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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합천문화원 회원 호국유적(護國遺蹟) 답사
추천 : 7 이름 : 이성동 작성일 : 2019-06-01 10:01:54 조회수 : 42
2019 합천문화원 회원 호국유적(護國遺蹟) 답사

지난 5월 9일은 합천문화원유적답사단(이하 유적답사단)이 매년 연례적으로 시행하는 문화유적답사일이었다. 연일 계속되었던 뿌연 미세먼지도 이날따라 말끔히 걷히고, 녹음(綠陰)으로 짙어가는 5월의 산야(山野)가 싱그러운 아카시아향기와 함께 고속도로 주변이 눈부시게 아름다운 날이었다. 금년 합천문화원의 유적답사는 호국보훈의 달을 1개여 월 앞두고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순국선열과 호국영령들의 나라 위한 희생정신을 기리고 나라사랑과 호국정신을 함양하기 위해 시행하는 호국유적(護國遺蹟) 답사행사였다.
차세운 합천문화원장의 인솔 하에 합천문화원 회원 450여 명이 읍면 단위로 13대의 관광버스에 탑승해 각각 지역별로 출발하는 대단위 유적답사였다. 먼저 논공휴게소에 집결한 유적답사단은 그곳까지 환송 나온 문준희 군수와 김윤철 도의원의 영접과 환송을 받았다.

     칠곡호국기념관

논공휴게소에서 1년 여 만의 회원들 간의 반가운 조우(遭遇)와 정겨운 인사도 잠시, 유적답사단은 이곳에서부터는 장사진(長蛇陣)을 이루며 경부고속도로와 중앙고속도로를 경유하여 50여분 달려 도착한 곳이 경북 칠곡군 석적읍 중지리 산 33번지에 위치한 ‘칠곡호국기념관’이었다. 이곳은 6,25전쟁 당시 대한민국 최후의 보루(堡壘)로써 국군과 유엔군의 총반격의 계기된 ‘낙동강방어선전투’를 재조명하는 곳이다. 사실감(寫實感) 넘치는 전시와 다채로운 체험을 통하여 호국안보의식과 나라사랑의 정신을 함양할 수 있는 공간이다.
칠곡호국기념관은 지하1층에 전투체험관, 어린이평화체험관, 4D 입체영상관, 지상1층에 호국전시관과 2층에 세미나실, 3층에 식당, 4층에 전망대로 조성되어 있었다.

