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비
김아영<합천여중 2년>
"아영이 너, 그때 하이문도 신부님을 얼마나 피곤하게 했는지 알아? 그때가 초가을이었지. 태어나자마자 바로 세례를 받았었잖니. 그날 아침부터 비가 와서 성당 갈 때도 얼마나 힘들었었지. 신부님이 우리 성당에 오신지 얼마 되지 않았을거야. 조그만 게 어찌나 울어대더지, 세례를 받을 때 신부님이 엄청 고생하셨어. 지금도 그때와 똑같이 도무지 말을 안 들어요. 제발 엄마 말 쫌 들어.
가끔 내가 부모님 말씀을 잘 듣지 않으면 엄마는 내게 말한다. 짜증 반 놀림 반으로 나에게 쏘아붙여 보통 때 같으면 엄마와 한바탕 전쟁을 했을 텐데. 오늘은 그 말이 더 가슴 아프게 들린다. 가을의 문을 여는 시월이 다가오기 때문일까. 마침내 나무들이 문을 닫고 긴 침묵 소긍로 가라앉을 준비를 시작했다. 고운 단풍으로 옷 입기 전에 벌써 갈색으로 갈아 입는 창밖 풍경이 아름답다. 거리에 가을의 빛깔이 스며들고 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가을 빛 엷은 물감을 풀어서 매일 조금씩 섞는 것 처럼. 그러다 보면 어느날 문득 무르익은 가을이 성큼 다가서겠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중에 언제나 가을에 만나 가을에 헤어진, 웃음이 너그러우셨던 신부님 생각이 난다. 비처럼 한 방울 두 방울 땅 속으로 스며들어 사라지면 좋으련만, 맑게 갠 파란 가을 하늘 아래서 빨간 고추잠자리와 함께 춤을 추면 좋으련만, 나에게서 '신부님'이란 단어는 슬픔을 더하게 할 뿐이다.
엄마, 아빠를 따라 처음으로 성당에 갔던 때가 정말 어렸던 한살 때, 우리집이 가톨릭 집안이니만큼 어릴 때 세례를 받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아주 어린, 갓 태어난 아기일 적에 계속 울어대는 아기에게 세례를 주기 위해 애쓰셨다는 신부님, 그렇게 신부님과 나는 만났던 것이다.
내가 유치원에 다닐 때, 신부님은 유치원의 모든 아이들에게 잘 대해 주셨던걸로 기억된다. 아침에 성당 문을 박차고 뛰어들어가면 언제나 웃으시며 우리들의 어깨를 토닥거려 주시던 신부님, 그 웃음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나의 여섯 번째 생일날 신부님과 함께 찍은 사진 속의 신부님은 엷은 미소를 뛰우고 계셨다. 그 미소를 영원히 간직하실 줄 알았는데......
신부님 은 아직까지도 미소를 간직 하고 계실까.
그 해 겨울에 우리 성당은 신축 공사를 했다. 작은 공소 같은 곳에서 정말 텔레비젼에서만 보았던 크고 아름다운 성당으로 바뀌는 동안 심부님은 그 자리에 늘 계셨다. 그리고 성당이 완벽하게 자리 잡는 동안 신부닐 은 다른 성당으로 가셔야했다. 신부님께 마지막 인사를 하지 못했기에 언젠가는 꼭 신부님을 찾아가 인사를 드리겠다고 다짐을 했었다. 그러던 것이 초등학생이 되어 한창 즐겁게 생활할 때쯤. 초등학교 5학년 가을 운동회를 준비 중이었을 때 신부님이 하느님 곁으로 떠나셨다는 슬픈 소식을 듣게 되었다.
신부님을 만나면 하고 싶었던 말이 그렇게도 많았었는데, 그렇게 신부님과 나는 헤어지고야 말았다. 아주 먼 곳으로, 아니 다시는 올 수 없는곳으로 신부님은 가셨다.
신부님의 영정 앞에서 많이도 울었다. 하느님 곁으로 가셨으면 좋으시련만, 영정의 사진 속 신부님은 좋은 기색이 없으셨다. 여섯 살 때 찍은 사진 속의 신부님은 아름다운 미소를 가지고 계셨는데, 그 미소가 어디로 갔는지 마음이 아프기만 했다 사진 속에서만 신부님을 뵐 수 있다는 것이, 다시는 반갑게 맞아 주시는 신부님의 따스한 손길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 너그럽게 웃으시는 신부님의 엷은 미소를 다시는 볼 수 없다는 것이 나를 정말이지 슬프게 했다. 우리 성당을 바로 세우시기 위해 많은 고생을 하셨다는 어른들의 말씀을 들으니 우리 성당속에 신부님의 따스한 손길 하나하나가 베어 있는 듯했다. 그리고 성당의 성물 하나하나가 아름답게 느껴졌다.
하루하루가 지나감에 따라 기억 한 구석에서 자리잡았던 신부님의 기억을 하나 둘씩 지워갔다. 가을비가 한 두 방을 떨어질 때면 가슴속에 무엇인가가 울컥 쏟아질 것만 같아 고개를 숙이고 우산을 눌러 쓴 채 거리를 걸었다. 지금은 하나의 습관처럼 되어버린, 그리고 이제는 어엿한 중학생이다. 그리고 가을을 몇 번이 지났지만 엄마의 꾸중을 들으면 생각는 신부님은 여전히 내 마음 속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신부님이 알아 보시지 못할 만큼 많이 변해버린 그 유치원생이 이제는 중학생이다 지금도 사진 속의 신부님은 여전히 웃고 계신다. 까만 뿔테 안경이 너무나 잘 어울리는 인자하신 신부님. 내가 어릴 때라서 신부님에게 아무것도 해 드린 것이 없는 것 같다. 항상 받기만 하는 사랑이었다. 아가페 사랑. 예수님의 사랑법, 신부님은 예수님을 꼭 닮은 훌륭한 사제였던 것이다.
가을에는
아흔아홉을 버리고
하나만을 얻게 하소서.
가을에는 하나만을 얻게 해 달라고 하였던가. 나에게는 그 하나가 이미 나에게 있지 않은 것인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셨던 분, 그렇게만 높아 보였던 분, 그렇게만 다정해 보이셨던 분, 신부님, "안녕하세요." 이제는 이 한마디 말조차 할 수 없다. 하지만 신부님은 항상 내 곁에 계신다고 믿는다. 그리고 누구나 수호 천사라는 이름을 가질 수 있기에 나는 기꺼이 신부님의 수호 천사가 될 것이다. 나에게 신부님을 생각나게 해 주는 가을비, 이제는 무엇보다도 소중한 비 한 방울 한 방울로 생각할 것이다. 왠지 가을비가 올 때의 그 습관들은 가을비로 스며들어 버린 것 같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도 어김없이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한다. 솔직히 원하는 것도, 이루고 싶은 것도 많은 나이기에 하느님께 기도드리면서도 조금 죄송하기는 하다. 하지만 정말 진정으로 바라는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내가 태어나, 내가 아는 사람에게서 죽음이란 단어를 처음 듣게 했던, 가을에 헤어진 아름다운 분, 라이문도 신부님이 하느님 곁에서 언제나 행복하시는 것이다.
커다란 우산을 받쳐 줄 너그럽고 고마운 마음으로, 모여 피는 가을꽃처럼 순한 빛으로, 하느님 곁에서 지내시는 신부님의 하루 하루가 따스하고 행복했으면 하고 간절히 기도드린다.
* 문학회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7-07-28 21:16) |
 |
|
백일장 입상 작품
추천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