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유효기간>
김정옥
혼자인 일요일
점심 챙겨먹으려 냉장고 문을 연다
달걀 두 개에 함께 넣을 재료 찾다
눈에 들어온
봉지 안에 속 문드러진 풋고추
랩에 싸인 채 곤죽이 된 두릅순
락앤락 안에 허연 곰팡이가 송송 솟은 뻘똥이며 앵두
올해 첫물 따며 생각나서 보내준 두릅순 풋고추
어린 시절 함께 먹던 추억이라며 보내온 뻘똥 앵두
두릅순 꺾다가 팔뚝이 온통 가시에 찔렸다는 깅숙이
이제 막 열기 시작해 더 없이 사랑스럽다는 풋고추 닮은 맹희
뻘똥이며 앵두 따러 가파른 산길 오르다 몇 번은 넘어졌을 깨숙이
미나리 마른 이파리처럼
바스스
무너져 내린다
문득
그 옛날 고향집
방 문고리 살며시 당겨보니
저기 저어기 안쪽
친구 유효기간
발끝에 달랑거린다
깅숙아, 맹희야, 깨숙아
아궁이에 불 지피면
혼곤히 잠든 친구들
배시시
기지개 켜고
한달음에 달려온다
<이십 년 후>
김정옥
첫눈 내리는 날
만나요 우리
크리스마스이브에 내리려나
섣달 그믐날 밤 몰래 내리면 어쩌지
사흘을 설레다가
이틀은 발 동동
이어지는 망설임
잦아드는 그리움
지금 창밖을 봐요
눈 같은 것이 내려요.
가로등 불빛에 그리움
터질 듯 환희 내리고
식탁엔
식어가는 찌개냄비 주인을 기다리는데
방망이질하는 심장 부여안고
밤을 견디는
여인
아무래도
길이 많이 미끄럽겠죠
사이
내 비탈길
예닐곱 번은 오르내렸을
첫사랑
만나러 가는 길
< 이방인 >
김정옥
동해바다에
밤새 토해낸 울음
시푸른 파도소리로 묻고
한계령 내려오는
차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팔 월 아침 태양
눈부심과 맞닥뜨리는 순간
방아쇠 잡은 손에
힘이 주어지는 나는
밤새 내린 눈 쓸어내며
출근 길 문 앞에서 웃으며 배웅해 주던
아버지
저녁나절에 싸늘한 주검으로 맞이하고도
다음날 점심에서
밥숟가락 마른 입술 안으로
꾸역꾸역 밀어 넣고 삼키는 나는
가장
처절한 순간에도
서쪽 하늘 붉게 물든 노을 보며
세상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도 있다니
허리를 펴는 나는
증오의 함성을 기다리는
뫼르소
<원동양반>
김정옥
친구네 집 사랑채 방 한가운데를
가로지른
미닫이문 창호지에 침을 발라 구멍을 뚫었다.
해마다 올벼를 질기*로
타작해서 중지** 명절을 지내는
친구 집에 해마다 오신다는 할아버지가 앉아 있다.
정수리에 올려진 솔방울 모양의 상투는
긴 머리카락을 쓸어 올려 만들었다.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글을 읽다가
가끔 손으로 수염을 쓰다듬으며
으흠으흠 마른기침을 두어 번 한다.
그 옆에는 갓이 놓여 있고
벽 횃대에는 도포가 넓게 걸려 있다.
예전에 아버지가 한 말이 생각났다.
“원동양반이 지금은 우리 집에서
남의집살이를 하지만
본시 뼈대 있는 가문의 장손인기라.”
할아버지 회갑연 때 찍었다는 사진 속에는
단발한 머리 위에
갓을 쓴 할아버지 삼 형제가 나란히 앉아있다
내 시의 오솔길에도
가끔 그 분이 다녀가신다
검은 도포자락에 묻은 이슬 툭툭 털며
할아버지, 부르면
되돌아볼 때 등대불 같은 두 눈이
나의 한 시절을 비추듯이
직진하다 서서히 꺼진다
*미리 당겨
**중구
<마지막 시험 시간>
김정옥
3학년 2학기말고사 마지막 시간
시험 감독에 들어가 교탁 앞에 서니
맨 앞에 앉은 꾀돌이 석권이가 동그란 눈으로
선생님, 오늘따라 참으로 예쁘십니다요!
으응?
오른쪽 창문 쪽에 팔짱을 끼고 앉은 동환이도
오늘 선생님은, 시로 표현할 것 같으면 정형시도 자유시도 아닌 예쁘시다가 되겠습니다.
여기저기서
킥킥, 흐흐흐
왼쪽 맨 뒤에 앉은 자칭 신사 창진이도 뒤질세라
오늘 선생님으로 말할 것 같으면 자유인도 시인도 아닌 미인이십니다.
호들갑이다
이쯤 되니 반장인 창훈이도 도저히 그냥은 못 있겠다는 듯 과묵에서 벗어나 기어이 한 마디 거든다.
선생님은 들판에 핀 가을 들꽃 중에서도 보라색 한 송이 들국홥니다.
발을 동동 구르며 웃는 학생
책상을 투당투당 치며 머리 박는 학생
박장대소 하는 학생
미술 시험은 뒷전이다.
으흐흐, 요 녀석들
3년 동안 고렇게 애를 먹이더니
오늘 인심 한번 옹골차게 쓰는데?
시험 끝나고 나면 거하게 한턱 쏘아 볼까나
그때
맨 뒤에서 유독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범생이 종수의 팬 목소리
“선생님 시험지 안 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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