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오도와 보길도
주영애
동네 신협산악회는 해마다 여름이면 이웃 간의 친목을 위해 경치 좋고 시원한 섬을 찾는다. 올해는 아름다운 항구도시 여수 금오도로 1박2일 동안 산행이 아닌 여행을 떠난다. 밤부터 초여름 비가 바람까지 몰고 가을철 건들장마처럼 오다말다 반복한다. 아직도 나이와 상관없이 여행은 늘 가슴 설레는 즐거움이다.
새벽부터 빗속을 달려온 버스가 여수에 도착했다. 작년 여름 여수세계박람회장 낯익은 건물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아름답고 웅장한 그 모습 변함 없건만 한가하게 날비를 맞고 있다. 또한 국내외 관람객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바다의 요정 Big o, 환상의 무지개처럼 밤하늘을 수놓던 여름밤의 그 함성 잊지 못해 외로운 등대처럼 무심한 바다만 바라본다.
옛 말에 들은 귀는 천 년이요 말한 입은 사흘이라 했던가. 순천에서 인물자랑 말고, 벌교에서 주먹자랑 말고, 여수에서 돈 자랑 말라고 하는 말이 있고 보면 호남지방의 내로라하는 부호들이 아마도 경치 좋은 여수에 다 모인 것 같다.
활짝 열린 바닷길, 수많은 자동차들이 물위의 소금쟁이처럼 나는 듯이 건너간다. 비 오는 날의 서정, 다닥다닥 시골마을 낯익은 풍경들이 고향에 돌아온 듯 지난날이 그리워진다. 길가 새빨간 언덕배기 무성한 호박넝쿨 속에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호박꽃도 꽃이라고 벌, 나비들이 뻔질나게 들락거린다. 바로 옆엔 파르족족 가지꽃은 시샘 많은 손윗동서 입술처럼 파르르 떨고 있다. 그러고 보니 여수지방 흙색깔은 칠팔월 한껏 벼슬 자랑하는 맨드라미꽃처럼 정열적인 적토가 대부분이다.
계속 쏟아지는 비 때문에 새벽에 출발하여 정오가 다 되어 여수 돌산한정식 앞에 버스가 멎는다. 음식점에서 사르르 풍겨오는 양념냄새가 갑자기 시장기를 자극한다. 전라도지방 음식 맛은 익히 아는 바지만 돌산지방의 손맛은 시장해서 입에 맞는 맛이 아니었다. 열 서너가지 되는 반찬들이 입안에 살살 녹는다. 그 가운데 돌산 갓김치와 오랜 시간 숙성되어 곰삭은 묵은 지 특유의 감칠맛은 한국인의 미각이 아니고는 감히 느끼지 못 할 것이다.
다도해상국립공원 금오도 비령길 가는 여천여객터미널, 날씨 때문인지 생각보다 한산했다. 그런데 비바람은 점점 거세진다. 시간은 다 되었는데 출항이 불투명하다며 운전기사의 걱정이 태산 같다.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출항명령이 떨어졌다. 먼저 배 뒤꽁무니로 관광버스와 트럭, 승용차들이 줄줄이 들어간다. 사람보다 차를 더 많이 태우는 건 아닐까. 어느 틈에 객실 안엔 많은 승객들이 목침까지 베고 누어있다. 그런데 목적지까지 아무리 한 시간거리도 안 된다지만, 객실 한쪽구석엔 구명조끼들이 먼지만 뒤집어쓴 채 의붓자식처럼 눈총만 받고 있다. 세월호, 생각조차 하기 싫은 그 엄청난 인재人災를 겪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너나 할 것 없이 아직도 설마 하는 안전 불감증은 여전했다.
흐리멍덩한 우중의 금오도 비령길을 굽이굽이 돌면서, 좁은 골짜기 사방을 둘러봐도 가파른 밭뙈기마다 농작물이라곤 하나도 없고 머위나물이 더러 보이고 방풍나물만 지천으로 널려있다. 문덕 내 고향 황강 옆 개비리듬이 생각난다. 사람은 다닐 수가 없고 개나 다닌다는 뜻이다. 금오도 비령길 또한 같은 뜻이 아닐까?
