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후(邂逅) 정 두 효
갸름한 얼굴에 깊게 파인 주름...
그는 큰 웃음을 지으며 다가왔다. 흰 머리에 많지 않는 머리 숱, 그도 나와 같이 세월의 흔적을 얼굴에 담고 있었다. 나도 금방 그를 알아보았다. 아니, 약속 장소에 나타난 사람이 그 일 것이라는 짐작 때문이었다. 그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고 손을 잡았으니까. 그의 얼굴, 나의 얼굴에서도 옛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백화점 앞 의자에 앉아 두서없는 얘기를 주고받았다. 서로의 얼굴을 보고 또 보면서 지난 세월이 떠올랐다. 어린 시절 함께 뛰놀았던 고향의 넓은 강, 푸른 하늘, 쏟아지는 달빛 아래에서 뛰놀던 추억들이 차근차근 스쳐갔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초등학교 입학 전이었다. 우리가 살았던 집은 뒷동산에 수십 년 된 소나무들이 있고 언덕에는 산딸기, 아카시아 숲이 있는 외진 곳이었다. 집을 나서면 곧 바로 맑은 강물이 흐르고, 하얀 백사장이 끊임없이 펼쳐진 마을이었다. 다른 동네에서 이사 온 그는 우리 가족이 살았던 작은 집에서 부모, 동생과 함께 생활했다. 그의 아버지는 이 마을, 저 마을 다니며 이발을 해주며 생활했다. 그가 8~9세 됐을 때에는 마을에 이발관이 있는 집도 마련하고 살아가기엔 큰 문제가 없었다. 마을 주민들 수 백 명은 모두 그의 아버지 이발소를 이용했다.
모두가 삶이 어려웠던 60년대 초, 시골 아이들이 하는 일이라고는 또래 친구들과 노는 것이 전부였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운동장에서 놀거나 마을 골목에 모여 산과 들을 쏘다니는 것이 일과였다. 어린 강아지를 데리고 토끼 사냥을 다니고, 마을 골목골목을 다니면서 술래잡기, 구슬치기 놀이에 바빴다. 여름이면 새까맣게 그을린 몸으로 온종일 강가에서 살았고, 밤엔 별빛내리는 하얀 모래밭에서 씨름, 술래잡기 놀이에 세월 가는 줄 몰랐다. 추운 겨울이 오면 마을 앞 늪지에서 온종일 썰매 타기, 편을 나눠 칼싸움 놀이하는 것이 아이들의 생활이었다.
62년 어느 날, 그의 가족들은 빈 몸으로 마을을 떠났다. 단돈 50원을 지닌 채 고향을 떠났다고 했다. 아버지의 노름빚으로 시골 이발관이 남에게 넘어간 것이었다. 도시에 도착한 날부터 먹는 문제에 부딪혔다고 했다. 10살 나이에 생활전선에 뛰어 들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다. 삶의 무게가 얼마나 컸을까, 가슴이 멍멍 해 왔다. 집을 돌보지 않는 아버지 대신 가족의 생계를 짊어져야 했던 어린 시절이었다. 그에게는 내가 모르는 남동생이 두 명이 더 있다고 했다. 여섯 식구 뒷바라지에 허리 펼 날이 없었을 것 같았다. 그 동안 살아오면서 온갖 일을 다 했다고 했다. 구두닦이 생활을 할 때는 불량배들한테 얻어맞으며 구두 통을 빼앗기기도 하고, 여름이면 아이스케이크 통을 땅에 내 팽개치는 일도 많았다고 한다. 얼마나 어려운 생활이었을까, 가슴이 저며 왔다. 인생을 살아가는 것 자체가 누구에게나 어렵다. 그러나 보편적 삶과 부모의 보살핌 없이 어린 날을 보내야하는 생활은 판이하게 다른 것이다. 그는 아름답게 보내야 했을 유년기를 먹고 사는 문제로 고통 받아야만 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내가 그를 다시 만난 것은 고향을 떠난 3년 후 대구에서였다. 어느 여름날 골목길에서 많이 본 듯한 아이가 구두를 닦고 있었다. 나는 중학생으로 그는 구두닦이로 길거리에서 만났다. 나는 그를 2~3번 만난 이후 다시 볼 수 없었다. “형! 내 머릿속에는 언제나 어릴 때 추억으로 가득해, 지금도 자주 그 추억들이 생각 나곤해, 며칠 전 꿈에서도 형이랑 같이 놀았던 모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어. 내 젊은 시절 중에서 행복했던 추억은 없어. 언제나 10살 전 어릴 때 기억밖에 없는 거지, 수십 년이 흐른 지금도 말이야, 이제 어릴 때 고향 의 추억이 꿈에 나타나지 않을지도 몰라. 오늘 형을 만났으니 말이지” 그는 유년기 고향의 추억 속에 살고 있었다.
