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사랑 사화집
합천을 걷는다
요즘 꼭 하나, 빼놓지 않고 하는 일이 있다. 그 일이 바로 취미로 걷는 일이다. 취미라고 했으니까 하는 말이지만 걷는 일만큼 좋은 취미가 있을까. 걸을 때 나 혼자면 오히려 바빠진다. 물론 평소에는 옆에 사람이 있으니까 집중을 할 수 없고 여럿이 함께 걸어갈 때는 어렵지만, 나 혼자 걸을 때는 황매산자락의 경치에 빠져들기도 하고 깊은 사색에 잠기기도 한다. 나이 들어가는 저녁황혼이 저 멀리서 오라고 손짓을 하는 지금에야 사색의 묘미를 느꼈다는 게 아쉽지만 어쩌랴, 나 같이 되는 대로 살았던 사람이 늦게나마 깨달았다는 사실도 고맙다.
이리 걷기에 푹 빠져 살아가는 나와는 반대로 나를 핀잔 일색으로 대하는 사람이 있다. 아내다. 이 사람 말에 의하면 내가 걷기를 잠자는 일보다 더 열심히 하고, 중요하게 생각한다면서 가끔은 이상한 사람으로 보거나 비정상이라고 한다. 마당에 풀도 뽑아야 하고 집안에 할 일도 많은데 꼭 그 걷는 일의 목표량을 오늘 채워야 하고, 내일로 미루거나 안하면 안 되느냐고 핀잔 비슷한 말을 들을 정도로 정말 나 혼자서 집요하게 하는 일이다. 하루의 목표가 7천보인데 그 목표를 채우지 못하면 이불을 펴둔 좁은 방안에서 뱅뱅 돌다시피 걷다가 휴대폰의 만보기 앱에 7천보가 지났다고 표시 되어야 자리에 눕는다. 하긴 이런 나를 정상이라고 받아준다면 오히려 그 사람이 비정상이 되겠지만,
추우나 더우나 한결같이 하루 7천보를 걷겠다는 나 자신과 약속을 한 지 벌써 10년이 지났지만 아직은 그런 데로 잘 걷는다. 내가 이리 애써서 걷는 줄은 모르고 내 자세가 아직은 바르다고 말을 하면서 부러워하는 분들이 있다. 세월이 그리도 흘렀고 내 나이도 70대 중반을 넘어가지만 이렇게 꼿꼿하게 다닐 수 있는 건 계속 걸었기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와의 약속이니 뭐니 하며 나를 옥조이게 졸라매듯 끊임없이 걸으려 하지만 걷는 일이 귀찮아 질 때도 있고 나도 모르게 게으름이 불쑥불쑥 불거지지만 그래도 오늘 하루만 더 견뎌보자 오늘만, 하며 나를 닥달할 때도 있었다. 하루만 더 고생하고 땀 흘려보자 하면서 나를 들볶다시피 달래고 걷는다.
그리 열심히 걷는 산책로 중에서 가장 손쉽게 다니는 길은 아무래도 집 앞에 있는 마을 저수지를 한 바퀴 도는 길이다. 요즘 시골 어느 곳이든지 저수지가 있지만 우리 마을의 대기저수지는 혼자 유유자적하며 경치를 즐기고 걷기에는 아까울 정도다. 저수지 길을 따라 걸으면 걷는 내내 하나의 거대한 수석으로 다가오는 천하명산인 모산재가 펼쳐진다. 쌍사자석등이나 돌거북과 같은 역사의 흔적을 남긴 영암사 폐사지터까지 올랐다가 저수지 주변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의 항상 변하는 풍경을 사계절 움직이는 영상으로 감상하게 된다. 정말 어제까지 저수지의 수면 위에 눈이 덮여서 쌓였던 얼음이 녹고 황량하고 메말랐던 그 겨울의 차디찬 땅에서 진달래가 피고, 메마른 수양버들가지에서 보들보들한 버들강아지가 통통하게 부풀듯 나오고, 부들이 자라면서 봄을 맞이한다. 여름의 무성한 초록에, 땀 흘린 더위를 시원한 저수지에 발 담그며 여름을 식히고, 가을은 오자 말자 벌써 겨울차비를 차린다고 아름다운 오색단풍이 낙엽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는 것 같다. 가을의 단풍든 색색의 이파리가 색갈이 붉게 변하고 떨어지면서 바람에 따라 낙엽 구르는 소리까지 아름답다.
