뚝순이 언니 연락을 받고 신이 났다. 함양군 휴천면 산 중턱에 있는 언니네 펜션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로 한 것이다. 코로나 19 확산으로 생긴 우울감이나 무력증을 떨칠 기회이다.
합천에서 산청으로 넘어가는 꼬불꼬불한 길목에도 봄은 찾아와 손짓한다. 벚꽃 떨어진 자리에는 아기 살결 같은 보드라운 잎들이 미소를 보내준다. 등이 굽은 할머니는 유모차에 의지하며 산길을 조심스레 가고 있다. 간혹 지나는 차들과 하늘의 구름을 바라보는 할머니에게 코로나는 딴 세상의 일인 듯 보인다.
노란 별처럼 생긴 애기똥풀, 보라공주 같은 여린 제비꽃, 파릇하게 피어 논두렁 가득 행복을 담은 클로버, 앉은뱅이 해바라기꽃 같은 민들레, 싱겁게 웃자라 후들거리는 냉이꽃들까지 애당초 코로나가 들어설 자리는 없었던 아름다운 곳이다.
나는 길치다. 내비게이션이 알려주는 대로 가도 엉뚱한 곳이 나온다. 지난번에는 뚝순이 언니와 동행했는데 오늘은 혼자서 찾아가는 길이다. 긴장되어야 하는데도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길을 잘못 들더라도 돌아오는 길도 봄날일 테니까. 무작정 따라 가볼 요량이다. 맘이 들떠서인지 조바심도 나지 않는다. 내일이 휴일이니 출근 걱정할 필요도 없다. 여유로운 길은 시야에 들어오는 풍경들 또한 한 폭의 그림이 된다.
산장은 지리산 향로봉 줄기를 타고 내린 산 중턱 400미터쯤 자리를 잡았다. 문을 열면 앞은 맑은 계곡이 흐르고 뒤편에는 소나무들이 울창하게 우거져 아늑하다. 그런 지리적인 조건이라면 신성한 기운이 감돈다고 했던가. 그런 곳이니 더욱 기대된다.
집은 화려하거나 세련되었다기보다 뚝순이 언니처럼 아담하다. 방 하나에 거실 겸 부엌으로 쓰는 공간에 우직한 벽난로가 오래된 친구 같이 놓여있다. 편안하고 기분이 좋아지며 자꾸 가고 싶은 곳이다. 주인 또한 후덕하여 냉장고에는 누구라도 와서 음식을 해 먹을 수 있도록 먹거리들이 빼곡하게 차 있다. 장작을 패서 쌓아두고 군불을 지펴 가며 추억도 곱씹을 수 있게 해 놓았다.
문만 열면 사방이 자연 정원이다. 나는 유달리 큰 아름드리 노송이 맘에 든다. 마치 천년을 넘게 터를 지켜주는 터줏대감처럼 우뚝 서 있다. 두 팔을 뻗어 끌어안아도 모자라는 우람한 소나무는 ‘노송 할배'라는 이름도 가졌다. 우리가 처음 가던 날 언니가 막걸리를 좋아하는 소나무 할배라고 소개했다. 오늘은 맛있고 시원한 합천 막걸리로 인사를 해야겠다고 서너 병을 준비했다.
정 많은 뚝순이 언니는 먼저 도착해 벽난로 가득 군불을 지펴 두었다. 방안을 훈훈하게 하고 군고구마까지 구워놓고 우리를 기다렸다. 마음이 오색 풍선처럼 들뜬다.
손끝이 야무진 순둥이 언니는 남편 몰래 매실주를 또 준비했단다. 지난번 만났을 때 남편이 담은 매실주가 요즘 아이들 말로 인기 짱이었다. 기분이 좋은 맛으로 이야기의 흥을 북돋워 주지 않았던가. 기대된다. 뚝순이 언니는 쌀가루를 챙겨왔단다. 오늘은 쑥을 캐서 쑥버무리를 해 줄 모양이다. 쌀가루를 묻혀 몰캉하게 쪄서 먹으면 각자 묻어두었던 그간의 이야기가 푸른 쑥처럼 파릇파릇하게 피어날 것이다.
