시 한 굽이 넘어가면 안쪽 주차장과 함께 새로 세운 일주문이 봉정사에 다 왔음을 알려준다.
> 천등산 기슭에 자리잡은 봉정사는 화엄의 종조 의상대사가 세운 절로 다음과 같은 창건설화가 있다. 당나라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의상스님이 영주에 있는 부석사에 있을 때, 종이로 봉황을 만들어 도력으로 날려 보냈는데 이 봉황이 이곳 천등산 지금의 봉정사에 내려 앉아 이곳에 절을 짓고 봉정사(鳳停寺)라고 이름지었다고 한다.
> 창건 이후의 확실한 역사는 알 수 없으나 참선 도량으로 이름났을 때에는 아홉 개의 암자를 거느렸던 대사찰이었던 것 같다. 그러던 이 사찰이 한국전쟁 중 사찰에 보관되었던 중요한 경전과 봉안하고 있던 사리까지도 모두 불태워 봉정사의 역사를 한 점 남김없이 화염과 연기 속으로 날려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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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고구려식의 봉정사 극락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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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물 제55호 봉정사 대웅전 국보 제15호 봉정사 극락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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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정사가 우리나라 사찰 가운데 명성을 높이는 것은 현존하는 목조건물 중에 가장 오래된 극락전(국보 제15호)이 있기 때문이다.
> 이 절에는 고려 때 지은 극락전과 더불어 조선 초기 건물인 대웅전과 조선 후기 건축물인 고금당과 화엄강당이 있어서 우리나라 목조 건축의 계보를 고스란히 간직해 왔기 때문에 건축 박물관 같은 특성을 지니고 있다.
> 일주문을 지나 나무숲 길을 걸어가면 돌계단에 이른다. 한 발 두 발 숨 가쁘게 올라가면 봉정사의 강당인 덕휘루 밑으로 지나게 된다. 덕휘루 문을 지나면 석축이 나타나고 대웅전을 중앙에 두고, 요사채와 화엄강당이 눈 안에 들어온다. 그 좌측으로 같은 위치, 같은 높이에 극락전이 고금당과 함께 있다.
> 봉정사 극락전은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건물 중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로 알려져 있는데, 1972년 9월 봉정사 극락전을 해체 보수하는 과정에서 기둥에 가로 얹은 중도리에 홈을 파고 기록이 들어 있는 곳이라는 기문장처(記文藏處)를 열어보자 극락전의 상량문이 들어 있었다. 그 상량문의 내용은 이러하다.
> “ 안동부 서쪽 30리쯤 천등산 기슭에 절이 있어 봉정사라 일컬으니 절이 앉은 자세가 마치 봉황이 머물고 있은 듯하여 이와 같은 이름으로 부르게 됐다. 이절은 능인대덕(能仁大德)이 신라 때 창건하고 이후 원감(圓鑑), 안충(安忠) 등 여러 스님들에 의해 여섯 차례나 중수되었으나 지붕이 새고 초석이 허물어져 1363년(공민왕12년)에 용수사의 대선사 축담(竺曇)이 와서 중수했는데 다시 지붕이 허술해져서 수리하였다.” 이 상량문이 밝혀짐으로 그때까지 가장 오래된 건물이라고 알려졌던 부석사의 무량수전은 봉정사의 극락전보다 13년이나 늦은 1376년에 지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 봉정사 극락전은 흔히 고구려식 건축으로 통한다. 그것은 고구려 고분벽화에는 기둥과 공포(拱包) 그림이 나오는데 그것과 같은 결구방식을 보여주고 있으며, 또 기둥과 기둥 사이에서 옆으로 가로지른 창방 위에 올라앉은 나무받침이 역시 고구려 벽화에서 보이는 복화반(覆花盤, 꽃잎을 엎어놓은 모양)을 하고 있어서 고구려식 건축물로 보고 있다. 그리고 미술가들은 고려 초에 삼국시대 문화에 대한 일종의 복고풍조가 석탑, 불상 등 각 장르에 넓게 퍼져 있었음을 상기하면서 그런 시대적 분위기에서 나온 고식으로 이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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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봉정사의 정연한 가람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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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정사에는 극락전말고도 국가지정 문화재로 대웅전(보물 제55호), 화엄강당(보물 제448호), 고금당(보물 제449호)이 있는데 문화적 가치와 중요성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 건물을 유기적으로 포치한 가람배치의 지혜로움을 엿볼 수 있었다. 봉정사는 큰 절은 아니다. 그러나 정연한 가람배치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단정하고 고풍스러운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산사가 되었다. 봉정사는 불국사처럼 대웅전과 극락전이라는 두 개의 주전((主殿)을 갖고 있고 각각의 전각이 독자적인 분위기를 장악하고 있어서 이 두 공간의 병렬적 배치가 봉정사에 다양성과 활기를 부여한다.