나 자신도 그를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어떻게 살고 있을까 하는 생각은 했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잊었다. 그에게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형, 그 당시 내가 구두를 닦고 있는데, 구두 통 앞에 운동화가 보이는 거야. 구두 닦을 사람은 아닌데 하고 위를 쳐다보는데 형이 서 있었어, 반갑기도 하고 정말 부끄러웠어” 그는 47년 전 만났던 그 날을 기억했다. 얼마나 자존심이 상했을까, 가슴이 먹먹했다. 흘러가버린 오랜 시간이 몇 시간의 대화로 단축되었다. 우리는 카페를 나와 전철에서 각자의 길로 갔다.
친구야, 너 어제 무슨 약속 있었어, 많이 바빠 보이더라, “ 아니야 내가 그렇게 오래 동안 얘기한 것이 꿈만 같아. 나도 정말 놀랐어, 가족 외에 다른 사람과 얘기하는 일이 없거든” 그는 그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많은 상처를 받는다. 주변사람, 은사, 때로는 친구로부터 받기도 한다. 그는 사회로부터 상처받은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그의 얼굴엔 원망이나 분노를 찾기 힘들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착한 아이였으니까.
헤어지면서 그의 핸드폰에 내 번호를 입력해 주었다. 폴더를 젖히자 화면에는 아내와 아들, 딸 세 식구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내 안에 흐르는 강 정 두 효
강은 때로는 폭력을 휘둘렀다. 먹구름이 밀려와 폭우를 쏟아내고 황토 빛 물은 주변 모든 것을 휩쓸며 사람의 목숨도 가져갔다. 강이 화를 풀면 마실 물을 주고. 곡식들을 자라게 하는 고마운 존재이기도 했다. 아이들에게 강은 즐거운 놀이터였고 고기를 잡아오는 낚시터, 언제나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이었다.
#1 여름 날 하루해가 서산에 지고 어스름이 밀려오면 아이들은 소 등에 올라 개선장군처럼 강을 건넌다. 왼손엔 소꼬리를, 오른손으론 고삐를 잡고 노을이 물든 강을 건너 집으로 간다. 버드나무 숲속을 다니며 소가 풀을 뜯는 동안 아이들은 모래밭을 뒹굴며 공차기. 술래잡기에 여념이 없다. 놀이에 정신이 팔린 사이 소떼는 남의 콩밭을 습격하기도 한다. 아이들이 소 등에 타고 콧노래를 부르는 것은 소몰이를 잘 했고 즐거운 하루를 보냈으며 허기진 배를 채울 시간이 곧 오기 때문이다. 소등과 닿은 엉덩이에서 느끼는 따스함은 소와 주인과의 교감이며 안온한 행복이었다.
#2 강변 모래밭에 앉으면 붉은 노을이 서쪽하늘에 물든다. 노을은 먼 하늘로부터 복숭아 색깔로 해가 기울어 갈수록 짙은 오렌지색으로 유혹한다. 마침내 붉은 해의 기둥은 산 넘고 강을 건너 아이가 앉은 물가에 닿고, 강도 아이의 얼굴도 놀빛에 젖어든다. 먹이를 찾아 상류로 오르는 고기들은 수면위에 튀어 오른다. 팔딱팔딱 튀는 고기들도 붉은빛에 물들고 해가 사라진 서쪽 하늘엔 어둠과 함께 별이 빛난다. 키 큰 버드나무들은 시커멓게 늘어서 밤새 강변을 지키는 파수꾼이다. 초저녁 강은 한 폭의 고운 수채화였다.
