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소설>
할아버지 추억
소 민 호
“할아버지, 누리 왔어.”
할아버지가 침대에 누워서 잇몸을 발갛게 드러내며 웃었다.
“아버님, 누리 아시겠어요?”
“누리는 내 손년데, 그쪽은 누구요?”
할아버지 눈빛이 금세 싸늘해졌다.
“아, 아버님, 알았어요!”
엄마가 두 손을 모아 쥐고 굽실거렸다.
할아버지는 80년의 추억들을 다 놓쳤어도, 내가 유치원에 다니던 그때의 추억은 꼭 붙들고 있다.
“오늘도 유치원에서 재미있게 놀았냐?”
6학년인 내가 할아버지 눈에는 여전히 유치원에 다니는 누리다.
“응, 할아버지.”
“쯧쯧쯧,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
옆에서 지켜보던 엄마가 혀를 차며 못마땅해 했다.
“친구처럼 말해야 좋아하셔.”
“누가 들으면 버릇없다고 손가락질…….”
“이 봐요. 우리 누리 야단치지 말아요!”
할아버지가 엄마에게 화를 버럭 냈다.
“예 예, 잘못했습니다.”
엄마가 나 보고 좋겠다고 하며 입을 삐죽거렸다.
“왜 할아버지는 그때 기억만 할까?”
“할아버지는 너와의 추억을 무척 소중하게 여기셨지. 특히 처음 유치원으로 너를 데리러 가셨던 일은 할아버지의 단골 추억담이었어.”
엄마는 그윽한 눈길로 할아버지를 바라보며 그때 일을 들려줬다.
그날 엄마가 몸이 많이 아팠어.
“아버님, 시간 맞춰 누리 좀 데리고 오세요.”
“알았다. 걱정하지 말고 병원부터 다녀와!”
할아버지는 일찍부터 유치원 문 앞에서 한참 기다리셨대.
하원할 시간이 되자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속속 모여들었다고 했어.
“처음 오셨나 봐요?”
어떤 할머니가 할아버지를 훑어보며 물으셨어.
“예, 오늘 처음입니다.”
그때 유치원 문이 열리며 선생님들이 아이들 손을 잡고 나왔대. 먼 데 사는 아이들은 차에 태우고, 가까운 곳에 사는 아이들은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챙겼어.
“할아버지!”
너는 달려와서 할아버지 품에 포옥 안겼어.
“아이구야, 이산가족이 따로 없네!”
“어쩌면 할아버지를 저렇게 좋아해?”
고개를 갸웃거리는 할아버지 할머니들과 함께 선생님도 지켜보았어.
“할아버지, 오늘 할아버지가 데리러 온다는 거 누리도 알고 있었어!”
“그랬구나. 할아버지가 데리러 와서 좋아?”
“응, 좋아. 그런데 오늘…….”
너는 그때부터 유치원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시작했고, 할아버지는 네 이야기를 듣기 위해 쪼그려 앉으셨지.
주위에 있던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손주들의 손을 잡은 채 신기한 듯 지켜보았어.
무엇보다 선생님이 너 때문에 들어가지 못하고 붙들려 있었다고 했어.
그러거나 말거나 너는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았고, 할아버지는 네 이야기를 들으면서 ‘참 잘했구나.’ ‘오, 그랬어.’ 하시며 추임새를 넣거나 맞장구를 치셨어.
다른 때도 너는 말이 참 많았지. 입을 열면 시간가는 줄 모르고 재재거렸거든.
한 반은 네 말을 듣던 아빠가 회사에 지각까지 했던 적도 있었어. 그래도 할아버지는 네 말을 들어주는 게 제일 먼저라고 말씀하셨지.
그날도 너는 자그마치 10분가량 쉬지 않고 재잘거렸다고 했어.
그러다 보니 다른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아이들 손을 잡고 모두 집에 가시고, 선생님과 친구 손을 잡은 할머니 한 분만 남았다고 했어.
“손녀가 어째서 할아버지를 그렇게 좋아해요?”
