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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형도 시 감상(퍼온글)
추천 : 865 이름 : 송영화 작성일 : 2003-08-18 17:11:38 조회수 : 3,061
기형도: 기억할 만한 질주, 혹은 용기

1

생에 대한 소박하고 명징한 낙관을 지니고 있었던 지중해의 철학자 쟝 그르니에는 자신의 낙관이 "죽은 자에 대한 살아 있는자의 지배, 사회적인 것에 대한 개인적인 것, 과거와 미래에 대한 현재의 지배"({인간에 관하여}, 청하, 1990, 175쪽) 라는 지중해 정신에 의해 제공된다고 고백하면서, 놀랍게도 그의 나이 53세 때 "내 생애의 많은 페이지가 거의 백지인 것이다"(181쪽)라고 썼다. 반면

오늘 우리가 기억해보고자 하는 기형도는 "나의 영혼은 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이다"({입 속의 검은 잎}, 문학과지성 사,1989,25쪽. 이하 쪽수만 표시)와 같은 삶에 대한 무수한 부정적 전언들로 우리를 놀라게 한다. 대개의 시인들은 절망과 비극 을 노래할 때라도, 자신의 절망과 비극을 희석시키거나 중단시킬 희망의 영상을 함께 제시하기 마련이다. 흔히 우리가 전망이라 고 말하는 것들을. 그런데 기형도는 낙관이나 희망과 같은 향일성 가치에 대해 너무나 엄격한 태도를 취했다.

그의 유고시집을 읽으며 우리는 몇 번씩이나 본문 읽기를 중단하고 시집의 표지 앞날개에 적힌 그의 약력을 되읽게 된다. 대체 얼마만한 연령을 살았기에 그는 이렇듯 상처입은 시집을 남길 수 있었을까. "도둑질말고는 다 해보았답니다"(18쪽)라 거나 "나는 기적을 믿지 않는다"(25쪽), "죽은 자들에게 나를 빌려주고 싶을 때가 있다"(38쪽) 등등 시구들 은 그가 언제 태어났고, 몇 살 때부터 (공식적인) 시쓰기를 시작했으며, 유고시집이 모두 씌여진 때는 또 언제인지 퍽 궁금하게 만든다. 그리고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 "나는 곧 무너질 것들만 그리워했다"(41쪽)거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 어"(49쪽), "나의 노래 죄다 비극이었"(50쪽)다는 구절을 대하곤 시집의 앞날개로 다시 돌아가 스물 다섯에 등단, 스물 아홉에 더 이상 씌어지기를 거부한 그토록 짧은 약력을 읽는다. 그런 이상한 독서를 한 독자는 그가 쓴 '검은 페이지 '에 진저리치면서 가슴속 한편으로 이런 의문을 키우게 된다. 스물아홉해의 생애는 어쩌면, 도둑질말고는 다 해보았다고 쓰기에 는 너무 과장된 연륜이 아닌가? 자연이 우리에게 명한 자기 보존이라는 대전제에 대하여 너무나 극렬하게 기형도의 시가 저항하 기 때문에 독자의 그런 의심은 수긍될 만한 것이다. 하여, 자라나는 의혹을 지우기 위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한 편의 독일 가곡 으로부터 도움받기를 원한다.


바람 부는 밤 말을 타고 달리는 아버지와 아들

그는 그 아들 품속에 안고 춥지 않도록 감싸줬네.

아가 무엇 그리 무서우냐?

오 아버지 마왕을 봐요?금관 쓰고 망토 휘둘며?

아아 그건 안개란다.


괴테의 시에다 슈베르트가 곡을 붙인 [마왕]은 이렇게 시작되며, 어린 아들이 볼 수 있는 마왕을 아버지가 보지 못하는 아이러 니는 시종 이 노래의 긴장을 고조시키며 비극적인 결말로 치닫는다.


마왕은 아이의 귀에 속삭인다.

귀여운 아가 함께 가련!

좋은 장난감 널 기다리고 수많은 꽃들 널 반기리.

아름다운 옷들 쌓여 있네.


