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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희 시인 작품 모음
추천 : 52 이름 : 김현숙 작성일 : 2018-07-23 10:03:38 조회수 : 324

" 응 "

문정희

   햇살 가득한 대낮
   지금 나하고 하고 싶어?
   네가 물었을 때
   꽃처럼 피어난
   나의 문자
   " 응 "


   동그란 해로 너 내 위에 떠있고
   동그란 달로 나 네 아래 떠있는
   이 눈부신 언어의 체위


   오직 심장으로
   나란히 당도한
   신의 방


   너와 네가 만든
   아름다운 완성


   땅 위에
   제일 평화롭고
   뜨거운 대답
   " 응 "  











요새는 왜 사나이를 만나기 힘든지  

문정희


요새는 왜
사나이를 만나기 힘들지?

싱싱하게 몸부림치는
가물치처럼
온 몸을 던져오는
거대한 파도들

몰래 숨어 해치우는
누우렇고 나약한
잡것들 뿐

눈에 띌까

어슬렁거리는
초라한 잡종들 뿐

눈부신 야생마는
만나기가 힘들지

여성운동가들이 저지른 일 중에
가장 큰 실수는
바로 세상에서
멋진 잡놈들을
추방해 버린 것이 아닐까?

핑게대기 쉬운 말로
산업사회 탓인가?

그들의 빛나는 이빨을 뽑아내고
그들의 거친 머리칼을 솎아내고
그들의 발에 제지의 쇠고리를
채워버린 것은 누구일까?

그건 너무 슬픈 일이야!!
여자들은 누구나 마음 속 깊이
야성의 사나이를 만나고 싶어 하는 걸

갈증처럼 바람둥이에 휘말려
한평생을 던져버리고 싶은걸

안토니우스 시저 그리고
안록산에게 무너진 현종을 봐
그뿐인가?
나폴레옹 너는 뭐여?

심지어
돈주앙, 변학도, 그 끝없는 식욕을
여자는 얼마나 사랑한다는걸
알고 있어?

그런데 어찌된 일이야?
요새는
비겁하게 치마 속으로 손을 드리미는
때 묻고 약아빠진 졸개들은 많은데

불꽃을 찾아 온 사막을 헤매이며
검은 눈썹을 태우는
진짜 멋지고
당당한 잡놈은
멸종 위기네.  

















키 큰 남자를 보면

문정희


키 큰 남자를 보면

가만히 팔 걸고 싶다
어린 날 오빠 팔에 매달리듯
그렇게 매달리고 싶다
나팔꽃이 되어도 좋을까
아니, 바람에 나부끼는
은사시나무에 올라가서
그의 눈썹을 만져 보고 싶다
아름다운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그의 눈썹에
한 개의 잎으로 매달려
푸른 하늘을 조금씩 갉아먹고 싶다
누에처럼 긴 잠들고 싶다
키 큰 남자를 보면




















치마

문정희


벌써 남자들은 그곳에
심상치 않은 것이 있음을 안다
치마 속에 확실히 무언가 있기는 있다
가만두면 사라지는 달을 감추고
뜨겁게 불어오는 회오리 같은 것
대리석 두 기둥으로 받쳐 든 신전에
어쩌면 신이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은밀한 곳에서 일어나는
흥망의 비밀이 궁금하여
남자들은 평생 신전의 주위를 맴도는 관광객이다
굳이 아니라면 신의 후손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들은 자꾸 족보를 확인하고
후계자를 만들려고 애를 쓴다
치마 속에 확실히 무언가 있다
여자들이 감춘 바다가 있을지도 모른다
참혹하게 아름다운 갯벌이 있고
꿈꾸는 조개들이 살고 있는 바다
한 번 들어가면 영원히 죽는
허무한 동굴?
놀라운 것은
그 힘은 벗었을 때 더욱 눈부시다는 것이다.  