“글쎄요. 할애비가 동무 같은가 보죠.”
할아버지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셨어.
“나는 같이 놀아주려고 갖은 애를 다 쓰도 안 되던걸요.”
그 할머니는 비결이 있을 것 같다고 하셨대.
“비결은 무슨 비결이 있겠습니까, 그냥 아이를 좋아하는 것뿐입니다.”
“그 참, 이상한 일이지요. 자기 손주 좋아하지 않은 할아버지 할머니가 어디 있겠어요. 예뻐하고 좋아하는 건 마찬가진데……!”
하지만 할아버지는 빙그레 웃기만 하시더래.
“할아버지, 이제 집에 가. 선생님, 안녕히 계세요.”
누리가 배꼽인사를 하자 할아버지도 누리 따라 배꼽인사를 했고, 선생님은 아무 말도 못하고 그냥 허리만 숙였다고 했어.
엄마 이야기를 듣는 동안 어둠이 서물서물 내려앉았다.
“다녀왔어요.”
아빠가 들어섰다.
“벌써 퇴근했어요?”
“어, 오늘은 좀 일찍 온 건가?”
“아니에요. 누리랑 이야기하느라고 시간가는 줄 몰랐네요.”
“아버지는 오늘도 잘 지내셨지?”
아빠는 엄마와 함께 할아버지 방에 들어갔다.
“아버지, 다녀왔습니다.”
“누구……?”
할아버지는 여전히 아빠를 못 알아보셨다.
아빠는 한참동안 말없이 슬픈 눈으로 할아버지를 바라보다가 방을 나왔다.
“여보, 고마워!”
아빠 눈에 눈물이 맺혔다.
“새삼스럽게 왜 그래요.”
엄마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지만, 아빠를 바라보는 엄마의 눈에도 슬픔이 고여 있었다.
“어머니도 저렇게 보내드리고, 아버지까지 저러시니 당신한테 너무 미안해. 그래서 하는 말인데……!”
아빠는 가족도 못 알아보고 몸도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할아버지를 요양원에 입원시키자고 했다.
“여보,……!”
엄마는 눈을 치뜨고 아빠를 바라보았다.
“그러면 환자도 편하고 가족들도 많이 자유로워진대.”
“아빠, 안돼요!”
나는 아빠를 보고 소리쳤다.
“엄마가 힘들면 할아버지는 더 힘들어져.”
시설도 좋고 잘 보살펴 주는 요양원이 있다고 아빠가 말했다.
“어머니를 모실 때보다 더 힘들긴 해도 요양원은 생각지도 않았어요.”
엄마가 눈물을 닦으며 아빠를 쳐다보았다.
“어머니 때문에 당신 고생한 걸 생각하면 조금 더 일찍 서둘렀어야 했어.”
“나는 마음이 안 놓여요.”
“걱정하지 마. 요즘은 가족들보다 더 살갑게 모신대.”
아빠는 이미 할아버지가 가실 요양원을 정해두었다고 했다.
“내일 오전에 아버지를 모시러 올 거야.”
요양원까지 가족들이 함께 갈 수 있는 토요일을 선택했다고 했다.
“그렇게 빨리……!”
엄마는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자꾸만 눈물이 났다.
나만 기억하는 할아버지를 내가 모시지 못하는 게 더 속상했다.
할아버지한테는 내가 제일 먼저였다. 내가 말을 하면 끝까지 들어주셨다. 내가 아파하면 같이 아파하셨던 할아버지를 위해 나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나는 내방으로 들어가서 이불을 뒤집어썼다.
“누리야!”
한참 뒤에 아빠가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자주 찾아뵐 수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라.”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울기만 했다.
방문을 나서는 아빠 어깨도 들썩거렸다.
다음 날 하얀 가운을 입은 사람들이 할아버지를 요양원 차에 태우고 집을 나섰다.
우리를 태운 아빠차도 그 차를 따라갔다.
오늘은 잿빛 하늘만큼 참 무거운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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