마왕의 속삭임을 듣고 어린 아들은 한번 더 아버지에게 구조를 요청한다. "오 나의 아버지 들어보세요. 저 마왕이 내게 속삭인 말" 그러나 아버지는 어린 아들의 필사적인 구조 요청을, 어리광으로 받아들인다. "조용히 진정해라 아가. 저 소린 바람 소리란다." 마왕은 유혹을 계속한다. '좋은 장난감'과 '아름다운 옷'보다 더 노골적인 유혹물로.


자 나와 함께 떠나가자.

너와 함께 놀아주기 위하여 나의 귀여운 딸이 기다리네.

너를 위해 춤추며 노래하리 너를 위해 춤추며 노래하리.


이제 어린 아들은 잔뜩 겁에 질렸다. "오 나의 아버지 저것 보세요. 저 마왕의 땀이 보여요?" 나이 많은 아버지는 마왕의 존재를 식별할 수 없을 만큼 무감각한 사람이다. 그는 이성복이 어느시에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고 썼을 때, 그 '아무도'의 사람이다. 늙은 아버지는 어린 아들이 세계에 대하여 느끼는 예민한 공포를 느끼지 못한다. "아가 아가 저기 저것은 늙은 수양버들이 틀림없다." 끝내 아이는 저 혼자만의 공포 속에서 죽는다. 세계와의 불화를 간직한 채.


울부짖는 아기 가슴에 안고 성급히 집에 와보니

품속에 안긴 아가 죽었네.


무서운 세계와 때묻지 않은 순결을 가진 아이의 대립. 어린아이는 마왕의 존재를 볼 수 있고 그의 유혹을 들을 수 있다. 기형 도는 [바람의 집 - 겨울 版畵 1]에 이렇게 쓴다.

내 유년 시절 바람이 문풍지를 더듬던 동지의 밤이면 어머니는 내 머리를 당신 무릎에 뉘고 무딘 칼끝으로 시퍼런 무우를 깍아 주시곤 하였다. 어머니 무서워요 저 울음 소리, 어머니조차 무서워요. 얘야, 그것은 네 속에서 울리는 소리란다.

[마왕]의 어린 아들과 같이 [바람의 집 - 겨울 版畵 1]에서의 어린 아들 역시 외부 세계에 대한 불안과 다가올 성년에 대한 공포를 느끼고 있으며, 초자연적 힘의 실체를 깨닫고 있다. 괴테의 [마왕]에서 외부 세계나 성년 세계에 대한 불안과 공포는 ' 좋은 장난감','아름다운 옷','귀여운 딸'과 같은 세속적 추구물로 상징되고 초자연적 힘의 실체는 바로 '죽은'이었듯이 기형 도의 시속에서도 그런 두 갈래의 두려움이 병치된다.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 모두들 공장으로 간다"던 그의 등단작 [안개] 속의 한 구절은 관리사회의 냉혹함과 도시생활의 공허함을 보여주는 [전문가],[조치원], [오후 4시의 희망] 같은 시를 만들면서 기형도가 어렸을 적에 느꼈던 외부, 성년 세계에 대한 공포를 구체화하고, 그의 시에 가득한 삶에 대한 부정적 영상 은 죽음이라는 무지막지한 힘의 실체를 일찍 깨닫고 있었던 예민한 어린아이의 불안을 수식하고 있다.

[바람의 집 - 겨울 版畵 1]과 [마왕]은 어린아이의 세계에 대한 불안과 공포를 '바람'이라는 자연 현상을 매개로 개진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지만, 어린 아들의 대화 상대자가 한편은 '아버지'고 다른 한편은 '어머니'라는 데서 사소한 차이를 갖는 다. 그러나 그 사소한 차이는 [바람의 집 - 겨울 版畵 1]에서 인용된 위의 시구에 이어 나오는 다음의 시구에서 알게 될 것처 럼 엄청난 차이를 숨겨 가지고 있다. 기형도의 어머니는 괴테의 아버지와 같이 어린 아들의 불안과 공포에 대하여 무감각하지만 않으며, 아들의 공포와 불안을 이해한다. 그리고 그 어머니는 아버지의 무감각(?)보다 오히려 더 비극적(!)인 충고를 아들에게 한다.