전쟁의 참화(慘禍)가 한반도를 휩쓸던 풍전등화의 국가위기인 1950년 8월~9월, 그 최후의 ‘낙동강방어선’의 벼랑 끝에 한미 연합군이 북한 공산군과 대치하며 한 발자욱도 물러설 수 없는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순간, 그들의 그때 ‘낙동강방어선’에 흘린 피와 눈물, 그 아비규환의 전쟁의 상처가 아물지도 않은 채, 잊혀져가는 오늘,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던 구국의 혼(魂)들이 “우리는 국토수호를 위해 여기에 뼈를 묻었다”고 외치는 단말마(斷末魔)의 함성이 들리는 곳이다.
1950년 6,25전쟁 당시 남침 준비를 완벽하게 갖춘 중무장의 북한군에 의해 수도 서울을 전쟁 개시 3일 만에 내어주고, 1950년 7월 말, 영덕·안동·상주·진주를 잇는 선까지 밀려오는 상황에서 국군과 유엔군은 8월 3일 낙동강의 모든 교량을 폭파한 뒤, 8월 4일 새벽 ‘낙동강방어선’까지 철수를 완료하였다. ‘낙동강방어선’은 동서 80㎞, 남북 160㎞로, 서북 끝의 왜관에서 동해안의 영덕에 이르며, 서쪽은 낙동강과 남강과의 합류 지점인 남지읍(南旨邑)에 이르고, 다시 함안 진동리(鎭東里)를 거쳐 진해만에 이르고 있었다. 한미 연합군은 이 선을 최후의 보루로 하여 반격작전을 계획하고 있었다. 이때부터 국군과 미군은 작전구역을 분담, 국군은 왜관으로부터 동해안에 이르는 낙동강 방어선의 북쪽을 맡고, 미군은 왜관으로부터 진해만에 이르는 서쪽을 맡아 전쟁 발발 이래 처음으로 어깨를 잇댄 방어전선을 형성하였다.
북한 공산군은 8월 초까지 소련이 지원해준 T34형 탱크 242대로 편성된 1개 전차사단과 9개 보병사단을 낙동강 전선에 투입했으며, 또 다른 3개 보병사단이 뒤따라 내려오고 있었다. 낙동강 전선의 공방전은 8월 초에서 9월 중순까지 계속되었는데, 국군과 유엔군은 긴밀한 협조체제를 유지하면서 방어병력을 적시적소에 집중하여 방어선을 고수하였다.
8월 중 마산 방면에서는 북한 공산군 제6사단을 미 제25사단을 주축으로 편성된 킨(Kean) 특수임무부대가 선제 역습으로 저지하였다.
창녕 남지 사이에 형성된 ‘낙동강 돌출부’에서는 미 제24사단이 북한 공산군 제4사단의 공세를 막아냈으며, 대구 서남에서 동북쪽에 이르는 외곽 전선에서는 국군 제1사단과 미 제1기병사단이 북한 공산군 수개 사단의 공격을 차단하였다.
포항-기계(杞溪)-안강(安康)을 잇는 동부 전선에서는 국군 제1군단 예하의 제3사단과 수도사단이 일진일퇴의 격전을 치르며 북한 공산군의 전선 돌파를 분쇄하였다. 또한 대구 북방 다부동에서는 국군 제1사단이 북한 공산군의 3개 사단을 저지하는 ‘다부동전투’를 벌였다.
특히 미 공군은 8월 16일 B-29폭격기 98대로 왜관 전면의 공산군지역에 960톤의 폭탄을 투하하여 이 지역을 초토화시켰다. 9월에 들어서서도 북한 공산군은 낙동강의 모든 전선에 걸쳐 맹렬한 공세를 취했으며, 특히 영천 일대에서는 북한 공산군 제15사단이 국군의 전선을 뚫고 공격해 들어왔다.
그러나 국군 제8사단은 제2군단 예하부대의 지원을 받아 이를 섬멸함으로써 개전 이래 가장 큰 전승을 기록하였다. 낙동강을 사이에 둔 1개월 반에 걸친 공방전은 결국 북한 공산군의 참담한 패배로 끝났으며,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개시와 더불어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 방어선에서 총 반격을 하게 되었다.
따라서, ‘낙동강방어선전투’는 북한 공산군의 주력을 무찌르고 6·25전쟁 발발 이래 초기의 수세(守勢)에서 벗어나 공세(攻勢)로 전환하는 발판을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유관순열사 기념관