> 봉정사의 진입로는 만세루인 덕휘루(德輝樓) 아래로 난 돌계단으로 되어 있다. 정성을 다해 가지런해 쌓았으면서도 천연의 멋을 다치지 않은 돌계단을 밟고 만세루를 향하면 넓은 부처님의 자비로우신 가슴으로 절을 찾는 중생들을 품어 안을 듯 포근해 보인다.
> 아래층 가운데 칸에 출입문을 두었으며, 위층은 네모난 우물 정(정)자 모양의 우물마루 바닥에 평난간으로 둘러져 있다. 봉정사의 입구에 해당하는 누문으로 원래는 덕휘루로 불리웠으나 언제 이름이 바뀌었는지는 알 수 없다.
> 조선 숙종 6년(1680)에 건립된 후 여러 차례에 걸쳐 보수된 만세루는 17세기 후반의 건실하면서도 당당한 건축수법의 특징이 날 나타나 있다.
> 봉정사 대웅전 앞마당은 전형적인 산지중정형(山地中庭形)으로 남북으로는 대웅전과 만세루, 동서로는 선방인 화엄강당과 승방인 무량해회(無量海會)가 포치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앞마당에는 석탑이나 석등 같은 일체의 장식물이 없고 반듯한 축대에 반듯한 돌계단이라는 정면성이 강조되어 있다.
> 이에 반하여 바로 곁에 있는 극락전의 앞마당은 중정(中庭)에 귀여운 삼층석탑이 자리 잡고 극락전 돌계단 양 옆으로는 화단이 있어서 정겨운 공간을 이루고 있으며, 그 앞으로는 시원한 전망이 열려 있어서 대웅전 앞마당 같은 엄숙함과 위압이 없어 보인다.
> 이 두 대비적인 공간의 병존이 우리로 하여금 봉정사의 가람배치에 경탄을 갖게 하는 것이며, 우리나라 산사의 대표적인 아름다움을 가졌다는 이미지를 풍겨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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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영산암과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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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웅전에서 전면에 보이는 덕휘루 누각 안에는 법고와 목어 사이로 봉정사의 오랜 역사를 적은 편액들이 걸려 있다. 여기서 스님들의 요사채인 무량해회를 돌아 올라가면 영산암이 다. 원래는 천등산에서 흐르는 골짜기 그대로가 길이던 것이 영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 여기서 촬영되고 난 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골짜기를 메우고 계단을 만들었다. 이 영화는 노승 한 명과 어린 승려 세 명의 구도적 삶을 담고 있는데, 투철한 수행으로 득도의 경지에 오른 노선사 해곡이 “사방이 몹시도 어두우니 마음의 심지에 불을 밝히고 갈 길을 비추어라”라고 어둠 속에서 석등의 심지를 돋우던 장면이 필자의 기억 속에 떠오른다.
봉정사에 딸린 영산암은 마치 내가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는 해인사의 학승인 경성스님을 만나려고 희랑대를 찾아 가파른 길을 헉헉거리며 올라갈 때 느끼는 그런 정감이 가는 암자이다.
