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강사 할미꽃
몇 해 전부터 인 것 같다. 봄이 되면 이끌리듯 허굴산 자락에 위치한 청강사로 발길이 옮겨진다. 크고 작은 바위들로 이루어진 허굴산은 강한 힘이 느껴지면서 울퉁불퉁 뾰족 바위들이 신비스러움을 더해주는 산이다. 그 품에 안기 우 듯 터를 잡고 조용히 내려앉은 청강사는 바라만보아도 마음이 평화로워진다. 절 입구에는 큰 너럭바위 두 개가 젊잖게 앉아있어 절을 찾는 이 들에게 편안함을 안겨준다. 절 주변을 애워싸고 있는 아름드리 벚꽃 나무는 몇 백 년이 되었음직한 세월의 흔적이 남아있다. 그러면서 벚꽃이 만개한날에는 온통 하얀 꽃으로 하늘을 뒤덮고 있어 과히 장관을 이룬다.
해마다 봄이 되면 홀린 듯 청강사를 찾는 이유는 벚꽃의 아름다움 때문만은 아니다. 몇 십년만에 귀하게 만난 할미꽃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내 유년시절에는 양지쪽 잔디 속에 지천으로 피어서 쉽게 만날 수 있는 꽃 이였는데, 언제부터인지 할미꽃이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려서 몹시 안타까웠었다. 그런데, 어느 봄날 청강사로 벚꽃구경 갔다가 법당 옆 잔디밭에, 또, 법당 뒷켠에 작은 무리지어 피어있는 할미꽃을 발견하고는 얼마나 반가웠던지 크게 심호흡을 한번 한 다음 진한 입맞춤을 했었다.
대개 꽃 하면 청춘과 미의 상징인데 비해 할미꽃은 그렇지 못해 연민을 불러 일어 킨다. “젊어서도 할미꽃 늙어서도 할미꽃”이라던 박목월님의 동요처럼 나면서부터 허리가 굽고, 또 하얀 솜털을 뒤집어쓰고 있어 할미꽃이라고 이름 불러 진 게 아닌가 싶다. 우리가 60년대 교과서를 통해 읽혀졌던 할미꽃에 얽힌 전래동화는, 어린소년소녀의 가슴에 효에 대한 애틋함을 심어주어 가슴을 찡하게도 하였다. 두 손녀를 키워 시집보낸 할머니가 늙어 의지할 곳이 없게 되자 부잣집으로 시집간 큰 손녀를 찾아 갔으나 문전박대 당했다. 할 수없이 마음씨착한 작은손녀를 찾아가다 고개를 넘던 중에 그만 할머니는 기진하여 쓰러지고 말았다. 뒤늦게 그 사실을 알게 된 작은손녀가 할머니의 시신을 양지 바른 곳에 묻어드렸다. 이듬해 할머니의 무덤가에는 허리 굽은 할미꽃이 피어난 것이다. 이러한 전래동화의 영향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할미꽃하면 예쁘다 아름답다보다는 우리마음에 애틋함을 안겨주는지도 모르겠다.
청강사의 할미꽃과 맨 처음 만나던 날, 불현듯 내 어렸을 때의 뒷집 할머니 모습이 왜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일흔을 넘기신 뒷집할머니는 하얀 머리에 느슨하게 비녀를 꽂으시고, 허리는 굽고, 버드렁니에 치아가 듬성듬성 빠져있었고, 넓적한 마당발이셨다. 늦게 결혼한 외 아들한테서 얻은 첫손자는 홍역하다 잃어버렸고, 고된 시집살이를 견디다 못한 착하고 어린 며느리는, 유난히 노을이 곱던 어느 여름날 작은 보따리하나 안고 집을 나가 버렸다. 할머니하면, 인자하면서 정이 많고, 너그러움의 대명사로 우리머릿속에는 각인 되어있다. 그런데 뒷집할머니는 욕심도 많고, 심술도 많은 게 여느 할머니와는 많이 달랐던 것 같다. 먹을 것이 귀하던 옛날에는 떨어진 감을 주우려고 첫새벽에 일어나 호롱불 켜들고 동네감나무 밑을 몇 번씩 돌곤 했던 기억들이 이제는 미소 짓게 하는 추억이 되어 내 곁에 머문다. 홍시가 되면 껍질이 아주 얇으면서 쫄깃하고, 유난히 달콤했던 두리감나무 하나가 우리 집 뒤에 있었는데 쿵하는 소리와 함께 홍시가 하나 떨어지면 뒷집할머니와 나는 혈안이 되어 100M달리기가 시작된다. 신발을 벗은 체 큰 발로 성큼성큼 달려와도 나보다 빠르진 못하다. 달콤한 홍시 먹을 생각에 환한 얼굴로 감을 집어 일어서면 “아까 그거 내가 마차난기다. 이리 도라”면서 냉큼 낚아 채간다. 나는 속으로 뒷집 할매는 도사님인가보다 감나무에서 언제 감이 떨어질 거란 걸 다 알고 있으니 참 신기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몇 번은 그렇게 당했지만 나중에는 두 손아귀에 꽉 움켜쥐고 울어버렸다. 그 후로는 할머니도 포기를 하였는지 자기 것이라고 우기지는 않았다.
재물을 많이 소유하고, 높은 위치에 있으면서도 만족할줄 모르면 행복함을 모르는 사람일 것이다. 내 것이란 집착을 버리고, 욕심을 적게 가지고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부처의 삶일까? 이웃이, 내 주변 사람이 행복해야 나도 행복하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또, 얼마나 많은 시간을 소비해야 할까? 어린 나이였지만 욕심과 심술이 뒷집할머니의 노후를 불행하고 슬프게 만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었다. 언제 시간이 허락하면 청강사 부처님께 지극한 마음으로 나를 아는 모든 이들이 뜻하는 일 이루어 행복하게 해달라고 정성을 다해 기도드리고 싶다. 그리고 내년에도 할미꽃을 만나러 청강사를 찾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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