칠곡호국기념관을 나온 답사단이 중앙고속도로를 경유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유관순길 38번지에 소재한 유관순열사의 유적지에 도착한 시각은 이날 정오경이었다.  
유관순 열사의 유적지 입구에 들어서니 천안시가 걸어놓은 2019년 천안시 3`1독립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 “유관순 열사 서훈 1등급 추서” 현수막이 도로 연변에 걸려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역대 정부에서 못했던 일을 때늦은 감은 있지만, 민족의 자존과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꽃다운 청춘을 바친 열사에게 정부가 서훈 1등급을 늦게나마 추서한 것은 참으로 당연한 것으로 느껴졌다.
일제에 항거한 열사의 유적은 유관순 동상과 기념관, 유관순추모각, 생태공원, 순국자 추모각과 광장, 유관순열사의 거리, 기념공원 등으로 1990년 4월 1일 사적 제230호로 지정되어 충남 천안시 병천면 탑원리 매봉산 자락에 정연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1919년 4월 1일 아우내장터 만세운동 때 순국한 이 지역 독립열사들의 초혼묘가 병탄리 매봉산 중턱에 자리하고 있고, 유관순열사의 생가는 사적관리소에서 서쪽으로 1,3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으며, 거기서 매봉교회를 지나 900m 정도 더 가면 조병옥 박사의 생가가 있다.
유관순 열사는 1902년 12월 16일 충청남도 천안시 병천면 용두리에서 아버지 유중건과 어머니 이소재 여사의 사이에서 5남매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이화학당에서 공부하던 중 1919년 3월 1일 기미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 학교휴교령이 내려진 가운데 사촌 언니 유예도와 함께 독립운동 선언문을 가지고 귀향하여 아우내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유관순은 아버지 유중권을 비롯하여 조인원, 김구응 등 20여 명의 동네 유지들과 4월 1일 아우내 장날 정오에 독립만세 운동을 전개하기로 논의하고 인근 각 면, 촌에 연락기관을 두고 대규모 독립만세운동을 준비하였다.
3월 31일 유관순은 용두리 매봉산에 봉화를 올렸으며 주변 24개 지역에서도 일제히 봉화를 올려 호응하였다.
4월 1일 조인원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유관순을 필두로 한 3천여 명의 군중들이 태극기를 앞세우고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유관순은 군중들과 함께 병천 헌병 주재소로 돌진하여, “나라를 되찾으려고 정당한 일을 하는데 어째서 총기를 사용하여 내 민족을 죽이느냐?” 하면서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였다. 이에 헌병들은 재차 무차별 총격을 가하여 군중들을 해산시킨 뒤, 유관순을 비롯한 시위 주동자들을 체포하여 천안헌병대로 압송하였다.
이때 열사의 부모도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여 시위현장에서 목숨을 잃었고, 집마저 불태워졌다. 유관순 자신도 일경에 체포되어 옥중생활을 하던 중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 받고, 이듬해인 1920년 기미독립만세운동 1주년을 맞아 서대문감옥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일제의 가혹한 폭행과 고문에 못 이겨 결국 순국하였다. 열사의 시신은 이화학당 주선으로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하였으나 후에 망실하였다.
답사단이 도착한 유관순 열사의 유적지에는 이날따라 천안시나 천안문화원 등 해당 관서 담당관의 영접이나 해설사의 안내도 전혀 없는 상황에서 답사단은 개별적으로 유적들을 둘러볼 수밖에 없었다. 유관순 기념관에는 유관순 열사의 연보와 학창시절의 모습, 아우내독립만세운동, 서대문감옥에서 온갖 탄압과 고문에 굴하지 않고 옥중만세를 부르는 수형생활의 면모, 투쟁과 순국의 여정, 매직비전(Magic Vision)현판 등이 걸려 있었고, 태극기를 대량으로 찍어낸 “태극기 스탬프” 코너도 있었다.  
답사단이 이 지역 독립열사들의 유적지를 모두 둘러볼 수 있는 시간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유관순열사의 추모각과 기념관 등을 둘러보고 기념관 앞에 모여 “대한독립만세 머리띠”를 이마에 두르고 대한독립만세를 힘차게 외쳐보는 퍼포먼스를 시연해보는 시간도 가져보았다.

  독립기념관

답사단이 이날 정오경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아우내장터에서 분산하여 지역별로 각기 다른 식당에 들어가 점심식사를 마치고 독립기념관에 도착한 시각은 이날 오후 1시 30분경이다.
독립기념관 입구에는 일제로부터 독립한 우리 민족의 기상인 ‘겨레의 탑’이 웅장한 모습으로 서있었다. 1945년 8월 15일 민족의 숙원인 일제로부터의 독립, 그것은 우리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었지만, 선열들의 독립에 대한 열망과 소망의 웅지(雄志)를 담은 ‘겨레의 탑’이 독립기념관 앞에 하늘을 찌를 듯 우뚝 높이 솟아 있었다. 대지를 박차고 하늘로 날아오르는 새의 비상(飛翔)을 보는 것 같기도 하고, 두 손 모아 기도하며 민족의 독립을 염원하는 모습을 보는 것 같은 탑이다. 35년 일제 치하의 암울한 시대를 극복하고 웅비하는 민족의 기상과 자주와 독립, 통일과 번영에의 의지를 나타낸 것이다. 높이는 51.3m이며, 가로 세로 각 24m의 기단 바닥에는 우리나라 지도와 24방향을 표시한 구리 주물판 24괘(卦)가 있고, 탑 양 날개 연결부위에는 무궁화가 조각되어 있다. 한도룡(韓道龍) 선생이 설계한 것이다.

