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호 작품 원고
사천의 조명군총과 이총
2008. 8. 23
연일 내려쬐든 염천의 삼복더위도 처서가 되면서 한풀 꺾여, 아침저녁으로 기온이 제법 쌀쌀해졌다. 어느덧 하늘이 파란 가을빛을 띠우고 있고, 산천의 경개(景槪)도 맑고 아름답게 펼쳐지고 있다. 베이징에서는 연일 우리나라 선수들의 금메달 사냥의 낭보가 날아오고, 애초에 예상했던 10개를 상회하여 12개 금메달을 차지한 가운데, 8월 22일에는 본선 야구시합에서 일본을 통쾌하게 이겨, 매우 상기된 기분으로 다음 날 오랜만에 합천향토사 연구회원들과 유적 탐방길에 나섰다. 우리들이 찾아 나선 곳은 임진왜란 중 왜군들이 저지른 조선인에 대한 무자비한 살상과 산사람 죽은 사람 구분 없이 마구 코와 귀를 베어간 그들의 야만적 행태를 볼 수 있는 임진왜란의 전적지 사천의 조명군총과 이총(耳塚)이다. 조명군총(朝明軍塚)은 임진왜란 중 사천 선진리 전투에서 왜군과 싸워 순국한 조선군과 명나라 군인들의 시신을 합장하여 안장한 무덤이며, 이총(耳塚)은 임진왜란 중 전국 특히 남원전투에서 민족수호를 위해 왜군과 싸우다가 순국한 영령들의 잘린 코와 귀가 전리품으로 일본에 건너가 일본 도요쿠니(豊國)신사 앞 귀무덤에 묻혀 있다가 환국되어, 지금 사천조명군총 한쪽에 조성되어진 귀무덤을 말한다.
사천시에서 그동안 조명군총 성역화 사업을 잘 마무리하여 묘역이 깨끗하게 잘 단장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총이 어떤 영문으로 충분한 공간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경내에 안장되지 못하고 평삼문 밖 광장 한쪽에 자리잡고 있는지 의아스러웠다.
낯선 일본 땅, 그것도 임진왜란을 일으킨 왜장 풍신수길의 도요쿠니(豊國)신사 앞에 그의 전리품으로 수모를 받으며, 긴긴 400년 한의 세월을 보낸, 원혼들의 무덤이 아닌가, 고국에 돌아와서도 문밖 홀대를 받는 기분이 든다. 이총도 평삼문 안 경내에 안장되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쉬운 마음을 접고, 우리는 조명군총과 이총이 모두 국가와 민족수호를 위해 산화한 순국 영령들이 잠든 무덤이라 생각하면서 조명군총과 이총 앞에서 경건한 마음으로 묵념을 올렸다.
조명군총은 정유재란이 한창이던 1598년 10월 1일 조명연합군(朝明聯合軍)이 사천 선진리성 안에 주둔 중인 왜군을 물리치기 위해 공격하던 중 진중에 매설된 폭약이 폭발하면서 왜군의 기습공격으로 7천여 명이 거의 몰살을 당하고, 코와 귀가 잘린 뒤 왜군에 의해 묻혀진 곳이다. 국토수호를 위해 왜군과 싸워 장렬하게 산화한 조명연합군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한 조명군총의 성역화 사업이 2001년부터 사천시에 의해 추진되었다. 그동안 사천시는 51억원 가량의 공사비를 들여 군총조성은 물론, 광장조성, 사당 및 평삼문, 기념관 건립 등 묘역 성역화사업을 추진하여 작년 2007년 말 완공하였다.
16세기 말 일본 전국(戰國)을 통일한 풍신수길(도요토미 히데요시)은 대륙으로 진출할 목적으로 1592년 조선을 침략하였다. 풍신수길은 ‘조선인의 코와 귀를 베라’는 명령을 내렸고, 휘하의 장수들은 승전의 표시인 수급 대신에 보관과 운송이 편리한 조선인들의 코와 귀를 잘라 소금에 절여 일본으로 가지고 돌아갔다. 일본 장수들은 왜군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귀 영수증’을 만들어 죽은 시체는 물론, 살아있는 사람들의 코와 귀, 그리고 심지어 자기들의 동료인 왜군들의 시신에서도 그것들을 잘라냈다고 한다. 그들의 무자비한 잔학상을 여기서 또 한번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당시 전라도 사람들은 왜군을 ‘코 베어가고 귀 떼어가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이비야(耳鼻爺)라고 불렀으며, 조선 후기에는 우는 아이에게 ‘이비야가 잡아간다’는 말로 겁을 주어 울음을 그치게 했다는 말이 유행하기도 했다. 이렇게 하여 베어간 코와 귀의 수가 12만 6천 명이라고 하는데, 풍신수길은 조선으로부터 베어 온 코와 귀를 전리품인양 마차에 싣고 전국을 순회했고, 무덤을 만든 후에도 그날의 승리를 귀무덤 앞에서 기념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풍신수길은 밤마다 그의 잠자리에 귀무덤 희생자들의 원혼들이 나타나 잠을 이루지 못해 괴로움을 당하다가 이들 혼령들을 위로하는 공양탑을 만들어 위로했다고 한다. 금년도 3월 8일 합천신문사 가족 일행이 이곳을 방문하였을 때, 이 공양탑이 봉분 한 가운데서 이총을 딛고 하늘을 향해 솟아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비록 이총은 무자비한 왜구의 전리품으로 코와 귀가 베어져 낯선 이국땅에 묻힌지 400년이 지난 오늘날, 그 흔적은 한줌의 진토(塵土)가 되어 고국으로 돌아와 사천에 안장되었지만, 합천에 있는 H신문사가족들과 용주면 무자생 일동은 혼령이 이미 고국으로 돌아온 허분(虛墳)으로 남아있는 그 봉분 앞에서 합천신문사 박환태 사장의 구령으로 고개 숙여 잠시 묵념을 한일이 있었다. ‘임진왜란’이라는 우리민족사의 치욕을 그냥 헛되이 망각하지 말자는 의지의 표현이 담긴 묵념이었다. 우리 일행은 그동안 우리 정부의 무관심과 일본 정부의 지원이 전혀 없는 가운데서도 조상들의 과오를 대신 뉘우치고 사죄한다면서 3대 째 귀무덤을 관리해오고 있는 일본인 시미즈씨(85) 댁을 찾아 그 갸륵한 뜻을 치하하고 금일봉도 전한 일이 있었다.