이렇게 아름답게 변하는 경치이지만 집주변만을 걷다 보면 어느 순간 똑같은 풍경을 접하니 지루하게 느껴지거나, 걷기에 대한 의욕마저 줄게 되면, 걷지 않고 집에서 책이나 읽으며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지만, 합천읍에 있는 도서관에 나가서 글을 쓰거나 책을 잡게 되면 7천보라는 오늘의 걸음목표도 달성하리라 작정한다.
그래서 책읽기를 마치고 도서관에서 나와 바로 황강으로 간다. 잔디가 파랗게 펼쳐진 체육공원에 넓게 조성된 축구장까지 걷는 기분은 시원하고 신선하다. 이 길이 나를 사로잡는 건 바로 황강변을 거닌다는 거다. 지금 내가 사는 곳이 황매산 아래라 저수지만 보니 강이나 바다와 같은 큰물을 보는 일이 드물지만 합천만 나오면 저절로 강을 따라 걸으니 일석이조다.
게다가 활을 쏘며 심신을 가다듬는 죽죽정도 지나고, 황우산 아래 절벽 가까이에 지어진 연호사라는 천년고찰을 둘러보며 걷거나, 황강변에 아름답게 자리 잡아 오가는 길손을 정자 안으로 불러들이는 함벽루에서 잠시 쉬며 저녁놀이 아름답게 물든 강을 바라보는 고즈넉함이 있는 곳이다. 이 함벽루는 이 정자 누각처마에 내린 빗물이 바로 황강으로 떨어지도록 배치되어 유명한 곳이 되었다. 이게 바로 이 길을 산책하는 재미다.
축구장이 거의 끝나가는 길에 돌 징검다리로 황강을 건너간다. 이 돌다리를 건너다보면 아련한 어린 시절이 생각나고 향수에 젖게 만들지만 조금은 물에 빠질 각오도 하면서 울퉁불퉁한 이 돌다리를 건너 갈마산까지 오른다. 이젠 바쁘다고 잘 오르지 않지만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산꼭대기까지 너무 쉽게 올랐던 길이었다. 이런 말없는 고생과 재미가 나를 합천에 살게 만든다. 이런 산책은 나에게 함께 세월을 견디는 힘을 준다.
몇 년 전에 우연히 알게 된 또 다른 아름다운 길이 있다. 우리 합천이 자랑하는 볼거리인 영상테마파크 곁에 있는 이 길은 내가 좋아하기도 하고 아름다워서 내 수필에도 그 감상을 올릴 정도인데 제목이 <혹시 천국을 보셨나요>라며 감탄한 산책길이다. 정말 나 같은 도시 출신의 사람들에게 눈에 쏙 들어오는 곳이다. 이 길에 대한 느낌으로는 “나는 천국에 살고 있다. 아침 일찍 산책을 나선다. 잘 다듬은 나무계단을 따라 오르락내리락 하며 만들어진 길에 꼬불꼬불 잘 다듬어 놓은 길, 정성 드려 가꾼 수목 틈으로 비죽히 얼굴을 내미는 야생화, 참 아름답다.”
사실 이곳은 내 글보다 훨씬 아름답다. 조정지댐의 호수에 낮게 깔린 물안개, 바로 위에는 악견산이 그림처럼 둘러있다. 산허리를 휘감는 안개에 조정지 댐의 수면에서 오르는 물안개, 재잘대는 여러 종류의 새소리에 마을에서 멀리 들리는 수탉의 뭉툭한 소리는 이 모든 자연이 살아있다는 소리인 것 같다.
이 아름다운 경치를 내 얕은 필설로는 다 형용하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용기를 내어 표현해 보려 하며 부족한 부분은 직접 오셔서 느끼시면 좋겠다.