영산암으로 오르는 길
지난 날 봉정사 스님들의 선방일 것으로 짐작되는 이 절 영산암은 영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을 촬영한 곳으로 유명한 암자인데, 상주하는 스님이 없다고 한다. 봉정사 영산암은 봉정사의 요사채인 무량해회에서 동쪽으로 약 100여 m 떨어진 곳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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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맹사성과 개목사에 얽힌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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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산암에서 등산로를 따라 고개를 넘어가면 ‘개목사’라는 절이 있다고 한다. 개목사는 신라시대에 의상이 창건하였으며 이 절도 다음과 같은 창건에 얽힌 설화가 있다.
> 의상이 출가하여 천등산 정상 근처의 큰 바위 밑에서 수도를 하였는데 하늘에서 큰 등불을 비춰주어 99일 만에 도를 깨치게 되었다. 의상은 지금의 터에 99칸의 절을 창건하고 “하늘의 등으로 불을 밝혔다”는 뜻으로 천등사(天燈寺)라고 이름 지었다. 고려말에는 정몽주가 이 절에서 공부하였고 조선 초기에는 안동 부사로 와 있던 맹사성이 중수하였다. 그 무렵 안동 지역에는 유난히도 장님이 많아 맹사성은 이 절 이름을 ‘개목사(開目寺)’라고 지으면 장님이 더 이상 안 생길 것이라고 하여 이름을 바꾸었는데 그 때문인지 그 뒤부터는 안동 지역에 장님이 생기지 않았다고 한다.
> 의상이 지을 때 아흔 아홉 칸이었다는 전설과 다르게 현존하는 당우는 법당인 원통전과 요사채 그리고 문을 겸한 종루가 있을 뿐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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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귀로의 버스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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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등산 봉정사 답사를 마지막으로 모든 여정이 끝나는 순간이다. 우리 일행이 합천을 향하는 귀로의 버스를 탑승할 때는 여섯 시를 막 지나가는 시각이었다. 앞으로 한 시간쯤 후면 아름다운 청량산과 천등산에서 흘러내린 낙동강 수계들이 합류하여 안동 하회마을을 휘감아 돌 때, 서녘에 기우는 낙조를 받아, 넓고도 푸른 풍산들판과 하회마을이 붉게 물들여 질 것이다. 이 아름다운 장관을 보지 못하고 우리는 하회마을을 비켜서 가야 한다. 우리강산 어디에 간들 아름답지 않은 곳이 어디 있을까 만은, 도산서원과 이육사문학관을 품에 안은 청량산과 천등산은 4계절 관광객을 불러들이고 그 마음들을 사로잡을 만큼 빼어나게 아름답다. 준령을 삼도에 뻗어 내린 지리산은 그 정기로 조선 중기의 산림학자 남명 조식 선생을 탄생시켰듯이 저 수려한 청량산과 천등산도 경북 북부에 자리하고 그 정기로 안동에 퇴계 선생 같은 걸출한 위인을 탄생시켰을 것이다. 이들 명산과 고찰을 이번 문학기행코스로 답사한 것은 내게 큰 행운이나, 일정에서 빠진 안동 화회마을을 그냥 지나가는 것이 못내 아쉬움으로 남는다. 서애 유성룡 선생의 영정을 모신 존덕사(尊德祠)가 있는 병산서원도 언젠가는 안동을 다시 들릴 때 꼭 찾아가 보리라. 나의 아쉬운 마음은 차안의 정겨운 분위기가 금방 달래어 주었다. 안동시가지를 지나올 때는 야음이 도로 위에 깔리고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마을들에서는 전등불이 하나 둘씩 켜지고 있었다. 이용형 교수가 따라주는 화끈한 양주에 취기가 돌기 시작하고 차안은 더욱 정겨운 분위기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술은 때에 따라서는 절제하는 한, 꼭 필요한 것이다. 한 순간에 20명의 마음들이 하나가 되어 차안에는 아무도 타인이 없었다. 모두가 가족이고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 이번 문학기행을 통해서 나는 아름다운 마음으로 시를 쓰는 합천문인협회 회원들과 따뜻한 동료애로 결속되는 기회를 가진 것이 무엇보다 큰 보람이고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합천문인협회의 무궁한 발전과 회원들의 가정에 언제나 따뜻한 사랑과 행복이 충만하시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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