이총 환국(還國)은 박삼중 스님에 의해서 일본 풍국(도요쿠니)신사 이총 봉분에서 채취한 흙을 항아리에 담아 영혼과 함께 일본으로 간지 400여 년 만인 지난 1990년 환국되었고, 2년 뒤인 1992년 4월 사천의 조명군총 옆에 임시로 묻어 두었는데, 이총은 그동안 안내판이나 비석도 없이 묻혀 있다가 2001년 사천시의 조명군총 성역화 사업 착공과 함께 삼중스님의 경주 자비사에 모셔져있었다. 그러다가 성역화 사업이 마무리 되던 2007년 10월 1일 사천시가 위령비를 세우고 처음 위령제를 올리기 위해 이곳에 다시 옮겨와 군총에서 20여 미터 떨어진 곳에 새로 안치되었다. 따라서 이총은 고국에 온지 17년 만에 7㎡ 남짓한 작은 공간이지만, 자리를 잡고 안장됨으로써, 400년이 넘도록 일본 땅에 묻혀 있다가 고국에 돌아와서도 제자리를 찾지 못해 한동안 전전했던 코와 귀의 원혼들이 비로소 안식처를 갖게 된 셈이다. 이총위령비는 1.8미터의 높이로 귀의 모양을 추상화한 모습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2007년 10월 1일에 있었던 위령제에서는 귀무덤의 환국을 추진해 온 박삼중 스님과 함께 일본 쪽에서 귀무덤의 환국을 도와 온 가키누마 센신(枾沼洗心) 스님이 참석, 참회사를 낭독하고 위령비에 헌화를 했다고 한다. 그는 또 야스쿠니(靖國)신사에 방치되어 있었던 북관대첩비가 남북공동 환수활동으로 2005년 10월 20일 함경북도 길주의 원래 자리에 돌아 갈 수 있도록 일조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
우리 일행이 사천시의 조명군총과 이총 탐방을 마치고 서둘러 귀가하여 이날 저녁에 있었던 세계 최강자를 뽑는 야구시합 중계를 TV로 시청했다. 치열한 접전 끝에 3대2로 우리나라가 세계 최강자인 쿠바를 누르고 올림픽 사상 최초로 야구에서 금메달을 따는 순간, 선수들은 오열하며 눈물을 흘렸고, 이를 지켜보는 우리 국민도 함께 울었다. 중국 베이징 올림픽 경기장 우리 응원석은 물론, 서울 상암동 월드컵 경기장에서도 수만 군중이 다시 몰려와 2002년 월드컵 이후 잠잠했던 대~한 민국을 다시 외치며, 우리는 또 한 번 우리의 저력을 만방에 과시했다. 우리나라는 이번 대회에서 금메달 13개, 은메달 10개, 동메달 8개를 획득해 국가별 메달 순위에서 종합 7위를 확정지으며, 8위에 머문 일본(금9, 은6, 동10)을 제치고 8년 만에 아시아 2위에 복귀하는 쾌거를 이룩하였으니, 근간에 있었던 일본의 노골적인 독도강탈 책동에 대한 불쾌감과 이날 일본의 야만적 행태로 남은 전적지 사천시의 조명군총을 둘러보고 느꼈던 울분 등, 겹겹이 쌓였던 응어리들이 한 순간에 정화되어 모두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속 시원한 ‘카타르시스’였다.
야구시합 중계가 끝나고, 방문 밖으로 나가 본 밤하늘에는, 이날따라 별들이 유난히 빛나고 있었고, 때 아닌 산들 바람이 불어와 올 여름 더위에 지친 나의 시름까지도 시원하게 쓸어가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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