네가 크면 너는 이 겨울을 그리워하기 위해 더 큰 소리로 울어야 한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는 자기 자식의 실패를 예견한다. 반면 세상의 모든 아버지는 자기 자식의 성공을 강요한다. 우리는 그런 차이에 모성의 원리와 부성의 원리라는 이름을 달아줄 수 있다. [바람의 집 - 겨울 版畵 1]의 어머니는 어린 아들에게 세상에 실패하면 언제든 너의 유년(/'이 겨울')으로 돌아오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러나 [마왕]의 아버지는 말을 탄 채 아들을 품에 안 고 앞으로, 앞으로 전진한다. 그 아버지는 세속에의 질주에 멀미를 느낀 아이의 불안과 공포에 무감각한 것이 아니라, 알고도 모 른 체한다. 저건 '안개','바람 소리','수양버들'일 뿐이라고 시침떼며!

우리는 기형도의 시에서 '미래'가 없는 '과거-현재'와의 단속적인 왕복운동만을 보는데, 기형도에게 '미래'가 없는 까닭은 또 '과거-현재'와의 단속적인 왕복운동만 있게 된 까닭은 그의 시에 부성의 원리가 부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시는 앞으로 전 진할 동력을 잃었다. 사실 {입 속의 검은 잎}에는 "아버지 또 어디로 도망치셨는지. [...] 아버지, 불쌍한 내 장난감 "(94쪽)과 같은 식으로 밖에는 아버지가 등장하지 않는다. 되돌아가야 할 "유년의 윗목"(127쪽)을 깨끗하게 보존하기 위해서 아버지는 "풍병"(80쪽)이 들어야 했고 [폭풍의 언덕]에서 "칼자국"같은 바람을 맞고 영영 "돌아오지 않"아야 했다. 결국 아버지란 부성의 원리가 지배하는 세계의 희생자이면서 '칼'을 가지고 싸우는 사람이다.

유년기 동안 양친과 가족에게 의존했던 아이는 자라나면서 최초의 통합으로부터 독립, 분리되어 사회와 재통합을 시도하게 된 다. 그런데 재통합 과정중에 원만한 통합을 이루지 못하면 다시 최초의 통합으로 퇴각하려 한다. 이때 재통합에 실패한 아이를 사회로 내보내는 것은 부성이고, 그것을 끌어당기는 자성은 모성에서 발원한다. 그러므로 외디푸스 콤플렉스란 프로이트가 말 하는 것과 같이 아들의 어머니에 대한 심리적, 성적 고착이 아니라 사회적 재통합에 실패한 성년이 최초의 통합을 잊지 못하고 양친, 가족으로 되돌아가려는 사회적, 감정적 고착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이런 드라마를 기형도와 함께 활동한 80년대 젊은 시인들의 시에서 많이 보아왔고, 그 주제에 바쳐진 평론도 있음을 기억한다.어쨌거나 위의 문단에서 본 것과 같은 부성원리의 부 재와 "그래, 고향에 가고 싶어/ 지금보다 훨씬 더 어렸지만/ 사과나무는 나를 사로잡았어"(920쪽)에서 간파할 수 있는 유년으로의 회귀, 모성 원리에로의 귀속이라는 특징을 기형도를 비롯한 그 또래의 젊은 시인들은 공유했다.

하지만 뒤에 설명되겠지만, 그 공유점은 너무 미미하고 기형도는 오히려 기억할 만한 괴상한 질주를 통해 한 무리의 젊은 80 년대의 시인과 상반된다.


2

기형도의 시를 읽으면서 우리는 '아, 운명이란 게 있기는 있는 것이구나' 하는 것을 새삼 느끼고 몸서리친다. 우리는 그가 어느 시에서 "어머니 왜 나는 왼손잡이여요"(108쪽)라고 말할 때 그 사소한 시구에서 기형도를 따라다닌 운명의 모지 락스러움을 본다 '내 힘으로 어찌 안되는 것', 그게 운명이다. 기형도는 그의 좋은 시 모두를 '내 힘으로 어찌 안되는 것'에 할애했는데, 그의 사후 유고시집이 묶여진 두에 출간된 산문집 {짧은 여행의 기록}에 실려 있는 여러 단편소설 가운데 어느 한 편은 '나는 왼손잡이'라는 그의 비극적 운명 인식을 극명히 드러낸다. 길기 때문에, 줄거리를 따라 중요한 의미만을 간추려보자.

(1) 만성중이염에 걸린 나는 어느 날 지금껏 참아오던 병원행을 감행한다.