독립기념관은 1982년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 사건을 계기로 민족의 자존과 독립을 상징하는 기념관 건립을 위한 범국민적 성금 모금과 역사자료 기증운동 등이 국내외 각지에서 일어나 1987년 8월 15일 역사적인 개관식을 갖게 되었다.  
우리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집대성하여 대단원으로 펼쳐진 독립기념관은 ‘우리역사 알기 코너(3시간 소요), 자연속의 기념시설(3시간 소요), 선열들의 애국시`어록비(2시간 소요) 모두를 섭렵하는 데 총 8시간이 소요되는 광활한 시설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시설들은 독립기념관의 상징이면서 고려시대 건축물인 수덕사 대웅전을 본떠 설계한 동양 최대의 기와집으로, 그 내부에 백두산 천지를 배경으로 한 ‘겨레의집’이 전시관 앞에 웅대한 보습으로 서 있다. 겨레의 집 뒤에는 선사시대부터 1945년 광복 때까지의 기록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7개의 전시관이 있고, 독립관 입구 ‘겨레의 탑’과 그 내부 ‘겨레의 큰 마당’ 한쪽에는 한반도 북부와 광활한 만주 일대까지 영토를 확장한 광개토대왕릉비를 재현해 놓아 고구려인의 기상을 엿볼 수 있도록 하였고, 민족의 독립정신과 자주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전시한 조선총독부 ‘철거부재 전시공원’, 독립군 양성기관이었던 신흥무관학교를 테마로 한 ‘체험교육장’, 나라위해 일제에 항거했던 위인들의 독립 정신과 남긴 어록을 새긴 102기의 시어록비(詩語錄碑) 등이 실내외에 짜임세 있게 잘 꾸며져 있다.
민족의 근원에서부터 민족의 분단과 시련, 국난극복의 역사, 앞으로의 민족의 비전까지 잘 제시해 놓았다.

  일정을 마무리하며

이날 오후 4시경, 답사단은 독립기념관 주차장에 대기해있던 지역별 관광버스에 모두 탑승해 귀로의 마지막 여정에 올랐다. 귀로의 버스 안에서는 회원들 간 평소 나누지 못한 정담들이 오가고 이날의 호국유적 답사에서 느낀 소감들을 발표하면서 모든 여정이 어느 때보다 유익하고 보람되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첫 번째로 들른 칠곡호국기념관은 국토의 90%를 빼앗긴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위기에서 수많은 호국용사들과 유엔군이 목숨을 바쳐 자유민주주의와 국토를 수호할 수 있었던 6,25전사에 기리 기억되어야 할 곳이었다.
그때 함께 피를 흘렸던 미국을 위시한 16개 참전우방국과 의료지원단 파견 5개국에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을 느끼지 않을 수 없으며, 두 번째로 들른 유관순 유적은 천안시 아우내 장터 독립만세운동을 들여다볼 수 있는 공간으로 합천지역 만세운동과 함께 일본 식민지배로부터 고통 받는 지역 민중에게 독립의지를 일깨우고 많은 민중이 피를 흘리며 투쟁을 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와 맥락을 함께 하고 있는 곳이다.
세 번째로 들른 독립기념관은 우리민족의 국난 극복사와 국가발전사에 관한 자료를 모아 연구하고 전시하여 민족문화의 정체성(正體性)을 느낄 수 있도록 한 곳이다.

우리는 지금 5천년의 유구한 역사화 빛나는 문화전통을 바탕으로 남북분단 현실을 극복하고 통일조국의 건설과 위대한 민족국가로 웅비(雄飛)하려는 역사적 과제를 안고 있다. “비전이 없는 민족은 망한다”는 인류역사의 교훈을 돌아보고 우리의 현대사를 그늘지게 했던 분열과 대립, 침체와 타성의 그늘에서 떨쳐 일어나 일찍이 고대 동아시아의 광활한 대륙을 호령했던 진취적인 민족의 기상(氣像)을 되찾고, 주체적인 민족사관(民族史觀)을 정립해 나가야 할 때이다.
지난날을 뒤 돌아 보고 새로운 미래를 여는 창(窓)으로 독립기념관을 찾아본 것은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매우 소중한 기회로 큰 감명과 보람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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