남편  

문정희


아버지도 아니고 오빠도 아닌
아버지와 오빠 사이의 촌수쯤 되는 남자
내게 잠 못 이루는 연애가 생기면
제일 먼저 의논하고 물어보고 싶다가도
아차, 다 되어도 이것만은 안되지 하고
돌아 누워버리는
세상에서 제일 가깝고 제일 먼 남자
이 무슨 원수인가 싶을 때도 있지만
지구를 다 돌아다녀도
내가 낳은 새끼들을 제일로 사랑하는 남자는
이 남자일 것 같아
다시금 오늘도 저녁을 짓는다
그러고 보니 밥을 나와 함께
가장 많이 먹은 남자
나에게 전쟁을 가장 많이 가르쳐 준 남자





















한계령을 위한 연가

문 정 희

한겨울 못 잊을 사람하고
한계령쯤을 넘다가
뜻밖의 폭설을 만나고 싶다.
뉴스는 다투어 수십 년 만의 풍요를 알리고
자동차들은 뒤뚱거리며
제 구멍들을 찾아가느라 법석이지만
한계령의 한계에 못 이긴 척 기꺼이 묶였으면.

오오, 눈부신 고립
사방이 온통 흰 것뿐인 동화의 나라에
발이 아니라 운명이 묶였으면.

이윽고 날이 어두워지면 풍요는
조금씩 공포로 변하고, 현실은
두려움의 색채를 드리우기 시작하지만
헬리콥터가 나타났을 때에도
나는 결코 손을 흔들지는 않으리.
헬리콥터가 눈 속에 갇힌 야생조들과
짐승들을 위해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시퍼렇게 살아 있는 젊은 심장을 향해
까아만 포탄을 뿌려대던 헬리콥터들이
고라니나 꿩들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
자비롭게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나는 결코 옷자락을 보이지 않으리.

아름다운 한계령에 기꺼이 묶여
난생 처음 짧은 축복에 몸둘 바를 모르리.









사람에게

문정희

사람을 피해 여기까지 와서 사람을 그리워한다
사람, 너는 누구냐
밤하늘 가득 기어나온 별들의 체온에
추운 몸을 기댄다
한 이름을 부른다
일찍이 광기와 불운을 사랑한 죄로
나 시인이 되었지만
내가 당도해야 할 허공은 어디인가
허공을 뚫어 문 하나를 내고 싶다
어느 곳도 완벽한 곳은 없었지만
문이 없는 곳 또한 없었다
사람, 너는 누구냐
나의 사랑, 나의 사막이여
온몸의 혈맥을 짜서 시를 쓴다
사람을 피해 여기까지 와서 사람을 그리워한다
별처럼 내밀한 촉감으로
숨 쉬는 법을 알고 있는
사람, 나는 아름다우냐  



















나는 나쁜 시인인가 봐

문정희

나는 아무래도 나쁜 시인인가 봐.
민중 시인 K는 유럽을 돌며
분수와 조각과 성벽 앞에서
귀족에게 착취당한 노동을 생각하며
피 끓는 분노를 느꼈다고 하는데

고백컨데
나는 유럽을 돌며
내내 사랑만을 생각했어
목숨의 아름다움과 허무
시간 속의 모든 사랑의 가변에
목이 메었어.

트레비 분수에 동전을 던지며
눈물을 흘렸지.
아름다운 조각과 분수와 성벽을 바라보며
오래 그 속에 빠지고만 싶었지.

나는 아무래도 나쁜 시인인가 봐.
곤도라를 젓는 사내에게 홀딱 빠져
밤새도록 그를 조각 속에 가두려고
몸을 떨었어.

중세의 부패한 귀족이 남긴
유적에 숨이 막혔어.
그 아름다움 속에
죽고 싶었어.  