(2) 진찰서류를 접수하고 나서 나는 심한 갈증에 시달린다.

(3) 커피 자동판매기를 발견하고 동전을 넣고 블랙 커피의 보턴을 누르려고 손가락을 가져가면서 나는 까닭 모를 불안감을 느낀 다. 아니나 다를까 몇 번이나 보턴을 눌러도 커피는 나오지 않는다. 다른 보턴을 눌러도 마찬가지.

(4) 내 병든 귀를 건성으로 진찰한 레지던트는 만성중이염이라며 수술을 권한다.

(5) 수술을 받기 전에 청력검사를 먼저 받아야 하는데 청력검사를 받기 전에 나는 다시 한 번 갈증에 시달린다. 그래서 이번에 는 좀전의 커피 자동판매기가 아닌 다른 커피 자동판매기를 찾아나선다.

(6) 새로 찾은 자동판매기에 분명 '판매중'이란 표지등이 켜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자동판매기 역시 동전만 삼키고 아무것도 쏟아놓지 않는다. 그런데 판매기 옆 의자에 앉은 조그만 소녀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코코아를 마시고 있지 않은가. 소녀에게 물 어보니 그녀는 여기 있는 자동판매기에서 코코아를 빼었단다. 그래서 나는 동전을 주며 소녀에게 대신 코코아를 빼달라고 부탁한 다.

(7) 소녀가 내 동전을 받아들고 쪼르르 달려가 동전을 막 넣으려다가, 판매중지라는 사실을 알린다. 내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 나 판매기 앞에 서서 보니 어느 틈엔가 판매중지 표지에 빨간 불이 와 있다.

(8)청력검사 결과 나는 고막이식 수술을 해도 소용없을 만큼 청신경이 망가졌다고 한다.

[미로]라는 제목의 이 소설에서 우리가 주목해보아야 할 대목은 (3)과 (6) (7)이다. 다른 사람은 커피 자동판매기에서 음료수 를 잘도 빼어 마시는데, 내가 하기만 하면 음료수가 나오지 않거나 중지된다! 나와 세계 사이의 이런 운명적인 불화를 우리는 김 종삼의 시에서 본적이 있다. 김종삼은 그의 시 [원정(園丁)]을 통해 과수원에서 자기가 집은 과일마다 썩어 있다거나 벌레먹은 것이라는 발견을 하고 놀라는데, 과수원 주인이 그를 보고 이렇게 타박하지 않았던가. "당신 아닌 사람이 집으면 그럴리가 없다."하므로 기형도의 시집에 발문을 쓴 김현의 단정 가운데 몇몇은 수정을 요하는지도 모른다. "나는 기형도의 시 가 아주 극단적인 비극적 세계관의 표현이라고 보고 있다. 그것은 도저한 부정적 세계관이다. 그의 시가 보여주는 부정성을 그 이전에 보여준 시인은 그리 많지 않다, 아니 거의 없다."의 '거의없다'와 조금 다른 문맥에서이지만 "한국 시에서 그 런 부정성을 보여준 시인이 누구일까? 이상? 이상에게는 그러나 치열성이 부족하다"의 '이상에게는 치열성이 부족하다' 같 은 것 말이다.

운명이란 그렇게도 '어찌 안되는 것'(도저한 부정성?)인가? 그리스도교가 들어오기 이전의 서구인들에게 운명 혹은 운명의 신은 항상 여신으로 간주되어왔고, 운명이 여성의 속성을 가졌기에 그 여신은 언제나 '남성적(vir)'인 것에 미소를 보냈고 거기에 순종했다. 로마인들은 남성적인 것을 참되게 드러내는 것을 '덕(virtus)'이라고 불렀는데 그 덕은 곧바로 사나이다움이나 용기 를 뜻하기도 했다. 운명은 언제나 그와 같은 덕에 굴복했는데, 그런 점에서 기형도는 부덕했는지 모른다. 그는 '운명아 비켜 라, 내가 간다!'고 말하기에는 너무 작기 응시적인 내성이 강했다.

