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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관한 변주곡 - 시 감상



추천 :	942	이름 :	송영화	작성일 :	2003-09-17 12:45:59	조회수 :	2,924

행복 : 유치환

1. 낭만, 그 유미적 아름다움.

흔히 시를 쓰고자 할 때 또는 '시'라고 말하는 순간, 가장 보편적으로 떠올리는 시적 정서가 기쁨이나 슬픔과 같은 감정임을 우리는 경험으로 익히 알고 있다. 왜냐하면 시는 인간의 노래이고 인간 삶의 노래이며 인간의 내면에서 끓어오른 감정을 이끌어내는 노래이기 때문이다. 시는 삶과 세계에 대한 총체적인 통찰의 노래이며 삶과 세계와 사물과의 근원적이고 섬세한 교감의 노래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 지점에 낭만의 유미한 본질이 자리하고 있다.
감정을 이끌어 내는 것, 그것을 일러 서정이라 한다. 예컨대 W. 워즈워드가 코울리지와의 공동시집인 <서정민요집> 서문에서 '끓어오르는 감정의 자발적인 흘러 넘침'이라고 말했던 것, 그것이 바로 낭만의 한 본질이자 서정의 본질을 의미하는 것이다.
덧붙이자면, 문예사조로서의 낭만주의는 18세기 말경 독일과 영국에서 처음 일어났는데 그 이전의 신고전주의의 반동으로 일어난 문예사조이다. 신고전주의는 개인적인 특성을 보편적인 합리성에 비추어 통제하여, 조화와 균형에 입각한 고전주의적 전통을 충실히 따르고 추구해 왔는데 이러한 신고전주의에의 반발이며 기성에 대한 반발이며 전통에 대한 반발이며 보편적 합리성에 반대한 개인적 특성을 띠게 된 것이 낭만주의인 것이다. 그러므로 낭만은 개인적이고 주관적이며, 딱딱한 법칙에 반대되는 유동성의 특징을 가진다. 오랜 이성의 통제에서 벗어나 인간이 가진 가장 자연스런 속성인 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하고 독특한 자기만의 개성을 표현하는 것, 그것이 낭만이 가진 문학적 덕성이요 유미한 아름다움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 낭만의 유미한 아름다움 가운데 사랑만큼 근원적이고 보편적인 정서가 또 있으랴. 모든 생명의 역사 이래로, 더 좁히면 인류사 이래로 얼마나 많은 사랑이 언어로, 혹은 화폭에, 혹은 선율로 그려져 왔는가. 사랑으로 인한 기쁨이나 슬픔은 수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제공해 주었으며 딱히 예술가가 아닌 사람들에게도 매우 강렬한 정서적 체험을 경험하게 한다. 특히 이성간의 사랑으로 인한 안타까움, 그리움, 애달픔, 절망감, 희열감 등은 사랑에 빠져있는 사람의 영혼으로 하여금 그 희비의 무게를 똑같이 동시에 느끼게 한다.
그러한, 인간이 가진 서정의 원천으로서 '감정의 자발적인 흘러넘침'을 아름답게 형상화한 노래 중 청마 유치환의 '행복' 이라는 참 아름다운 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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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행복 - 유치환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한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더 의지 삼고 피어 헝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 방울 연연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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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감상