알몸 노래

문정희


추운 겨울날에도
식지 않고 잘 도는 내 피만큼만
내가 따듯한 사람이었으면
내 살만큼만 내가 부드러운 사람이었으면
내 뼈만큼만 내가 곧고 단단한 사람이었으면
그러면 이제 아름다운 어른 으로
저 살아가는 대지에다 겸허히 돌려 드릴텐데
돌려드리기 전 한번만 꿈에도 그리운
네 피와 살과 뼈가 만나서
지지지 온 땅이 으스러지는
필생에 사랑을 하고 말텐데



한 사내를 만들었다

문정희


과천 뒷산 작업실에서
조각가 K의 흙으로
한 사내를 만들었다
푸르른 내 시간의 물방앗간에서
고딕체로 쿵 쿵 방아를 찧던 남자
오늘은 흙 묻은 손으로
눈과 어깨와 전신을
꿈틀거리는 입술을
진종일 만지고 주물러
내 앞에 분명하게 세워놓았다
이제 남은 일은
수천 도의 불로 사랑을 깨우는 일뿐
그리고 그를 껴안고
당당하게 내 집으로 데려오는 일뿐이다



물 만드는 여자

문정희

딸아, 아무 데나 서서 오줌을 누지 말아라
푸른 나무 아래 앉아서 가만가만 누어라
아름다운 네 몸 속의 강물이 따스한 리듬을 타고
흙 속에 스미는 소리에 귀 기울려 보아라
그 소리에 세상의 풀들이 무성히 자라고
네가 대지의 어머니가 되어가는 소리를
때때로 편견처럼 완강한 바위에다
오줌을 갈겨 주고 싶을 때도 있겠지만
그럴 때일수록
제의를 치르듯 조용히 치마를 걷어올리고
보름달 탐스러운 네 하초를 대지에다 살짝 대어라
그리고는 쉬이 쉬이 네 몸 속의 강물이
따스한 리듬을 타고 흙 속에 스밀 때
비로소 너와 대지가 한 몸이 되는 소리를 들어보아라
푸른 생명들이 환호하는 소리를 들어보아라
내 귀한 여자야





















첼로처럼 살고 싶다

문 정 희


하룻밤 쯤
첼로처럼 살고 싶다
매캐한 담배연기 같은 목소리로
허공을 긁고 싶다

기껏해야 줄 몇 개로
풍만한 여자의 허리 같은 몸통 하나로
무수한 별을 떨어뜨리고 싶다
지분 냄새 풍기는 은빛 샌들의 드레스들을
넥타이 맨 신사들을
신사의 허세와 속물들을
일제히 기립시켜
손바닥이 얼얼하도록 박수를 치게 하고 싶다

죽은 귀를 잘라버리고
맑은 샘물을 길어올리게 하고 싶다
슬픈 사람들의 가슴을
박박 긁어
신록이 돋게 하고 싶다

하룻밤 쯤
첼로처럼 살고 싶다














화장化粧을 하며

문정희

입술을 자주색으로 칠하고 나니
거울 속에 속국의 공주가 남아 있다
내 작은 얼굴은 국제 자본의 각축장
거상들이 만든 허구의 드라마가
명실공히 그 절정을 이룬다
좁은 영토에 만국기가 펄럭인다

금년 가을 유행 색은 섹시 브라운
샤넬이 지시하는 대로 볼연지를 칠하고
예쁜 여자의 신화 속에
스스로를 가두니
이만하면 음모는 제법 완성된 셈
가끔 소스라치며
자신 속의 노예를 깨우치지만
매혹의 인공 향과 부드러운 색조가 만든
착시는 이미 저항을 잃은 지 오래이다

시간을 손으로 막기 위해 육체란
이렇듯 슬픈 향을 찍어 발아야 하는 것일까
안간힘처럼 에스테로더의 아이 라인으로
검은 철책을 두르고
디올 한 방울을 귀밑에 살짝 뿌려 마무리한 후
드디어 외출 준비를 마친 속국의 여자는
비극배우처럼 몸을 일으킨다  













즐거운 밀림의 노래

문정희

백화점마다 모피 세일을 한 후
거리에는 때아닌 짐승들이 밀려나와
소란을 떨었다.