일행은 일찌감치 숙소에 들었지만 밤새도록 세찬비바람 때문에 모두 단잠을 설쳤는데 날이 밝아도 비는 좀처럼 그치지 않는다. 아침식사를 하고 그래도 몇 사람은 우의로 완전무장을 하고는 비령길 따라 산행에 나선다. 남아있는 사람들은 꼼짝없이 차안에 갇혀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야 했다. 안산에 이사 와서 10여 년 동안 해마다 많은 섬을 여행했지만 이번처럼 비 때문에 발목을 잡히기는 처음이다.
설핏, 재작년 보길도 갔을 때 그 아름다운 비경과 풍광들이 창밖의 빗줄기 속에 아른거린다. 그 당시 안내자 따라 ‘세연정, 세연지’가 있는 곳을 먼저 찾았다. “고산 윤선도”의 고향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고요한 물결의 섬, 겹겹이 산과 물 그 속에 연화처럼 들어앉은 섬 보길도, 자연그대로의 아름다운 정원, 세인들은 윤선도 원림이라 부른다.
해남의 만석꾼 집안에 태어난 윤선도는 당쟁에 휘말려서 낙향하여 고향에 있을 때,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고산은 임금을 돕기 위해 강화도로 가던 중 인조가 항복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울분을 참을 수 없어 세상을 등지고 초야에 묻히려고 제주도로 떠나던 중, 풍랑을 만나 정착한 섬이 보길도였다고 한다.
자연을 최대한 살린 세연지 계담溪潭에 일곱 개의 바위가 있다. 그 중, 커다란 황소가 힘차게 뛰어갈 것 같은 형상을 하고 있어 혹약암, 이라 하는데. 지금도 어디론가 달아날 것 같은 성난 황소 같다. 계담의 반석보, 세연지 저수를 위해 만들었다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석조보로 일명 굴뚝다리라 한다. 물이 잦아지면 돌다리가 되고 비가 많이 와 물이 불어면 폭포로 변한다고 한다. 그 밖에도 비홍교, 사투암 같은 기암괴석들을 일일이 다 헤아릴 수가 없다. 세연은 주변 경관이 깨끗하고 계곡에서 흐르는 자연수가 거울처럼 맑아서 기분이 상쾌해 진다는 뜻이다.
윤선도는 명문 어부사시사와 오우가 등 수많은 시를 창작하고 강론을 즐기던 낙서재와 동천석실이 있다. 산중턱에다 천년바위를 이용해 단칸 정자를 지어 독서와 사색을 즐겼다는 곳이다. 등산 난코스처럼 줄을 잡고 오르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석실에서 멀리 보이는 곡수당은 고산이 팔십 오세까지 살며 장수한 집이라고 한다.
시인 도연명은 중국의 도화원을 인간선경 세외도원이라 극찬을 했다는데. 내가본 도화원은 조그마한 골짜기 전부 복숭아밭이고, 야트막한 산은 대나무 숲으로 복숭아밭을 둘러싸고 있었다.
천혜의 낙원 보길도는 섬 전체가 동백의 화원이라 한다. 11월부터 꽃이 피기 시작하면 한겨울 눈 속에 만개하여 이듬해 4월까지 볼 수 있어 관광객들이 줄을 잇는 동방의 명승지다. 보길도가 세계자연유산에 등재될 날도 머잖은 듯싶다.
차창을 부딪치는 거센 빗소리가 그저 짜증스럽기만 하다. 재작년 보길도여행 때 곡수당 옆 개천물소리가 옥이 구르는 듯해서 낭음계라 한다는 그 명징한 물소리가 지금도 귓가에 쟁쟁하다.
이번 여행에선 비 때문에 보고들은 게 없어 아쉽지만 금오도 머위나물과 방풍나물 맛은 별미였다. 여행에선 늘 낯선 것에 대한 새로움으로 귀와 눈이 즐겁다. 입까지 즐거우면 금상첨화가 아닐까.
약력
합천 대양 출생
<문학산책 등단>
<문학이후 >자문위원
한국문학비 답사 회원
시집<내 자리는 왼쪽이다>
수필집 <연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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