한국의 현대시사에서 1930년대는 시대적 상황과 모더니즘의 여파로 하여 문학이 건조해지고 형식화된 시기였다. 이에 대한 반동으로 인간 삶에 대한 뜨거운 열망을 노래한 일군의 시인들이 나타났는데 그중 생명파(생명파라는 명칭은 미당 서정주 시인이 처음 붙였다고 한다), 혹은 인생파로 이름지워진 시인들이 있었다. 그들이 바로 미당 서정주, 청마 유치환 등 시인부락 동인들로 구성된 시인들이었다.
인간의 원초적 생명력을 강인한 남성적 어조로 노래한 청마는 근본적으로 낭만주의자다.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 아예 애련에 물들지 않고 / 희노에 움직이지 않고 / ....>를 노래한, 더구나 광복 후 자유당 정권의 비리에 대해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를 지을 정도로 준열한 노래를 부른 의지의 시인 청마를 떠올리면 낭만의 의상을 입은 이 '행복'이라는 시는 일견 어울리지 않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러나 곰곰이 들여다보면 청마의 작품의 전편에 걸쳐 흐르는 강인한 의지적 어조 안에는 청마 특유의 낭만이 잘 곰 삭여져 배어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우선 눈을 감고 이 시의 시적 정황을 마음으로 따라가 보자. 화자는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을 바라보며 화자의 연인에게 편지를 쓴다. 그 첫 문장은 시구 그대로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이다. 마음속에 연인의 모습을 떠올리는 화자의 입가에 슬며시 피어나는 엷은 미소가 보일 듯 하다. 눈을 들면 다시 우체국이 보인다. 우체국을 드나드는 숱한 사람들이 보인다. 그들은 총총한 걸음으로 우체국을 들어선다. 그리운 누군가에게로 혹은 고향으로, 전해야 할 어떤 사연으로 온 생각이 집중된 얼굴을 하고 와서는 전보지를 사고 우표를 산다. 화자나 화자의 연인을 포함하여 모든 소식을 전하는 사람이나 소식을 받는 사람이나 모두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는 곤고한 삶들이다. 그런 곤고한 삶들이 서로 인정을 나누는 곳, 그 곳이 바로 우체국이다.
세상 속에서 화자와 화자의 연인과의 연분은 세상의 온갖 장애와 시련 속에서 시달리고 나부낀 사랑이며 애틋하게 핀 한 송이 연연한 진홍빛 양귀비꽃인 듯이 생각된다. 그리고는 다시 처음 자신이 쓰던 편지의 첫 구절을 상기하며 설령 지금 쓰고 있는 이 편지가 연인에게 보내는 화자의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을 받기보다 사랑하는 것이 진정 사람에게 행복한 일이라는 깨달음을 얻기에 이른다.
참으로 아름다운 깨달음이 아닌가. 사랑의 참 의미가 갈수록 퇴색되어가는 현대에 있어서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 것인가. 정신적인 것보다는 물질적 욕망이 앞서고 부드러운 율문적 사고보다는 딱딱한 논리적 산문에 더 익숙해진 현대에 있어서, 주는 것만으로 한없이 따스해지는 사랑과 그로 인한 행복을 노래한 이 시는 새삼 소중한 감동을 우리에게 안겨 준다.

4. 돋보기

어쨌든 그러한 한 편의 연애시로도 진한 감동을 주는 이 시가 단지 사랑을 고백하는 연애시로만 머무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시의 문맥 속으로 조금 더 들어가 보자.

우선 첫 연의 잠언풍의 구절은 이 시의 중심 구절이자 설명이 필요 없을 만큼 아름다운, 사랑의 한 전범을 보여주는 백미이다.
여기서 <오늘도 나는>이라는 표현은, 현재는 물론이요 과거에도 미래에도 그러할 것이라는 화자의 지극한 사랑에의 의지를 표현한 것으로 이 시의 마지막 연의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와 짝을 이루며 이 시의 진가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데 기여하고 있다. '오늘도 나는'이라는 구절을 '오늘 나는'으로 토씨 하나를 빼고 읽어보자. 이 얼마나 맥 빠진 사랑의 고백일 것인가.
실제로 통영의 우체국이 있는 좁은 길을 'ㄱ'자로 꺾어 들어서면 이층에 찻집이 있는데 그 곳이 청마가 늘 앉아 편지를 쓰던 그 다방이다. 넓은 창을 통해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보이는 우체국 창문 앞, 찻집에서 화자는 편지를 쓴다. (그 대상이야 두말 할 것도 없이 청마와 플라토닉한 사랑을 주고받았던 이영도라는 여성이다.)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편지를 쓴다>고 적고 있는 이 첫 연은 매우 낭만적인 어법으로 쓰여졌지만, 연인과의 장벽, 그 단절된 비극적 상황을 비유한 매우 상징적인 표현이다. 유리창이란 밖이 훤히 내다보이지만 분명하고 엄연한 장벽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 유리의 상징성은 '琉璃窓을 사이에 둔 遊離'라는 상징의 자장 안에 자신과 연인과의 사이의 매개역할을 하는 우체국까지도(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하는 이를 두고도 다가갈 수 없는 애통함을 표현하고 있다고 하겠다.