빌딩 사이로 밍크가 재빨리 사라지는가 하면
지하실에는 양 한 마리가 석간신문을 사고 있었다.
오리들은 남의 이불 속까지 숨어들었다지.
아이구 재미있어라, 심지어 악어들조차
젊은 계집애의 겨드랑이에 끼어서 이를 악물고 있었다.
뱀들은 요즘엔 주로 살찐 사내들의 허리를 노린다는군.

비야 오지 마라.
이 도시가 무서운 밀림이 되고 말리라.
나이 어린 여우 두 마리가 열렬히 교미를 하며
호텔문을 나서는 것을 보아라.
네거리에 멈춰선 자동차 안에도
신호등을 노려보는 낙타의 검은 눈이 있다.
주름살 수술을 하고 돌아가는 중년여자의
목을 애무하는 살쾡이들.
쥐나 토끼들도 털을 세운 채
택시를 기다리는 청년의 호주머니를
슬슬 덮치고 있다.
그렇잖아도 짐승이 많아 늘 체증이던
이 도시엔 백화점 세일 후 퍼져나온 짐승들로
더욱더 스산해지고 있다. 정글이 되어가고 있다.












마흔 살의 시

문정희

숫자는 시보다도 정직한 것이었다
마흔살이 되니
서른아홉 어제까지만 해도
팽팽하던 하늘의 모가지가
갑자기 명주솜처럼
축 처지는 거라든가

황국화 꽃잎 흩어진
장례식에 가서

검은 사진테 속에
고인 대신 나를 넣어놓고
끝없이 나를 울다 오는 거라든가

심술이 나는 것도 아닌데 심술이 나고
겁이 나는 것도 아닌데 겁이 나고 비겁하게
사랑을 새로 시작하기보다는
잊기를 새로 시작하는 거라든가.

마흔살이 되니
웬일인가?

이제가지 떠돌던
세상의 회색이란 회색
모두 내게로 와서
어딘가에 전화를 걸어
새옷을 예약하는 거라든가

아, 숫자가 내 기를 시든 풀처럼
팍 꺾어놓는구나.  







내가 세상을 안다고 생각할 때

문정희  

내가 세상을 안다고 생각할 때
얼마나 모르고 있는지
그때 나는 별을 바라본다.
별은 그저 멀리서 꿈틀거리는 벌레이거나
아무 의도도 없이 나를 가로막는 돌처럼
나의 운명과는 상관도 없지만
별!을 나는 좋아한다.

별이라고 말하며 흔들린다. 아무래도
나는 사물보다 말을 더 좋아하는가보다.
혼자 차를 마시면서도
차를 마시고 싶다라는 말을 하고 싶고
여행보다
여행 떠나고 싶다라는 말을
정작 연애보다는
사랑한다라는 말을 나는 좋아한다.

어쩌면 별도 사막일지 몰라
결국 지상에는 없는 불타는 지점
하지만 나는 별을 좋아한다.
나의 조국은 별 같은 말들이 모여서 세운
시의 나라
나를 키운 고향은 책인지도 몰라  














몸이 큰 여자

문정희  

저 넓은 보리밭을 갈아엎어
해마다 튼튼한 보리를 기르고
산돼지 같은 남자와 씨름하듯 사랑을 하여
알토란 아이를 낳아 젖을 물리는
탐스런 여자의 허리 속에 살아 있는 불
저울과 줄자의 눈금이 잴 수 있을까
참기름 비벼 맘껏 입 벌려 상추쌈을 먹는
야성의 핏줄 선명한
뱃가죽 속의 고향 노래를
젖가슴에 뽀얗게 솟아나는 젖샘을
어느 눈금으로 잴 수 있을까

몸은 원래 그 자체의 음악을 가지고 있지*
식사 때마다 밥알을 세고 양상추의 무게를 달고
그리고 규격 줄자 앞에 한 줄로 줄을 서는
도시 여자들의 몸에는 없는
비옥한 밭이랑의
왕성한 산욕(産慾)과 사랑의 노래가

몸을 자신을 태우고 다니는 말로 전락시킨
상인의 술책 속에
짧은 수명의 유행 상품이 된 시대의 미인들이
둔부의 규격과 매끄러운 다리를 채찍질하며
뜻없이 시들어가는 이 거리에
나는 한 마리 산돼지를 방목하고 싶다
몸이 큰 천연 밀림이 되고 싶다  


* 미국의 심리분석학자 클라리사 P. 에스테스가 한 말.  