악견산을 배경으로 조정지댐의 호수면에 비치는 산이 거꾸로 서 있는 풍경에다, 아침안개가 피어오를라 치면 그 자체가 한 폭의 동양화다. 나는 합천을 드나들 기회가 많으니까 이런 풍경을 자주 보게 되지만 어느 날에는 그 물안개 피어오르는 정경을 찍기 위해 사진작가들이 몇 십 명이나 모여서 카메라를 들이대며 작가들이 바라는 장면이 나오거나 아름다운 광경이 펼쳐지면 놓치지 않고 찍으려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다. 그럼 이 그림처럼 멋 잇는 풍경을 그림으로 그리고 싶은 화가는 없었을까, 어느 화가가 이 아름다운 풍경을 그리고 싶어 하지 않을까. 이 아름다운 길을 어느 누가 매일을 걷고 싶지 않으랴.
이런 쉬운 7천보를 걷는 일조차도 2,3년 전만해도 어렵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이젠 조금씩 힘에 부쳐온다. 늦은 오후 지나서는 하기 싫고 내일로 미루고 싶을 때도 있다. 그러나 어떤 일이 있어도 나와의 약속이라 기를 쓰고 지키려 한다. 내가 귀촌한 사람으로 이 걷는 일울 열심히 하면서 합천의 주변 경치에 더 관심을 가지고 보거나 아름다움에 감탄하면서 새삼 합천에 대한 애향심이 더 생긴다고나 할까. 이렇게 걷다보면 어느새 마을사람들도 함께 나서서 걷게 되어 웃을 일도 자주 생긴다. 우리 마을을 걷기 명소로 지정해 달라고 건의하자면서 우리끼리 웃는다.
그렇다면 내가 이 걷는 일을 왜 그리도 악착같이 하려 할까. 그런 나를 나도 분석해 보고 싶다. 이 늙어가는 나이에 뭘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끌려가듯 해내야 하고, 때로는 이 일에 매달리다시피 해내려 하는 이유가 뭘까.
이 문제에 대한 답을 나의 짧은 지식과 경험으로만 풀려고 하지는 않겠다. 우리 인간이 그 까마득한 고대 이후에 창조되고 난 후 가장 자주 하고 많이 한 일이 무엇일까를 생각해보면 답이 있지 않을까. 이 글을 읽는 독자 여러분도 잘 생각해보시기 바란다.
우리 인간이 원시인이었을 때부터 현대까지 무슨 일을 가장 자주 했고 많이 했을까? 잠자는 일에 먹는 일을 자주 한 건 우리 목숨을 부지하려면 빼먹을 수도 없고 안 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 자주 했겠지만 먹고 잠자고 일하는 그 다음은 무엇을 했을까. 거듭 말하지만 농경민족이나 유목민족을 포함하여 우리 인간이라는 종이 무슨 일을 자주 했을까? 우리 인류의 조상들은 계속적으로 무슨 일을 하며 부족한 먹는 양식을 거두어들이고, 춥고 어려운 환경을 견뎌냈을까. 정말 나 혼자만의 추측으로 생각해보면 아마 걷는 일을 가장 자주 하는 일이 아니었을까. 물론 농사를 지으면 한자리에 앉아 있게 되니 많이 걷지를 못하겠지만 여러 군데의 밭이 있거나 산너머에도 경작지가 있으면 멀리라도 안 다닐 수가 없지 않았을까? 그래서 인간은 걷는 일을 가장 많이 한 게 아닐까? 마찬가지로 산토끼나 고라니 같은 야생동물을 잡아야 한 끼의 고기 맛을 볼 수 있는 인간은 뛰고 걸으면서 사냥하고 수렵하는 그 일을 해내지 않았을까? 이렇게 생각하다보면 답은 저절로 나온다. 인간은 살기 위해서 먹었고 살기 위해서 뛰고 걸었노라고. 그러면 걷지 않는 인간은 밥도 제대로 챙겨먹을 수가 없었으니 벌써 소멸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지 않았을까? 그러니 살기 위해서라도 걸어야 한다.
현대의 우리 인간은 보건학이나 인체를 연구하는 학문도 크게 발달하여 걷기를 게을리 하거나 그렇게 편히 살게 되면 비만이 되고 어느새 병에 걸리게 되니 운동하라고 가르치고, 걸으라고 언론에서도 지시를 내린다. 반대로 문명이 발달하여 자동차를 항상 탈 수 있으니까 편해서 좋기는 하지만 결정적인 문제는 걷는 일을 미루고 안하게 되면 어느 순간 운동부족에 걸리게 된다. 다시 말하지만 살기 위해서라도 걸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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