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합천문학30호 원고- 시5편-김정옥
시월 동화
김정옥
구월 건너온 아침 햇살
신갈나무 숲길 주렴으로 드리우고
서양등골나물 눈꽃으로 피웠다
수런거리는 골짜기
가을 차려입은 참죽나무아가씨 하이힐 신고 저 산을 넘어오고 있대
윗마을 노총각 장군이 주먹코가 벌름벌름한다네
우리 마을 이쁜이 화강이는 어쩌누
쪽동백 그렁그렁 눈물방울 매단 말
불그레 열 오른 팥배나무 소매 걷어붙인다
간밤 비 빚어놓은
도톰한 입술 오똑한 콧날 짙은 속눈썹에
빨갛게 익은 열매 입술 새기고
조록싸리잎 두 개 따다 눈동자 그려놓고
산벚나무 단풍잎으로 연지곤지 찍고
누리장나무 열매 귓불에 달아
긴병꽃풀 초록 화관 얹어 마무리하니
세상에 둘도 없는 시월의 신부
아랫마을 화강이
소문 들은
구절초도 마타리 배초향 앞세워 화동으로 나서고
직박구리 박새 참새까지 축가 부르겠다 선언한다
곧 도착한다는 참죽나무아가씨 기별
내려오는 길목
수크령 팔 내밀어 손 마주 잡으니
시월의 시인
아슬아슬하다
접붙이는 하루
김정옥
밀양 어느 나지막한 산자락
안길 듯 자리한 아늑한 집 한 채
앞뜰에 자두나무며 목련이며 대추나무 한두 그루씩
예전에는
토스토옙스키를 많이 좋아했는데
최근엔
푸쉬킨이 좋다고
푸쉬킨의 시와 소설을 읽으면 색다른 느낌이 든다고
그 집주인
바람결에 전해온 말
오늘, 나도 온종일 푸쉬킨을 읽는다
책갈피에 꽂혀 말라가는 작은 꽃에서
네 다정했던 속삭임을 읽고
눈 냄새를 맡은 말이 이리저리 장난칠 때면
나도 말이 되어 작은 썰매 끌어 그대에게 가 보고
그가 살아온 골목길을
마냥 따라 걸어보기도 합니다
언제나 두어 걸음 더디게 오는
내 슬픈 사람
그대 마음 가지에
푸쉬킨으로 접붙여
내일을 견딥니다
저울질하는 여인
김정옥
손주와 함께 앤서니브라운전을 보기 위해
한가람미술관 2층 매표대 앞에 섰다
몇 살이세요?
일곱 살요.
아니요, --- 저---.
---저요? 왜요?
65세 이상은 할인이 되세요.
주머니 속 내 나이 입 떼려다 머뭇머뭇
---으음 64세요.
전시장 입구 검표대 앞에서
어머니, 안에서 아이가 뛰거나 큰소리치지 않도록 지도해 주세요.
요행히 들키지 않은 도둑질
지난 봄날
아무도 널 예순다섯으로 안 볼걸?
배려하는 네 말속에 숨겨진 나이 저울
어린 여자가 더 이상적이고 예쁘다는 기준
주머니 속 내 착한 나이 우물쭈물하는 사이
잠깐의 정적 속에 드러난
내 가난한 저울
그 수요일
김정옥
산책길에
긁적였던 메모, 수요일
2022년 5월 20일
집에 와
옮겨 쓰며 달력 보니, 그 수요일
2022년 5월 18일
다행이다
널 만나던 날 주머니 귀퉁이에서 꼬깃꼬깃 접힌 지폐 한 장 만져질 때처럼
쭉정이 노래
김정옥
주인 없는 뒷골밭
노랑콩대 터질 듯 뿌리 채 서 있고
푸르름 머금고 예닐곱 이랑 비스듬히 말라가는 들깻대
키 높이로 두른 천막 안에 김장 배추 무 스무 평 웃자랐다
노랑콩고물 인절미며 쑥찰떡은 살찐다고 원망
참깨 들깨 기름 짜서 아들딸네 다 보내고 마지막 기름 받아 작은 병에 담아두었더니 딸내미 친정 와서 나물 무치다가 참기름 냄새 대신 박카스 냄새 난다고 타박
무 배추 절여 양념까지 만들어놓고 김장하러 오라는 엄마 말에 바쁜 사람 부른다고 투덜투덜
올해만 올해만
산언덕 가파른 길
지팡이 짚고 오르내린 노래
엄마 자랑
형은 내한테
집주고 땅 주고 엄마꺼정 줬는데 뭐가 불만이냐고 하지만
인자는 더 이상 엄마랑 못 살겠다
엄마는 내가 싫다캐도 없는 돈에 소고기 돼지고기 수시로 사다가는 국 끓이고 찌지고 볶아서 자꾸 밥상에 올려 마이 먹으라꼬 그릇에 수북수북 고봉으로 담아주고, 친구들과 밖에서 좀 늦게까지 노는 날에는 전화를 해대며 일찍일찍 다니라 성화, 밤늦게 집에 오면 노인네가 그때까지 잠도 안 자고 불 환하게 켜놓고는 말똥말똥 기다리는기라
내 나이도 마흔 넘긴지가 언젠데
골목 안집 친구 팔순잔치에서 들었다는 말 전하며 덧붙인 말
쭉정이들이 다 그렇지 뭐
그날 눈부신 서러움
밭 울타리 탱자처럼 저미어 오는 오후
타닥타닥 타닥타닥
건너편 산기슭에서 들려오는 들깨 터는 소리
우리 이 서방은 언제 올라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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