조등이 있는 풍경

문정희  


이내 조등이 걸리고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아무도 울지 않았다
어머니는 80세까지 장수했으니까
우는 척만 했다
오랜 병석에 있었으니까
하지만 어머니가 죽었다
내 엄마, 그 눈물이
그 사람이 죽었다
저녁이 되자 더 기막힌 일이 일어났다
내가 배가 고파지는 것이었다
어머니가 죽었는데
내 위장이 밥을 부르고 있었다
누군가 갖다준 슬픈 밥을 못 이긴 척 먹고 있을 때
고향에서 친척들이 들이닥쳤다
영정 앞에 그들은 잠시 고개를 숙인 뒤
몇 십 년만에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위로의 말을 건넸다
"아니, 이 사람이 막내 아닌가? 폭 늙었구려."
주저없이 나를 구덩이 속에 처박았다.
이어 더 정확한 조준으로 마지막 확인 사살을 했다
"못 알아보겠어.
꼭 돌아가신 어머니인 줄 알았네"  













탯줄

문정희  

대학병원 분만실 의자는 Y자였다
어디로도 도망칠 수 없는
새끼 밴 짐승으로
두 다리 벌리고 하늘 향해 누웠다

성스러운 순간이라 말하지 말라
하늘이 뒤집히는
날카로운 공포
이빨 사이마다 비명이 터져 나왔다
불인두로 생살 찢기웠다

드디어
내 속에서 내가 분리되었다
생명과 생명이 되었다

두 생명 사이에는
지상의 가위로는 자를 수 없는
긴 탯줄이 이어져 있었다

가장 처음이자
가장 오래인 땅 위의 끈
이보다 확실하고 질긴 이름을
사람의 일로는 더 만들지 못하리라

얼마 후
환속한 성자처럼
피 냄새 나는 분만실을
한 어미와 새끼가
어기적거리며 걸어 나왔다  








손의 고백

문정희  

가만히 손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우리의 손이 언제나 욕망을 쥐는 데만
사용되고 있다는 말도 거짓임을 압니다
솨아솨아 작은 오솔길을 따라가 보면
무엇을 쥐었을 때보다
그저 흘려보낸 것이 더 많았음을 압니다
처음 다가든 사랑조차도
그렇게 흘러보내고 백기처럼
오래 흔들었습니다
대낮인데도 밖은 어둡고 무거워
상처 입은 짐승처럼
진종일 웅크리고 앉아
숨죽여 본 사람은 압니다
아무 욕망도 없이 캄캄한 절벽
어느새 초침을 닮아버린 우리들의 발걸음
집중 호우로 퍼붓는 포탄들과
최신식 비극과
햄버거처럼 흔한 싸구려 행복들 속에
가만히 손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생매장된 동물처럼
일어설 수도 걸어갈 수도 없어
가만히 손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솨아솨아 흘려보낸 작은 오솔길이
와락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시계와 시계 사이

문정희

이 아침 고장 난 시계 속에 눈을 뜬다
고장 난 시계가 이를 닦고
고장 난 시계가 밥을 먹고
고장 난 시계가 나이를 먹는다
그래도 어딘가 맞는 시계가 있으리라
나는 그런 시계를 하나 갖고 싶다
나는 CNN을 본다. CNN은 당황하여
고장 난 시계가 있는 곳에 특파원을 파견하고
꼬리를 잘 흔들고 손을 싹싹 비비고 눈치를 살핀다
고장 난 시계에다 총구를 갖다 댄다
고장 난 시계를 고치러 다니는 사람들을
대화라든가 외교라는 말로 보도한다
결국 모두가 제 힘으로 살다 가는 것
세상의 모든 시계를 똑같게 고칠 수는 없나 보다
너와 나 사이에는 어차피 시차가 있다
고장 난 시계로 길을 걷다가
교차로에 서서 시계탑을 본다
나의 시계가 맞는지 교차로의 시계가 맞는지
알 수 없다
모든 시계는 나이가 없다
제각기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다
















