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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사랑 사화집(이동실)
추천 : 17 이름 : 이동실 작성일 : 2022-04-25 11:16:31 조회수 : 52
내 젊은 날의 꿈  
              이동실

책장 정리를 하다 빛바랜 책 한 권이 우연처럼 눈에 들어온다. 수십 년의 세월을 건너뛴 아련한 기억처럼 희미하게 드러나는 제목은 심훈의 소설『상록수』이다. 주인공 동혁과 영신이가 펼친 희생과 꿈의 열정은 내 마음마저 홀리고 나를 합천에 뿌리내리고 살게 한 마중물이기도 하다.
그즈음 나는 학교를 졸업하고 대구 시내의 한 유치원에 근무하고 있었다. 도회에 있는 좋은 시설과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잘 갖춰진 교육 조건이 좋은 곳이었다. 편리한 교통과 문화생활에도 부족함이 없었으니 삶의 질이 높았던 시절이었다.
가을바람에 낙엽이 흩날리는 어느 날 오후로 기억된다. 신사 한 분이 창문 너머로 기웃거리며 교실 안을 살폈다. 연유를 물었더니 사회교육부에 유치원 교사를 의뢰하기 위해 합천에서 대구까지 왔단다. 합천이 어느 지역에 있더라도 별 관심이 없던 내게 그는 푸념이라도 하듯 갈 생각도 하지 않고 도시의 교육 조건이 부럽다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풀어 놓았다.
교회 부설 유치원을 설립한 지 삼 년째를 맞이했으나 환경이 열악하다 보니 교사들이 일 년을 넘기지 못하고 떠난단다. 아이들을 사랑하는 선생이 희생으로 아이들을 지도해주면 좋겠다는 말에 가슴이 저몄다. 기회가 되면 봉사하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쉽게 결정할 일은 아니었다. 부모님께서 허리가 휘도록 농사지어 보내주신 등록금으로 편하게 공부한 내가 열정만으로 아무런 연고도 없는 곳으로 간다고 하면 가족들의 반응이야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지인들이라고 다르겠는가.
상념이 깊어질수록『상록수』책 속의 주인공인 동혁과 영신이는 내게 등 떠밀며 힘을 내라는 듯하였다. 마음이 앞선 나는 뚜렷한 계획이나 어떤 목표도 없이 교사가 없다는 말에 각오를 다짐했다. 지금 실천하지 않으면 언젠가 더 많이 후회할 것 같은 자신감에 찬 결정이었다. 도시의 편리한 생활을 접고 벽지의 아이들을 가르치고 싶었던 내 푸르렀던 날 들끓던 열정이 용기로 부추긴 셈이다. 만류하던 가족들과 안타까워하던 직장동료들에게 3년만 봉사하고 돌아오겠다고 했다.
1986년 2월. 대구 서부 정류장에서 합천 가는 시외버스를 탔다. 시내를 벗어난 차가 비포장을 달리기 시작했다. 산으로만 둘러싸인 길은 돌아 돌아도 긴 띠처럼 끝없이 이어졌다. 경북과 경남의 경계를 짓는 지릿재를 넘어서면서는 덜컹거림에 어지러움을 견디지 못하고 멀미는 시작됐다.
버스는 초행길을 나선 나에게 눈곱만한 배려도 없이 사정없이 앞으로만 내달렸다. 차려입은 원피스 하얀 소매 끝자락이 열어둔 창문으로 날아든 흙먼지로 뽀얗게 얼룩지고, 발이 부어 구두를 벗어 던진 맨발이 강아지 발바닥처럼 까맣게 됐다. 열정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니 정신을 차리라던 이들의 수많은 말들이 화살처럼 쏟아졌다. 혼미해졌다. 누군가 합천 도착이라고 하는 말이 바람이 전하는 소리처럼 아득히 들렸다. 정신을 차리고 내려보니 버스는 허허벌판 판잣집 같은 합천 터미널에다 나를 내려놓고는 먼지 속으로 미끄러지듯 사라졌다.
유치원 출근을 했다. 말로만 듣던 상황보다 더 열악한 환경이 펼쳐졌다. 출입문은 합판으로 만든 지 오래인 듯 삭아 내리기 직전이었고, 바람드는 교실 틈은 벽지로 발라 두었다. 한참을 가야 하는 크고 깊은 재래식 화장실은 불편하고 두려웠다. 더운 날이면 설 잠 깬 똥파리가 생떼를 쓰듯 앵앵거렸다. 아이들을 위한 교구는 밤늦도록 재활용 물건들을 활용해 만들어 사용하기도 했지만, 재료 구매할 곳이 마땅하지 않아 대구나 진주까지 나가야 하는 불편함 또한 일러 무엇하겠는가.
지역의 빈부격차도 만만치가 않았다. 만 원이 없어 소풍을 못 간다는 아이, 2km를 넘게 혼자서 걸어 다니는 일곱 살 아이가 눈에 밟혔다. 『상록수』 책 속의 동혁이와 영신이가 어려운 환경을 위해 경제적으로 갈등하던 일과 유치원 환경이 닮아있어 놀라웠다. 안타까움에 교회에서 운영하는 교회학교나 야학을 지도하는 일에도 봉사했지만 근무하던 유치원은 경제난을 이겨내지 못하고 어려움에 봉착했다.
나만을 위해 학부모들과 정든 아이들의 손을 놓고 떠나 버릴 수도 없었다. 어려운 여건을 가진 합천 아이들을 위해 또 한번 용기를 내자는 선배의 권유에 학원을 열기로 마음먹었다. 형편이 어려운 아이는 학원비 걱정 없이 다니게도 하고, 공부가 어려운 아이들은 학습을 지도해주기도 했다. 봄이 가면 여름이 오고 열매가 익어가듯 그렇게 사람들과의 인연도 깊어갔다.
삼 년을 기약했던 처녀는 배우자를 찾아 합천을 달려왔던 걸까. 3년째 되던 해 합천이 고향인 남편을 만나 세 아이의 엄마가 되었고 어느덧 중년의 나이로 철들어 간다. 세상이 빠르게 변했듯 합천도 눈부시게 발전했다. 흙먼지 날리던 터미널과 주변의 논밭은 빌딩으로 채워졌고 사람들의 의식과 문화 수준도 높아졌다. 모두가 어리석다는 염려까지 아끼지 않았지만, 그 선택조차 최선이었음을 후회하지 않는다. 낯선 설움은 익숙한 친근감으로 정들었다. 상록수 주인공들처럼 뜻을 오롯이 펼치지 못했더라도 그 또한 내 그릇의 크기라고 받아들이면 될 일이다. 우연히『상록수』 책을 보며 젊은 날 가졌던 꿈을 잃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지 되돌아보게 되었다.
4월이다. 보리밭에는 희망의 꼬투리가 푸르게 열리고 나는 지금도 아이들과 함께 지내고 있으니 내 꿈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수필과비평』 신인상 수상
      수필과 비평작가회 회원
      경남수필비평작가회 회원
      합천문학회원
      합천수필문학회원
      현) 합천 대양초등학교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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