#3 밤이면 아이들은 모두 몰려나와 목욕을 한다. 쏟아지는 별들은 온통 물에 잠기고 애들은 물속에서 한 낮의 땀을 씻어낸다. 강물에 누워 하늘을 보면 은하수는 반짝이는 강이 되어 남북으로 흐른다. 몸을 닦고 홑이불에 누우면 뜨거운 태양빛에 달궈진 모래톱의 굴곡이 등에 와 따뜻한 감촉으로 닿는다. 지친 몸은 어느새 졸음이 쏟아지고 온가족이 함께 잠든다. 방바닥은 모래알, 천정은 별들의 군무로 생명이 넘친다. 달 밝은 밤엔 흐르는 물이 쪼르륵 쪼르륵 졸졸 소리를 내며 반짝이고 은모래는 하얗게 빛난다. 강변은 온통 부드러운 달빛으로 밤을 지새운다. 모래밭에 잠든 새벽엔 옷은 이슬에 젖고 몸은 무겁기만 하다. 좁은 집에 잠자는 것 보다 아이들은 넓은 강변을 좋아했다. 강은 마음의 쉼터였다.
#4 물속은 언제나 피라미들이 떼 지어 강을 오르내린다. 얕은 물에 사는 고기들은 아이들의 밥이었다. 짧은 막대기를 들고 제일 큰 놈을 골라 집중적으로 좇아가며 지치게 한다. 흐너적 거리는 고기 앞을 막대기로 막으면 뒤로 돌아서고, 발뒤꿈치 밑으로 들어와 숨는다. 살짝 밟아 잡아 올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낚시질 할 때 손끝을 타고 느껴지는 짜릿한 감촉은 아이들을 강가로 불러낸다. 파리를 잡아 낀 바늘에 고기가 타닥타닥 입질을 하면 낚싯대를 통해 전달되는 그 진동은 희열이다. 고기는 물속. 허공에서 떨어져 도망 가기도한다. 성질이 급한 피라미들은 주전자 속에서 벽에 부딪히며 탈출구를 찾는다. 고기를 잡아넣으려고 뚜껑을 열면 잡혀있던 놈이 튀어 올라 나보라는 듯 유유히 사라진다. 어느새 주전자는 고기로 가득하고 낚싯대를 어깨에 멘 작은 어부는 집으로 향한다. 강은 생활터전이었다.
#5 여름이 다갈 즈음 얕고 조용한 강은 태풍이 몰고 온 홍수로 아수라장으로 변한다. 갑자기 폭우가 내리면 상류에서 내려오는 물은 바닷가에 밀려오는 파도다. 계곡과 들판에 모인 물들이 한꺼번에 대열을 갖추고 하류로 내지르는 모습은 공포였다. 강물의 횡포가 잦아들면 아이들은 강으로 나간다. 언덕 바위 위에 서서 발가벗은 몸들이 줄이어 황토물속으로 점프한다.
물이 흘러가는 대로 작은 몸들은 빠른 속도로 떠내려간다. 황토색 물은 아이들을 안고 하류로 흐르기를 반복한다. 아이들 몸은 햇볕에 구릿빛이지만 깔깔대며 웃음이 떠나지 않는 즐겁기만 한 강이었다. 지금은 중년을 넘어선 여자 친구의 벗은 몸은 아직도 어린아이의 나체로 기억 속에 맴돈다. 강은 언제나 아이들을 품고 흘렀다.
강 언덕에 앉아 그때의 강을 본다. 그 곳에는 소등에 올라 강을 건너는, 고기를 잡으며 목욕하던, 홑이불 달빛아래 잠든 아이, 강변에서 여름을 보내던 많은 사람들을 본다. 모두 이곳에서 살며 추억을 만들고, 또 많은 사람들이 영겁 속에 묻혔다. 내 마음속에 흐르는 강은 오늘도 영원 속을 향해 흘러가고 있다.
양력입니다.
정두효
합천 용주
헤럴드경제신문 편집기자 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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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 : 010-8416-5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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