우리 앞에 공평하게 놓여 있는 운명은 누군가를 파괴하고, 짓궂게 괴롭히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은 누구의 편도 들지 않으면서, 자신을 거칠게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을 위해 '조력자'로 '대기'라고 있다. 기독교 이전의 서구인이 받아들였던 이런 운명론은 '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는다'는 우리말 속담과 배다르지 않다. 감상적이어서인가? 아니면 우리가 모르는 절망 이 그에게 더 있었다는 뜻일까? 그것도 아니면 기형도에 의해 새로운 운명론이 연구된 것일까? 기형도는 '나는 왼손잡이'하는 비극적 운명을 극복하지 못했다.


3

그러나 ......그는 특이한 방법으로 그의 용기를 보여주었다. 우리는 그것을 기억하기 위해 이 글을 쓴다. 필자는 1장의 끄트 머리에 기형도의 시는 부성 원리의 부재로 말미암아 앞으로 전진할 동력을 잃었고 미래로의 투사가 불가능했던 그의 관심은 유 년으로의 회귀를 지향하고 있다고 썼다. 그리고 모성의 원리로 돌아가려거나 유년으로 회귀하려는 노력이 기형도와 같은 80년대 젊은 시인들에게 드러나는 공통점이라고 썼다. 하지만 필자는 곧 "뒤에 설명되겠지만, 그 공유는 너무 미미하고 기형도는 오히려 기억될 만한 괴상한 질주를 통해 한 무리의 젊은 80년대의 시인들과 상반된다"고 쓴다.

기형도가 보여준 괴상한 질주란 "나는 일생 몫의 경험을 다했다"(35쪽), "내가 차라리 늙은이었다면!" (40쪽), "나는 이미 늙은 것이다"(45쪽)와 같은 특기할 만한 구절을 의미 있게 지칭함이 팬처럼 유년에 머물러 있으 려 하지 않고 '늙어'죽겠다고 결심했으며, 자궁에 몸을 숨기기보다는 무덤에 육신을 누이겠다고 결심했다. 궁극에는 자궁이나 무 덤이 다르지 않을지 모르나 그는 과거에로의 끊임없는 유혹을 당하면서, 흘낏흘낏 뒤돌아보면서 앞으로 나갔다.

젊은이가 겉늙어가는 것은 우리 시대의 특이한 질주다. 우리는 그 문학적인 물증을 임철우의 소설과 최윤의 소설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80년 광주항쟁을 자기 소설 작업의 밑자리로 하고 있는 임철우는 [동행]이라는 단편 가운데 "그 몇 번의 계절 이 바뀌었던 일년 반 동안에 겨우 스물일곱 살 동갑내기인 우리는 터무니 없이 늙어버린 것이었다."고 썼으며 최윤은 역 시 같은 사건을 주제로 했던 그의 중편 [저기 소리 없이 한 점 꽃잎은 지고] 속에 "난 단숨에 늙어버렸어"를 주문처 럼 외운다.

기형도는 유년 시절의 가난 체험을 통해 최초로 '늙음'을 경험한 후, 대학 시절에는 정치적 부정의를 목격하면서 정치적 부정 의에 항의하는 동료들의 투쟁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못하는 갈등으로 부터, 또 사회에 나와서는 관리 사회의 거대한 억압에 대해 무기력할 수밖에 없는 소시민이 되어 겉늙음을 경험한다. {입속의 검은 잎}에는 그가 '늙음'을 강요당했던 그런 세 종류 의 상황이 여러가지 직접적, 암시적인 방법으로 얽혀 있다.

빨리 늙어 "오오, 그리운 생각들이란 얼마나 죽음의 편에 서 있는가"(63쪽) "나를 찾지말라"(41쪽)고 단 호히 말할 수 있는 처연한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괴상한 질주를 기형도는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 그가 쓴 [환상일지]라는 제목의 단편소설 가운데 한 대목은 그가 얼마나 그로테스크한 질주의 전문가였는지를 말해준다.

그때, 멀리 굽어지는 철로 위에 조그만 소년 하나가 신호등처럼 서 있는 것이 눈에 띈다. 마치 어떤 결연한 각오를 한 듯이 당 당하게 서서, 그는 전문가처럼 기차를 기다리고 있다. 나는 갑자기 어떤 섬뜩한 생의 단면을 보는 듯한 추상적 착시를 느낀다. 사내가 소리지른다. 저...... 저...... 소년이 기차를 등지고 철길을 내닫기 시작한다. 진눈깨비가 기차보다도 먼저 소년의 등 뒤로 무수한 총알이 되어 날아간다. 기관사가 소리지를 것이 여기까지 들린다. 아슬아슬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소년이 철길 옆 으로 재빨리 내려선다.