파 뿌리

문정희  

크고 뭉툭한 부엌칼로 파 뿌리를 잘라낸다
마지막까지 흙을 움켜쥐고 있는
파 뿌리를 잘라내며 속으로 소리지른다

결혼은 왜 시를 닮으면 안되는가
질기게 붙잡고 늘어져야 하는가
뿌리 없이 가볍게 날아다니는 깃털이란
그토록 두렵고 불안하기만 한 것인가
언제나 정주(定住)만을 예찬해야 하는가
가축처럼 번식과 무리를 필요로 하고
영원히 동반이어야 하는가
검은 머리는 언제 파뿌리가 되는가

나 오늘 파 뿌리를 잘라낸다
부엌칼 중 제일 크고 뭉툭한 칼로
남은 파를 술술 썰어
펄펄 끓는 찌개에 쓸어 넣는다  





















아침 이슬

문정희  

지난밤 무슨 생각을 굴리고 굴려
아침 풀잎 위에
이렇듯 영롱한 한 방울의 은유로 태어났을까
고뇌였을까, 별빛 같은
슬픔의 살이며 뼈인 생명 한 알
누가 이리도 둥근 것을 낳았을까
고통은 원래 부드럽고 차가운 것은 아닐까
사랑은
짧은 절정, 숨소리 하나 스미지 못하는
순간의 보석
밤새 홀로 걸어와
무슨 말을 전하려고
아침 풀잎 위에
이렇듯 맑고 위태한 시간을 머금고 있는가  


밤(栗) 이야기

문정희  

내 어머니는 분명 한쪽 눈이 먼 분이셨다
어릴 적 운동회 날, 실에 매단 밤 따먹기에 나가
알밤은 키 큰 아이들이 모두 따가고
쭉정이 밤 한 톨 겨우 주워온 나를
이것 봐라, 알밤 주워왔다! 고 외치던 어머니는
분명 한쪽 눈이 깊숙이 먼 분이셨다
어머니의 노래는 그 이후에도
30년도 더 넘게 계속되었다
마지막 숨 거두시는 그 순간까지도
예나 지금이나 쭉정이 밤 한 톨
남의 발밑에서 겨우 주워오는
내 손목 치켜세우며
이것 봐라, 내 새끼 알밤 주워왔다! 고
사방에 대고 자랑하셨다  


석남꽃

문정희

새벽 두 시인데 잠을 이룰 수가 없어요
나 아무래도 잘못한 것 같아요
저녁 때 사거리에서
청담사거리를 묻는 노인에게
그만 봉은사거리를 가리키고 말았어요
그 노인은 지금쯤 어디를 헤매고 있을까요

청담사거리를 찾다 지쳐
수천 마리 귀뚜라미들을 데리고 쓰러져 있을까요
외줄에서 떨어진 줄광대처럼
산발한 어둠 속에 떨고 있을까요
정육점의 불빛처럼 충혈된 밤
사방에서 컹컹 내지르는 짐승소리를 들으며
모래바람 날리는 자동차들 속에
털썩 무릎을 끓고 앉아
성직자처럼 기도를 올리고 있을까요

죽어서도 석남꽃 머리에 꽂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러 온 신라의 남자처럼
벌써 죽어 아름다운 관에 누워 있을까요