이 시의 배경인 우체국은 두 번째 연에 이르면 한 쌍의 연인들의 사랑을 전해주는 매개자일 뿐만 아니라 숱한 사람들의 인정이 꽃피는 꽃밭이라는 인식에 이른다.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 더욱더 의지 삼고 헝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의 구절에서 보듯이, 평범한 군상들이 그리운 사람들과 서로 소식을 전하고 전해 받으며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인정으로 더욱더 의지 삼고 어우러지는 곳. 그곳이 '인정이 꽃피는' 꽃밭으로서의 우체국의 의미이다.
청마는 그 꽃들 가운데에서도 화자와 화자의 연인을 일러 선연한 진홍빛 양귀비꽃과 같다고 표현하고 있다. 하필이면 왜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고 하였을까. 정치한 해석이 아닐 수도 있지만 청마가 사랑의 상징을 양귀비, 더구나 진홍빛 꽃에 비유한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알다시피 양귀비는 당나라 시대의 풍염한 미인이며 당송 팔대가의 시인 백거이가 <長恨歌>를 써서 더 유명해진 비극적인 사랑의 주인공이다. 즉, 아름다움과 비극적인 사랑의 대명사이기도 하다. 또 꽃으로서의 양귀비는 여러 종류의 꽃빛깔을 가지고 있는데 그중 진홍빛은 정열과 피를 연상시키며 종자가 익기 전 상처를 내어 유액을 받아 아편이라는 마약을 얻는다. 여기서 마약과도 같은 사랑이라는 연상이 또 가능해진다. 게다가 아편, 다시 말해 몰핀은 진통 또는 진정을 위해 사용하는 의약품이기도 하다. 이 시에서 <한 방울...>이라는 표현이 그걸 암시하고 있다.
이 얼마나 극명한 표현인가. 황폐하고 쓸쓸하기 이를 데 없는 현실을 이겨낼 힘이 충분한, 사랑의 진정한 의미에 육박해 있는 절창이 아닌가. 취(取)할수록 취(醉)하는, 한없는 끌림이 있는, 고통을 진정시키는 그것, 그것이 사랑이 아닌가. 그러고 보면 양귀비는 참으로 적절하게 쓰여진, 치밀한 상징성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또한 마지막 연에 이르러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 지라도 /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에 이르면 보편적 진리인 잠언에서 화자의 주관과 동일화되는, 말하자면 서정시의 특징인 화자의 정서를 주관적으로 드러낸 자아화가 이루어진다. 그리하여 화자의 내면에서 끓어오르는 이 애틋하고 진한 고백은 한 개인의 지극한 사랑고백이라 할지라도 가슴 뭉클한 격동을 불러일으켜 시적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게 한다. 즉,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의 가정이 불러일으키는 정서의 격렬함이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라는 질서로 환원된다. 정서의 평형상태인 균형을 찾음으로서 오는 쾌감. 그것이 이 한 편의 시가 주는 시적 카타르시스이자 미적 가치이다. 화자의 아픈 체험과 깊은 사색의 결과로 얻어진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라는 값진 인식은 읽는 이의 가슴에서 깊은 감동의 울림을 갖게 되는 것이다.

사랑은 인간이 가진 가장 순결하고 아름다운 덕목이다. 특히 이 시에서는 자칫 통속성에 매몰되기 쉬운 이성간의 사랑을 보다 가치 있는 미학으로 승화시킨 점에서 깊이를 획득한다. 예술작품의 감상이란 본래 감동과 감명을 본질로 하고 있는 것이며 느낌의 세계이므로 설명의 경지를 초월해 있는 것이다. 아무리 정교하게 설명한다 해도 '어떤 느낌'을 설명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고 결코 느낌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언어의 불완전함이다.
그러한 언어의 불완전함을 염두에 둔다 해도 이 시는 첫 연의 잠언풍의 어조에도 불구하고 교훈적임에 지나침이 없고, 이성간의 사랑이라는 소재적 한계를 넘어 인간의 행복의 본질을 꿰뚫어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폄훼될 수 없는 미학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 시이다.

사랑이란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생명의 원리이고 인간의 영혼의 고향이다.
무릇 모든 예술 작품은 직접 혹은 간접적인 체험의 결과물이며 사랑은 그 질료로서 미학적 원천이 된다. 특히 서정시의 특징은 순간적인 정서의 포착이지만 그것은 시인 자신의 체험에서 비롯된 직관에 의존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사랑을 다 직접 경험할 수는 없지만 '예술작품의 감상의 본질은 그 작품의 取美'라는 정의에 동의할 때 우리는 또한 시인이 체험한 미학적 원천인 사랑을 간접적으로 경험하기도 하는 것이다. 어쩌면 이성간의 사랑이야말로 가장 단순하면서도 포괄적인, 삶의 비의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모든 삶은 사랑이라는 동일한 주제를 가지고 변주하는 사랑의 변주곡에 다름 아니다. 미움이나 증오까지도 그 속성을 들여다볼 때 사랑이 전제되어 있음을 우린 흔히 목도할 수 있다.
단지 받기만 하는 이기적인 사랑에 머무르지 않고 보다 넓고 크게 승화하여 또 다른 사랑을 낳는 원천이 되는 것, 그것이 사랑의 본질이라 한다면 이 시의 결구에 함축되어 표현되어 있는 사랑의 의미는 사랑부재의 현대에 순결한 도덕률로서 천둥 같은 경종을 울리고 있는 것이다



최병태	2003-09-21 11:30:48

詩란? 한 마디의 진솔한 언어와,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과, 한 곡의 가슴 뭉클한 노래가 합쳐져 하나가 된 것이라 했다. 청마 유치환님의 시 행복을 읽고 또한 평론도 읽으면서 다시 한 번 옛날 학창 시절에 애송하던 제목이 분명치 않지만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라고 기억되는 시가 문득 그리워 지는군요. 누구 이 시의 제목과 워문을 이 홈페이지에 올려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부탁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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