기차를 피해 철길 옆으로 내려서는 순간 소년은 씩, 웃었을까? 그의 운명, 그의 마왕을 향해? 덮쳐오는 기차를 등뒤에 놓고 마구 질주하는 이 소년은 모든 가치가 거꾸로 물구나무 선 근대 초입의 식민 사회에서 나아갈 진로를 잃어버리고 "막다른 골목"을 "무서워하"며 질주하는 이상의 '열세 아해'를 닮았다. 친절하게도 "사람들은 조금씩 빨라진다./속 도가 두려움을 만날 때까지"(115쪽)와 같은 그의 시구가 그런 단서를 보강한다. 그러나 기형도는 80년대의 모던한 '열세 아해'와 다르다. 그 누구보다 더 마왕의 추적에 지쳐 숨 헐떡거리는 주자였으면서도 그는 형식 파괴보다는 고전적인 질서를 추구했다. 미친 부성이 날뛰는 세계로부터 도피해 어린아이로 오래 있고 싶다는 여느 피터팬과 달리 기형도는 미친 세계의 길거 리에 망연히 선 채 '늙음'을 수락한다. 그것이 그가 보여준 용기였다.

그 기억할 만한 질주와 함께 그가 보여준 또 하나의 용기를 명기하고 싶다. 그것은 "진눈깨비 쏟아진다, 갑자기 눈물이 흐 른다"(35쪽),"습관적으로 주르르 눈물을"(125쪽),"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127쪽)과 같이 많은 눈물이 그의 시에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울음을 잘 참았다는 것이다.


유리창 너머 한 사내가 보였다

그 춥고 큰 방에서 書記는 혼자 울고 있었다!

눈은 퍼부었고 내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침묵을 달아나지 못하게 하느라 나는 거의 고통스러웠다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중지시킬 수 없었다

나는 그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창밖에서 떠나지 못했다


[기억할 만한 지나침]이란 제목을 가진 이 시는 "춥고 큰 방"에서 울고 있는 나의 자아를 지켜보는 동일인의 초자아 가 "거의 고통스러"워하면서도 "혼자 우는" 자아의 편에 가담하지 않고 울음과의 거리를 지킨다. "그 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창밖에서 떠나지 못"하는 연민을 가지고서! 이것이 기형도가 우리에게 보여준 두번째 용기인바, 그의 미덕(용기!)은 80년대의 많은 시인들이 외칠 때 가슴에 담긴 침묵으로 이야기했다는 것이다. 성대가 내는 소리라는 데서 외치는 거나 울부짖음은 구별되지 않기에.


4

특기할 만한 개성을 가졌던 시인이 요절해버렸기에, 평자들은 그가 살아 있으면서 계속 시를 썼다면 어떤 방향으로 가게 되었 을까 점쳐보고 싶은 욕망을 억제하지 못하였다. [기억할 만한 지나침]이란 시를 읽고 나서 기형도의 모든 시에 이중성이라고 불 러도 좋고 자아분열이라고 불러도 좋은 강력한 양가감정이 있다는 것을 느낀 필자에게도 갑자기 점쟁이가 되고 싶은 욕망이 일 었다. [기억할 만한 지나침]에 나오는 두 자아만을 신대 삼아 판단해보자면, 창밖의 자아가 방속으로 들어가 방 가운데서 울고 있는 자아를 껴안고 함께 운다면 김소월과 같은 초혼시가 나왔으리란 생각이 들고, 울고 있던 방안의 자아가 밖으로 뛰쳐나와 창속을 들여다보던 바깥의 자아와 합세하여 텅 빈 방을 함께 쳐다보게 될 때 기형도는 [입 속 의 검은 잎]의 세계보다 더 냉 혹한 모더니스트가 되었으리란 예감이 든다. 그러나 복채를 놓아줄 시인은 더 이상 시를 쓰지 않는다.

글 장정일

























      

  (퍼온글)정호승-슬픔의 힘 속에서 생성되는 사랑의 노래
  나도 시인이 될 수 있다 (퍼온 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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