내 불면의 가지 끝에 검은 눈썹달이
갈매기처럼 끼룩거리고 있어요

세상에는 왜 이리 길을 묻는 사람이 많을까요
여보, 나침반과 지도는 모두 어디에 있지요  











혹  

문정희

자궁 혹 떼어낸 게 엊그제인데
이번엔 유방을 째자고 한다
누구는 이 나이 되면 권위도 생긴다는데
내겐 웬 혹만 생기는 것일까
혹시 젊은 날 옆집 소년에게
몰래 품은 연정이 자라 혹이 된 것일까
가끔 아내 있는 남자를 훔쳐봤던 일
남편의 등뒤에서 숨죽여 칼을 갈며 울었던 일
집만 나서면 어김없이
머리칼 바람에 풀어 헤쳤던 일
그것들이 위험한 혹으로 자란 것일까
하지만 떼내어야 할 것이 혹뿐이라면
나는 얼마나 가벼운가
끼니마다 칭얼대는 저 귀여운 혹들
내가 만든 여우와 토끼들
내친김에 혹 떼듯 떼어버리고
새로 슬며시 시집이나 가볼까
밤새 마음으로 마을을 판다




겨울 사랑

문정희

눈송이처럼 너에게 가고 싶다
머뭇거리지 말고
서성대지 말고
숨기지 말고
그냥 네 하얀 생애 속에 뛰어들어
따스한 겨울이 되고 싶다
천년 백설이 되고 싶다




성에꽃

문정희

추위가 칼날처럼 다가든 새벽
무심히 커튼을 젖히다 보면
유리창에 피어난, 아니 이런 황홀한 꿈을 보았나.
세상과 나 사이에 밤새 누가
이런 투명한 꽃을 피워 놓으셨을까.
들녘의 꽃들조차 제 빛깔을 감추고
씨앗 속에 깊이 숨 죽이고 있을 때
이내 스러지는 니르바나*의 꽃을
저 얇고 날카로운 유리창에 누가 새겨 놓았을까.
하긴 사람도 그렇지.
가장 가혹한 고통의 밤이 끝난 자리에
가장 눈부시고 부드러운 꿈이 일어서지.
새하얀 신부 앞에 붉고 푸른 색깔들 입 다물듯이
들녘의 꽃들 모두 제 향기를
씨앗 속에 깊이 감추고 있을 때
어둠이 스며드는 차가운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누가 저토록 슬픈 향기를 새기셨을까.
한 방울 물로 스러지는
불가해한 비애의 꽃송이들을.

* 니르나바 : 모든 번뇌의 얽매임에서 벗어난 경지인 열반을 뜻하는 말.
















비망록

문정희

남을 사랑하고 싶은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남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가난한 식사 앞에서
기도를 하고
밤이면 고요히
일기를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구겨진 속옷을 내보이듯
매양 허물만 내보이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사랑하는 사람아
너는 내 가슴에 아직도
눈에 익은 별처럼 박혀 있고

나는 박힌 별이 돌처럼 아파서
이렇게 한 생애를 허둥거린다.



가시  

문정희

어머니

나는 가시였어요
당신의 생애를 찌르던 가시

당신 떠난 후
그 가시가 나를 찔러요
내가 나를 찔러요

어머니



갈대숲을 지나며  

문정희

처녀 시절이여, 안녕

나에겐 증거처럼
웨딩드레스를 입고
수염자리 의젓한 신랑의 팔을 끼고 서 있는
한 장의 결혼사진도 있지만

이상도 하지
나는 한 번도 결혼한 여자가 아니었네
유부녀는 더구나 아니였네

방목해서 키운 튼튼한 아이들
넉넉한 평수에 편리한 부엌의 안주인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언제나 처녀였다네

집안에서 잠시 아내이다가
현관문을 나서면
어김없이 다시 처녀가 되었지

사람들은 모르지
세상엔 결혼한 여자가 없다는 것을
모든 여자가 독신이라는 것을

세상이 가지 자로는
재어지지 않는 넓이와 크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웨딩드레스 입고 사진 찍은 여자를
결혼한 여자라 묶어 버릴 뿐이지





윤경선   2018-07-27 13:19:31  
좋은 시 올려주심에 감사합니다
설레이는 마음으로 문정희 시를 읽고 만날날을 기다립니다.
  문정희 시인의 대담 및 강연 내용 모음 자료
  제6회 합천문학콘서트(이정록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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