뚝순이 언니 애칭은 결혼하고 나서 붙여졌단다. 사업하는 형부가 몸이 편찮으셨던 모양이다. 허약한 남편 대신 젊은 새댁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억척같이 일을 한다고 사람들이 붙여준 별호였다. 그때 무리한 탓도 있을까. 언니는 허리에 복대를 하고 일을 한다. 날씨가 싸늘해지면 허리가 더 아프다고 하니 마음이 짠하다.
순둥이 언니는 할머니께서 늘 강아지라고 어르며 키운 탓에 형제들도 강아지라고 불렀다고 한다. 언니를 처음 만나던 날 웃는 모습이 하도 순해 보여 내가 순둥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생각도 긍정적이고 성품 또한 순하고 고와서 ‘순둥이 언니’라는 이름이 잘 어울린다.
좋은 장소에서 좋은 사람들과 좋은 시간을 함께한다는 것은 기쁨이다. 살면서 가끔 이런 힐링의 시간은 필요하다. 한 이벤트 회사는 직장인을 위해 상사에게 고함을 지르게 하고 사표를 써보게 하는 행사까지 마련했다지 않는가. 그러고 보면 차이는 있겠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스트레스를 피할 수 없는가 보다.
일을 처리할 때 스트레스를 받으면 쉬는 시간도 재미가 없어진다. 혼자서 조용히 삶을 돌아보고 계획하는 시간을 갖는다는 것은 언감생심이다. 일을 시작할 적에는 계획을 세우고 많은 신경을 쓰지만 정작 쉬어야 하는 일에는 현실은 만만치 않다. 쉬는 것도 계획과 연습이 필요한 것이다.
남편과 아이들을 두고 잠시 떠날 수 있다는 건 아내만의 특권이고 희망 사항이기도 하다. 호젓한 밤, 별을 헤아리며 달도 보고 부엉이 울음소리 들으니 밤은 짧기만 하다. 먹거리를 만드는 방법을 나누는 것도 즐거움이고 음식을 해 먹는 것 또한 빼놓을 수 없는 기쁨이다. 여자의 수다는 보약 먹는 것 이상으로 보상이 되는 금쪽같은 시간이다.
여가의 건강한 즐거움은 가족은 물론 이웃에게도 에너지를 불어넣어 줄 힘을 얻는다. 오늘은 코로나를 이기고 건강하게 잘 살기 위한 힐링 날이다.
꿈속에 뵈옵고
이 동 실
꿈을 꾸었다. 시댁에 큰 잔치가 열렸다. 작고하신 시조부님과 시아버님이 보인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 이야기가 풍성했다. 그때다. 대문으로 친정아버지께서도 들어오시는 게 아닌가. 움찔했다. 먼 길 떠나신 지 40년이 지났건만 여전히 원망과 두려움으로 남아있었던 걸까.
아버지는 일신이 좋아 보이신다. 어머니가 손질한 하얀 모시 두루마기 의관에 부채를 드시고 두리번거리는 나의 속내까지 읽어낸다. 너희 엄마와 같이 왔다며 시댁 잔치에 초대해 줘서 고맙다고 하신다. 말씀도 다정하고 따뜻하다. 눈빛 또한 근엄하고 냉철하기만 했던 아버지가 아니다. 그토록 원하던 가슴 뜨거워지는 만남이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뒤를 따르고 계신다. 아버지가 좋아하시던 쪽머리를 곱게 빗어 비녀를 꽂으셨다. 두 분이 차려입고 함께 외출하는 일은 가뭄에 콩 나듯이 보기 드문 행사였다. 집안에 혼인 잔치 같은 큰일이 있다는 것을 뜻하지 않았던가. 그럴 때처럼 어머니는 아버지의 그림자처럼 조용히 웃고 계신다.
두 분은 안색도 밝고 좋으시다. 아버지께서 내 어깨를 다독이며 잘 지내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신다. 그 말씀에 덜컥 아버지 팔을 잡고는 채근했다. 다시는 어머니를 힘들게 하거나 외롭게 해 드리면 안 된다고. 생시 같으면 엄두도 못 낼 일에 용기를 냈다. 아버지도 호통이 아니라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신다. 시댁 어른들이 모이신 자리에 친정 식구가 번잡을 떠는 건 실례라며 작별 인사를 하셨다. 나도 손을 흔들어 보였다.
물과 기름처럼 겉돌기만 했던 부녀 사이가 소통되는 시간이었을까. 나도 아버지가 있다는 든든함으로 다가왔다. 그 보이지 않았던 힘이 시집살이의 힘든 고비마다 에너지로 지켜주고 있었구나 싶다. 말없이 불어 든 훈풍의 힘줄 같다. 웅숭깊은 아버지의 사랑에 얼어붙었던 마음이 눈 녹듯 사르르 녹아내렸다. 훌쩍이는 내 울음소리에 놀라 눈을 떠니 꿈이다. 현실처럼 생생한 꿈.
어머니가 먼 길을 가신지 일 년도 채 되지 않은 시간이다. 아버지가 그립고 아버지 곁으로 갈 것이라 하시곤 꽃잎 노랗게 물드는 가을날에 떠나셨다. 두 분이 만났을까 했었다. 비 온 후 맑게 갠 하늘을 본 듯 상쾌하다. 시댁 어른들과 친정 부모님을 한자리에서 뵙다니 신비롭다. 며칠 후면 시할아버지와 친정아버지의 기일이 일주일 간격을 두고 있다. 현몽일까.
친정아버지를 떠올렸다. 생전의 아버지는 야단칠 일만 찾아내는 것처럼 자식들을 단지 귀찮은 식솔로만 여기는 것 같았다. 그럴 때면 서러움은 엎치락뒤치락 가슴을 후볐다. 그때부터였을까. 아버지는 내게 겨울을 풀어놓은 높고 시린 바람이었다.
그에 대한 어머니의 불만도 컸다. 자식들을 주워 온 것도 아닌데 남의 자식 대하듯 하냐고 아버지를 향해 지청구를 쏟아내곤 했다. 그럴 적마다 마음속으로 어머니를 응원했다. 어머니 말이 구구절절 지당한 말씀이라고. 아버지는 먼 길을 떠나실 때도 가족들을 위한 준비도 없이 어머니께 우리를 맡겼다. 그랬는데 두 분이 함께 꿈속에 다녀가신 것이다.
아버지가 떠나시고 몇 해후 직장을 가졌고 나는 합천으로 시집을 왔다. 시댁의 분위기는 친정과 사뭇 달랐다. 시아버님은 정이 많고 표현을 해 주시는 분이셨다. 무언의 사랑을 전하는 친정아버지와 달리 시아버님은 생선 뼈를 발라 밥 위에다 올려도 주셨다.
며느리가 좋아하는 것을 챙겨주길 좋아하셨다. 먼저 전화를 걸어와 어려운 일들을 살펴 주셨다. 그런 일들이 익숙지 못했던 나는 조심스럽기만 했다. 그래서 당신을 싫어하는 것 같다고 아버님께 서운함의 오해를 드리기도 했다. 아버지의 자식에 대한 바람이었을까. 아버지께 받지 못했던 사랑을 시어른들로부터 듬뿍 받았다.
나도 이제 아버지의 그 나이만큼 되었다. 부모가 되고서야 아버지의 무거웠던 어깨가 느껴진다. 아버지도 처음 걸어본 아버지의 길에서 얼마나 힘들고 고달프셨을까. 잘하고 싶었고 잘 살고자 애쓰며 내 자식을 최고로 키우고 싶었을 것이다. 부모란 그런 맘이란 걸 이제 조금은 알 것 같다. 아버지께 엎드려 미욱하고 어리석은 불효에 용서를 빈다.
부모님과 시댁 어른들까지 뵌 오늘은 참 행복한 날이다. 가끔 이런 행운이 내게 와 준다면 좋겠다. 비록 꿈속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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